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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7 10:45(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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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이 저걸이 갓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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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평론

  • 작성일

    2024.03.07 AM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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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

극단 현장이 지난 2003년 연극 한 편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른바 진주정신 찾기 시리즈 가운데 뮤지컬 논개(2001년)와 형평운동 이야기인 불꽃(2002년)에 이은 세 번째 작품으로 1862년 진주농민항쟁운동을 다룬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라는 공연이었다. 진주정신 찾기가 연극의 사회적 환원이라는 분명한 목표의식 아래 시도된 이 공연은 진주정신이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으로, 미래형으로 계속된다는 전제를 지역사회에 표명해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진주는 한국농민운동의 발상지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 진주 망건 또 망건, 짝발이 휘양건, 도르메 줌치 장독간, 머구 밭에 덕서리, 칠팔월에 무서리, 동지섣달 대서리’

진주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어릴 적 친구들과 방에 앉아 서로 다리를 두드려가며 불렀던 이 언가(諺歌, 한글노래)를 기억할 것이다. 때로는 구불구불 어지럽게 휘어진 골목길을 뛰어다니며 불렀고, 마을 앞 타작 마당과 빈 논바닥을 맨발로 누빌 때도 흥얼거렸다. 하지만 이 노래에 담긴 진주 역사와 진주정신을 알아채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 혹은 ‘언가(諺歌)’로 불리는 이 노래는 진주농민항쟁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류계춘 (柳繼春, 1830~1862)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1862년 진주농민항쟁에 관한 당시 조선 정부의 수사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전한다.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라는 노래에는 진주농민항쟁 의 발발 원인과 역사가 밀도 높게 응축되어 있는 것은 물론 수탈과 착취에 맞선 진주의 농민들의 삶의 애환과 아픔 그리고 저항정신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 연극의 대본을 집필한 윤영수 방송작가는 노래의 가사가 함의하고 있는 뜻을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는 농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양 반들이 갓을 걸어 놓는 걸이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즉, 농민은 지배계층의 수탈대상이자 종속된 소유물과 같다는 의미이다.

‘진주 망건 또 망건’은 진주에 사는 양반이 수도 없이 많다는 뜻으로 뇌물을 주고 벼슬을 산 가짜 양반이 많았기에 그들의 횡포가 극심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짝발이 휘양건’은 탐관오리(貪官汚吏)를 의미한다. 짝발이는 발이 양쪽으로 쫙 벌어졌다는 뜻이며, 휘양건은 결혼식이나 벼슬아치들이 사모(紗帽冠帶)를 쓸 때 받쳐주는 모자를 의미한다. 

‘도르메 줌치 장독간’은 농민들의 생존권이 양반의 허리춤에 달렸다는 뜻이다. 도르메 줌치는 양반들이 허리에 차고 다니는 휴대용 지갑의 일종으로, 그 속에 토지문서나 노비문서가 들어 있어 농민과 천민의 생존권이 양반들의 허리에 달려 있다는 뜻을 갖고 있다.

‘머구 밭에 덕서리’는 온갖 종류의 세금이 덕지덕지 쌓였다는 뜻이다. 머구는 음지에서 자라는 식물의 한 종 류로 아무리 잎을 뜯어도 계속 잎이 생겨나기 때문에 세금의 수탈 대상인 농민을 의미한다. 덕서리는 어떤 물건을 계속 볶거나 삶아서 결국 걸쭉하게 된다는 뜻으로 온갖 종류의 악랄한 세금과 부역이 농민들을 억누르고 있다는 뜻이다.

