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of 진주 (STORY OF 진주2) 5. TV속 진주 -영화와 드라마에서 진주를 발견하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진주를 발견하다바보상자 속 진주 영화(MOVIE)와 드라마(DRAMA)는 각박한 현대 생활의 탈출구이다. 명절에 친구, 연인들과 찾던 영화관의 추억과 안방극장의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은 드라마는 시간이 지나도 그 영향력을 잃지 않고 있다. 386세대라면 기억하실 것이다. 추석과 명절이면 만날 수 있었던 ‘성룡’과 한때 홍콩 느와르를 주름잡았던 ‘주윤발’은 ‘홍콩영화 폐인’이라는 신조어를 만들기도 했다. 물론 한참 오래전의 일이다.OTT(Over The Top)가 주름잡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플랫폼으로 사용자가 원할 때 방송을 볼 수 있는 일종의 VOD 서비스이다. 물론 영화나 드라마가 주는 추억을 제공하는 서비스는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자유의지에 따라 골라볼 수 있는 새로운 플랫폼이다. 대표적으로 넷플릭스, 디즈니 플러스, 티빙, 애플 TV+, 웨이브 등이 뜨고 있다. 안방극장을 독차지했던 아침드라마와 지상파방송이 타격을 입고 있다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그럼에도 영화와 드라마가 가진 파워는 여전하다. 여행코스를 정할 때 ‘00영화 촬영지’ 또는 ‘00드라마 촬영지’ 등의 인기 명소를 최우선으로 찾아보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격언에 어울리지 않게 ‘맛집 찾기’은 어느새 후 순위로 밀려난 지 오래이다. 이처럼 방송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명소(名所)’로 등극하는 지역이 많아지고 있다. 영화와 드라마 등의 미디어 촬영 장소로 노출된 이후, 지역의 인지도와 방문자 수가 급증하는 사례가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천재적인 두뇌와 자폐 스펙트럼을 동시에 가진 신입 변호사 우영우의 대형 로펌 생존기를 다룬 ENA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우영우 팽나무 에피소드’가 촬영된 창원 동부마을은 30가구, 60여 명이 농사를 지으며 사는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 드라마가 방영된 2022년 하루 평균 1천여 명이 방문하는 유명세를 겪었다. 그리고 ‘우영우 팽나무 가는 길’ 팻말과 우영우를 상징하는 고래벽화가 생기면서 이른바 ‘핫플’로 등극했다. 드라마와 영화가 가진 영향력 덕분에 방송 프로그램 홍보를 위한 예산을 따로 세우는 지방자치단체들이 늘어날 정도였다. ‘드라마와 영화 속에서 자신이 사는 고장을 발견하는 재미’와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일깨우는 동기부여의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역사 도시 진주는 천년의 역사와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그래서 드라마와 영화 촬영지로도 사랑받고 있다. 영화(映畫) 논개(論介) 임진왜란 당시 왜장을 껴안고 의암에서 순국한 의기 논개(義妓 論介)를 다룬 영화는 2편이다. 윤봉춘(尹逢春) 감독의 영화 「論介」는 1956년 개봉했다. 주연은 김삼화(金三和)와 최성호(崔星湖)이다. 당시 영화 포스터를 보면 ‘韓國 最高의 大스펙타클 超巨作’이라는 선전 문구가 눈에 띈다. 그리고 ‘矗石樓의 悲話 倭將을 끼여 않고 죽은 論介의 설음은?’이라는 소개 문구도 보인다. 한국영화주식회사(韓國映畵株式會社)가 제작한 이 영화의 원작(原作)은 유치진(柳致眞, 1905~1974)이다. 출연자로는 성소민, 이해룡, 김승호, 윤상희, 김미선, 고춘반, 조항, 임운학, 김칠성이다. 한국영상자료원(KOFA)의 한국 영화 데이터 베이스에서 열람할 수 있다. 이형표 감독의 영화 「논개」는 1972년 개봉했다. 주연은 김지미, 신성일, 최불암이다. 주연 배우로는 김지미, 신성일, 최불암을 비롯해 김성원, 오경아, 주증녀, 박암, 신일룡, 박옥초, 최삼, 문태선, 박혜숙, 손전, 이예성, 조덕성, 정미경, 이연숙, 연운경, 김월성, 한명환, 노사강, 김경오, 추봉, 박일, 장인한, 김승남, 임동훈, 박달, 박양미, 전숙, 최석, 박부양, 이운규, 이영우, 박상진, 하옥진, 최용해 등이다. 영화 「살인의 추억」과 죽봉터널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은 한국 영화사에 큰 족적을 남긴 작품 중의 하나이다. 2003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경기도 화성 연쇄 부녀자 살인 사건을 다루었다. 뛰어난 연출과 배우들의 열연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은 이 영화는 개봉 이후 많은 찬사를 받으며 한국 영화의 새로운 기준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았다. “밥은 먹고 다니냐?”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어둠이 잔뜩 내려앉은 터널로 걸어가는 용의자 박현규(박해일 분)에게 박두만(송강호 분)이 던진 대사이지만 영화 전반을 이끌어 가는 핵심적인 질문이기도 했다. 미제사건의 비극과 경찰 조직의 한계를 한꺼번에 보여주는 대목이다.봉준호 감독은 어둠으로 가득한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아 ‘사건이 암흑 터널처럼 해결하기 쉽지 않다는 느낌’을 줄 수 있어 촬영지로 선택했다고 한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촬영된 곳은 바로 진주시 정촌면 화개길 194번지 121에 있는 ‘죽봉터널’이다. 죽봉터널 앞에는 ‘위험장소(투시불량)’이라는 안내판만 덩그러니 붙어 있다. 한국 영화사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영화 「살인의 추억」 촬영지인 진주 죽봉터널에 대한 안내문은 찾아보기 어렵다. 아쉬운 대목이다. 영화 「진주의 진주」와 삼각지 다방 김록경 감독의 독립영화 「진주의 진주」는 철거 예정인 삼각지 다방이라는 문화공간을 지키고 싶은 예술가와 돈을 벌어야 하는 다방 주인과의 갈등을 다룬 영화이다. 주인공의 이름 역시 진주이다. 진주(晋州)라는 공간에 대한 애정이 묻어 있는 영화로 주연에는 이지현, 문선용, 임호준, 이정은 등의 배우가 출연했다.「진주의 진주」의 촬영지는 진주(晋州)이다. 영화에는 오죽광장(진주시 봉곡동)과 진주역(晋州驛) 등 다양한 진주의 명소가 등장한다. 그중에 진주 ‘삼각지 다방’은 진주 지역 문화예술인들이 60여 년간 즐겨 찾는 만남의 장이자, 사랑방으로 이용되었던 실제 공간이다. 김록경감독은 ‘레트로가 유행하지만 정작 오래된 공간은 사라지고 있는 현실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영화’라고 밝혔다. 2024년 개봉했다. TVN 드라마 「철인왕후」와 지신정(止愼亭) ‘조선 중전 영혼 가출 스캔들’이라는 부제가 붙은 「철인왕후」는 불의의 사고로 대한민국 대표 허세남 영혼이 깃들어 ‘저 세상 텐션’을 갖게 된 중전 김소용(신혜선 분)과 두 얼굴의 임금인 철종(김정현 분) 사이에서 벌어지는 영혼 가출 스캔들을 다룬 드라마이다.「철인왕후」에서 철종의 별장으로 등장한 곳이 바로 ‘지신정(止愼亭)’이다. 드라마에서 철종이 중전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 앞으로 지신정(止愼亭)이라는 현판이 보인다. 지신정(止愼亭)은 허준(許駿, 1844~1932)의 호(號)이자, 만년에 기거한 곳이다. 허준 선생은 수많은 재산을 자식들에게 물려 주지 않고 친지들과 빈민들에게 나누었다. 그중 일부를 출연해 의연기구인 ‘허씨의장’을 만들었다. 『진양속지 증보』에 기록된 지신정(止愼亭)과 관련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주의 동쪽 지수면 승산촌의 목양산(木陽山) 아래 신독곡(愼獨谷)에 있는데, 승선(承宣) 허준(許駿)이 짓고 연재(淵齋) 송병준(宋秉濬)이 명명한 집이다.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가 기문을 지었다.’철인왕후에서는 지신정과 함께 진주 비단이 소재로 등장하기도 했다. 철인왕후는 20부작으로 2020년 12월 12일부터 2021년 12월 14일까지 방송되었다. SBS 드라마 「더 킹 : 영원의 군주」와 문산성당(文山聖堂) 「더 킹 : 영원의 군주」는 악마에 맞서 차원의 문(門)을 닫으려는 이과(理科)형 대한제국 황제 이곤(이민호)가 주인공이다. 그리고 문과(文科)형 대한민국 형사 정태이 두 세계를 넘나드는 공조를 그린 로맨스 드라마이다. 이곤 역에 이민호, 정태을 역에 김고은이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더 킹 : 영원의 군주」에서 주인공인 이곤이 정태을에게 부모님의 러브스토리를 들려 주며 함께 거니는 배경으로 나온 공간이 바로 문산성당(文山聖堂)이다. 문산성당은 진주시 문산읍 소문리에 있는 성당이다. 1899년 진주 최초의 성당으로 진주 본당 이외에 24개의 공소 중에 소촌 공소가 1905년 소촌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뒤에 지금의 문산성당이 되었다.문산성당의 교회당과 강당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있어 지방에서 활동한 외국인 선교사들의 실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건물이다. 특히, 현재 강당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은 한옥 성당 건물로서, 한국 성당 건축 양식의 변화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더 킹 : 영원의 군주는 16부작으로 2020년 4월 17일~6월 12일까지 방영되었다. TVN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와 촉석루(矗石樓)·진양호(晋陽湖) 「60일 지정생존자」는 미국 드라마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대통령을 잃은 나라에서 유일하게 살아 남은 한 사람의 60일간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이다. 