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07 10:45(목)

전체기사
구독신청

아카이브 오브 진주

아카이브 오브 진주(23건)
진주평론 로고

아카이브 오브 진주 진주교방문화의 멋과 맛을 찾아서 (3) : 진주교방문화의 역사와 문화·예술적 평가

교방문화를 선도한 기녀(妓女)는 신분제도에 있어 하층민에 속한 존재로 신분적 멸시와 냉대는 물론 일제강점기와 근대화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중 삼중의 억압과 천대에서 스스로 벗어나기 힘든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특히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이른바 기생문화라는 그릇된 인식의 확산에 따라 전통문화예술을 계승해 온 교방문화가 이 땅에서 소멸되다시피한 것은 사실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다. 더불어 교방문화의 역사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이 부족해 교방문화가 가진 문화·예술적 가치가 과소평가되어 온 것은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는 교방문화의 역사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부당한 제도와 부적절한 사회적 시선에 대한 새로운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그리고 교방문화가 간직하고 있는 문화·예술적 가치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함은 물론 교방문화의 전승과 보전이라는 시대적인 요청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교방(敎坊)의 역사와 기녀(妓女) 고려 시대에 기녀(妓女)들에게 춤과 음악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으로 중앙에 교방(敎坊)이 있었다. 교방은 당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인 것으로, 교육을 받은 기녀들은 궁중의례와 연회, 외교사절 접대, 연등회, 팔관회 등과 같은 국가행사에 동원됐다. 교방(敎坊)은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기녀들의 교육을 관장했고, 조선 초기에 설치된 악학도감과 장악서 등을 계승한 장악원(掌樂院)이 설립된다. 장악원은 성종 1년(1470) 이후, 고종 광무 1년(1897)의 관제 개혁으로 교방사(敎坊司)로 개칭될 때까지 427년 동안 활동한 국립 음악기관으로 자리했다. 조선 세조 때 장악원(掌樂院) 하부의 좌방(左坊)과 우방(右坊)을 합쳐 교방이라 불렀고, 조선 후기에는 지방에도 교방을 설치했다. 특히 지방에 설치된 교방의 위치는 읍성 내의 가장 중요한 위치한 지방 관아(官衙)에 딸려 있는 건물로 대개 관문 밖 객사(客舍) 주변에 위치해 있었다. 진주의 교방에 대한 기록은 진주의 인문지리지 『진양지(晋陽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관우(館宇)」 조에는 ‘중대청(中大廳) 동쪽과 서쪽에 낭청방(郞廳房)이 있고, 서쪽 낭청방 앞에 교방(敎坊)이 있었다(中大廳 東西各有郞廳房 西郞廳之前 有敎房)’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은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옛 진주MBC가 바로 진주객사가 있던 자리이며 진주교방이 있던 곳이다. 갑오개혁(1894년)으로 노비제도가 폐지됨과 동시에 장악원이 해체되었다. 이에 따라 궁중과 지방관아에 속한 기생안(妓生案)이 사라지면서 관기(官妓)들이 대량 해고되었다. 1905년에는 고려 시대 당악정재·향악정재를 연주했던 교방악의 전통을 이은 여악(女樂)마저 폐지되면서 1909년 관기제도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생계유지를 위한 자구책의 하나로 기생조합들이 생겨나게 된다. 