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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의 나눔과 실천 기업가企業家 박종실朴鍾實

  • 작성자

    진주평론

  • 작성일

    2024.03.05 PM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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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

‘지역을 자산으로 성장한 기업은 반드시 지역을 위해 기여해야 한다’는 명제에 한 치 어긋남이 없었던 그의 행적은 분명 기업인들의 모범이 될 만하다. 그래서 그의 지역사회에 대한 헌신적인 봉사는 더욱 값지게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기업가(企業家) 박종실(朴鍾實, 1920~2002).
부와 권력,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해야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는 도덕성과 실천력을 두루 겸비한 진주사람이다. 기업의 사회 환원이 실종됐다는 사회 일각의 비판이 비등하는 오늘날,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그의 고향 진주에 내어주고 떠났다.
회고해 보면, 그는 분명 성공한 기업가이다. 일면을 보면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큰 기여를 했고, 지역사회발전이라는 측면에서도 그의 공적은 어느 누구와 견주어도 결코 녹록지 않다. 기업가로서 어쩌면 당연한 행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업가 박종실의 삶이 환히 빛날 수 있었던 건, 지역사회의 공공이익을 위한 헌신적인 삶이 있었기 때문이다.
재단법인 진주산업대학교 종실연구장학재단 설립에 이어 진주사람들에게 ‘병상(病床)의 나눔, 아름다운 팔순(八旬)’으로 기억되는 재산의 사회 환원.

그는 떠나면서 그의 재산 모두를 진주의 인재육성에 기부했다. ‘평생 모은 재산을 의미 있게 쓰겠다’는 평소 그의 신념은 바로 실천으로 이어졌다.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실천되는 순간이었다.
기업가 박종실이 걸어온 길은 곧 지역 운송업의 역사이기도 하다. 1920년 진주에서 태어나 진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1942년)한 박종실은, 삼가금융조합의 서기로 근무하다가 1946년 조선화폐자동차에 근무하게 된다.
경전여객자동차(주) 전무이사를 역임한 그는 대한통운(주) 진주지점장에 이어 1969년 경전여객자동차(주) 대표이사와 뉴종로관광호텔 대표에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기업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지역사회에 대한 공헌에도 기여한 그는 모교의 축구부 후원회장을 맡으면서 전국대회 우승을 이끌었고, 중안초등학교 악대부 창설에 이은 전국대회 우승 그리고 춘추회 회장을 맡으며 동문화합을 이끌어내는 산파역을 해냈다.
기업가로서 성공한 그는 70세 되던 해인 1990년 재단법인 진주산업대학교 종실연구장학재단을 설립하면서 지역 인재육성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11년이 지난 2001년 병상에서 투병 중이던 그는 공시지가 26억 5,000만 원에 이르는 그의 재산을 재단에 기부했다.
그가 바란 것은 오로지 모교의 발전과 지역발전 그리고 인재육성이었다.
그의 모교인 경남과학기술대학교는 그의 뜻을 기리는 의미에서 학생회관의 이름을 ‘종실회관(鍾實會館)’으로 정했다.

 

그가 1976년부터 운영했던 뉴종로호텔은 지역에 대한 그의 애정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진주를 찾는 사람들에게 편리한 숙식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자 했던 많은 외국인에게 아늑한 쉼터가 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눈에 띄는 서비스와 애향심의 발로는 곧바로 기업의 성공의 바로미터가 되었다.

 

벽지와 도시를 연결하다

기업가 박종실은 1920년 1월, 진주에서 태어났다. 향년 82세를 일기로 타계하기까지 그의 삶은 오로지 진주의 경제발전과 인재육성에 집중됐다.
그는 1941년 2월 진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한 뒤, 우수한 학업성적으로 이듬해 삼가금융조합 서기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게 된다. 당시만 해도 진주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산촌 지역으로 변변한 사회기반시설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는 깡촌에 불과했다.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한 그는 지역경제를 살리는 일이 급무(急務)임을 깨닫고 가슴속 깊이 담아 두었다.
1946년 조선화폐자동자(주) 경리주임을 역임하면서 마침내 낙후된 지역경제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실천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당시 운송업에 종사했던 그의 주 관심사는 효율적인 진주시의 운송체계를 확립하는 일이었다. 1951년 버스업체인 경전여객자동차(주) 전무이사를 맡으면서 그의 꿈은 점점 현실화되기 시작했고, 1958년 대한통운(주) 진주지점장을 역임하면서 진주시의 물류체계와 운송의 효율성을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에 자신감을 갖게 된다.
그의 이러한 신념은 1969년 경전여객 대표이사를 맡은 뒤 본격적인 기업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현실화되었다. 그는 우선 벽지와 도시를 연결하는 대중교통 노선 개발에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도농(都農)간의 격차 해소가 곧 지역발전과 연계된다는 그의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경영진들은 이러한 벽지노선 개발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벽지노선을 개발하고 운행을 하게 되면 ‘남는 게 적다’는 이유로 격렬하게 반대했다. 이익을 우선하는 기업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운수업은 이익보다 승객들의 불편을 덜어 주는 게 가장 중요하다’며 경영진의 반대를 일축했다.
이러한 그의 기업이념은 진주시의 교통사(交通史)에 있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고, 그것은 곧바로 기업가로서의 성공을 담보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기업가 박종실은 진주에서 성장해 나갔다.
그가 1976년부터 운영했던 뉴종로호텔은 지역에 대한 그의 애정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진주를 찾는 사람들에게 편리한 숙식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자 했던 많은 외국인에게 아늑한 쉼터가 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눈에 띄는 서비스와 애향심의 발로는 곧바로 기업의 성공의 바로미터가 되었다.
그에게 기업은 곧 지역 경제발전이라는 등식으로 연결됐다. 그러기에 그는 진주에서 가업(家業)을 이룬 기업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종실연구장학재단 설립

기업가 박종실의 꿈은 기업가답게 지역의 경제를 발전시키는 일이었다. 그의 꿈은 일흔 살이던 1990년까지 현재진행형이었다. 그는 삶의 거의 모두를 기업을 일으키는 일과 가업을 지켜나가는 일 그리고 ‘먹고 살기 힘든 시대의 탈출’에 쏟아 부었다.
그런 그의 꿈과 희망은 결실을 보고 있었다.
고희(古稀)의 기업가 박종실은 새로운 삶의 도전을 시작했다. 그것은 지역의 인재육성이라는 새로운 꿈이었다. 그는 남다른 모교사랑을 바탕으로 후배사랑과 지역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1990년 1억 원을 출연하여 진주산업대학교에 ‘종실연구장학재단’을 설립했다.
재단에서는 가정형편이 어렵지만 타의 모범이 되는 후배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그들이 묵묵히 걷고 있는 면학(勉學)의 길에 힘을 보태주었다. 그리고 교육연구발전을 위해 교수들에게 연구비를 지급했다.
기업가 박종실은 ‘좋은 교육을 받고 열심히 공부하는 인재가 국가발전의 초석’이라는 명제를 몸소 실천한 것이었다.
후배들 역시 모교발전과 후배들의 학업증진을 위해 사재를 출연해 만든 박종실 동문을 추모하는 모임인 ‘혜봉회’를 만들어 선·후배 간의 나눔의 전통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당시 종실장학금의 수혜를 받은 많은 학생들이 현재 사회 각계에서 국가발전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신념과 선택은 분명 옳았음이 증명되고 있는 셈이다.
동문화합을 위한 그의 공헌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진농·진산대의 원로 모임인 춘추회 회장을 10여 년간 역임했다. 춘추회는 모교에 대한 헌신적 봉사로 동문화합은 물론 대학의 발전을 위한 다양한 일들을 추진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종실연구장학재단의 설립은 기업가 박종실이 기업의 사회환원이라는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는 첫걸음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결정한다.