‘칠팔월에 무서리’는 부당한 세금이 악랄하다는 뜻이다. 칠팔월에 무서리가 내리면 모든 곡식들이 순식간에 죽게 된다. 이는 당시 농민에게 부당하게 부과된 환곡과 도결로 인해 농민들이 굶어 죽을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지섣달 대서리’는 온 세상이 하얗고 깨끗하게 되었으면 하는 염원을 담고 있다. 동지섣달에 눈이 내려 온갖 모순된 제도와 포악한 벼슬아치들과 탐욕스러운 양반들을 몰아냄과 동시에 공명정대한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운동권 노래

진주농민항쟁은 조선 철종 13년(1862) 2월 14일 경상도 진주지역에서 일어난 최초의 반봉건 농민항쟁으로 삼정 문란과 경상도우병사 백낙신(白樂莘)의 가혹한 수탈에 저항하여 유계춘(柳繼春) 등이 농민들을 이끌고 일으킨 대규모 농민운동이었다.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의 대본 가운데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당시 조선은 진주농민항쟁을 엄중하게 처리하기 위해 박규수를 안핵사로 파견하게 된다. 박규수 는 진주농민항쟁을 주도한 류계춘에게 “백성은 임금을 상대로 싸워서는 안 된다. 이것은 승패 이전의 문제이다”라고 말한다. 이에 류계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은 승패 이전에 역사의 문제이며, 정신의 문제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 싸울 때 만이 정녕 살아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그 위대한 인간정신의 문제이다. 더불어 낡고 썩은 세상은 언젠가는 자멸한다는 역사의 법칙. 이것이 문제이다.” 

소설가 정동주는 진주농민항쟁 당시 불려졌던 ‘이걸 이 저걸이 갓걸이’라는 노래가 우리나라 최초의 운동권 노래이자, 혁명가(革命歌)라고 규정짓기도 했다. 노랫말의 경우, 누구나 따라 부르기 쉬운 순 한글로 지은 것은 물론 곡을 붙여 널리 퍼뜨렸으며, 진주농민 항쟁 이후, 농사꾼이 사는 동네라면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라는 노래는 구전으로 전해져 왔다. 따라서 진주농민항쟁의 발원지인 진주지역과 다른 지역의 가사의 내용이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초등학교 2학년 교과서인 즐거운 생활에는 ‘이거리 저 거리 각거리’가 구전 놀이 운율을 민요조로 만들어 기록하고 있으나 진주지역의 노랫말과는 많이 다르다. 더불어 진주농민항쟁의 역사와 정신을 담고 있는지 도 의문이다. 

이거리 저거리 각거리, 천사만사 다만사, 조리김치 장독간, 총채비 파리딱, 한 다리 두 다리 세 다리, 인사만사 주머니끈, 칠팔월에 무사리, 동지섣달 대사리, 한 다리 두 다리 세 다리, 너희 삼촌 어디 갔니, 자전거를 고치러, 오꽁조꽁 부지깽 

진주농민항쟁은 삼정의 문란 등 봉건 수취체제의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제기한 이후, 다른 지방의 농민항 쟁의 자극제가 되어 전국적인 농민항쟁으로 확산되 었으며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진주농민항쟁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의 노랫말이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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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의 나루터