최초의 기생조합은 1909년 4월 경찰 주도하에 만들어진 한성기생조합이며, 조선기녀의 전통과 역사가 반영된 다동기생조합과 광교기생조합도 잇달아 만들어진다. 이때부터 이른바 ‘기생문화’가 이 땅에 자리 잡게 된다. 당시 일제는 기생조합의 설립에 따른 기생활동을 통제하는 단속령을 내리게 된다. 당시 기생은 관청에 속한 관기로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던 일패 기생과 은근자(隱勤者)라 불린 이패 기생, 탑앙모리(搭仰謨利)라 해서 몸을 파는 유녀인 삼패 기생으로 엄격히 구분했다.하지만 일제는 이러한 엄격한 구분을 해체한뒤 예기(藝妓)와 창기로 구분하기 시작했고,시간이 흐르면서 속칭 ‘기생(妓生)’으로 불리게 되는 불행한 운명과 마주하게 된다. 사실상 이 시기를 기점으로 전통문화의 계승자였던 기녀(妓女)들이 기생(妓生)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가지게 된다.특히 당시 기생조합들은 1914년부터 일제의강요에 의해 ‘권번(券番)’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바뀌었다. 이처럼 권번제도가 도입되면서 예기와 창기의 구분이 없는 ‘가무와 몸을파는 기생’이라는 이미지로 정착되고 만다.이는 일제가 자국에서 들여온 저급한 유녀문화의 유입으로 인해, 예인(藝人)으로서 자존심을 지켜왔던 조선 기녀(妓女)들의 가치가평가절하됨은 물론 성적 이미지의 왜곡이 더욱 심해지고 노골화된 것이다.이러한 왜곡된 인식하에서도 당시 기생(妓生)의 신조와 원칙은 ‘노래를 팔지언정 몸은팔지 말라(買唱不賣淫)’였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더불어 일제강점기를 통틀어기생독립운동 등 애국(愛國)에 대한 열정은물론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기생들도 적지 않았다.진주권번은 1915년 당시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지만, 진주 기녀인 금향을 비롯한 노기(老妓)들이 다시 ‘진주기생조합’을 만들어 재정이 건실한 권번으로 발전되었다. 당시 진주 기생조합은 여성들에 의해 운영되다가, 기생조합이 권번으로 바뀌고 경영권이 남자들의 손에 넘어가면서 비리와 부조리가 만연하게 된다. 진주권번은 1939년 11월 2일 주식회사 ‘진주예기권번’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면서 전통적인 진주 기생의 풍류와 멋을 복원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게 된다. 진주권번은 현재 우리은행(옛 상업은행) 자리에있었다. 진주권번의 교육과 가무국립문화재연구소 중요무형문화재 기록 도서인 『진주검무』를 보면 당시 진주권번의 교육과정을 상세히 기록해 놓고 있다. 당시 진주권번은 기생 100명과 견습생 50~60명으로 학부를 설치했다. 오전과 오후 두 번에 걸쳐 진주검무와 한량무를 비롯한 가무를 시작으로 음곡, 산술, 일본어, 예법 등을 가르쳤다. 견습생들은 각 과목당 3개년 수업 연한으로 고전시조, 가야금, 유행가, 서화, 수신, 산술 등 학술 방면의 교육을 받았다. 합격자에 한해서는 기생 자격을 부여하고, 3개년의 의무 연한제를 제정해 진주 기생의 양성에 목적을 두었다. 진주권번에는 대개 12~13세에 입학했다. 이들과 같은 동기(童妓)들은 예의범절부터 배웠다. 12세 때는 시조, 우락, 계면, 편 등의 가곡을 수련했으며, 춘향가, 단가 등을 교육시켰다. 춤은 검무, 한량무, 신무(神舞), 춘향무 등을 익혔다. 이 가운데 진주검무는 진주권번에서 익히는 중요한 무용이었다. 오전에는 주로 창(唱)을, 오후에는 무용을 수련했다. 당시 진주권번의 무용 선생으로는 김창조(1865~1919)가 유명했다. 중외일보는 1929년 당시 진주권번의 교육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진주에서는 권번에 입적하여 기예를 익히는 과정의 기생을 ‘학생기생’이라 하였다. 학생기생은 3년간 월사금 2원씩을 내고 국악 전반에 관해 학습을 하게 된다. 