 

병상(病床)의 나눔, 아름다운 팔순(八旬)

팔순의 박종실은 병마와 싸우고 있었다. 병상(病床)에 누운 그는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평생 모은 재산을 의미 있게 쓰고 싶다.”
외아들인 영환을 비롯한 자녀들은 아버지의 뜻에 따른다. 단 한마디의 이의제기도 없었다.
기업가 박종실은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진주시 장대동 소재 토지 464평을 재단에 기부했다. 시가(時價)가 무려 26억5,000만 원에 이르는 알짜배기 땅이었다.
이 땅은 진주시내의 단독주택 한 채를 제외하고 그가 소유했던 유일한 재산이었다.
‘재학생 중에 부모님이 땔감을 팔아서 학비를 마련하는 것을 보고는 가슴이 아팠다’는 그는 이번 기부가 ‘모교와 사회에 대한 마지막 봉사라고 생각하고 기증을 결심했다’고 담담히 말했다.
2001년 11월 당시 정해주 총장에게 기증의사를 밝힌 뒤 그는 다음 달 바로 병원에 입원을 했다.
기업가 박종실의 아름다운 기부가 알려지자 곧바로 언론에서는 지방과 중앙을 가리지 않고 대서특필을 했다. 그리고 그의 기부를 이렇게 평가했다.
‘병상(病床)의 나눔, 아름다운 팔순(八旬)’
평생을 운수업과 호텔업에 종사했고, 모교를 졸업한 지 50년 되던 해에 종실연구장학재단을 설립한 그는, 자신이 몸을 누일 집 한 채를 제외하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사회에 기부한 것이다.
‘모교와 후배사랑의 평소 소신을 실천으로 옮겼을 뿐’이라는 겸손한 인터뷰는 곧장 기업의 사회환원이라는 의제로 옮겨져 지역사회의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점검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경남과학기술대학교는 그의 뜻을 받들어 장학사업과 교직원 연구지원에 활용하겠다고 약속한 데 이어 학생회관의 명칭을 ‘종실회관’으로 명명(命名)해 선후배간의 새로운 나눔의 전통을 만들기도 했다.
기업가 박종실의 아름다운 기부는 지역 대학발전과 지역주민의 교육열 향상이라는 원동력이 될 뿐만 아니라, 크게는 국가의 교육발전과 인재양성을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교훈적인 일이다.
지역의 관점에서 보면, 한 개인이 자신이 가진 전 재산을 지역을 위해 쾌척한다는 일은 분명 쉽지 않고 전례가 드문 일이었다. 그의 이러한 아름다운 뜻은 전국의 신문과 방송으로 전파되어 국민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었고, 기업의 사회 환원 붐을 조성하는 계기로 자리 잡기도 했다.
이렇게 기업가 박종실의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기부는 진주의 명예를 전국에 드높이는 소중한 진주의 한 역사가 되었다.

 

‘병상(病床)의 나눔, 아름다운 팔순(八旬)’ 평생을 운수업과 호텔업에 종사했고, 모교를 졸업한 지 50년 되던 해에 종실연구장학재단을 설립한 그는, 자신이 몸을 누일 집 한 채를 제외하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사회에 기부한 것이다.

 

지역사회에 남긴 흔적

기업가 박종실은 지역사회의 다양한 분야에도 그 흔적을 남겨 두었다. 생전에 1남 5녀를 둔 그는 평소 검소하고 절제된 생활로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그리고 운송업과 호텔업에 종사하면서 지역경제발전과 교육에 헌신적인 열정을 쏟았다.
그런 그의 가슴 한 켠에 머물고 있던 또 하나의 관심은 학교발전을 위한 작은 밑거름을 뿌리는 일이었다.
1960년대 모교인 진주농림고등학교의 축구발전을 위해 후원회 회장을 흔쾌히 맡으면서 후원자로서의 그의 활동은 시작됐다. 당시 축구부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모교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대회를 치르고 있었다. 그는 축구부의 이러한 헌신에 주목했다.
그가 축구부 후원회장을 맡으면서 축구부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곧바로 좋은 성적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적극적인 후원의 결과는 1965년 전국고등학교축구선수권대회 우승이라는 보답으로 돌아왔다.
당시의 우승은 축구의 도시인 진주의 명성을 잇는 쾌거이자, 향후 진주가 전국의 축구대회 최강자로 등장하게 되는 물꼬를 여는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지역사회에 대한 그의 헌신적인 봉사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진농·진산대 원로 동문 모임인 ‘춘추회’ 회장직을 맡게 된다. 춘추회는 모교의 발전을 위한 다양한 기획을 생산해 내고 실천하는 모임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남다른 열정과 물심양면의 지원으로 춘추회는 학교라는 작은 사회의 화합과 발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역주민의 화합과 다양한 분야의 발전이라는 시너지 효과를 거두게 된다.
지역사회에 대한 그의 헌신적 봉사와 지원은 다양한 결과로 나타났다. 그는 진주중안초등학교 악대부 창설에 기여를 했다. 당시 불모지였던 초등학교 악대부의 창설은 단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중안초등학교 악대부는 그의 지원 아래 1995년 전국 아동음악경연대회 우승을 거머쥐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6년에는 조계종 전 종정인 청담스님 선시시비건립추진 운동이 시작되자, 곧바로 추진위원장을 자임했고 경남과학기술대학교 관내에 청담대선사 선시비를 건립하기에 이른다.
‘지역을 자산으로 성장한 기업은 반드시 지역을 위해 기여해야 한다’는 명제에 한 치 어긋남이 없었던 그의 행적은 분명 기업인들의 모범이 될 만하다. 그래서 그의 지역사회에 대한 헌신적인 봉사는 더욱 값지게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경제계의 큰 별이 지다

기업가 박종실은 8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는 1960년대 대륙공업사, 경전여객 등을 창업해 진주의 운수업을 이끌었고, 1970년대에는 호텔 경영 등으로 적지 않은 재산을 모았다. 하지만 그는 그가 평생 모은 재산을 종실연구장학재단에 기부했다. 세상을 떠날 때 그의 곁에는 다 헤어진 점퍼와 구두 그리고 자전거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모교인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학생들은 모교 소식지에 그를 추모하는 글을 실었다. 그의 후배들은 그의 삶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숭고(崇高)한 삶을 사셨습니다.’
무소유의 삶을 실천한 기업가 박종실에게는 최고의 찬사였다.