진주의 나루터 조선후기 철종 연간에 제작된 분첩절첩식(分帖折疊 式)의 지도인 「동여도(東輿圖)」를 보면 청천진(菁川津), 남강진(南江津), 황류진(黃柳津), 운당진(雲堂津) 등 남강을 중심으로 한 4개의 나루터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있다. 19세기에 만들어진 전국 군현지도집인 「광여도(廣輿 圖)」에는 남강진(南江津), 황류진(黃柳津), 운당진(雲 堂津)에 대한 기록이 보이며, 조선 후기에 제작된 지도인 「동역도(東域圖)」의 경상도 지도에서도 운당진 (雲堂津)의 명칭과 기록을 확인할 수 있으나 정확한 위치를 알기는 어렵다. 조선 시대 경상도 진주의 연혁· 인문지리· 행정 등을 수록하여 편찬한 지방지인 『진양지』에 따르면 광탄진 (廣灘津)을 남강 본류가 시작되는 지점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진주의 나루터는 남강의 본류인 광탄진 을 시작으로 청천진, 남강진, 운당진, 황류진 등의 대 표적인 나루터 이외에 남강의 물길을 따라 각 지역마다 나루터가 생겨났음을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진주시와 진양군의 지명을 기록한 『진주지명사(晋州地名史)』를 바탕으로 살펴보면 진주에는 24개의 나루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나루터는 남강과 접하고 있는 대평면, 호탄동, 칠암동, 상평동, 초전동, 금산면, 대곡면, 진성면, 지수면, 사봉면 지역을 중심으로 생겨났다.먼저 남강 본류를 중심으로는 남강댐 안쪽 자리인 것으로 보이는 광탄진(廣灘津)과 진주성의 서쪽인 서장 대 아래의 청천진(菁川津), 옛 진주성(晋州城)의 남문 (南門) 아래에 있던 남강진(南江津, 촉석루 나루터), 남강 하류 동쪽 10리 지점인 운당진(雲堂津), 금산면 송백리 안담 남쪽의 황류진(黃柳津)이 대표적이다.지역별로 보면 대평면(大坪面)에는 상촌리의 상촌나루터(上村津)가 대표적이다. 상촌나루터는 남강에 나룻배가 최초로 등장한 이후 지금까지 남강변에 생겼다가 사라진 수많은 나루 중에 가장 마지막까지 존속했던 나루터이다. 상촌 나루터는 1998년 7월 16일 대평교(大坪橋)의 등장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외에도 대평면에는 대평리의 밤밭나루터, 어은리의 한강나들이, 당촌리의 벗들나루터, 마동리의 마 동나루터가 있었다. 호탄동(虎灘洞)에는 범골 서쪽에 있었던 범골나루터 와 테깐골나루터가 있었다. 정촌면과 문산면을 연결했던 테깐골나루터는 호탄동 주민들이 문산면 원촌과 범골에 가서 농사를 짓기 위해 만든 나루터이다.칠암동(七岩洞)에는 모디기뱃가로 불리던 치암이나루터가 있었다. 치암이나루터는 칠암동 동쪽에 있는 나루터로 칠암동과 도동을 잇는 나루터이다. 이 나루터는 1969년 진양교가 가설되면서 사라졌다.상평동(上平洞)에는 큰들나루터와 아랫들나루터가 있었다. 큰들나루터는 현 김시민대교 인근에 있으며, 상평동과 가좌동, 정촌면, 사천시, 통영시 등을 왕래하는 교통수단으로 이용됐다. 지 난 2016년 11월 28일 큰들나루터 표지석을 세웠다. 아랫들나루터는 상평동과 호탄동 범골을 잇는 나루터이다.초전동(草田洞)에는 황내진이나루터와 마들이나루터가 있었다. 황내진이나루터는 초전동 125-21번지에 소재했 으며, 초전동에서 금산면 송백리를 잇는 교통수단이었으 며, 마들이나루터는 초전동 259-1 금산 잠수교 입구에 위 치했으며 금산면, 대곡면, 의령군의 교통 관문으로 기능했다.금산면(琴山面)에는 황류진 (黃柳津)과 구암나루터가 있 었다. 황류진은 금산면 송백리 안담 남쪽에 소재했으며, 마을사람들이 진주로 가던 유일한 뱃길이자, 진주사람들이 마산과 대구로 가는 나루터였다. 구암나루터는 잠수교가 있던 자리에 있었 다.대곡면(大谷面)에는 마진리에 마진(麻津)이 있었다. 옛날 삼(麻) 농사가 잘되는 곳이며, 대곡면 마진리와 사봉면 마성리를 연결하는 교통수단이었다.진성면(晋城面)에는 진성면 북쪽에 있는 가진리와 대곡면 가정리를 잇는 가좌진(伽佐津)이 있었다. 월강교(月江橋)가 생기면서 사라졌다. 사봉면(寺奉面)에 는 사봉면 북마성과 대곡면 마진을 연결하는 산뒤나루터가 있었다.지수면(智水面)에는 지수면 용봉리 안계나루터와 지수면 청담리 염창나루터가 있었다. 안계나루터는 의 령군 화정면 상정리를 잇는 교통수단으로 강을 건너면 합천면 삼가, 대곡, 의령 읍내로 통하는 길이 이어져 조선지형도에 표시되어 있다. 지수면은 2019년 12 월 19일 안계마을 입구에 위치한 옛 남강변 안계나루 터 자리에서 안계나루터 유래비를 세웠다. 염창나루 터는 지수면 청담리와 의령군 화정면 화양리를 잇는 교통수단이었다.진주의 나루터는 남강 최초의 교량(橋梁)인 진주교 가설로 인해 1920년대 후반부터 남강변에 있던 대표 적인 나루터(津)가 사라지기 시작했고, 진양호댐 건설과 각종 교량의 건설로 인해 나루터 이용객들이 급격히 줄면서 교통수단으로서의 기능을 잃고 역사 속 으로 사라졌다.