갑작스러운 국회의사당 폭탄 테러로 대통령을 잃은 대한민국에서 환경부 장관 박무진이 60일간의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지정되면서 테러의 배후를 찾아내고 가족과 나라를 지키며 성장하는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이다. 박무진 역의 지진희를 비롯해 허준호, 배종옥, 이준혁, 강한나 등의 스타들이 출연했다.「60일 지정생존자」에서 박무진 대통령 권한대행이 자신을 통수권자로 인정하지 않고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정보를 접수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관문(최재성 역) 합참의장을 찾아간다. 박무진 대통령 권한대행과 이관문 합참의장이 만난 곳이 바로 촉석루(矗石樓)이다. 그리고 이관문 합참의장에게서 쿠데타를 막겠다는 답변을 듣지 못한 박무진 권한대행이 “잠깐 쉬었다 가죠”라는 말과 함께 석양이 지는 진양호(晋陽湖)를 바라보며 회상에 잠기는 모습이 방영되었다.진주의 촉석루(矗石樓)는 진주성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며 진양호(晋陽湖)는 수려한 자연경관을 자랑하며, 진주와 서부경남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진주 8경의 하나인 진양호 노을과 석양으로 유명하다.「60일 지정생존자」는 16부작으로 2019년 7월 1일~8월 20일까지 방영되었다. KBS2 드라마 「징크스의 연인」과 논개시장(論介市場) 드라마 「징크스의 연인」은 세상 모든 것이 불행한 자신의 삶을 숙명으로 여기고 순응하며 사는 한 인간 남자와 저주를 풀기 위해 미지의 세상 밖으로 뛰어든 여신이 잔혹한 운명을 뛰어넘으며 펼치는 판타지 로맨스 드라마이다. 서현, 나인우, 전광렬, 윤지혜, 기도훈 등이 출연했다.진주 올로케이션이었던 「징크스의 연인」은 진주 논개시장을 주 무대로 남가람공원, 국립진주박물관 등의 관광명소와 진주시 곳곳을 카메라에 담았다. 더불어 진주 출신 배우와 아역 보조 출연자의 출연으로 연기지망생들에게 기회의 장이 되기도 했다. 진주 논개시장은 중앙시장 중앙길의 커다란 시계를 기준으로 왼쪽에 형성된 시장이다.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올뺨 야시장은 매주 2천명의 관광객이 방문할 만큼 문전성시를 이룬다. 진주논개제와 진주문화유산 야행 등의 행사와 연계해 진주의 새로운 명소가 되고 있다.남가람공원은 남강 바로 옆 대나무 숲길에 조성되어 있다. 울창한 대나무 숲이 장관이며, 조명의 안내를 따라 남가람 별빛 길을 걸으면 대나무 숲의 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도심속 휴식공간으로 최적의 공간이다.드라마 「징크스의 연인」은 16부작으로 2022년 6월 15일~8월 4일까지 방영되었다. TVN 드라마 「위대한 쇼」와 비단길 청년몰·목공예전수관·진주냉면 「위대한 쇼」는 전 국회의원 위대한이 국회 재입성을 위해 문제투성이 사남매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이다. 위대한 역에 송승헌, 이선빈, 임주환 등이 출연했다. 「위대한 쇼」의 진주 촬영지는 진주중앙시장 비단길 청년몰에서 시작된다. 비단길 청년몰은 열정과 도전정신을 가진 청년 상인들과 전통시장 활성화를 위해 2018년 12월 개장했다. 다음 촬영지는 진주목공예전수관이다. 진주 목공예의 우수성을 널리 알림과 동시에 일상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제품을 직접 만들고 체험하는 공간이자, 진주 목공예를 계승·발전시켜 나가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진주는 예로부터 소목장 등 전통 목공예가 다양한 형태로 전승되고 있는 곳이다. 상, 장, 농 등의 가구와 궁궐에서 사용하는 함과 같은 가구류를 궁궐에 진상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3대 냉면의 하나인 진주냉면(晋州冷麪)도 소개되었다. 「위대한 쇼」는 16부작으로 2019년 8월 26일~10월 15일까지 방영되었다. MBC드라마 「연인」과 진주역차량정비고 드라마 「연인」은 병자호란을 겪으며 엇갈리는 연인들의 사랑과 백성들의 생명력을 다룬 휴먼역사 멜로 드라마이다. 주인공인 이장현 역의 남궁민과 유길채 역의 안은진이 출연했다.백상예술대상 드라마 작품상을 수상한 「연인」은 극중에서 한복전이 열린다. 이 한복전이 개최된 공간이 바로 진주의 ‘진주역 차량정비고’이다. 진주역차량정비고는 일제강점기인 1925년 진주역과 함께 건립되었다. 원래 명칭은 ‘진주역 기관구’로 2005년 국가등록문화재 제202호로 지정되었다. 진주역차량정비고에는 한국전쟁 당시 총탄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산 역사의 현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현재는 진주철도문화공원의 핵심 공간으로 많은 행사가 개최되고 있다.드라마 「연인」은 21부작으로 2023년 8월 4일~11월 18일까지 방영되었다. 진주는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 이외에도 각종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전국으로 소개되었다. 대표적인 프로그램으로 「김영철의 동네 한바퀴」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 「박종인의 땅의 역사」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 등이 있다. KBS1 교양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 한바퀴」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는 속도의 시대에 잃어버리고 살았던 동네의 숨은 매력을 재발견하면서 팍팍한 삶에 따뜻한 위안을 전하는 도시 기행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다. 김영철의 동네 한바퀴에 진주가 소개된 것은 2020년. ‘보배롭다, 그 이름 –경남 진주’라는 프로그램명으로 방송되었다.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는 진주의 여러 곳을 소개했다. 진주상공회의소의 전신인 ‘상무사(商務社)’와 진주를 대표하는 음식인 ‘진주육회비빔밥’, 진주 중앙시장의 한복공방, ‘촉석루와 의기논개’, 은장도 공방 ‘쇠모루’와 사라지지 않아 아름다운 진양호와 수몰마을의 마지막 주민과의 만남도 가졌다.상무사는 1895년(고종 3) 보부상 등 과거의 상업조직을 정비해 새로 설치한 상업기관으로 진주상공회의소의 전신이다. 상무사 건물은 건축물로는 충청남도 예덕상무사와 더불어 조선시대 관아 건축의 전형적인 평면구성을 볼 수 있는 드문 사례이다. 현판을 통해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를 전후한 보부상의 활동상황과 진주지역의 경제활동상황을 볼 수 있어 경제사적인 의미가 크다. 현재 진주시 옥봉길15번길 5에 있다. 진주 실크의 명성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바로 진주 중앙시장의 한복 공방들이다. 진주 비단으로 한복을 지어 입는 사람들은 모두 중앙시장 한복 공방을 찾았다. 지금도 한복 공방은 진주 비단의 역사를 이어가려 애쓰는 공간으로 남아 있다. TV조선 교양프로그램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은 식객 허영만이 소박한 동네 밥상에서 진정한 맛의 의미와 가치를 찾는 교양 프로그램이다.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에 소개된 진주음식은 진주비빔밥의 대명사인 ‘제일식당’, 못생겼지만 별미인 아귀 수육과 복국 맛집인 ‘하동집’, 흑돼지 갈비 수육으로 유명한 ‘산청흑돼지’, 별미 거지탕 ‘평양빈대떡’, 국밥의 일인자 ‘송가네 국밥’ 등이다. TV조선 교양프로그램 「박종인의 땅의 역사」 「박종인의 땅의 역사」는 날 것 그대로의 역사를 기반으로 땅에 남아 있는 역사 흔적을 파헤쳐 보고 의심과 뒤집어보기를 통해 우리가 몰랐던 우리의 역사를 앞뒤 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알아보는 프로그램이다.박종인의 땅의 역사에서는 ‘진주, 그 사람들이 사는 법(64회)’ ‘지워진 이름, 잊힌 기억 민초들의 땅, 진주(12회)’이 방송되었다. ‘진주, 그 사람들이 사는 법(64회)’에서는 남강과 의기 논개를 비롯한 진주역사를 써 내려간 진주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지워진 이름, 잊힌 기억 민초들의 땅, 진주’에서는 ‘남강이 피로 물들던 날, 선조는 도주 중이었다, 태평회맹도의 비밀과 진주성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KBS 교양프로그램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는 인생 후반전을 준비하는 싱글 여배우와 여가수들이 같이 모여 살면서 인생의 새로운 맛을 찾아가는 교양 프로그램이다.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 15화에 ‘가수 혜은이의 61년 전 추억의 장소’편이 방송되었다. 혜은이는 61년 전 추억이 담긴 진주의 ‘진주성 촉석루’와 ‘의암’을 찾아서 자신의 사연을 소개했다. 영화나 드라마가 화제가 되면 ‘촬영지’는 SNS의 핫 게시물로 떠오른다. 저마다 촬영지를 방문하고 인증 샷을 올리면 이른바 명소로서의 인지도 역시 증가한다. 진주는 영화와 드라마,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진주의 가치’를 알리고 있다. 영화나 드라마, 방송프로그램 속에 소개된 진주의 명소를 알리기 위한 노력도 필요해 보인다.