검소한 삶을 실천한 기업가 박종실. 그는 주로 점퍼와 운동화 차림으로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업무처리를 위해 타지(他地)에 갈 일이 아니면, 자동차를 일체 이용하지도 않았다. 그가 타계한 뒤 그의 가족들은 낡은 구두를 그의 곁에 두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어렵게 공부했던 한(恨)을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는 그는 종실연구장학재단을 만들어 후배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리고 건강이 나빠지면서 마지막 재산을 뜻 깊게 쓰고 싶다’던 그는 가족들의 동의하에 자신의 전 재산을 모교 후배들에게 쾌척을 했다.
그런 그가 평생을 살면서 가장 즐거웠던 일은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이 보낸 편지를 읽을 때였다고 한다. 그리고 시간을 내어서 매년 한 두 차례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과 식사를 하면서 격려하는 시간이 행복했다고 한다.
기업가 박종실은 임종을 앞두고 유언을 남겼다.
‘조의금을 일체 받지 말고 가족장으로 조용히 장례를 치러 달라.’
당시 정해주 총장이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학교장’으로 치러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그는 간절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고 2002년 1월 25일 기업가 박종실의 장례는 학교장으로 치러졌다.
평생동안 그의 마음속의 고향이었던 모교에서 치러진 장례식은 개교 92주년을 맞은 경남과학기술대학교 최초의 학교장이었다. 당시 정해주 총장은 “당신은 돌아가시면서도 지방대학의 열악한 재정을 염려하셨다”고 회고했다.
무소유의 삶을 실천한 기업가 박종실.
그는 성공한 기업가이자,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몸소 보여준 실천적 기업가이다.
진주시는 지역사회와 지역 인재육성, 지역 경제분야, 공익사업분야, 사회위생분야 등에 그의 공적을 높이 기려 2002년 제2회 진주시민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기업의 사회환원과 지역사회에 대한 기여가 어떤 것인지를 몸소 보여주고 실천한 기업가 박종실이 진주시민상을 받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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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기금 1억 원을 쾌척하기도 했다.그의 ‘사회공헌활동’은 계속되고 있다. ‘중국 상하이 홍커우공원(현 루쉰공원)에 윤봉길 의사를 기리는 조각비’를 건립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국민들이 항일운동을 펼치다 순국한 용사들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내비쳤다.민족의 위상과 자존심을 지키는 일에 자신의 삶을 희사한 오효정.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한 일을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그는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역사는 미래다한국과 중국의 역사논쟁이 활발하던 당시, 고구려가 개척했던 광활한 만주벌판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면서 ‘만주는 우리가 다시 찾아야 할 땅’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일면 민족정신의 발로이자, 한민족의 혼과 얼이 담겨 있는 애국심의 발로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을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 선조들이 남긴 발자취와 웅대한 기상을 자부(自負)하고 싶을 뿐이다.지금으로부터 1,500여 년 전, 만주벌판에 한민족의 기상을 떨친 광개토대왕은 한민족의 기개와 얼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뒤를 이은 장수왕은 부친의 뜻을 기리고자 중국 길림성 지안시에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를 세웠다.진주에서 건설업을 운영하던 그가 이곳을 찾은 것은 지난 1996년의 일이다. 중국 안내원의 안내로 방문한 광개토대왕비역. 반가운 마음은 잠시, 민가에 둘러싸여 초라하게 방치된 비를 보고는 참담한 마음이었다. 허물어진 담장 안쪽에 방치된 비는, 길 가의 흔한 돌에 지나지 않았다. 그 모습은 부끄러움을 넘어 분노로 다가왔다.중국 관리에게 1,000달러를 주고 비역 주변 정비를 부탁하고 귀국했지만, 광개토대왕비가 처해 있던 현실은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나중에 관리로부터 비역을 정비한 사진을 받았지만, 그의 마음에 찰 리가 없었다. 그는 중국정부에 5만 달러를 투자해 묘역정비를 의뢰했다.‘너희 땅도 아니고 정비를 한다 해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매몰찬 답변이 돌아왔다. 여섯 차례에 걸친 부탁 끝에 마침내 정비공사 허가를 받아냈다. 동생 오영환을 현지에 보내 현지답사를 벌인 뒤 광개토대왕비역 정화사업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설계도를 작성해 사업을 시작했다.비역 벽면에 벽화를 다시 그려 넣은 것은 물론 주변의 잡목들은 모두 베어내고 한국의 적송과 백두산에서만 자라는 백자작나무까지 구해다 심었다. 진입로 포장과 담장 개보수에 이어 기와를 덮고 출입문까지 웅장하게 달아 단장을 마쳤다.비역 정비과정에서 중국과 마찰도 적지 않았다. 중국정부는 정비공사 허가에서 부터 수명이 1,000년이 넘는 측백나무를 심지 않고 적송을 심으려던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적송이 한민족의 대표나무라는 생각에 거의 사투를 하다시피해서 적송을 심었다.동생 오영환은 직접 감독하며 장장 8개월의 시간 동안 현장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정비사업에 심혈을 쏟았다. 무려 2년간에 걸친 작업 끝에 광개토대왕비는 정비가 되었다. 이후 중국정부는 물론 지안시 사람들도 그의 진솔한 마음을 받아들였고, 명예시장으로 임명하기 까지 했다.“한국인으로서 민족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는 광개토대왕비가 중국 현지에서 잡초더미에 묻혀 있다는 게 마음이 아파 미약하나마 힘을 보태고 싶었습니다.” 언론 인터뷰에서 한 그의 말에서 절절한 민족애를 발견할 수 있다.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광개토대왕비에서 200여m 떨어져 있는 곳에 방치되고 있는 광개토대왕릉의 정화사업을 추진했다. 이미 비 정화사업에 사재 2억 5,000여 만 원을 투자한 그는 왕릉 정화사업에 자신의 유일한 재산인 시가 10억 원 상당의 땅을 희사하겠다고 나섰다.이 사업은 규모가 너무 커 비용은 자신이 부담하고 공사는 국가 혹은 민간단체, 현지에 나가 있는 대기업이 맡아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전했다.‘이 같은 사업이 바로 민족운동이며, 진정한 투자인 동시에 후손들에게 물려줄 유산 그 자체이고, 분단이 종식되는데 조금의 기여가 된다면 족할 뿐’이라고 그는 담담히 말한다.‘언젠가 다시 우리가 찾아야 할 역사이다. 광개토대왕비 정비사업을 최초로 시작한 사람으로서 후손들이 우리의 역사를 잊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뿐’이라는 그는 우리 민족의 역사성을 확인하고 정체성을 찾는 문화사업을 계속 이어나갔다. 무명용사의 애국과 일제 만행을 기억하다광개토대왕비 정비사업은 그가 가진 재산으로 추진하기에는 벅찬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부나 재벌들도 엄두를 내지 못한 일을 거뜬히 해냈다. 민족정신 고취에 대한 그의 집념이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넓디넓은 중국 땅에 널브러져 있는 고구려 유적 정비사업에만 전념한 것은 아니다.일제 강점기에 청산리 전투 등에서 일제와 싸우다 숨진 5만여 명에 이르는 무명용사의 넋을 기리기 위해 2001년 중국 연벤대학 뒷동산에 ‘항일무명영웅기념비’를 세웠다.2년여의 공사기간과 7억 원의 사비를 들여 길림성 연길시 연변대학 내 북산 인근 500여 평의 부지에 기념비와 야외공연장, 만남의 광장 등이 들어선 항일영웅 추모공원이 완공됐다. 기념비 주변의 대리석은 북한 김일성 종합대학교가 기증했고, 북한측도 공원건립을 간접적으로 지원했다.그리고 그는 비문에 이렇게 적었다.‘항일구국의 일념으로 일제와의 투쟁에서 이름 없이 산화한 영령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고자 비를 세웁니다.’그가 이 기념비를 세운 것은 후세들에게 민족정신을 재무장시키고 또한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한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광개토대왕비 정비사업처럼 민족혼 현양사업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그가 세운 항일무명 영웅기념비는 그 의미가 단순하지 않다. 