또한 배우는 학과에 따라 자신이 부족한 부분은 따로 수업료를 내야 했다.’ 이처럼 진주권번은 기생의 양성을 책임지는 교육기관으로 조직을 탄탄히 갖추어 나갔다. 진주를 비롯한 서울, 평양, 대구, 부산 등 대도시의 권번들은 예능인 배출이라는 목표하에 다양한 내용과 철저한 방식으로 교육을 시킨 것이다. 이에 따라 진주권번에 소속된 기생들의 존재 의의는 예능(藝能)에 있으며, 기생 교육의 본질적 목표가 예도를 구현함에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진주교방문화의 문화·예술적 평가 진주교방문화가 가지는 문화·예술적 가치는 대단히 높다. 실제로 진주의 교방문화는 전국적으로 독보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다. 진주만큼 교방문화가 활성화되어 있는 지역이 드문 것이다. 진주권번에서 계승된 궁중무와 민속무는 현재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춤으로 남아있을 뿐 아니라, 시·도문화재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더불어 교방에서 진주권번으로 이어진 교방악가무는 우리 전통 악가무의 주역이자 중심이며, 오랜 시간을 이어오면서 길러지고 다듬어진 진주교방문화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점은 매우 주목할만하다. 진주교방문화가 가진 그 풍류와 멋을 진주만의 독특한 문화로 재발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주만의 독특한 문화로 전승되고 있는 교방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적 접근의 필요성은 물론 교방문화가 풀어야 할 숙제인 이른바 ‘기생문화’라는 부정적인 인식변화를 위한 체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우선 진주교방문화의 문화·예술적 가치에 대한 심포지엄을 비롯한 학문적 접근은 물론 교방문화의 인식개선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 개발 등의 노력이 지금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경남역사문화연구소 진주향당이 올해 문화재청 생생문화재 활용사업에 ‘교방문화 그 풍류와 멋’이라는 공모사업에 선정됐다.향후 본격적으로 교방문화에 대한 인식개선을 비롯한 토론회를 비롯해 지역민과 함께 호흡하는 교방문화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비록 오늘날 진주의 교방문화가 역사 속의 전설에 머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그 속에 담겨있는 정신사적 가치와 문화예술적인 가치를 전승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은 다행이다. 아무리 훌륭한 문화예술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계승· 보존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그 존재가치를 상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사단법인 진주민속예술보존회를 중심으로 각계각층의 노력이 더해져 진주교방문화가 가진 문화·예술사적 가치가 계승·발전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진주의 봄축제인 진주논개제를 통해 진주교방문화의 역사와 전통을 대내외에 꾸준히 알려나가고 있다는 점도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진주교방문화의 문화·예술적 가치 평가에 이견(異見)이 없다면, 이제는 지역사회가 나서서 진주교방문화를 어떻게 계승·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그것이 진주의 문화예술을 아끼고 사랑하는 우리의 진정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 2024-03-05
  • 작성자