- 2025-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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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황경규/진주향당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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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193

Story of 진주 (STORY OF 진주2) 4. 진주식탁 -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진주 음식 이야기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진주 음식 이야기 진주 식탁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진주의 식탁’으로 초대한다. 진주의 식탁은 오래전부터 내륙과 해양의 산해진미를 풍성하게 차려졌다. 전통의 맛은 전통의 맛대로, 현대의 맛은 현대의 맛대로 진주 고유의 상차림은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다소 생소한 교방음식(敎坊飮食)을 필두로 한 진주 전통의 풍류(風流) 밥상, 맛의 시간여행을 만끽하게 하는 추억의 간식인 수복빵집, 최근에 한국의 찐 매운 맛을 보여준 진주 고추로 만든 버거(BURGER)에 이르기까지 진주 음식은 시대와 세대를 가리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세미진(世味晋),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진주 음식이야기’는 교방문화(敎坊文化)의 본산인 진주 교방음식(敎坊飮食)에서 시작한다. 한상 차림의 품격, 교방음식(敎坊飮食) ‘진주의 교방음식’은 영남의 교방 연향 음식에서 유래한다. 교방연향은 술 잔을 올리는 절차와 격식에 따라 음식과 가무의 내용이 달라졌다. 그리고 연향에 제공된 음식은 궁중 연향의 음식과 지방의 향토성을 반영한 재료를 이용했다. 일반적으로 교방 연향 음식은 의례의 시간 차에 의해 차례로 제공되었다. 이로 인해 교방음식은 의례의 절차에 따라 온도와 조리법을 선택했고, 기본적으로 술과 어울리는 음식이 제공되었다. 경상도 관찰사인 이민구(李敏求)가 1624년 진주 촉석루에서 연회를 개최했다. 이 연회에 참석한 김경조(金慶祖, 1583~1645)가 화공을 불러 그림을 그리도록 했는데 이것이 「촉석루연회도(矗石樓宴會圖)」이다.촉석루연회도에서 음식과 교방의 가무를 갖춘 교방 연향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관찰사의 앞에 놓인 상차림은 둥근 원반에 개인 상차림이 제공되었다. 나머지 15명에게 제공된 음식도 개인 독상인데, 관찰사보다는 작은 상이다. 작은 독상에 2~3가지의 음식이 제공된 것은 몇 차례의 코스 요리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촉석루연회도에 나타난 음식은 상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지금처럼 여러 사람이 둘러 앉아 먹을 수 있는 다인상(多人床) 차림이 아니라 일인상(一人床) 차림이라는 점과 코스 요리 형식으로 제공되었다는 점은 알 수 있다. 이것이 교방 연향 음식의 특징이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1780년 진주를 방문한다. 당시 진주목사 홍화보(洪和輔)는 사위인 정약용을 위해 촉석루에서 연회를 준비한다.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에 정약용을 위한 진주 관아의 환영 의례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내일 촉석루에서 잔치를 벌일 것이니, 아무는 음식을 맡으라. 술이 향기롭지 않고 회(膾)가 풍성하지 않으면 너에게 죄가 있다. 아무는 관악기(管樂器)와 현악기(絃樂器)를 맡으라. 만일 음악 소리가 조용하고 화평하지 않고 슬프고 낮고 급박한 것이 있으면 너에게 죄가 있다. 아무는 광대와 기생 등을 맡으라. 모든 포구락(抛毬樂)·처용무(處容舞) 등속이 음률에 맞지 않은 것이 있으면 너에게 죄가 있다. 그 이튿날 아침에 절도사가 대장기(大將旗)와 대장고(大將鼓)를 앞세우고 촉석루에 올랐다. 기록에 의하면 다산 정약용을 위한 연회 오른 음식은 영남지방의 연회에 올랐던 단골 음식인 회(膾)이고, 교방 가무악(歌舞樂)인 포구락무와 처용무, 그리고 교방의 주인공인 예기(藝妓)가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 교방문화의 3대 핵심이 교방악가무·교방음식·교방예기임을 알 수 있다. 더불어 교방문화의 본산인 진주(晋州)가 보유하고 있는 진주 전통 풍류밥상의 원류를 발견할 수 있다. 미국 공사관으로 파견됬던 조지 포크(George Clayton Foulk, 1856.10~1893.8.)에 의하면 1884년 11월 25일 진주객사(晋州客舍)에서 제공했던 진주 음식의 종류를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미공사관 조지 포크는 1884년 11월 25일 진주를 방문해 진주병마절도사가 있는 진주성을 거쳐, 진주객사에 도착했다. 저녁을 먹기 전에 약주와 떡을 비롯한 전채(前菜)요리를 대접받았다. 저녁 식사로는 튀긴 쇠고기(육전), 닭고기, 구운 죽순, 무국, 삶은 달걀이 제공되었다. 진주는 조선시대 영남우도의 대표적인 지역으로 병마절도사와 목사가 근무를 했다.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는 경상남도 관찰사가 임명되는 등 영남의 행정중심지로도 기능했다. 이에 따라 공식적인 연향이 많았고 연향에 제공된 음식 수준도 매우 높았다. 함안수령 오횡묵(吳宖黙)이 1890년 1월 11일, 진주관아를 방문한 후에 내아(內衙)에서 차려낸 아침 음식을 맛보고는 “처음 보는 서울 음식 솜씨였다”며 감탄하면서 시(詩)를 한 수 지었다.오횡묵의 시에 나타난 진주목관아에서 제공된 음식은 닭, 돼지, 술, 면에 이어 생선, 과일, 차(茶)가 제공된 것으로 나타났다. 진주 전통 풍류음식의 꽃, 교방연향음식 진주의 교방음식은 교방의 연향 음식을 원류로 하고 있다. 따라서 진주 교방음식은 진주를 대표하는 전통음식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진주비빔밥 명인이었던 정계임은 진주교방음식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진주교방음식으로는 유곽(乳槨), 도미찜, 가오리찜, 서대, 조선잡채, 닭찜, 묽은 탕, 해삼전, 백합 회 등을 예로 들었다. 더불어 이러한 교방음식은 기본적으로 술의 절차에 어울리는 요리들로 구성되었다. 대표적으로 유곽과 조선잡채를 소개한다. 유곽(乳槨)조갯살과 같은 생 재료 및 볶음 재료를 조개껍데기에 담아 석쇠에 굽는 요리이다. 진주에서는 백합 대신 개조개의 살을 바르고 소고기와 방아 잎을 버무려 껍데기에 구워낸다. 조선잡채진주의 대표적인 연향 음식이다. 콩나물, 고사리, 소고기, 버섯, 도라지 등을 겨자 소스에 버무려 잡채를 만들었다. 이것을 진주지역에서는 조선잡채라 했다. 영남의 교방 연향 음식이 영남지역을 대표한 진주지역에서 행해진 연향(宴享)을 통해 자연스럽게 진주의 교방음식으로 변천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진주의 교방음식은 첫째, 술과 함께 먹을 수 있는 요리로 남해안의 풍부한 해산물을 사용했다. 둘째, 궁중의 연향 음식을 기본으로 진주의 향토 재료를 활용했다. 셋째, 진주 교방음식은 풍류와 멋을 간직했다. 영남 교방 연향에 제공된 음식은 술(酒)을 중심으로 한 음식이었기 때문에 탕(湯)이 필수적으로 제공되었다. 더불어 밥 보다는 냉면, 국수와 같은 면(麵)요리를 제공했다. 진주의 냉면, 고성의 국수가 대표적이다. 교방음식의 맥을 잇다, 진주 한정식 진주의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해 보면 경남 서부의 교통중심지이자, 지리산의 청정 농산물과 남해 바다의 싱싱한 수산물을 가까이 할 수 있는 지역이다. 이로 인해 그야말로 산해진미(山海珍味)의 음식문화가 일찍부터 발달했다. 특히 교방의 연향 음식은 진주를 대표하는 ‘진주음식의 꽃’으로 이름났다.조선 중기 음식문화의 꽃을 피웠던 교방음식의 맥을 잇고 있는 것이 ‘진주 한정식’이다. 학계에서는 ‘진주 한정식이 교방음식과 상차림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본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교방음식의 맥이 끊기긴 했지만 진주 한정식을 통해 진주 교방음식의 화려함과 맛을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은 매우 다행스럽다.진주 한정식은 상차림이 우아하고 화려하다. 