국내의 독립운동가들은 그런대로 공적을 인정받고 있지만, 중국땅에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숨진 무명영웅들에 대한 조명은 전무한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사비를 들여 기념비를 세운 것은 그 의미가 남다르고 값진 것이다.그가 추모공원을 건립하게 된 것은 일제시대 무명 영웅들을 위한 기념장소가 필요하다는 현지 동포들의 건의에 공감해 시작했다. 그리고 백두산 관광 코스에서 방문하는 연길시에 이 기념비를 세운다면 이곳을 한 번씩만 들르더라도 이곳에 묻힌 애국지사들이 큰 위안을 받을 수 있고, 후손들의 민족애, 나라사랑 정신을 함양시키는데도 적지 않은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추모공원을 세운지 10년이 지났지만, 이곳을 찾는 국민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운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백두산을 가려면 연길을 거쳐야 하고, 연길에서 5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인데 찾는 사람이 거의 없다”며 민족관과 국가관을 바탕으로 한 애국심의 발로를 주문하기도 했다.2000년 12월, 그는 또다시 사재를 털어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책을 발간해 무료로 배포했다.그가 발간한 책은 『강제징병자와 종군위안부의 증언』이다. 그리고 뒤이어 청소년들이 읽기 편하도록 쉽게 풀어쓴 『끌려간 사람들, 빼앗긴 사람들』이라는 책을 제작해 필요한 사람들에게 무료로 제공했다.특히 『끌려간 사람들, 빼앗긴 사람들』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피할 수 없는 희생자가 된 만주지역 동포의 삶을 기록한 것으로 중국 조선족의 역사와 삶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이 책은 중국의 조선족 2세 사학자인 강용권씨가 중국의 지린(吉林), 헤이룽장, 랴오닝 등 동북 3개 성에 사는 강제징병자와 종군위안부 49명을 만나 그들의 체험을 기록한 것을 토대로 했다. 연변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하던 강씨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항일 민족운동 기록을 수집하던 중 과로로 쓰러져 숨졌다.그는 “일본군에 징병됐거나 위안부로 끌려간 사람들 대부분이 세상을 떠나고 생존자마저 고령자여서 기록을 남기는 일이 시급하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민족의 역사가 남긴 뼈아픈 흔적을 치유하는데 모두가 합심하는 계기로 삼고, 후세들에게 역사를 바로 알리기 위해 책을 발간하게 되었다”고 말했다.특히 이 책은 통일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즈음에 발간돼 민족통합의 문제를 좀 더 넓게 일깨워 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기도 했다. 사회가 필요하다면…그는 늘 말한다. “사회에 보탬이 되도록 하겠으며, 사회가 필요하다면 그 어떤 일이든 뜻있는 일을 하겠다.”여력이 있는 한 사회공헌을 멈추지 않겠다는 일흔 중반의 그는 사회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사회에 필요한 일을 찾아 나서고 있다.우선 조선족 자치주 화룡시에 있는 교민들에게 농업기술교육을 실시했다. 연변지구를 여행하면서 소득수준이 낮아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 교민들을 본 그는 농업기술을 전수해주기만 하면 비옥하고 넓은 평야를 이용해 잘살 수 있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그는 화룡시 직원에게 농업을 전공한 학사출신 2~3명을 추천받아, 진주소재 경남과학기술대학교에 영농위탁교육을 시켰다. 그들은 선진농업기술을 전수받는 것은 물론 유실수 개종 및 현지 토양에 맞는 식물 재배를 통한 소득향상 방안을 공부하고 연구했다.그의 동포사랑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그리고 일제의 만행을 기록한 ‘강제징병자와 종군위안부’에 대한 KBS의 방송내용을 담은 영상교육 자료를 만들어 학생의 교육용으로 무료 배포했다.책자 발간 이후, KBS창원총국에서 관심을 갖고 특집 프로그램을 제작한 것이다. 중국 동북 3성에 살았던 강제징병자와 종군위안부의 삶을 담은 이 프로그램은 방송 이후, 지역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그는 이번에도 직접 나섰다. KBS 본사에서 방송한 자료를 바탕으로 테이프 400개를 제작해 경남도내 중·고등학교 역사교사를 초청해 내용을 소개하고 학생들의 역사교육 자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후, 이 자료를 활용한 역사교육이 실시되었고, 많은 학생들은 민족을 아픔을 직접 체험한 절절한 마음을 독후감에 담아내기도 했다. 그는 독후감에 감동했다. 그리고 자신이 추진해 온 일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이 사업을 계기로 제가 평생을 두고 시행해야 할 사업으로 여기게 되었고, 향후 경남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확대해 시행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그가 추진해 온 많은 일들이 단기전이 아닌 장기전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또 있다. 종군위안부의 처절한 삶을 직접 목도한 그가 종군위안부를 위한 일을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그는 전쟁으로 어려운 삶을 지탱하고 있는 사람들과 종군위안부라는 과거 때문에 아픈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다. 위로하는 일은 물론 생활비를 보태는 일도 잊지 않았다. 특히 자의가 아닌 타의의 강요에 의해 자신의 삶을 잃은 강제징병자에게는 고향을 찾아 친척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그의 사회공헌은 또 있다. ‘오효정장학회’를 만들어 힘들게 공부하고 있는 고학생들에게 4년간에 걸쳐 장학금을 지급한 것은 물론 광개토함에 체육시설을 기증하기도 했다.광개토대왕 사적 정비사업을 마친 뒤. 광개토대왕의 위상을 빛낸 공로로 광개토대왕함 함장으로부터 초청을 받은 그는 병사들에게 체력단련장 설치를 약속했고, 2002년 그는 광개토대왕함장 최호진 대령에게 1,000만 원을 전달해 병사들과의 약속을 지켰다. 그는 ‘노인을 공경하라’는 어머니의 유지를 받들어 진주시 복지타운 상락원 노인복지회관에 노인들을 위한 공간을 건립해 2002년 5월 8일 어버이날에 기증했다. ‘덕의관’으로 명명된 이 회관에는 교육실을 비롯해 할머니방과 취미교실, 체력단련실, 다목적실,경로당, 체력단련기구 등을 갖추고 있다.그리고 덕의관 준공에 맞춰 그의 아들과 딸, 사위, 조카들도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1,000만 원을 모아 TV, 에어컨, 운동기구를 기증해 그의 뜻에 동참했다.그는 덕의관 건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기업은 사회의 도움을 받아 성장하는 만큼, 기업이취득한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했다.” 최근 그는 지인들과 함께 망진산 봉수대 앞 빈터에 단풍나무를 심었다. 이에 앞서 석갑산과 평거동에도 단풍나무 묘목을 식재했다. 소나무가 재선충병에 걸려고사하는 것을 보고 대체목으로 단풍나무를 심은 것이다.등산객들이 단풍나무를 보고 일상에 찌든 마음의 여유를 찾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인 것이다. 소박한 일상으로 돌아 온 그를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민족혼 선양을 위한 마음마저 사그라든 것은 아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중국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 윤봉길 의사를 기리는 조각비를 건립하고 싶다.” 그야말로 쉼 없는 전진이다.“사람이 살면서 하루 세끼를 먹는 것은 같지만,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그는 자녀에 대한 교육과 애국관을 쉼 없이 강조한다. 그가 평생을민족정신 고취를 위해 해온 일들과 결코 다르지 않다. 울산 언양에서 태어나 진주에 이사한 지 40년이 넘은 그에게 진주는 이미 그의 고향이 되었다. “이제는 진주가 고향이 됐고, 앞으로 가까이는 진주, 나아가서는 한민족의 뿌리를 찾는데 공헌하고 싶다”며 향후 계획을 밝혔다.그가 걸어 온 길은 ‘누구나 갈 수 있는 길이지만, 아무나 갈 수 없는 길’임은 분명하다. 더구나 각박한 현실 사회에서 쉽게 기억해내기 어려운 ‘민족정신 고취와 현양사업’에 자신의 사재를 털어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기에 그가 걸어온 자취는 더욱 의미 있고 값지다.진주의 명예를 드높인 공로를 인정받아 진주시민들은 그에게 진주시민상을 수여했다. 그리고 그는 수상금에 사비를 더해 1,000만 원을 진주시를 위해 기증했다.그는 자랑스런 진주사람이다.