  • 2024-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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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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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좌 (晋州座)

일제강점기 진주 유일의 문화공간 진주좌가 진주에 들어선 것은 1922년 11월 11일이다. 당시 일제는 경남도청 소재지인 진주에 마땅한 공연장이 없다는 점에 착안해 구 진주극장 자리에 2층으 로 된 일본식 목조 건물인 진주좌를 건립했다. 진주좌 낙성식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되었으며, 당시 활동사진으로 불린 무성영화를 비롯해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무용공연 등 다양한 문화공연과 강연이 개최되었다. 진주좌의 문화공연 가운데 가장 큰 인기를 끈 것은 걸쭉한 입담을 자랑하는 변사가 주도한 무성영화 상영이었다. 1928년에는 우리나라 초창기의 영화를 개척한 무성영화의 거장 춘사 나운규의 영화도 상영되기도 했다. 나운규가 대표로 활동한 ‘영화순업대(映畵巡 業隊)’가 1928년 2월 진주를 방문해 자신이 만든 조선 영화 ‘잘 있거라(1927년 작)’, ‘옥녀(1928년 작)’ 등의 작품을 진주좌에서 상영했다. 진주좌에는 나운규의 영화를 보려는 관객들로 대만원을 이루었다. 한국 근대예술사의 위대한 신화로 기억되고 있는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진주공연도 진주좌에서 마련되었다. 1931년 10월 진주를 찾은 최승희는 자신의 무용예술연구소 제자들과 ‘자유인의 춤’, ‘인조인간’, ‘십자가’ 등의 독무(獨舞)를 선보였고, ‘고난의 길’, ‘폭풍우’, ‘건설자’ 등의 창작무용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런 한편 1931년에는 동아일보 진주지국과 진주예 기권번이 공동으로 개최할 예정이었던 동포구제연주 회를 일제가 강제로 금지시켜 지역민의 강력한 비난 을 사기도 했다. 동포구제연주회는 진주예기권번이 만주에서 수난을 당하는 동포에게 구호품을 보내기 위해 마련한 연주회였지만 일제의 공연 불허로 취소되면서, 이후 진주좌는 진주지역 각종 사회단체들의 집회장소가 되기도 했다. 진주의 사회단체 집회장소로 변모한 진주좌에서는 1930년대 중반, 일제가 대사지(大寺池)를 매립해 대안동 일대가 신시가지로 조성되기 이전까지 영화상영은 물론 각종 문화공연 등이 공연된 진주 유일의 문 화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진주좌에서 영화상영과 공연만 개최된 것이 아니라, 진주지역 각종 사회단체들의 집회장소로도 이용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1923년 5월 13일 진주좌에서 개최된 백정해방의 기수 형평사 창립축하식이다.형평사 창립축하식은 진주좌에서 열린 행사 중 최대의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이를 계기로 경남도청 이전반대 도민대회(1925년 1월 2일) 개최, 진주의 사회단체들이 주도한 전기요금 인하운동(1930년 1월 13일)을 비롯해, 남강치수문제 진주시민대회(1932년 8월 26일) 등의 크고 작은 사회단체들의 집회장소로 이용되었다. 진주좌는 일제강점기하에서 우리나라의 영화와 예술 을 공연하고 각종 사회운동을 펼쳤다는 점에서 단순한 장소 제공의 차원을 넘어서 진주의 역사가 진일보하는 계기로 작동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고 있다. 