일단 음식을 대하면 대접받는다는 느낌에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예전처럼 일인상(一人床)이 아니라 다인상(多人床)이긴 하지만 내어놓는 음식 하나 하나에 정성이 느껴진다. 다인상이긴 하지만 음식이 한 상차림에 끝나지 않는다. 이른바 코스별로 서 너 차례 나뉘어 제공된다. 갖가지 일품요리가 나올 때 마다 입맛이 절로 나는 것이 진주 한정식의 매력이다.진주 한정식의 메뉴는 정해져 있지 않다. 계절별로 다양한 음식이 제공된다. 청정 바다에서 공수해 온 해물로 만든 해물 요리는 그야말로 최고이다. 문어·낙지·전복·조개·가오리를 이용한 해물찜·해물전·조개구이·백합탕 등은 신선함과 맛에 있어서 엄지를 치켜 올릴 수 밖에 없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생산되는 각종 나물은 다양한 요리로 재탄생한다. 각종 해산물에 쇠고기·고사리·도라지·산채를 겨자에 무쳐 낸 조선 잡채는 한 접시만으로 만족하지 못할 정도로 입맛을 당겨댄다.교방음식은 술과 함께 하는 접대 음식의 범주에 들어간다. 따라서 교방음식 한 상을 들여다 보면 술 안주 위주의 음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교방음식에 국물음식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밥을 이용한 요리보다는 면(麵)요리가 유명하다. 소머리와 내장을 가마솥에 넣어 끓여낸 진주 곰탕도 유명하지만, 진주냉면(晋州冷麪)이 대표적이다. 지금 진주에는 묵묵히 교방음식의 꽃이었던 진주한정식의 맥을 잇는 분들이 많다. 진주 교방음식은 진주 한정식을 통해 이해된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 겨울의 별미, 진주냉면(晋州冷麪) 진주냉면은 평양냉면과 쌍벽을 이룬다. 근데 평양냉면의 유명세에 비해 진주냉면의 위상은 그리 탄탄해 보이지 않는다. 현 시점에서 진주냉면이라는 콘텐츠 자체가 파급력과 확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뜻이다. ‘진주냉면은 과거에만 평양냉면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음식이었다’라는 다소 부정적인 결론을 내려도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다. 이것이 바로 평양냉면과 진주냉면의 현주소이다. 근데 진주냉면은 ‘교방음식’에 기원하는 맛의 유산을 품고 있는 진주를 대표하는 음식임에는 틀림없다. 진주냉면이 가진 가치는 ‘해물 육수에 메밀국수를 말아 먹는 진주의 대표적인 향토음식’으로 정의할 수 있다. ‘진주’하면 ‘냉면’이라는 공식은 아직도 대한민국 어디에서도 통하고 있다. 바로 진주냉면이 가진 힘이다. ‘진주냉면’ 한 그릇 하지 않으면 ‘여름을 잘 보냈다’는 소리를 하기 어렵다. 진주냉면이 여름철에 즐겨 먹는 음식이 되었다는 뜻이다.근데 진주냉면은 한겨울의 별미(別味)이다. 평양냉면과 진주냉면 모두 겨울철 야심한 밤에 허기를 달래던 야참이었다. 진주냉면이 여름 별미가 된 것은 해방 이후, 평양냉면을 비롯한 냉면(冷麪) 음식이 대한민국 전역으로 전파되면서 사계절 음식 특히 여름철 인기 음식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진주냉면을 정의하기는 어렵다. 다행히 국립무형유산원이 발간한 『진주의 무형문화유산』에 진주냉면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진주냉면은 조선시대 진주지역 양반가에서 절기음식 내지는 특식, 국권피탈 이후에는 진주권번에 소속된 예기들의 생활터전이었던 기방에서 야식으로 눌러 먹었던 진주의 향토음식이다.’ 진주냉면의 역사를 온전히 정립하려는 지역의 시도가 없는 점을 감안 하면, 진주냉면의 정체성을 확보하기에는 충분해 보인다. 다만 이 기록은 현재 유통되고 있는 진주냉면과는 역사성을 달리하는 음식이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김영복의 고증을 받아 황덕이 할머니가 재현했다는 광고효과로 널리 알려진 진주냉면과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진주냉면의 레시피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진주냉면 전문가들의 레시피를 종합하면 ‘바지락과 디포리(멸치), 홍합을 이용해 맑은 육수를 내고 메밀과 고구마전분을 이용한 면발을 뽑아 만들면 된다’로 정리할 수 있다. 특이한 점은 ‘해물육수가 가진 비린내를 제거하기 위해 벌겋게 달군 무쇠를 육수 통에 넣는다’는 것이다. 요즘 시중에는 인스턴트 음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육수를 내고 면을 뽑아서 해먹는 번거러움을 줄이고 신속하게 만들어 먹자는 모토로 만들어진 인스턴트 냉면이 인기를 얻고 있다. 대충 한 그릇 때우면 그만이라는 현대인의 취향을 반영한 음식의 대표주자이다. 전통음식의 역사와 존재감이 점점 사라지는 이유이다.그럼에도 진주는 ‘진주냉면’이다. 시원한 육수와 쫄깃한 면발, 그리고 최고의 포인트인 육전(肉煎)이 주는 구수함은 그 어떤 냉면도 따라올 수 없다. 진주냉면은 겨울철 별미였다. 겨울에 맛보는 진주냉면의 신세계를 경험하기를 추천하고 싶다. 칠보화반(七寶花飯), 진주비빔밥 일반적으로 역사·문화의 산업화를 등한시하고 보전·발전·계승의 노력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역사와 문화 그 자체를 잃어버리거나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진주냉면, 진주비빔밥, 진주소 힘겨루기대회, 의기 논개 등이 대표적이다. 과연 이같은 콘텐츠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쉽게 답하기 어렵다면 냉정한 지적에 동의해야 한다.지역의 명칭이 붙은 음식은 대개 그 지역을 대표한다. 진주냉면에 이어 진주비빔밥도 마찬가지다. ‘칠보화반(七寶花飯)’이라 불리는 진주비빔밥은 진주를 대표하는 향토 음식으로 명성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진주가 한국에서 비빔밥의 전통을 가장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다는 점은 자부심을 가질만한 일이다. 너무나 친숙한 탓에 진주비빔밥의 진면목(眞面目)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는 ‘진주비빔밥’이 가진 전통을 상실해 가고 있다는 일종의 반성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근데 이런 지적에도 불구하고 ‘진주비빔밥은 대한민국 비빔밥의 원류이다.’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흔히 우리나라 3대 비빔밥을 ‘진주비빔밥’ ‘전주비빔밥’ ‘해주비빔밥’으로 본다. 이들 비빔밥의 특징을 보자. 먼저 전주(全州)지역의 유명한 비빔밥은 ‘전주비빔밥’이다. 가마솥 밥이 뜸이 드는 과정에 콩나물을 넣고 가마솥 안에서 버무렸다고 해서 ‘전주부뷘밥(비빈밥)’이라 했다. 해주(海州) 지역의 유명한 비빔밥은 ‘해주비빔밥’이다. ‘여인의 아름다움과 비교될 만큼 아름답다’고 해서 ‘해주교반(海州嬌飯)’이라고 부른다. 비빔밥에는 나물과 고기 이외에 수양산 고사리와 황해도 김을 넣는 것이 특별하다. 진주지역의 유명한 비빔밥은 ‘진주비빔밥’이다. ‘일곱 가지 보석을 담은 아름다운 꽃과 같다’해서 칠보화반(七寶花飯)이라 부른다. 놋쇠 그릇에 하얀 쌀밥 위에 제철 나물 고명을 얹은 다음 육회(肉膾)를 올린다. 비빔밥에 곁들여지는 보탕국과 선지국은 두 그릇은 비워야 성에 찰 정도이다. 진주비빔밥을 대하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식구들을 위해 갖가지 나물을 만들고 직접 담근 고추장과 참기름을 듬뿍 넣어 비벼주시던 어머니의 손맛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그것이 진주비빔밥이 가진 매력이다. 진주 헛제사밥 ‘조선 인재의 절반은 영남에서 나오고, 영남 인재의 절반은 진주에서 나온다(朝鮮人材半在嶺南 嶺南人材半在晋州)’라는 말이 있다. 진주가 인재(人才)의 본향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헛제사밥이 조선시대 유학의 본향이자, 인재의 보고인 진주에서 비롯된 음식이라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헛제사밥은 진주(晋州)와 안동(安東)이 대표적이다. 대한민국 전통음식인 ‘헛제사밥’은 ‘헛(참되지 못한) 제사 밥’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기일(忌日)을 맞아서 준비하는 제사밥이 아니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헛제사밥의 유래는 다양하다. 조선시대에 공부하던 학자들이 배고픔과 별미를 맛보기 위해 헛제사를 열어 제사음식을 즐겼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일반 평민들도 헛제사를 열어 제사음식을 즐겼다는 설도 있다. 