  • 2024-03-05
  • 작성자

    진주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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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검절약·사회봉사 외길 추담楸潭 장충석張忠錫

경상남도가 경남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선정한 ‘자랑스런 경남 100인’ 중의 한 사람인 진주사람 추담(楸潭) 장충석(張忠錫, 1922~2011).그의 삶을 되돌아보면, 오로지 ‘근검절약’과 ‘사회봉사’의 외길을 걸어왔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그는 대한민국 제1호 세무사로서 한국세무사회의 창립멤버이자, 사회봉사단체인 진주라이온스클럽 창단멤버로 47년간 봉사했다.만학도(晩學徒)의 삶 역시 그에게는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여는 신선한 시도였다.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의 눈에는 지역의 인재육성이라는 새로운 삶의 목표가 들어왔다. 고희를 맞은 1991년에 추담장학재단이 설립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추담장학재단은 지금도 그의 뜻을 이어 지역발전을 위한 연구와 인재육성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경남탄생 100주년을 맞아 경남도가 선정한 ‘자랑스런 경남인상’을 수상한 것은 자랑스런 진주사람이자 그의 삶이 타인의 모범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일이다. 추담의 행적은 캡슐에 보관돼 후세 사람들에게 길이길이 그 전범(典範)이 되고 있다.사후에 경상대학교에 그의 시신과 장기 기증을 약속한 추담은 일일이 기록하기 힘들 정도의 봉사활동을 해왔고, 그 결과 2001년 ‘제1회 진주시민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게 된다. 그리고 10년 후인 2011년 추담 장충석은 영원히 진주를 떠났다.추담은 2001년 제1회 진주시민상, 2002년 대통령상, 2006년 경남문화상을 수상했으며 2007년에는 제44회 저축의 날을 맞이하여 저축 유공자로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훈하기도 했다. 저서에는 『삶의 지평』 『旅窓에 비친 南美大陸』이 있다. ‘제가 어릴 때 어머니께서는 끼니 때가 되어 거지가 찾아오면, 당신의 밥을 거지에게 주고 굶을 때가 많았다.’ 2007년 저축의 날을 맞아 저축유공자로 선정돼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은 추담의 회고담이다. 자린고비 세무사추담 장충석은 대한민국 제1호 세무사로서 한국세무사회의 창립 멤버이다. 1962년 2월 10일, 은행집회소에서 열린 한국세무사회 창립총회에서 133명의 회원 가운에 당당히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세무사로서의 그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세무사로서의 삶을 시작한 그의 미래가 탄탄대로가 될 것임은 누구도 의심치 않았다. 더군다나 1호 세무사라는 자부심과 그의 앞에 열린 탄탄대로는 무작정 걷기만 해도 부와 영예는 예약되어 있었다.하지만 그는 진주에서 유명한 ‘자린고비 세무사’로 불렸다. 자신의 집에서 회계사무소까지 왕복 8km에 이르는 거리를 하루도 빠짐없이 도보로 출퇴근을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 흔한 자동차 한 대도 사지 않고 평생을 걸어 다녔으니 더 할 말이 없다.하지만 그의 그러한 근검절약 정신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추담의 어머니가 몸소 실천한 봉사하는 삶을 보고 배우며 자랐기 때문이다. 추담의 어린 시절 어머니의 삶은 다음과 같았다.‘제가 어릴 때 어머니께서는 끼니 때가 되어 거지가 찾아오면, 당신의 밥을 거지에게 주고 굶을 때가 많았다.’2007년 저축의 날을 맞아 저축유공자로 선정돼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은 추담의 회고담이다.어머니의 근검절약과 봉사하는 삶을 배우고 자란 추담에게 ‘절약과 봉사’는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흔한 자동차 한 대도 없이 도보로 출퇴근했던 그의 삶이 결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남을 위해 살자’는 생활 신조는 그렇게 자신의 인생 대부분을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한 삶을 살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생활신조는 일상생활에서 철저히 실천되었다.근검절약하는 삶을 산 추담은 무려 400여 개가 넘는 통장을 가질 만큼 넉넉했지만, 3천 원짜리 점심을 사먹을 만큼 그의 검소한 생활은 그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절약하는 습관에 이어 그만의 재테크 비법을 소개하기도 했다. 세무사라는 직업을 갖게 된 이후, 그는 진주의 한 금융기관과 거래를 했다. “한 금융기관과 거래를 하면 신용도도 쌓이고 VIP 대접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만의 노하우다. “일생을 두고 나 자신의 힘으로 남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길 늘 기대해 왔다. 비록 만학도의 몸이긴 하지만 69세 되던 해에 경상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사과정을 거치면서 낙후된 지방대학의 육성 발전을 위해 견실한 장학재단의 설립이 시급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추담장학재단을 설립하게 된 것이다.” 추담장학재단 설립추담이 오로지 돈을 버는 데만 매달린 것은 아니다. 평소의 경제관념을 알게 해주는 그만의 신념이 있었다. ‘돈 버는 자랑을 하지 말고, 돈 쓰는 자랑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자린고비 세무사로 이름났던 추담은 이렇게 아껴 모은 돈으로 1991년 ‘추담장학재단’을 설립하게 된다. 1991년 10월 고희연을 맞은 추담은 추담연구장학재단 발기인 총회를 열고, 12월 18일에는 1억 원을 출자해 재단설립 신청을 하면서, ‘추담장학재단’이 결실을 맺게 된다.추담장학재단은 현재 5억 원의 출자금을 기반으로 지역의 어려운 학생들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을 전하는 소중한 재단으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1992년에 등록허가를 마친 추담장학재단은 이듬해인 1993년 제1회 연구비 및 장학금 수여식을 갖고 교수(2명)와 학생(12명)에게 총 1천만 원을 지급하게 된다. 이어 1994년에는 1,550만 원, 1994년에는 5,000만 원을 출자한데 이어 1995년에는 1,980만 원, 1997년에는 2,480만 원 등 지난 2001년까지 수혜금액은 2억 1,590만 원에 이르렀다.추담이 별세한 2011년부터는 장학재단이 경상대학교로 이관되면서 ‘추담연구재단’으로 명칭은 변경됐지만, 추담의 설립 취지에 맞게 교수와 학생에게 연구 지원금과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추담은 추담장학재단 설립과 관련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일생을 두고 나 자신의 힘으로 남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길 늘 기대해 왔다. 비록 만학도의 몸이긴 하지만 69세 되던 해에 경상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사과정을 거치면서 낙후된 지방대학의 육성 발전을 위해 견실한 장학재단의 설립이 시급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추담장학재단을 설립하게 된 것이다.”당시 추담이 가졌던 지방대학의 발전과 인재육성의 중요성. 그것은 만학도로서의 삶을 산 추담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만학도(晩學徒)의 삶69세의 만학도 추담 장충석이 석사모를 쓰던 날, 그의 지나온 삶에 대한 언론의 관심이 집중됐다. 자린고비 세무사에 저축왕으로 이름났던 추담이 만학도(晩學徒)로서의 새로운 삶을 걷게 된 이유는 여러모로 언론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던 것이다.‘배움에 있어서는 청춘’이라는 이야기를 자신 있게 할 수 있었던 건, 추담이 비교적 넉넉한 세무사 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학문에의 끊임없는 욕구 때문이었다.