    진주평론

  • 조회수

    28

진주평론 로고

아카이브 오브 진주 진주교방문화의 멋과 맛을 찾아서 (2) : 교방문화의 멋과 맛이 남긴 미래가치

진주교방문화단지 조성을 통해 타지역과 차별화된 문화도시 진주를 만들기 위해서는 역사성과 정체성에 기반을 둔 문화 콘텐츠의 개발이 중요하다. 실제로 지역의 문화자원 활용을 통한 문화 콘텐츠 개발은 기존의 역사문화자원을 토대로 하거나, 문화자원이 가지는 가치(價値)를 이식(移植)하는 방법이 대두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진주교방문화는 지역의 소중한 문화자원과 문화적 가치의 이식이라는 두 측면 모두 활용이 가능하다. 이는 진주교방문화를 통해 진주를 대표하는 새로운 문화 콘텐츠로의 개발은 물론 이를 통한 기존 관광산업과 연계한 관광 활성화와 먹거리 산업 확산을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충분한 미래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진주시는 물론 전국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도시재생사업(都市再生事業)에서 문화·예술·역사가 화두(話頭)가 되고 있는 시점에서 ‘진주교방문화의 멋과 맛이 남긴 미래가치’에 대해 주목하는 일은 충분히 가치가 있는 일이다. 문화와 예술이 도시를 재생하고, 창의성과 독창성을 지닌 문화 콘텐츠 개발을 통해 문화도시로 도약할 수 있는 근거를 진주교방문화에서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방문화의 풍류와 멋, 의암별제 교방문화의 풍류와 멋, 의암별제 진주교방문화의 풍류와 멋은 의기(義妓) 논개(論介)를 추모하는 성대한 대동제 성격의 의암별제(義巖別祭)와 진주권번에서 계승된 진주검무(晋州劍舞)를 비롯한 전통 가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가운데 진주교방문화를 대표하는 것은 단연 의암별제(義巖別祭)이다. 의암별제는 고종 5년인 1868년 당시 진주목사인 정현석(鄭顯奭)에 의해 창설되었다. 의암별제는 매년 음력 6월에 길일(吉日)을 택하여 기녀들만이 치른 대규모 의식으로, 악공을 제외한 제관(祭官) 등 모든 의식(儀式)을 여성들이 주관하는 점과 선비들의 음악인 정악(正樂)을 사용한다는 점을 특징으로 하는 행사이다. 첫 제례가 베풀어진 무진년(戊辰年)에는 300여 명의 기녀들이 모인 가운데 악가무(樂歌舞)가 어우러진 성대한 제례가 행해졌고, 무려 3일 동안 베풀어진 여흥잔치에는 수천 명의 구경 인파가 몰려 가히 장관이었다고 전해진다. 의암별제는 그 의식(儀式) 자체가 갖는 민족성 때문에 진주의 노소명기(老少名妓)와 시민들의 의식 발로로 일제강점기에도 한두 차례 봉행 되다가 결국 단절이라는 아픔을 겪지만, 진주민속예술보존회의 노력에 힘입어 1992년 진주성 촉석루에서 의암별제 복원과 봉행이 거행된다. 의암별제의 복원과 봉행은 논개의 민족적 충혼을 오늘에 되살리는 역사적인 가치를 지니는 일임과 동시에 나아가 민족의 정체성을 후손들에게 알리는 민족적인 쾌사(快事)라는 가치를 지닌다. 의암별제가 가지는 또 하나의 가치는 조선 시대 종묘(宗廟)에서 행해진 종묘대제(宗廟大祭)나 문묘(文廟)에서 제사를 지내는 석전대제(釋奠大祭)를 제외하고서 의암별제처럼 음악과 노래, 춤이 어우러진 제사의식을 치른 전례가 없다는 데 있다. 여기에서 진주교방문화가 가진 역사성과 정체성, 독창성을 계승하는 진주만의 문화 콘텐츠로 발전시켜 나가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진주의 봄축제인 2018년 진주논개제의 대표 프로그램인 의암별제가 세계축제협회 한국지부 주최로 열린 피너클 어워드 한국대회에서 대표 프로그램상을 수상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당시 의암별제는 의암별제 창설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1868년 그날’이라는 주제로 진주검무 이수자들과 진주지역 학생 등 100여 명이 참여했으며, 당상악공, 당하악공 등이 제례에 참여하는 종합가무제로 창설 그 당시 그대로 재현한 행사여서 더욱 의미가 있었다. 역사적 사실 재현을 통한 전통문화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의암별제의 대표 프로그램상 수상은 그 의미가 깊고, 진주시가 추진하고 있는 유네스코 공예·민속예술창의도시 지정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주목할만한 부분이다. 일각에서 대한민국 축제의 원조가 ‘의암별제’ 라는 주장이 제기된 적도 있다. 동의한다면 의암별제가 창제된 1868년을 기점으로 진주의 축제는 151년이라는 유구한 역사를 갖게 된다. 축제도시 진주를 표방하는 진주시가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더불어 의암별제가 지닌 가치의 전승을 위해 무형문화재 지정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의암별제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감안한다면 무형문화재 지정은 당연한 일이다. 의암별제의 무형문화재 지정은 진주교방문화의 활성화를 위한 핵심사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반드시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교방의 악가무가 지닌 전통의 향기 의암별제와 더불어 진주교방문화의 핵심은 진주검무를 비롯한 전통가무(傳統歌舞)에 있다. 