진주헛제사밥은 진주의 유생들이 밤 늦게까지 공부를 하다가 야식을 먹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척 음식을 장만해 먹었던 데서 유래한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진주헛제사밥은 기제사에 마련하는 제수(祭需)처럼 상차림을 한다. 일반적인 가정에서 제사를 지낼 때 마련하는 제수와 거의 비슷하다. 헛제사밥 상차림 중에 누구나 즐기는 최애 음식이 하나있다. 바로 후렴전탕이라 불리는 ‘거지탕’이다. 거지탕은 제사음식 중 각종 전(煎)과 생선을 한 데 모아 끓인 국물요리이다. 속설에는 옛날 거지들이 동네 양반집 제사에서 동냥한 음식을 한 솥에 넣고 끓여 먹은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한 입 먹어보면 양반도 주저 앉아 같이 숟가락질을 할 정도로 반전 매력이 있다. 이름은 좀 민망하지만, 맛은 ‘최고’라는게 아이러니하다. 헛제사밥은 기제사를 지낼 때 올리는 음식을 평상시에 맛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특히 일명 ‘거지탕’으로 불리는 후렴전탕은 제사 전후 최고의 음식이자, 진주 헛제사밥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자리잡고 있다. 진주 게장 ‘진주가 게장으로 유명해?’라는 질문을 던질 법하다. 진주의 젖줄인 남강(南江)에서 참게가 많이 잡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민물게는 논이나 개울에서도 많이 잡혔다. 밤이 되면 횃불을 들고 나가 바위에 붙어있거나 웅덩이에 몸을 숨기고 있는 게를 잡은 기억이 생생하다. 옛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남강 지류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참개를 잡아서 게장으로 만들어 먹는 일은 손바닥 뒤집는 일보다 쉬웠다. 진주 게장이 진주의 대표 음식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게장(게젓)’에 대한 기록은 다양하다. 『산림경제(山林經濟)』에는 조해법(糟蟹法) 즉 게·재강·소금·식초·술을 섞어 담근 기록이 있다. 이 밖에도 『규합총서』 『주해법』 『초장해법』 『염탕해법』 등의 기록이 있으며 육선치법이라 해서 ‘게를 기르는 법’도 있다. 이러한 기록에 따르면 1600년대부터 게장(게젓)은 우리의 식탁에 오른 전통음식이라고 볼 수 있다.게장을 만드는 법은 다양하다. 진주 게장의 경우에는 살아있는 참게를 깨끗이 씻어 독에 넣은 뒤, 끓인 간장을 참게 독에 붓는다. 이런 상태로 하루나 이틀 정도 지나 간장을 따라내어 다시 끓여 붓기를 너댓 번 반복한다. 이렇게 완성된 진주 게장은 ‘게 다리 하나로 밥 한 그릇을 비운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진짜배기 맛을 낸다. 맛을 보기 전에는 ‘진주는 진주 게장이 유명하다.’는 말을 믿지 못할 것이다. 은어 밥 남강에 은어가 사라진지 오래이지만, ‘은어 밥’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적지 않다. 남강과 지류에서 잡은 은어는 다양한 요리로 탄생했다. 일품(一品)은 ‘은어 회(膾)’이고 이품(二品)은 ‘은어 구이’, 삼품(三品)은 ‘은어 튀김’이었다. 은어 요리를 부담없이 즐기고 나면 남은 은어로 ‘은어밥’을 해 먹었다. 은어 밥은 비록 회·구이·튀김처럼 삼품 요리에 들지 못하지만, 은어의 독특한 향과 양념장 맛 때문에 진주 사람들은 ‘별미(別味) 중의 별미(別味)’로 꼽았다. 은어 밥은 이렇게 지었다. 밥솥에 깨끗이 손질한 은어를 꼬리가 밖으로 나오게 파묻은 다음에 밥을 짓는다. 밥이 다 되고 나면 은어 꼬리를 살짝 잡아 당기면 밥 속에 살만 남게 되고 뼈는 깔끔하게 추려져 나온다. 여기에 양념장을 비벼서 먹으면 ‘천국의 맛’이었다. 남강에서 은어가 사라지면서 은어밥에 대한 기억도 흐릿하다. 진주를 대표하는 은어 밥을 다시 만나는 기회가 생겼으면 한다. 진주 장어 진주 장어구이가 유명한 이유는 안동의 간고등어와 유사한 유래를 갖고 있기에 그렇다. 내륙에 위치한 안동지역은 싱싱한 생선을 구경하기 힘들었다. 이에 상인들이 내륙 깊숙한 곳까지 고등어를 운송하기 위해 소금으로 간을 한 고등어를 보급하면서 안동 간고등어는 안동을 대표하는 생선으로 자리잡았다.진주는 장어의 주생산지가 아니었다. 인근 바닷가 지역에서 살아있는 장어를 가져와야 했는데 운반수단이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장어가 가장 신선할 때 연탄불에 초벌을 해서 가져왔다고 한다는 설이 있다. 이때 진주 특유의 장어구이 맛이 탄생했다고 한다.현대에 이르러 진주 장어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남강 변에 장어구이 전문점들이 집중되면서 부터이다. 교통의 발달로 붕장어가 많이 잡히는 남해안의 장어 생물을 운송하기 편해졌고, 민물장어가 귀하던 시절에 때맞춰 관광객들의 수요를 채우는 대체물로 장어구이가 탄생한 것이다. 진주대첩광장 조성 사업으로 진주를 대표하던 진주 장어구이 골목은 사라졌지만, 진주 장어는 연탄불이 내는 특유의 향과 다양한 양념장을 곁들인 장어 맛을 볼 수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진주 장어는 진주를 대표하는 생선이다. 꿀빵과 찐빵 통영 꿀빵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진주 꿀빵 역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간식거리임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꿀빵은 한국 전쟁 이후 만들어진 전통 빵이다. 경주 황남빵, 안흥 찐방, 천안 호두과자와 어깨를 견줄만한 진주를 대표하는 간식거리이다. 진주 꿀빵은 동그스름한 도넛 모양의 빵에 꿀을 발라놓았다. 통영 꿀빵은 끈적끈적해서 손에 묻는 특징이 있지만, 진주 꿀방은 끈적임이 적당하다. 그래서 달기는 덜하면서 부드러움은 배가 된다. 통영 꿀빵에 비해 진주 꿀빵이 유명세를 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찐빵 하면 곧 진주이다. 수복빵집에 가면 갓 쪄낸 담백한 찐빵에 달짝지근한 팥물을 끼얹어 준다. 평범해 보이지만 맛은 비범하다. 1974년에 개업한 유서 깊은 빵집이다. 하루에 정해진 양만 팔아서 오후 3~4시 이전에 가도 먹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달달한 디저트를 좋아한다면 수복빵집의 찐빵과 꿀빵, 팥빙수와 단팥죽을 추천한다. 진주 유과 진주는 한과(韓菓)로 유명하다. 특히 유과(油菓)는 일제강점기 당시 진주에 정착했던 일본인들의 최애 식품일 정도였다. 해방 이후, 일본인들이 진주 유과 맛을 그리워했다는 후문도 있다.특히 진주 유과는 제사상에 빠질 수 없는 제수의 하나이다. 유과는 찹쌀가루를 반죽해 기름에 튀긴 후 고물을 묻힌 과장의 일종이다. 지금도 진주의 전통식품인 유과를 제조해 판매하는 곳이 적지 않다. 한국인의 음식, 식객 허영만의 백반 기행 등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음식 채널의 진주방문도 잦아지고 있다. 진주를 찾은 한국인의 음식 진행자인 최불암은 ‘꽃보다 아름다운 진주 풍류 밥상’을 소개했고, 식객 허영만은 진주 속 숨어 있는 진짜배기 진주 음식을 소개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진주이야기는 여기가 끝이 아니다. 운석 빵과 유등 빵을 비롯한 길거리음식은 물론 최근에는 실크 커피 등 진주의 특산물을 이용한 제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진주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한국인의 찐 매운 맛을 보여준 맥도널드의 ‘진주고추 크림 치즈 햄버거’처럼 진주의 음식 신중흥기를 맞이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 202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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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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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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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of 진주 (STORY OF 진주2) 3. 진주성(晋州城)의 역사를 잇다 - 진주대첩광장(晋州大捷廣場)