‘어떤 형태로든 기회만 닿으면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고 말해왔던 추담은 끊임없는 업무와 노령으로 인한 건강 쇠약으로 소망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지난 1988년 경상대학교에서 1년 과정의 경영자반 학생을 모집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1년 정도면 늙은이도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는 추담은 선뜻 마음을 내어서 원서를 제출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원서마감과 동시에 경영자 과정이 없어지게 되었다. 결국, 추담은 ‘큰 맘 먹고’ 석사과정에 등록을 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만학도로서의 삶은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경상대학교 경영행정대학원에 진학하긴 했지만, 칠순을 눈앞에 둔 노령의 몸으로 경영전공 서적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난생처음 대하는 영어는 큰 고민거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담은 1학년 1학기를 우수한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기도 했다.추담은 끊임없는 노력으로 계속 장학생에 선발됐다. 그런 그가 떠올린 생각 하나. ‘나는 장학금을 받지 않아도 공부를 할 수 있는 형편이지만 젊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결국 추담은 자신이 받은 장학금을 가난한 학생에게 주기를 권하며 자신은 사양했다.그의 만학도로서의 삶은 계속 이어졌다. 2학년 때는 그 어렵다는 종합시험도 거뜬히 통과한 추담은 논문심사도 무사히 통과했다. 그의 석사학위 논문은 「기업합병에 따른 세무회계처리에 관한 연구」이다.1989학년도 학위수여식에 참석한 추담은, 69세의 최고령 학위수여자로 주위의 부러움과 찬사를 한몸에 받았다. 만학도로서의 첫 꿈이 비로소 이루어지던 순간이었다.추담의 학력을 보면 1946년 9월 30일 진주사범 교원양성학과 졸업, 1957년 경남대학교 졸업, 1990년 8월 25일 경상대학교 경영대학원(경영학석사) 졸업에 이어, 5년 뒤인 1995년에는 경남대학교 대학원 경영학 박사과정을 밟았다. 그의 나이 74세였다.세무사로서의 그의 삶이 그랬듯이 만학도로서의 삶 역시, 그에게는 하나의 끊임없는 도전이었고 결국에는 화려한 꽃을 피워냈다. 진주발전을 위한 그의 헌신도 적지 않았다. 이남두 진주시장 재임시절에는 ‘민간인 토지감정평가 위원’에 위촉돼 남강교~새벼리 도로 2차선 확장 공사 당시 강남동과 칠암동쪽 토지를 감정가로 매입하여 현재와 같은 4차선 보도를 설치하는데 공헌을 했다. 자랑스런 경남인추담은 경상남도가 경남도 탄생 100주년을 맞아 선정한 ‘자랑스런 경남인 100인’에 선정됐다. 경남의 명예를 드높인 경남인 100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된 영예를 얻은 것이다. 그의 삶 곳곳에 깃들어 있는 교훈은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자린고비 세무사, 저축왕, 장학재단, 만학도로 대표되는 추담의 삶에 있어 또 하나의 흔적을 찾는다면 단연 ‘지역에 대한 봉사’이다.1964년 국제라이온스클럽 진주라이온스클럽 창립 멤버로 새로운 지역봉사의 지평을 열었다. 진주라이온스클럽 창단 이후 47년간 계속된 그의 사회봉사활동 경력은 아직도 모범사례로 남아 있다.시내에 거주하고 있는 동거인 합동결혼식을 개최한 것은 물론 1991년 고희연 때에는 2명의 소년 소녀 가장에게 각 200만 원의 성금으로 국민주택에 입주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민주화 시민정신운동과 관련해 김동길 교수 초청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지역의 정신문화 개선에도 그 흔적을 남겼다.1992년 4월에는 180만 원의 봉사금을 쾌척해 국제재단 Melvin Jones Fellow 회원이 되었으며, 1996년에는 경남탄생 100주년에 즈음하여 ‘자랑스런 경남 100인’에 선정되어 캡슐에 그의 공적이 보관되어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진주발전을 위한 그의 헌신도 적지 않았다. 이남두 진주시장 재임시절에는 ‘민간인 토지감정평가 위원’에 위촉돼 남강교~새벼리 도로 2차선 확장 공사 당시 강남동과 칠암동쪽 토지를 감정가로 매입하여 현재와 같은 4차선 보도를 설치하는데 공헌을 했다.또한, 진주시 지방세 심의위원으로 활동한 것은 물론 한국산업경제학회 고문으로 경제부분에서 활약을 하기도 했다. 삶의 지평추담은 지난 1997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마지막 삶의 목표에 대해 밝힌 적이 있다. 평생을 근검절약과 봉사로 살아온 그의 마지막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만년에 배움에 대한 열의로 가득찼던 그가 가진 마지막 소망은 진주의 인재를 키우는 장학사업이었다.추담장학재단은 그가 작고한 뒤에도 여전히 지역의 인재들에게 꿈과 희망이 되고 있지만, 그의 속내는 진주발전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많이 연구자들과 학생들에게 혜택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사람이 밥을 하루에 한 그릇을 먹든, 두 그릇을 먹든, 죽을 때는 돈 한 푼 가져갈 수 없어. 쓸데없는 물욕이 사람을 망치는 길이야.”추담의 말 속에는 욕심 없이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삶에 제법 어울리는 삶을 사는 것도 중요하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내가 진주에서 살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았는데, 이제는 사회에 환원하고 싶어.”그는 생전에 한 푼이라도 더 아껴 장학금을 만들고 싶어 했고, 그 장학금으로 지역발전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어 우수한 인재가 육성되어 장래 진주의 발전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고자 했다.추담은 생을 마감하기 전에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은 학구파였으며, 여전히 집에서 그의 직장까지 왕복 8km의 거리를 걸어 다녔으며, 3천 원짜리 소박한 밥으로 점심을 해결하는 자린고비 세무사였다.담배를 피우지도 않았고, 매일 아침 세숫물을 변기에 부어 물을 아꼈던 추담. 평생을 세무사로 살았지만, 자신의 명의로 된 재산이라고는 땅 한 평도 없다.그리고 추담은 자신의 시신과 장기를 경상대학교 의과대에 기증하기로 약속했고 실천했던 ‘아낌없는 삶’을 살았다. 추담은 생을 마감하기 전에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은 학구파였으며, 여전히 집에서 그의 직장까지 왕복 8km의 거리를 걸어 다녔으며, 3천 원짜리 소박한 밥으로 점심을 해결하는 자린고비 세무사였다. 진주시민상 수상진주시의 명예를 빛내거나 지역발전에 공이 있는 시민을 대상으로 수여하고 있는 ‘제1회 진주시민상’에 추담이 선정됐다.진주시민상은 체육 및 지역발전에 공헌해온 사람에 대해 부문별로 시상을 해왔던 진주시문화상이 대상자가 줄고 권위가 없다는 지적에 따라 2001년부터 진주의 명예를 빛냈거나 지역사회 발전에 공헌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을 선정해 시상하는 상이다.추담이 처음으로 제정된 진주시민상에 선정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적어도 그가 걸어왔던 89년 삶 가운데 거의 대부분이 진주에 있었고, 그의 다양한 활동 역시 진주발전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저축유공자로 선정돼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은 뒤 그의 인터뷰는 너무나 평범하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었다.“요즘 대학까지 애들 교육하려면 돈도 많이 든다는데 국민 저축률이 떨어져서 걱정입니다. 적게 벌더라도 아껴 쓰고 장래를 위해 반드시 저축해야 합니다.”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그 일은 추담은 평생을 실천했다.오늘날 자신만의 삶의 방향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럴 때 추담 장충석이 걸어온 길을 한 번 되돌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그는 그의 삶의 원천이었던 세무사 생활에 한 치의 빈틈도 없었고, 어머니의 근검절약 정신을 이어받아 검소했으며, 자신을 위해 돈을 쓰기 보다는 사회를 위해 사랑의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자신은 한 평의 땅도 소유하지 않은 채 자연으로 돌아갔다.진주사람 추담 장충석은 그렇게 살았다.