진주권번에서 계승된 진주의 궁중무와 민속무는 현재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춤으로 남아있을 뿐 아니라 시·도문화재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대표적인 것이 바로 국가무형문화재 제12호인 진주검무(晋州劍舞)이며,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3호인 한량무(閑良舞),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12호인 진주포구락무(晋州抛毬樂舞),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21호인 진주교방굿거리춤 등이다.이처럼 진주권번이 계승한 전통춤들은 우리나라 무용사에 중요한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동안 요리집 여흥거리로만인식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는 기녀들의 춤을 악(樂)의 총체적 개념 속에서 보지 못하고, 여기(餘技)에 부속된 것으로만 인식되었던 탓이다.진주교방에서 진주권번으로 이어진 기녀들의 춤에 대한 인식 여부를 떠나 당대에는 엄연히 우리 춤의 주역이었고, 우리 춤의 중심이었다는 점은 매우 소중한 일이다. 기녀들의 춤 속에는 수백, 수천 년을 이어오면서 길러지고 다듬어진 우리 춤의 정신이 담겨있는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사단법인 진주민속예술보존회를 중심으로 진주교방문화 혹은 진주권번문화의 예술문화사적인 가치가 계승·발전되고 있다는 점이다. 교방문화의 맛, 진주냉면과 교방음식 진주교방문화가 가진 문화 콘텐츠 가운데 교방음식(敎坊飮食)은 조선 중기의 음식문화의 꽃을 피웠다고 평가받고 있다. 따라서 교방음식의 재발견과 창조적 계승 노력은 진주교방문화 활성화에 필수적인 과제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교방음식은 진주교방청의 연회음식에서 비롯된 한정식(韓定食)을 지칭한다. 조선 시대에는 중앙에서 관리가 내려오면 그들을 접대하기 위한 연회가 베풀어졌고, 이 자리에서 기생들의 가무와 술이 곁들여진 진주교방청의 연회음식이 곧 교방음식으로 발전한 것이다. 예로부터 진주는 서부경남의 교통 중심지로 지리산의 청정 농산물과 남해바다의 신선한 수산물을 가까이 할 수 있어서 산해진미의 음식문화가 다양하게 발달되어 왔다. 이러한 지정학적 요인으로 말미암아 진주교방음식은 타지역들과는 다른 독특한 형태로 발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교방이 폐쇄되면서 교방문화와 더불어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고, 교방음식과 상차림은 일부 한정식 식당에서 그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교방음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진주냉면이다. 진주의 기녀들이 새참으로 진주냉면을 먹었다는 전술(傳述)도 있지만, 진주의 권력가나 재력가들이 야참음식으로 즐겨 먹었는데, 조리하는 방식도 독특해 진주를 대표하는 향토음식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고려 시대부터 메밀을 이용한 메밀국수를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 시대에 이르면 ‘냉면 중에 제일로 여기는 것은 평양냉면과 진주냉면이다’라고 할 만큼 평양과 진주지방에서 냉면이라는 명칭으로 정착, 발전하였다. 디지털진주문화대전에 따르면 진주냉면은 1960년대 중반에 진주지역에서 사라졌다가, 1999년 진주냉면 원형을 중심으로 식생활문화연구가에 의해 재현되었다. 1960년대 중반까지 옥봉동을 중심으로 수정식당, 평화식당, 은하식당 등 7~8개 업소가 성업 중이었으며, 옛날에는 이러한 식당들이 하인을 두고 직접 배달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진주냉면이 그 역사와 전통을 이어받아 진주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점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북한의 평양냉면과 같은 명성과 유명세를 누리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가능하다면 진주교방문화단지 조성을 통한 진주냉면의 전국적인 홍보와 전략적인 발전방안 마련이 필요한 시점이다. 의암별제를 비롯한 진주의 전통가무의 계승· 발전은 기존의 관광산업과 연계한 관광 활성화에 힘을 보탤 수 있다. 그리고 진주교방청에서 유래한 교방음식과 진주냉면의 문화 콘텐츠화는 지역의 먹거리 산업과 연계를 통해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진주교방문화의 멋과 맛이 남긴 미래가치이다. 정작 문제는 진주교방문화와 교방음식을 진주만의 새로운 문화 콘텐츠로 만들기 위한 노력의 부재에 있다.이제 진주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교방문화가 갖는 미래가치를 인식하고, 진주문화의새로운 한 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노력들이 이어져야 한다. 더불어 진주교방문화의풍류와 멋이 지닌 진주만의 전통문화의 홍보와 전승은 물론 진주의 새로운 문화 콘텐츠로 계승할 수 있는 각계의 노력이 더해져야한다. 진주교방문화가 갖고 있는 풍류와 멋은 진주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 2024-03-05
  • 작성자