신극장운동과 진주 최초의 민간 영화관 진주극장 진주에서 신극장운동(新劇場運動)이 시작된 것은 1934년의 일이다. 당시 언론들은 진주시민들이 진주좌를 대신할만한 신극장 설립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제기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진주좌가 건물의 노후화로 3만 진주시민의 오락장으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물론 전염병의 산포지라는 불명예를 얻고 있는 상황에서 경찰 당국이 극장 신설을 가로막고 있다는 내용이었다.일제가 신극장을 불허하는 이유에는 진주의 규모에 비해 2개의 극장이 필요 없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지 만, 사실은 진주좌의 주주와 유력인사의 숨은 반대 때문이었다. 이에 진주의 신문기자구락부는 총회를 개최하고 신극장의 설치를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진주시민들의 신극장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일본 내지 인의 조합경영으로 운영되었던 진주좌의 경영권이 서종숙(徐宗淑) 씨에게 넘어간 것은 1936년 2월의 일 이다. 서종숙은 당시 5만 원의 공사비를 마련하여 봄 에 착공해 가을 준공을 목표로 진주 최초의 민간 영화관인 진주극장을 건립했다. 진주시가 경영한 영화관 시공관市公館진주좌, 진주극장에 이어 진주시가 영화업자와 함께 유료영화관으로 운영한 시공관(市公館)이 1958년 건립된다. 시공관은 진주시가 공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행정기관의 건물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진주시청이 전소한 상황에서 마땅한 행정장소가 없었던 진주시가 부족한 행정수요를 해소하고자 건립한 것이 시공관이다. 시공관은 1958년 진주시 본성동에 세워진 대규모 강당용 공관으로 각종 회의와 강연 등이 개최되었다. 시 공관은 전국 최초의 지방종합예술제인 개천예술제가 개최되면 연극과 음악, 무용 등 각종 공연이 펼쳐지면 서 한국전쟁 이후 진주 유일의 문화공연장으로 기능 했다.하지만 1960년대 들어서면서 행정건물의 복구와 함께 행정기관으로서의 기능이 미미해지면서 민간 영화업자와 함께 시공관을 극장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시공관이 거액의 탈세사건에 휘말리면서 경영자를 경질하는 등 자구책을 마련했지만 결국 시공관은 영 화관으로서의 기능을 잃고 간판을 내리고 만다. 이후 1969년 4월 25일 제일극장이라는 간판을 올리고 ‘미워도 다시 한번’이라는 영화를 상영함으로써 시공관 은 민간영화관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진주지역 최초의 극장인 진주좌와 진주극장, 시공관 에 이어 1990년대에 들어서는 동명극장, 동명시네마, 제일극장, 대한극장, 진주극장, 강남극장 등의 영화관이 있었다. 이 영화관들은 주로 단관극장이었기 때문에 스크린의 수도 10개에도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진주의 극장들은 인근의 사천, 함양, 산청 등지 주민들 의 문화향유권을 그나마 충족시켰던 문화공간으로 오랜 기간 동안 자리매김했으며,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러하다.

  • 2024-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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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신사 (晋州神社)