  • 2024-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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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현장 고능석 대표

극단 현장에 대해 간단하게 소개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고능석 대표 (사)극단 현장은 대부분의 지역 극단들과 마찬가지로 직장인들이 중심이 되어 밤샘연습으로 공연을 올리는 동우회 형식으로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극단이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성장하기에는 너무 힘들기에 오랜 기간에 걸쳐 끊임없이 조직 운영의 변화를 시도해 왔습니다. 전문극단으로의 성장을 위해 상근단원제로 전환했고, 극단 자산의 공공화를 위해 2005년에는 사단법인으로 전환했습니다. 지난 2007년에는 구 동명아트홀을 전문공연장으로 리모델링해 현장아트홀로 개관한 이후 진주의 대표적인 문화예술사랑방으로 자리해 왔습니다.함양군, 산청군, 사천시 등 인근 시군에 상주단체로서 문화예술을 보급하고자 2017년 12월 국민배우를 시작으로 당해 시민 극단(이중생활)의 창단을 도와 지역의 생활문화예술 보급에 앞장서 왔습니다. 지역의 대표 축제의 주제공연과 사회적 이슈에 공감하는 예술교육 등으로 시민들과 함께 호흡하며 극단 현장이 진주의 소중한 문화예술자산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왔습니다.극단 현장이 이번에 복합문화예술센터를 만든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결정을 하게 된 배경은 어디에 있습니까?고능석 대표 극단 현장의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문화예술의 힘은 시민의 힘에서 나옵니다. 극단 현장이 지난 46년의 경험을 통해 획득한 교훈입니다. 따라서 도시에 문화예술이 스며들지 않으면, 그 공간은 색을 잃기 쉽습니다. 그리고 공간은 사람들의 관심과 노력으로 커질 수도, 묻힐 수도 있습니다. 진주에서, 진주시민의 힘으로, 또 얻을 수 있는 공공의 힘을 빌려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꾸리고, 그 공간을 모두의 손길로 이어가고자 합니다. 극단 현장을 진주를 대표하는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만들고자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복합문화예술센터를 건립하면서 ‘파란만장, 백만대군’이라는 슬로건을 내거셨습니다.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고능석 대표 복합문화예술센터 건립에 총 15억 원 정도의 예산이 소요됩니다. 그중 10억 원은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도시재생 기금융자를 받았습니다. 나머지 금액 중 2억 3천만 원은 극단 현장의 자체 자금과 회원들의 자발적 기부로 충당하고, 나머지 2억 5천만 원은 시민들의 모금과 무이자 출자금으로 충당하려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사실 건물의 감정가는 20억 원 정도이지만, 건물주의 배려로 13억 원에 매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극단 현장은 건물 매입비용에 약 2억 원의 리모델링 비용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극단 식구들과 고민고민한 끝에 ‘파란만장 백만대군, 복합문화공간을 만들어 주세요’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모금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파란만장 백만대군’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셨습니다. 사실 이 슬로건은 부산의 최우석 원장께서 제의하신 것입니다. 최 원장님은 그동안 아무 조건 없이 어려운 지역의 극단을 지원해주신 후원자입니다. 그분의 ‘파란만장이 좋겠다’는 의견에 백만대군이 출자한다면 모금 프로젝트의 성공이 가능할 것이라는 극단 식구들의 전적인 찬성도 한몫을 했습니다. ‘파란만장 백만대군’은 향후 건립될 복합문화예술공간이 현장아트홀의 사유물이 아니라 시민 예술가들의 공공자산이 되겠다는 선언적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1974년 창단한 극단 현장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참으로 ‘파란만장’하며, 발전적 도약을 위해 ‘백만대군’을 조직해 지역문화예술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담보한다는 함의적인 의도도 갖고 있습니다.현장아트홀은 지역의 문화예술인들이 모여서 문화예술 발전을 위한 사업은 물론이고 창작활동, 시장구축, 홍보마케팅, 예술생태계 고민, 축제기획 등 다양한 분야의 일을 추진할 것입니다. 현장아트홀의 역사와 복합문화예술공간이 갖는 가치가 있다면?고능석 대표 동명아트홀은 지난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진주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관 중의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복합상영관(multiplex)의 등장으로 몰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극단 현장은 오랜 기간 동안 빈 공간으로 있던 동명아트홀의 먼지를 걷어내고 지난 2007년 공연장 「현장아트홀」로 리모델링한 이후, 지역의 유일한 민간 소극장으로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진주 원도심의 상권이 급격하게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붕괴 직전에 도달했고, 현장아트홀 건물은 건물주에 의해 부동산시장에 매물로 등장했습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한 날들을 보내던 중 극단 현장의 단원들과 회원들의 의지로 이 사업을 추진하게 된 것입니다.현장아트홀이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의 변화를 시도한 것은 서부경남에서는 처음입니다. 물론 전국적으로는 많은 시도가 이어졌고 성공한 사례들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현장아트홀이 도시재생의 중심과 원도심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며, 지역의 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탈바꿈되는 현장아트홀은 어떻게 운영이 되나요?고능석 대표 좁게는 연극, 넓게는 예술 분야로의 확장이 시도될 것입니다. 현장아트홀은 지역의 문화예술인들이 모여서 문화예술 발전을 위한 사업은 물론이고 창작활동, 시장구축, 홍보마케팅, 예술생태계 고민, 축제기획 등 다양한 분야의 일을 추진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진주문화예술의 허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장아트홀 인근을 차 없는 거리로 만들어 특색있는 문화공간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급변하는 문화예술 생태계에 대응하기 위한 영상산업기반 구축 등 영상제작 스튜디오 사업도 추진했으면 하는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호남연극제를 진주연극페스티벌로 변경해 추진하는 방안도 강구 중입니다. 어려움이 있겠지만 지금까지 해 온 대로 극단 현장만의 방식으로 풀어볼 생각입니다. 이와 함께 경남연극인 페스티벌과 같은 극단의 계획이 실현된다면 도시재생 활성화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파란만장 백만대군’에 대한 지역사회의 반응은 어떻습니까?고능석 대표 사실 걱정이 많았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지역 경기는 얼어붙고, 씀씀이도 줄이는 상황에 사회적 기부가 설 자리가 있을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모금 프로젝트도 2019년 12월에 시작했습니다. 사실 2019년 8월부터 시작했지만, 도시재생 기금융자를 받는 과정에서 시일이 걸려서 처음부터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습니다.불과 2주 사이에 목표액의 50%를 달성했습니다. 기부자 중에는 무기명으로 고액을 기부한 분도 계시고 극단 현장과 전혀 관계없는 시민들께서도 기부에 동참해 주셨습니다. 액수도 액수지만 기부해 주시는 분들의 사연들도 다양했습니다. 극단 현장이 그동안 지역에서 해 온 활동에 대한 평가라 생각하면서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고액기부자는 후원회원 중에서 많이 해주셨고, 1,000만 원을 10년 동안 출자하겠다고 한 후원자도 계셨습니다. 500만 원과 1,000만 원을 조건 없이 기부하신 분들도 계십니다. 소액기부자들은 극단 현장을 경험한 분들이거나 공연을 보신 분, 자원봉사를 하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극단 현장은 이번 모금 프로젝트를 통해 현장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길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모금 프로젝트에 동참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불과 2주 사이에 목표액의 50%를 달성했습니다. 기부자 중에는 무기명으로 고액을 기부한 분도 계시고 극단 현장과 전혀 관계없는 시민들께서도 기부에 동참해 주셨습니다.극단 현장이 그동안 지역에서 해 온 활동에 대한 평가라 생각하면서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극단 현장은 이번 모금 프로젝트를 통해 현장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길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변화하는 현장아트홀의 모습이 궁금해지는데요?고능석 대표 복합문화예술공간인 현장아트홀은 지하 1층, 지상 4층으로 꾸며질 예정입니다. 먼저 지하는 다목적 소극장으로 운영됩니다. 가변형 블랙박스 씨어터로 설계해 다양한 예술적 실험이 일어나게 하고, 관객과의 거리를 최대한 좁혀 콘서트, 강연, 워크숍, 예술가 인큐베이팅, 지역민 커뮤니티, 축제 등의 다양한 공연과 행사가 가능한 공간으로 재탄생합니다.1층은 카페형 전시실로 운영됩니다. 갤러리 형식의 복합문화예술공간과 카페로 설계해 전시와 작은 공연이 일상이 되게 하고, 향후에는 미술관으로서의 전환도 꿈꾸고 있습니다. 인디밴드나 실내악 등 장르를 불문한 작은 공연들과 함께 음료를 마시며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커피와 음료뿐 아니라 맥주와 와인 등의 주류도 판매해 좀 더 열린 관극문화를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사천 리미술관, 예술상점 등과 MOU를 맺어서 미술 관련 공동기획도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지역미술관에 대관하는 기능도 만들어서 외국처럼 자유롭고 열린공간으로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2층은 공유사무실입니다. 공유사무실이란 여러 분야에서 독립적으로 작업하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 아이디어를 공유하며 의견을 나눌 수 있도록 조성한 협업공간을 말합니다. 극단 현장을 중심으로 조명 디자인, 음향 디자인, 영상 미디어, 생활예술 동아리, 시민단체 등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개인과 단체들에 공간을 제공하여 긍정적 영향을 주고받는 선순환 관계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다만 입주단체들의 공동경비 부담형식으로 운영해 소규모 단체들의 비용부담을 덜어 주고 싶습니다. 극단 현장이 겪었던 어려움을 다른 단체가 겪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입니다.현장아트홀은 어떤 모습으로 변모합니까?고능석 대표 현장아트홀은 3층과 4층입니다. 현장아트홀은 밀도 있는 공연을 원하는 지역 문화예술단체들의 사랑방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동안 불편했던 공간들에 대한 개선도 이뤄질 것입니다. 현재 1개소인 분장실을 두 곳으로 늘리고, 로비와 화장실을 확장할 계획입니다. 특히 화장실은 남녀로 구분해서 더욱 편리하고 쾌적한 공간으로 리모델링할 것입니다. 공연장에 더욱 편리하게 장비 반입이 가능하도록 곤돌라 설치도 함께할 예정입니다.그동안 극단 현장이 사회적기업으로 활동하지 못한 이유가 있습니까?고능석 대표 사실 지역 극단의 경우 회계처리 등의 어려움으로 인해 사회적기업으로의 전환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사회적기업 전환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주변의 작은 문화단체들로부터 “여러 가지로 힘들다”라는 말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 그래서 주춤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예비사회적기업으로 지정을 받았습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경남도의 관계자가 경남을 대표하는 사회적기업이 되었으면 하는 기대감을 전해왔습니다. 극단 현장이 사회적기업으로서 할 일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경남을 대표하는 사회적기업이 되도록 노력할 계획입니다. 현장아트홀이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탈바꿈하면, 문화예술 활성화도 중요하지만, 운영을 위한 자금 확보 등 적지 않은 어려움에 처할 수도 있다고 보는데 어떻습니까?고능석 대표 극단 현장은 지난 1974년 창단한 이후,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역경을 겪고 오늘날 이 자리에 서있습니다. 극단 현장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현장에 대한 회원들의 무한한 관심과 후원 덕분이었습니다. 극단 현장이 걸어온 역사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극단 현장이 사단법인화의 길을 선택했을 당시, 극단 현장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선배님들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극단 현장은 공공의 것이어야 하며, 후대에 물려 줄 자산이다.” 극단 현장은 공공의 것입니다. 지역의 작은 민간 극단에서 출발한 극단 현장이 이제 파란만장한 역경을 이겨내고 백만대군의 출자에 힘입어 진주 최초의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나려고 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극단 현장은 공공의 자산이며, 후대에 물려줄 자산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변한다면 더 이상 극단 현장은 지역에 발붙일 곳이 없을 것입니다. 극단 현장은 지난 1974년 창단한 이후,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역경을 겪고 오늘날 이 자리에 서있습니다. 극단 현장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현장에 대한 회원들의 무한한 관심과 후원 덕분이었습니다. 극단 현장이 걸어온 역사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현장아트홀이 진주 최초의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고능석 대표 극단 현장에 대해 주신 관심과 사랑은 진주 문화예술의 발전으로 보답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더불어 현장아트홀이 무명의 가수와 음악가들이 자신들의 음악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공연장이 되고, 뭇 예술인들이 찾는 창작의 놀이터가 되었으면 합니다. 가능하다면, 도시재생과 관련한 기관들과 함께 문화도시 재생에 작은 힘을 보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극단 현장을 지켜봐 주시고, 응원해 주시고, 격려해 주십시오. 극단 현장은 시민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지역의 문화예술을 지켜나갈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피플&스토리|극단 현장 고능석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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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문화유산원 심동섭 원장