    진주평론

  • 조회수

    38

진주평론 로고

아카이브 오브 진주 진주교방문화의 멋과 맛을 찾아서 (1) : '진주교방문화단지' 조성과 문화도시 도약

진주의 교방문화(敎坊文化)에 대한 정신·예술사적 가치 재평가가 필요한 시점이다. 진주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간직한 교방문화는 향후 진주를 대표할 새로운 문화 콘텐츠이자, 진주가 진정한 의미의 문화도시(文化都市)로 도약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진주의 문화자산이기 때문이다. 진주의 교방문화는 임진왜란 당시 순국한 의기(義妓) 논개(論介)와 매국노를 꾸짖은 산홍(山紅)의 절의(節義), 그리고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분연히 일어선 기생독립운동(妓生獨立運動) 등과 같은 진주의 정신문화사(精神文化史)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진주교방문화에서 발원된 진주정신(晋州精神)의 줄기에 대한 확인은 물론 민족의 자주성을 대내·외에 천명한 일련의 역사는 결코 가볍게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 더불어 151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교방문화의 진수인 의암별제(義巖別祭)와 진주교방문화에서 계승된 진주의 전통가무가 그 역사성과 예술성을 인정받아 국가무형문화재와 시·도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진주검무(晋州劍舞), 한량무(閑良舞), 진주포구락무(晋州抛毬樂舞), 진주교방굿거리춤 등이 지금도 전승·보존되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진주교방문화가 갖고 있는 예술문화사 측면도 마땅히 고려되어야 한다.안타깝게도 진주교방문화는 그동안 사회 전반에 걸친 이른바 ‘기생문화’ ‘바(BAR) 문화’라는 부정적인 인식의 지배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진주의 교방문화가 갖고 있는 정신·예술사적인 가치에 대한 재평가 노력은 물론 ‘진주교방문화단지’ 조성 등과 같은 실질적인 전승과 보전 노력을 통해 진주가 진정한 문화·예술의 도시임을 증명해야 한다는 시대적인 요청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진주교방문화가 지닌 가치의 발견 진주교방문화의 멋과 맛을 오롯이 담아낸 진주교방문화단지 조성이 갖는 의미는 진주가 문화도시임을 대내외에 표방하는 것은 물론 새로운 킬러 콘텐츠로서 지역의 관광산업과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큰 몫을 담당해 낼 수 있다는 점이다. 의기 논개, 산홍, 기생독립운동 등이 갖는 교방문화의 정신사적 가치와 의암별제, 전통가무, 교방음식 등 교방문화가 지닌 문화예술사적 가치를 활용한다면 문화·예술·관광의 도시 진주를 대변하는 새로운 킬러 콘텐츠로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진주교방문화를 중심축으로 전국의 교방문화와 연계하는 ‘전국교방문화협의체(全國敎坊文化協議體)’ 구성 등을 통해 교방문화 관광벨트 구축은 물론 교방음식을 활용한 먹거리 산업의 활성화를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도 기대할 수 있다. 진주를 중심으로 하는 전국교방문화협의체 구성은 진주가 교방문화의 허브로 자리잡음과 동시에 진주교방문화의 역사성과 우수성을 알리는 좋은 계기가 됨은 물론이다. 