진주성(晋州城)의 역사를 잇다 진주대첩광장(晋州大捷廣場) ‘이야기를 품은, 즉 땅이 기억하는 역사를 일깨워 진주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를 연결하는 광장으로 조성하자.’ 현대 건축의 거장이라 불리는 승효상 건축가의 이 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진주대첩광장이 진주(晋州)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하는 광장이 되어야 한다는 대전제이기에 그렇다. 협의의 개념으로 보면 진주대첩광장이 진주성(晋州城)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하는 기억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진주대첩광장의 중요성이 이와 같다면, 다음에 질문에 명쾌하게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질문 하나. 진주대첩광장에 진주대첩의 의미를 충분히 담았는가?질문 둘, 진주대첩광장이 진주성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잇고 있는가?질문 셋, 진주대첩광장은 진주성 원형 복원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가? 진주대첩광장이 ‘이야기를 품은, 그래서 땅이 기억하는 역사를 일깨워 진주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를 연결하는 광장’이 될 수 있는지 자문자답해야 한다. 과거의 찬란했던 진주성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역사성을 잃었다. 진주성정화사업이라는 옷을 갈아입은 오늘날의 진주성은 진주시민공원 정도로 치부되고 있다. 진주성의 미래 비전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다만 진주대첩광장이 ‘진주가 기억하는 진주성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역사를 어떻게 써내려가야 하는지를 일깨우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진주대첩광장 조성에 있어 불변의 대원칙이 있다. 그것은 지금은 사라진 진주성 외성의 원형복원에 대한 근본적인 필요성과 함께 원형 찾기 시도를 가능케 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주대첩광장의 정체성은 ‘진주성의 원형 복원’을 전제로 해야 한다. 이 원칙이 흔들린다면 진주성은 일제강점기의 훼손에 이어 진주성 원형복원에 실패한 진주성정화사업과 다를 바 없는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할 것이다. 진주성 역사공간 회복 진주대첩광장은 진주성의 역사 복원의 일환이자, 역사 공간 회복이라는데 의의가 있다. 향후 진주대첩광장은 진주대첩(晋州大捷)으로 기억되는 진주성의 특별한 의미를 국가적·민족적·세계사적 맥락에서 평가되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해야 하며, ‘단절된 진주성의 원형을 찾는 새로운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진주(晋州)와 진주성(晋州城) 역사의 새로운 한 페이지를 장식해야 한다. 진주대첩광장 조성 사업의 핵심은 ‘진주성의 역사성을 담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주대첩광장이 현재의 도심공원 정도로 치부되는 진주성과 일제의 강제 훼손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진주성 외성(晋州城 外城)을 잇는 가교역할을 하는 중요한 사업이기 때문이다. 만약 진주대첩광장이 진주성의 역사성을 담보하는 공간이 되지 못한다면 진주성 외성을 포함한 ‘진주성의 원형 찾기’가 실현 불가능해질 것이다. 진주대첩광장이 갖는 중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진주성이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은 진주성정화사업의 결과이다. 사실 사적 제118호임에도 불구하고 진주공원 또는 시민공원 정도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진주는 물론 진주성의 불행이다. 결국 진주성정화사업(1970년~1984년)은 진주성의 역사성·상징성·유일성과 같은 역사 복원 혹은 역사 공간의 원형 보존에 실패한 사업이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진주대첩광장 조성 사업이 ‘진주성의 역사성을 담보해야 한다’는 시민사회의 여론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진주성정화사업으로 진주성의 역사를 상실했듯이 진주대첩광장 역시 그 역사성을 잃어버리는 과오를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기 때문이었다. 진주성-진주대첩광장-진주성 외성 진주대첩광장이 진주성의 원형 복원을 전제로 추진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진주성-진주대첩광장-진주성 외성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역사 공간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진주대첩광장이 그 역사성을 잃게 되면 진주성 외성을 찾아서 복원해야 한다는 명분을 잃어버리게 된다. 진주성의 외성 공간인 진주대첩광장이 진주성의 역사성을 담보하지 못한다면 진주성 외성 역시 그 역사성을 영원히 되찾을 수 없게 된다. 진주대첩광장 조성사업이 진주성의 원형복원을 전제로 추진되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실 진주성이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실패한 진주성정화사업의 결과물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진주성정화사업은 진주성의 역사성·상징성·유일성을 담보하지 못했다. 때문에 오늘날의 진주성은 그 유구한 역사성에도 불구하고 시민공원 정도로 치부되고 있다. 만약 진주대첩광장이 진주성의 역사성을 담보하지 못했다면 ‘진주성 외성 찾기 프로젝트’와 같은 민간단체 차원의 노력은 진행되기 어려웠을 것이다.진주성 원형 찾기는 진주성 연구 성과의 축적과 진주성 내·외성의 주요 시설물의 발굴과 복원에 이어 진주성종합정비계획 수립 등 진주성 발굴과 정비라는 시대적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궁극적으로 진주성 원형 찾기는 진주대첩광장이 진주성의 역사성을 담보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진주성 외성 세상 밖으로 나오다 진주대첩광장 조성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문화재 정밀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통일신라시대 성벽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통일신라시대의 건물지 배수로와 고려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토성(土城)과 조선시대의 진주외성(石城)이 발굴되었다. 더불어 강주 설치 시기의 기와와 토기가 발견되었다. 이는 9주(九州)의 치소는 물론 인구의 거점으로 가로망을 갖춘 고대도시의 조성 가능성을 확인한 계기가 되었다. 도심 속에 묻혀 역사에 묻힐 뻔했던 진주성 외성이 이렇게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진주대첩광장 조성 초기의 정체성 논란 진주대첩광장 조성 사업이 진행되면서 이른바 ‘광장의 정체성’ 논란이 제기되었다. 역사진주시민모임이 기자회견을 열고 ‘광장에 천년 진주의 역사와 문화를 담자’는 주장을 편 것이다. 2017년의 일이다. 당시의 주장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진주대첩광장’이 아닌 ‘진주역사광장’을 조성하자는 내용을 골자로 김시민 장군을 비롯한 창렬사 정사에 모신 일곱 분의 청동상을 최고의 예술품으로 조상(彫像)하자는 주장이었다. 참고로 현재 창렬사 정사에 모신 분은 충무공 김시민·문열공 김천일·무민공 황진·충의공 최경회·충의공 장윤·효열공 고종후·주부 유복립이다. 이외에도 형평운동기념탑과 연지사종탑, 이수일장군 사당 충무사 건립, 논개동상, 위안부소녀상 등을 설치해야 한다는 주장했다.진주대첩광장이 아닌 진주역사광장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당시 역사진주시민모임의 주장이 과연 시의적절한지, 그리고 과연 부정할 수 없는 확고한 명분의 여부는 따져보기 어렵다. 다만, ‘진주대첩광장이 진주성의 역사성을 담보해야 한다’는 대전제에는 부합하지 못하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진주대첩광장 정체성 논란과 관련해 경남일보에 두 차례의 기고문을 게재했다. ‘진주대첩광장은 진주성의 역사성을 담보해야 한다.’