진주문화유산원에 대해 먼저 간단하게 소개해 주시죠.심동섭 원장 진주문화유산원은 진주문화유산의 올바른 전승과 보전을 위한 각종 사업을 전개해 지역사회에 진주문화유산의 폭넓은 이해와 소중함을 널리 인식시키고자 만들어졌습니다. 천년 진주의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진 진주시민들의 소중한 마음이 담겨 있는 단체입니다. 앞으로 진주문화유산에 대한 전문성을 갖춘 기관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전 회원들이 노력해 나갈 것입니다.진주문화유산의 올바른 전승과 보전을 위한 사업이 핵심사업이라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주신다면?심동섭 원장 진주를 비롯한 경남지역의 문화유산의 전승과 보전을 위해 추진할 사업은 대략 5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먼저 「경남지역 문화유산 조사·연구사업」, 「경남지역 문화유산 아카이브 구축사업」, 「진주시 문화유산의 창조적 콘텐츠 개발」, 「문화유산 전문인력양성 및 시민교육사업」, 「문화유산 학술행사 및 전시회 개최」, 「출판사업」 등입니다. 세부적으로 중요한 사업만 말씀드리면 진주문화유산 조사 및 연구, 진주시 유교 문화재 조사연구, 진주문화재 아카이브 구축사업, 진주교방문화 활성화 및 단지 조성, 문화유산을 활용한 기념품 개발사업, 진주문화유산지킴이 운영, 지역문화유산 관련 심포지엄 및 토론회 개최, 진주문화유산 관련 책자 발간 등의 세부사업들을 앞으로 추진해 나갈 계획입니다.진주문화유산원이 추진할 사업 규모가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러한 사업들을 추진해 나갈 수 있는 실행단체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심동섭 원장 원활한 사업 추진을 위해 진주문화유산원 내에 3개의 연구소를 두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진주의 교방문화를 보전하고 계승해 나가기 위한 ‘교방문화연구소’와 축제 원조도시인 진주의 축제 발전을 위한 ‘지역축제연구소’, 천년 진주의 역사와 문화를 녹여내는 ‘기념품연구소’ 등 3개 연구소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향후 각 연구소는 토론회, 심포지엄 등의 연간 사업계획을 세워 진주문화유산 전승과 보전을 위한 첨병 역할을 하는 것은 물론 분야별로 지역에 도움이 되는 연구소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진주시 문화유산의 창조적 콘텐츠개발 사업에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우선 진주만의 고유한 콘텐츠인 진주교방문화 활성화와 진주교방문화단지 조성을 추진해 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교방문화에 대한 사회적 인식변화를 위한 사업이 중요합니다.진주문화유산원 운영위원 진주관광기념품 개발을 위한 지역의 노력은 전무하다시피 한 실정입니다. 창작지원금이나 판로개척 등의 지원체계는 전무합니다. ‘기념품이 없으니 안 사고, 안 사니, 안 만든다’는 기념품의 현실을 주지하고 다양한 정책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다양한 사업들이 추진될 것 같은데 그중에서도 진주문화유산원이 중점을 두고 있는 사업이 있다면 소개를 해주시죠?심동섭 원장 진주시 문화유산의 창조적 콘텐츠 개발사업에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우선 진주만의 고유한 콘텐츠인 진주교방문화 활성화와 진주교방문화단지 조성을 추진해 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교방문화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를 위한 사업이 중요합니다. 더불어 진주의 교방문화가 가지고 있는 문화예술적 가치를 창조적 콘텐츠로 개발해 진주 문화·역사의 우수성을 대내외에 알리는 것은 물론 지역산업 활성화에도 도움이 되도록 할 생각입니다. 진주교방냉면과 진주교방비빔밥 등 진주의 문화를 산업으로 연결시키는 시도는 진주문화유산의 창조적 계승이라는 진주문화유산원의 설립 목적에 부합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진주문화유산의 문화재등록사업을 위해 발 벗고 나서 역사·문화도시 진주의 위상을 정립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가장 시급한 사업으로는 진주에 소재하고 있는 문화유산에 대한 각종 기록 등을 수집해 기록화하는 일입니다.문화유산을 활용한 기념품 개발 등에 대한 지역의 관심이 적은데, 진주문화유산원의 향후 계획에 있습니까?심동섭 원장 진주관광기념품 개발을 위한 지역의 노력은 전무하다시피 한 실정입니다. 더불어 현재 개발되어 있는 관광기념품 역시 전국적으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최근 지역의 공예작가가 엄청난 개인비용을 들여 ‘진주검무’를 활용한 관광기념품을 개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창작지원금이나 판로 개척 등의 지원체계는 전무합니다. ‘기념품이 없으니 안 사고, 안 사니 안 만든다’는 기념품의 현실을 주지하고 다양한 정책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안동 하회탈의 경우에도 전국적인 기념품으로 만들려는 안동시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진주시민 모두가 함께 진주의 문화재를 활용한 기념품 개발에 나서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문화유산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날로 줄어들고 있습니다. 문화유산 전문인력 양성이나 시민교육사업의 경우에 민간단체에서 수행하기가 쉽지 않은 사업으로 보입니다 심동섭 원장 정부나 지자체가 관심은 갖고 있지만,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지속적인 예산 투입에도 불구하고 단기간에 성과를 도출해 낼 수 있는 사업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관심을 갖지 않고 무관심해진다면 이러한 사업은 영원히 시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희들은 우선, 지역의 청년들에게 문화유산에 대해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다양한 사업을 추진할 계획입니다. 진주향당이 추진하고 있는 ‘진주청년역사학교’와 연계하는 것은 물론 ‘진주역사골든벨’을 통해 시민들 스스로가 자랑스러운 진주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갈 것입니다. 문화유산 전문인력 양성과 시민교육사업에 지방정부의 각별한 관심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사실 진주문화유산원의 사업이 방대해서 그런지, 방향성에 대해 쉽게 이해가 안 됩니다. 쉽게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해 주신다면?심동섭 원장 진주시민들에게 빠른 이해를 제공해 드리자면, 최근 추진하고 있는 사업 중에 진주문화재 아카이브 구축사업이 있습니다. 사업명은 거창하지만, 실제로는 진주시의 문화재를 기록화하자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로 진주시 무형문화재 제10호인 은장도의 역사와 제작과정 등을 담은 책자를 발간할 예정입니다. 지금 사진작가의 촬영이 끝났고, 제작과정에 대한 해설이 마무리되고 전문가 고증이 끝나면 시민들에게 선보일 예정입니다. 저희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소목장, 두석장을 비롯한 진주 문화재를 한 권의 책에 담아 아카이브 구축에 노력할 것입니다. 그리고 근현대 진주이야기를 담은 책자도 곧 발간할 예정입니다. 가능하면 올해 하반기나 내년 상반기 중에 2권의 책을 발간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진주교방문화단지 조성은 조금 생소한데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시죠?심동섭 원장 진주교방문화에 대한 논의는 지난 2019년 경남일보에 기획특집으로 실린 ‘진주교방문화의 멋과 맛’이라는 기사를 토대로 진주의 문화와 역사성을 반영하고 있는 교방문화를 전국적인 문화콘텐츠로 만들어 보자는 의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산청에 있는 동의보감촌과 같은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역사공간으로 만들어 보자는 것이죠. 진주교방문화단지에는 교방문화역사관, 체험관, 공연장, 교방음식관(교방냉면, 교방비빔밥 등) 등으로 구성해 진주를 대표하는 관광 테마공원으로 만들어 보고자 추진 중에 있습니다. 지난 21대 총선 당시 강민국 국회의원 후보자가 총선공약으로 정해 앞으로 사업추진에 속도를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오는 2028년에는 남부내륙고속철도가 완공됩니다. 이에 대비해 전국의 다른 지역과 차별화되는 진주만의 문화콘텐츠를 담은 문화관광단지가 필요합니다. 현재 진주에는 진주성 촉석루 이외에는 관광객들을 끌어들이는 흡인력을 갖춘 공간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실정입니다. 만약 진주에 교방문화단지가 들어서게 된다면 문화의 산업화를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라는 최근의 트렌드를 충족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일자리 창출로 이어지는 선순환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진주지역의 문화관광 관련 대규모 사업의 경우에는 남부내륙고속철도 시대에 대비한 맞춤 전략으로 추진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교방문화를 이용해 남북교류사업도 고려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심동섭 원장 최근에 경상남도로부터 교방문화를 활용한 남북교류사업 추진을 위한 자료 요청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통영의 윤이상음악제와 진주의 교방문화를 검토하고 있는 단계라는 설명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남북관계를 봐서는 성급한 일이 되겠지만, 만일 진주의 교방문화가 남북교류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면 진주는 새로운 문화관광지로서의 위상을 점유할 뿐 아니라 진주의 문화관광과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상당히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주와 평양은 인문학적으로 상당한 연관이 있습니다. 진주냉면-평양냉면, 진주 의기 논개-평양 계월향, 제1, 2차 진주성전투-제1, 2차 평양성전투, 진주 남강-평양 대동강, 진주 촉석루-평양 부벽루 등 진주와 평양의 인문학적 교류를 통한 노력이 진주의 문화관광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자신합니다.진주교방냉면이나 진주교방비빔밥 등은 문화의 산업화 논의 측면에서 보면 상당히 의미 있는 일 같은데요, 현재 추진상황은 어느 정도입니까?심동섭 원장 일단은 상표등록 등을 통해 진주의 고유 자산으로 만들 계획입니다. 평양냉면이나 전주비빔밥 등과 같이 지역을 대표하는 음식의 개발과 산업화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주변에 진주의 문화유산 보전과 전승에 대한 노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진주를 대표하는 의기 논개는 장수에 빼앗기고, 소싸움은 청도에, 비빔밥은 전주에 빼앗겼다는 자조 섞인 한탄이 많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노력이 부족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교방냉면과 교방비빔밥의 개발과 보급을 통해 지역경제 활성화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다양한 노력이 각계각층에서 마련되어야 할 것입니다. 진주문화유산원의 설립 취지에 동의해 주신 분이 700여 명이 됩니다. 모두 회비를 낸 회원들이며, 운영위원의 경우에는 진주문화유산원에 직접적으로 참여 의사를 밝혀주신 분들입니다.회원님들은 진주문화유산원의 존재 필요성을 증명해 주는 중요하고도 고마운 분들이기에 앞으로 회원들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진주문화유산원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문화유산 학술행사나 전시회 계획은 있습니까?심동섭 원장 문화유산 보존을 위한 첫걸음은 지역사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태 파악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따라서 내년에는 진주문화유산 보존과 계승을 위한 토론회를 비롯해 관련 분야 전문가들의 의견을 받아 진주문화유산 보존을 위한 사업계획을 수립할 예정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민간단체의 사업 범위를 넘어섰다는 비판도 만만찮지만, 정작 문제는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저희들이 다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아젠다를 만들고 함께할 수 있는 전문가, 시민들이 참여하는 협의체를 만들어 첫 발걸음을 뗄 예정입니다.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현재 진주문화유산원의 회원은 몇 명 정도 됩니까?심동섭 원장 진주문화유산원의 설립 취지에 동의해 주신 분이 700여 명이 됩니다. 모두 회비를 낸 회원들이며, 운영위원의 경우에는 진주문화유산원에 직접적으로 참여 의사를 밝혀주신 분들입니다. 회원분포도 지역별로 보면 진주가 주축을 이루지만 사천, 하동, 산청 등 서부경남지역에서 마음을 내어주신 분들도 많습니다. 앞으로 목표는 회원 2,000명을 만드는 것입니다. 회원의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사업을 어떻게 추진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회원님들은 진주문화유산원의 존재 필요성을 증명해 주는 중요하고도 고마운 분들이기에 앞으로 회원들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진주문화유산원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죠?심동섭 원장 현재 비영리단체로 활동하고 있지만, 향후 사단법인화를 통해 보다 체계적으로 운영을 해나갔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진주문화유산원의 역할과 방향성을 설명드리면 동의해주시는 분들도 많지만, 고개를 주억거리는 분들도 많습니다. 아마도 진주문화유산원이 가고자 하는 길이 쉽지 않을 것이며, 성과를 거두기도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 때문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누군가는 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운영위원회에서 매주 회의를 하면서 고생해 주시는 부위원장님들, 700명의 회원님들과 잘 상의해서 진주문화유산원이 진주에 도움이 되는 단체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진주문화유산원이 가고자 하는 길이 쉽지 않을 것이며, 성과를 거두기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누군가는 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운영위원회에서 매주 회의를 하면서 고생해 주시는 부위원장님들, 700명의 회원님들과 잘 상의해서 진주문화유산원이 진주에 도움이 되는 단체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진주시민들에게 한 말씀해 주시죠?심동섭 원장 진주문화유산원이 진주시민들에게 실망을 드리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진주문화유산원과 함께 지역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시민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피플&스토리|진주문화유산원 심동섭 원장

  • 2024-03-05
  • 작성자

    진주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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