진주신사의 건립과 참배 강요일제강점기 당시 진주의 갖가지 기록을 정리한 『진주대관』에 따르면 진주 신사는 1917년 5월 14일 진주부 본정 499-7번지 진주성 경내 부속지 3,277평에 건립되었다.건립과정을 보면, 1915년 1월 진주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진주신사 봉사회(奉祀會)를 조직한 이후, 9월에 기공식을 가진 뒤 11월 10일 낙성식을 가졌다. 신사가 들어설 예정지 일대는 경남 최초의 경상우도 소학교인 경상남도 공립소학교(중안초등학교의 전 신)가 있었던 매월당 자리였다.신사 터를 마련한 일본인들은 이듬해 인 1916년 12월, 진주신사 창립을 청원했고, 1917년 5월 14일에 허가를 받은 뒤, 총공사비 6,000여 원으로 본전과 부속건물을 기공하고 10월에 준공하면서 진주신사의 수모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당시 경상남도 장관이었던 좌좌목등태랑(佐佐木藤太郞)은 진주신사의 안 정적인 재정운영을 위해 ‘진주신사숭경회’를 조직한 뒤 도내 일원에 걸쳐 회원을 모집하여 일금 일만이천 원을 모아 기본자산으로 삼기도 했다. 이어 1939년에는 진주읍 예산에 신사비를 계상해 진주신사의 안정적인 운영을 도모했다. 일제의 진주신사에 대한 참배 강요는 진주지역 학생과 시민, 기독교단체 등 각계각층을 겨냥했다. 특히 중일전쟁이 일어난 1937년부터는 출정군인의 보고제 와 무운장구 기원제, 진주 각급 학교와 종교단체의 신사참배와 궁성요배 등이 매일같이 개최됐다. 진주신사 역사 속으로 사라지다일제강점기 진주의 대표적인 황국신민화 교육장이었던 진주신사는 1945년 해방과 함께 지역에 소재했던 어떠한 일제의 잔재보다 가장 먼저 파괴되었다. 하지만 일부 부속건물은 진주공보관(진주문화원의 전신) 과 시립도서관(연암도서관의 전신)으로 사용되다가 1960년대에 완전히 철거되었다. 진주신사가 자취를 감춘 자리에는 1962년 12월 진주 방송중계소(현 KBS진주방송국)가 들어섰다가 1978년 신안동 현 청사로 이전되기 전까지 16년간 진주를 포함한 서부경남의 귀가 되었다. 이후 진주시민들의 적극적인 요청에 의해 문화재관리국은 1987년 12월 진주신사가 있던 자리에 진주성 임진대첩계사순의단(晋州城壬辰大捷癸巳殉義壇)을 건립했다. 임진년과 계사년에 순국한 영령들의 충혼을 위령하기 위해 이 단(壇)을 세운 것이다. 진주신사 자리에 세워진 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은 일본제국주의의 망령과 흔적을 지우고, 천년 진주의 역사를 지켜온 진주정신을 새로이 새기고 계승하는 역사적 상징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 진주신사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의 상징물이자, 일제강점기 진주 근대역사에 있어 수난의 역사를 상기시키는 구시대의 흔적이다. 더불어 일제의 진주신사 참배 강요에 대한 진주 백성들의 저항과 훼절 역시 진주의 역사이다. 다만 진주신사에 대한 참배를 40여 년 만에 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 참배로 바꾸어낸 진주정신과 진주역사를 반드시 기억했으면 한다.

  • 2024-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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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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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지 (大寺池)