교방문화를 매개로 한 진주-평양 간 남북문화교류 가능성에도 무게를 두고 접근할 필요가 있다. 진주와 평양의 교방문화는 예로부터 ‘남진주-북평양’으로 불릴 만큼 대표적이며, 두 도시가 갖는 역사·문화적 연관성도 상당히 밀접하다. 진주냉면과 평양냉면으로 대별되는 교방음식은 물론 전통가무인 진주검무와 평양검무, 진주 의기 논개와 평양 계월향, 진주성 촉석루와 평양 부벽루, 진주 남강과 평양 대동강,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전투와 평양성전투, 진주의 기생독립운동과 평양의 기생독립운동이 있다. 진주-평양 간 교방문화를 통한 남북문화교류사업의 시도를 위해 민간단체 주도의 ‘교방문화발전위원회(敎坊文化發展委員會)’ 운영도 고려해야 한다. 이처럼 진주의 교방문화가 가지는 미래 가치는 무궁무진하다. 다만 지금 필요한 것은 이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장기플랜 수립과 지역 차원의 적극적인 추진의지이다. 진주교방문화의 진수를 담은 ‘진주교방문화단지(晋州敎坊文化團地)’ 조성이 그 대안이 될 수 있다. 진주교방문화의 진수를 담아내자 진주교방문화단지는 진주가 문화도시로의 새로운 도약을 알리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전국적으로 문화도시임을 표방하고 있는 파주 헤이리 아트벨리, 경주 역사문화중심도시, 부산 영상문화도시, 부천 만화애니메이션 산업단지 등과 같이 진주교방문화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역사성과 예술성, 그리고 미래가치를 담아내야 한다. 우선 진주교방문화단지에는 교방문화의 상징이자, 역사성과 정체성을 대변하는 진주교방청(晋州敎坊廳)이 건립되어야 한다. 진주교방청은 진주교방문화의 상징물이 될 것이며, 향후 전국교방문화의 메카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관광산업 활성화 차원에서 진주교방의 역사를 한눈에 맛볼 수 있는 진주교방역사관(晋州敎坊歷史館)을 건립해야 한다. 역사관은 진주교방문화가 가진 역사와 문화예술의 우수성을 대내외에 알리는 창구이자, 진주교방문화를 중심으로 한 문화도시로의 도약을 천명하는 공간이 될 것이다.더불어 전국의 관광객들이 진주검무 등 진주교방의 전통가무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진주교방체험관(晋州敎坊體驗館), 진주냉면을 비롯한 교방음식을 맛볼 수 있는 교방음식관(敎坊飮食館), 한옥 숙박시설인 교방촌(敎坊村) 등을 통해 진주교방의 멋과 맛을 음미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나가야 할 것이다. 교방문화의 역사와 문화·예술적 평가 이제 진주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교방문화의 흔적을 찾아내 진주문화의 새로운 한 축으로 자리매김시킬 수 있는 실천적 노력들이 이어져야 한다. 우선 진주교방문화의 역사와 문화예술성에 대한 학술 연구와 이론 정립은 물론 교방문화의 역사와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의암별제와 전통가무의 전국적인 홍보와 전승, 진주냉면을 비롯한 교방음식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통해 진주만의 새로운 킬러 콘텐츠를 만들어 내야 한다. 단언컨대, 진주교방문화가 그 주역이 될 것이며, ‘진주교방문화단지’가 그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2024-03-05
  • 작성자

    진주평론

  • 조회수

    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