와 ‘진주대첩광장 본질 훼손하지 말라’였다. 진주대첩광장 조성사업은 진주성정화사업의 실패를 교훈 삼아‘진주성 외성의 복원 혹은 보존’을 대전제(大前提)로 하는 사업이 되어야 한다. 만약 진주성의 역사성을 간직한 ‘진주대첩광장’이 아니라 진주의 천년 역사를 백화점식으로 담아내는 ‘진주역사광장’으로 역사적 공간성을 확장시킨다면, 진주성정화사업으로 진주성의 역사를 상실했듯이 진주대첩광장 역시 그 역사성을 잃어버리는 과오를 되풀이하고 말 것이 명약관화하기 때문이다. 진주대첩광장 조성을 둘러싸고 지역사회에서 벌어진 ‘광장의 정체성 논란’은 진주성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에서 출발되었다. 진주대첩광장이 진주성의 역사성을 담보하는 사업으로 진행되는데 큰 역할을 한 것도 분명하다. 진주대첩광장은 그렇게 ‘비움’을 컨셉으로 진행되었다. 진주대첩광장의 비전인 ‘비움’은 미래세대에 진주대첩광장의 미래를 물려주자는 의도였다. ‘비움’은 ‘비워야 비로소 채워진다’는 격언만큼 진주성의 미래를 담보하는 적절한 표현은 없다. 진주대첩광장, 시민의 품으로 진주대첩광장은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대첩의 역사성과 호국충절의 도시 진주의 얼을 되살리자는 목적하에 추진되었다. 더불어 역사 도시로서의 이미지를 고취시킴과 동시에 도심지 내 휴식 및 휴양기능의 도입으로 시민들의 여가선용 욕구를 충촉시키고, 각종 축제의 개최 등으로 도시민의 정서함양에 기여하고자 추진됐다.진주대첩광장은 총사업비 940억원이 투입되었다. 대지 1만 9870㎡에 연면적 6382㎡ 규모로 지하 1층은 주차장, 지상은 최소한의 공원지원시설과 역사공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2007년 타당성 조사 및 기본계획을 수립한데 이어 10여 년간 보상 협의와 건물철거 작업, 3년간의 문화재 지표조사 및 정밀 발굴조사, 수차례의 문화재청 자문과 심의를 거쳐 현상변경허가를 받은 후 실시설계과정에서 경제성 검토, 지방건설기술심의 등 복잡한 행정절차를 완료하고 기본계획 수립 15년만인 2022년 2월 대망의 착공식을 가진 이후 17년 만에 드디어 진주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진주대첩광장 조성사업의 역사적인 순간을 후세에 길이 남기기 위해 준공기념 바닥재 각인문구도 새겼다. 제1차 진주대첩 승전연도인 1592년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총 1592개로 결정했다. 진주대첩광장은 과거의 문화유산을 계승해 현재와 공존하면서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진주대첩광장이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2024년 지역사회는 진주대첩광장의 준공을 앞두고 진주성의 역사성을 담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여론이 빗발치고 있다. 진주대첩광장이 진주성의 역사성과 정체성과 상관없는 역사공원으로 돌변한 것이다. 시민사회의 여론수렴과정도 거치지 않았다. 지금 진주대첩광장은 일제강점기에 이어 다시 역사의 전면에 나서지 못하고 모습을 잃어 가고 있다. 지난 2007년 시작된 진주대첩광장 조성사업은 무려 17년에 걸쳐 940억원의 예산을 투입했다. 근데 진주시민사회는 진주대첩광장을 두 손 들고 환영하지 않고 있다.모 언론사 기자의 칼럼 제목과 내용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진주대첩광장과 생뚱맞음.’ ‘생뚱맞다’의 사전적 의미는 ‘하는 행동이나 말이 상황에 맞지 아니하고 매우 엉뚱하다’이다. 주변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진주성의 공북문을 지나 촉석문 쪽으로 들어서면 회랑 모양의 큰 구조물(공원지원시설)이 나오는데, 이를 보면 나도 모르게 이 말이 튀어 나온다. 사실 진주대첩광장 사업 추진을 지켜보면서 진주역사에서 사라진 채 도심의 콘크리트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진주성 외성(晋州城 外城)’을 찾아내는 일을 다음 과제로 정했다.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시급한 과제였지만, 결과적으로 시작부터 발목이 잡힌 셈이 되었다.온갖 미사여구를 갖다 붙여 변명한다 해도, 미안하지만 진주대첩광장 조성사업은 제2의 진주성정화사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최소한 ‘역사의 죄인’은 되지 말아야 한다는 원로의 꾸짖음이 생생하다.
- 2025-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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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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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145

Story of 진주 (STORY OF 진주2) 2. 잃어버린 성곽(城廓)을 찾아 길을 나서다 - 진주성(晋州城) 외성(外城)
잃어버린 성곽(城廓)을 찾아 길을 나서다진주성(晋州城) 외성(外城) 잃어버린 성곽(城廓)을 찾아 길을 나섰다.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 그리고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그 원형을 잃어버린 진주성(晋州城)의 원래 모습을 찾기 위해서였다. 현재 진주성은 반쪽이다. 나머지 반쪽은 진주 도심의 콘크리트에 묻혀 신음하고 있다. 진주성이 갖고 있는 그 위대한 가치를 찾고 싶었다. 「진주성 외성 찾기 프로젝트」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2023년의 일이다.천년 진주 역사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진주성(晋州城)의 위대한 가치(價値)를 찾아 나서야 한다. 진주성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앵무새처럼 되짚어 보는 일을 반복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진주성의 원형 복원이 진주와 진주성의 미래를 결정짓는 역사적인 과업이라는 시대의식을 갖고 실천해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더불어 진주성이 진주의 미래 100년의 마중물이자, 진주를 이끌어갈 미래세대의 문화유산이라는 점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그것이 동시대를 살고 있는 기성세대의 품위를 보여주는 일임과 동시에 진주의 미래를 걱정하는 참 세대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성곽(城廓)을 찾아 길을 나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양도성(漢陽都城)과 진주성(晋州城) 한양도성(漢陽都城)은 조선시대 수도였던 한양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곽(城廓)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으로 천도하기 위해 1396년(태조 5) 축성을 시작해 2년 뒤인 1398년에 완공했다. 성벽에는 사대문(四大門)인 숙청문(肅靖門), 흥인문(興仁門), 돈의문(敦義門), 숭례문(崇禮門)과 혜화문(惠化門), 광화문(光化門), 창의문(彰義門), 소덕문(昭德門) 등 8개의 성문(城門)을 두었다.한양도성이 가지는 가치는 ‘조선왕조의 도읍으로 궁궐, 관청, 종묘, 사직과 백성들을 지키는 나라의 중심이자, 도읍의 상징’이라는 점에 있다. 한양도성의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로는 도심을 에워싸고 있는 도시 규모의 성곽유산(城廓遺産), 600년의 역사층위가 축적된 유산, 땅과 한 몸으로 구축된 문화유산, 집단 장인기술로 구축된 유산에 두고 있다.진정성(authenticity) 측면에 있어서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수축과 수리 과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관리되어 왔다는 점이며, 완전성(integrity)에 있어서는 한국의 독창적인 도성 형식으로 조성되었고, 규모 면에서도 한국에서 가장 큰 성곽이면서 성곽의 70%가 성곽의 원형 또는 유적형태로 보존·관리되고 있다는 점이다.현재 한양도성은 국보와 보물, 그리고 사적으로 지정돼 국가문화유산으로 관리되고 있다. 