기록으로 보는 대사지대사지는 『삼국유사』에 신라 혜공왕 2년(766) 강주(康州) 관서(진주성)의 대사(大寺)라는 절의 동쪽 땅이 점점 꺼져 연못이 생겼는데 그 연못의 크기가 세로 13척, 가로 17척이었다는 기록이 보인다.대사지는 진주성의 방어시설인 해자(垓子)로 진영지(鎭營池)·진영못이라는 별칭(別稱)을 갖고 있다. 해자는 일종의 방어시설로 성 주위 땅을 파서 만든 연못 이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을 방어하는데 일차적인 수성 역할을 했다.대사지의 옛 모습은 현존하는 진주성도(晋州城圖)와 진주지도(晋州地圖) 등을 통해 자세히 알 수 있다.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진주지도(1931년)에 의하면 대사지는 북쪽 성벽을 따라 3개의 연못으로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사지가 본격적으로 매립되기 시작한 1937년 이전의 대사지의 원형을 볼 수 있는 지도 이다.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소장하고 있는 해동지도 진주목 지도(조선, 1730년경)에는 대사지의 물길이 진주성의 동쪽을 돌아서 진주 남강과 합류하고 있다. 지도상의 진주성은 서쪽으로는 깎아지른 절벽, 북쪽과 동쪽의 대사지, 남쪽의 남강에 둘러싸인 고립된 하나의 섬이 되어 천혜의 요새로 자리매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대사지의 규모는 계명대학교 소장 19세기 진주성도(보물 제1600호)에서 알 수 있다. 현존하는 진주성도 가운데 대사지의 규모와 모습을 가장 자세하게 그리 고 있다. 계명대학교 소장 진주성도에 나타난 대사지의 규모는 지금의 진주성 북장대 아래에서부터 시작되어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진주성 외성의 신북문까지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응향정(凝香亭)과 연지(蓮池) 대사지는 아름다운 연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도심 속의 연못이었다. 진주성도에 그려진 대사지에는 만개한 연꽃과 그 사이를 한가로이 다니는 나룻배의 모습도 여러 척 보인다. 대사지 북쪽에 있던 진영(鎭營) 앞에는 나루터도 있었다. 뱃사공 없는 나룻배 한 척이 나루터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을 따라 진주성 공북문 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정자(亭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응향정(凝香亭)이다. ‘연꽃 향기가 정자에 어린다’는 뜻에서 이름한 듯하다. 일부 진주성도에는 대사지를 연지(蓮池)라 적고 있다. 응향정을 더욱 빛나게 하는 대사지의 연꽃은 ‘대사지연(大寺池蓮)’이라 하여, 옛 진주 12경 중의 하 나에 포함될 만큼 그 아름다움을 뽐냈다. 대사지 전체를 아름답게 수놓고 있는 연꽃은 군사시설의 하나인 해자로 기억하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도심의 휴식공 간이었다. 대사지 역사 속으로 사라지다진양성지도(晋陽城地圖, 1950년대)에 따르면 대사지의 위치는 인사동로터리와 진주성 북쪽의 중안초등학교 일부와 배영초등학교, 진주경찰서, 진주우체국을 거쳐 대안동 일원에 걸쳐 소재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경상문화재연구원이 2009년 진주교육지원청 부지의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길이 39.0m, 너비 1.5m, 높이 1.3m가량의 호안석축이 확인돼 대사지의 존재를 확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일제강점기 강제 매립이라는 일제의 만행으로 대사지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대사지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은 경남일보 등 각종 언론 보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경남일보는 1909년 11월 20일 자 지면을 통해 “진주성 밖 대사지는 원래 관 소유로 지난해 일본인 모씨가 못을 메우고 시장을 개설한다는 소문이 퍼진지 오래 되었는데, 3일 전에 과연 그 못을 메우는 공사를 시작 했다”라고 보도했다. 경남일보는 1910년 4월 12일 자에도 진주성곽의 흙과 돌을 부숴 못을 메울 경우, 대사지 인근 지역 농민들이 큰 피해를 입게 되어 군청과 도청에 억울함을 호소한다는 내용의 기사를 보도했다.경남일보 기사에 의하면 적어도 대사지는 1909년 이전에는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이후 일제는 1927년 진주에서 개최한 ‘시구개정(市區 改正) 기공식’과 1934년 6월 20일 총독부령 제18호로 공포된 조선시가지계획령의 시행을 계기로 대사지 매립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진주성 대사지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정치적 목적 달성의 희생양이 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일제는 대사지를 매립한 후 이 일대를 ‘영정’이라는 일본식 지명을 붙였다. 일부 일본인들은 못을 메우고 주택을 지어 사익을 챙기려 했고, 대사지를 메우는데 진주성곽의 돌과 흙을 사용했다는 점은 결코 용서하기 어렵다.한때 대사지 복원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천년진주의 역사복원은 반드시 필요하다. 진주성 복원과 함께 대사지 복원이 하루 빨리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 2024-03-07
  • 작성자

    진주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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