철저한 고증을 거쳐 성곽의 잔존 및 훼손 구간에 대한 지속적인 복원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특히 서울시는 한양도성 종합보존·관리활용계획을 수립하고 한양도성을 세계유산의 관리지침에 부합하는 기준으로 보호하고 있다.진주성의 가치와 의미는 무엇일까? 한국성곽연구소 심광주 소장은 진주성의 의미와 가치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첫째, 진주성의 훼손과 정화사업을 통한 경관회복 노력이다. 진주성은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원형 경관이 급속히 훼손되었다. 1906년 동장대(東將臺)의 붕괴를 시작으로 1910년에는 일제가 진주성 성돌로 대사지(大寺池)를 매립했다. 이후 진주신사(晋州神社) 건립(1917년)과 읍성훼철령(1910년), 시가지건축물 취제규칙(1913년), 면제시행규칙(1917년)으로 진주성 훼손이 가속화되었고 진주성 경내에는 민가(民家)들이 무질서하게 들어섰다. 1963년 진주성이 사적 제118호로 지정되었지만, 진주성은 원형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폐허로 변했다. 이후 진주성정화사업(晋州城淨化事業)의 추진으로 진주성은 오늘날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둘째, 진주성 축성에 응축된 우리나라 성곽 축성 기술의 가치이다. 진주성은 ‘우리나라 축성 기술사 연구의 보고’라는 것이다. 고려 석축성에서 조선시대 읍성 축성법의 연계성이 확인되고 있다. 축성기록이 잔존하고 있어 조선시대 각 시기별 축성법의 특징 파악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성곽 방어 시스템과 무기체계 등도 진주성이 가진 가치를 더해주고 있음은 물론이다.셋째는 견고하고 완전무결한 것으로 평가되었던 조선의 대표적인 군사유산이라는 점이다.읍성의 축조가 갖는 의미는 동아시아의 국제적인 상황이 반영된 독특한 방어시설이다. 이러한 점에서 진주성은 평지성(坪地城)이면서 산성(山城)의 방어력을 갖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읍성(邑城)인 것이다. 이는 제1차 진주성전투(1952년. 10. 6~10)에서 3,800명의 수성군이 2만여 명의 왜군을 상대로 승리했고, 제2차 진주성전투(1593. 6. 19~29)에서는 7만 명의 수성군이 10만여 명의 왜군을 상대로 항전했다. 서울의 한양도성(漢陽都城)과 진주의 진주성(晋州城)이 갖는 가치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성곽(城廓)이자, 조선을 대표하는 군사유산이며 ,우리나라 성곽 축성 기술의 보고라는 점이다.「진주성 외성 찾기 프로젝트」를 위해 한양도성을 방문했을 당시의 일화이다. 진주성 외성 찾기 계획을 살펴보던 한양도성 담당자가 이렇게 말했다. ‘도심 속에 있는 진주성을 가진 진주가 부럽다. 진주성이 복원되면 대한민국 최고의 성곽유산을 가진 곳이 될 것이다.’ 서울의 한양도성과 견주어 조금의 부족함도 없는 진주성. 진주성이 잃어버린 성곽(城廓)을 찾아 나서는 여정(旅程)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진주성의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진주성 외성은 진주의 도시근대화라는 미명 아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진주의 상징이자, 역사 현장인 진주성의 본격적인 훼철이 시작된 것은 일제강점기이다. 일제는 진주에 이주하는 일본인들이 급증하자, 진주의 도시 근대화하는 명분 아래 경상우병영의 군사방어시설이던 진주성 성벽을 허물고 대사지를 매립했다. 이 시기 경남도청 선화당(宣化堂)을 비롯해 진주성 내의 주요 옛 건축물들이 역사 속으로 모습을 감춘 것은 물론 진주성 외성 역시 근대 도시화의 미명 아래 진주 역사에서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해방 전후와 한국전쟁 시기의 진주성에는 더욱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진주성의 상징인 촉석루(矗石樓)가 전소된 것을 비롯해 진주 시가지는 폐허가 되었다. 그리고 진주성 역시 그 원형을 잃은 채로 오랜 기간 동안 방치되었다. 이 시기 진주성은 내성(內城)의 성곽은 거의 찾아 보기 어려웠고, 진주성 외성(外城)은 존재 자체를 기억하는 사람이 드물 정도가 되었다.진주성(晋州城)의 복원에 대한 지역민의 건의가 이어졌다. 이에 따라 1963년 진주성이 사적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사적지 지정과 동시에 성지 일원이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지만, 이후에도 꽤 오랜 시간 진주성은 폐허 그 자체로 방치되었다. 지역사회에서 진주성 복원을 통한 진주의 정체성 확립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었다. 진주시가 1969년 진주시장기계획사업으로 진주성정화사업을 설정했다. 진주성정화사업은 3차에 걸쳐 진행되었다.진주성은 제1차 진주성정화사업(1970~1975년)을 통해 성곽, 촉석문, 북암문을 복원하고 촉석루를 비롯한 9동의 문화재 보수와 성지 내 순환도로 개설로 사적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제2차 진주성정화사업(1979~1980년)에서는 성지 경내에 산재한 민가 751동의 철거와 토지 보상이 이루어졌고, 제3차 진주성정화사업(1981~1984년)에서는 성곽 490m가 복원되고 유적 7동이 보수되었으며, 광장 4,728평과 주차장 456평, 10,677평에 이르는 조경사업이 추진되었다. 국립진주박물관이 건립(1984년)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사실 진주성정화사업으로 인해 진주성이 오늘날의 규모를 갖추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지만, 진주성의 역사성·상징성·유일성이 내재된 역사 복원 혹은 역사공간의 원형보존에 실패한 사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적지임에도 불구하고 시민 공원 또는 관광지 정도로 인식되고 있는 점은 진주성 뿐만 아니라 진주시 전체의 불행이기도 하다.진주성정화사업을 통해 진주성(內城)은 불완전하나마 제 모습을 찾았지만, 진주성 외성 복원과 정비에 대한 논의는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진주성 내·외성에 대한 연구가 이어지면서 다양한 성과물이 축적되는 과정에서 최근 진주성 외성 복원 혹은 재현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진주성 주요 건축물의 발굴과 복원 진주성 외성을 찾는 일을 정의하자면 ‘역사 속에 묻혀 있는 진주성에 고유한 이름을 부여하는 일’이다. 더불어 진주성 외성 찾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진주성 관련 연구와 발굴 성과의 축적에 이어 진주대첩광장(晋州大捷廣場)에서 진주성 외성의 성벽이 발굴된 것이 결정적이었다.진주성 내성·외성과 관련된 그동안의 연구 성과의 축적은 괄목할 만하다. 연구자들에 의해 다방면으로 이루어진 연구를 통해 진주성 내성과 외성의 일각을 확인하는 성과도 거두었다. 이러한 연구가 향후 진주성 내성과 외성의 주요 시설물의 발굴과 복원 자료로 활용되었음은 물론이다.진주성 주요 시설물의 초기 발굴조사는 ‘진주성 내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선화당 부지조사(국립진주박물관, 1997년), 공북문 조사(경남문화재연구원, 1999년), 촉석루 아래 성벽 조사(국립진주박물관, 2000년) 이후 진주성에 대한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진주성 내·외성의 주요 시설물에 대한 발굴과 복원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2010년 이후의 일이다.진주성(晋州城) 외성(外城) 동벽(東壁)과 북벽(北壁)이 발굴되었다. 진주성 외성의 첫 발견이라는 의의가 있다. 최초로 성벽이 확인된 것은 진주교 사거리 동쪽에 위치(구 중앙파출소 골목길)한 진주성 외성의 동벽 구간이다. 그리고 진주성 외성 북벽은 지금의 진주경찰서와 진주우체국 앞길로 추정된다.진주성(晋州城) 외성(外城) 북서벽(北西壁)으로는 진주시 중안동 15-11번지에서 통일신라시대 채토 수혈과 외성벽, 대사지 호안 석축 등이 조사되었다. 대사지(大寺池) 북쪽 호안과 남쪽 호안이 발견된 진주 중안동 유적은 경상남도 진주교육청 이전 부지 내에서 발굴되었다.진주대첩광장에서는 통일신라시대 배수로와 고려시대 토성, 조선시대 석성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진주성 외성과 치성, 대사지 추정 유구가 2020년 발굴되었다.진주성(晋州城) 외성 북쪽 대사지 흔적은 중앙병원과 동산교회 사잇길에서 확인되었다. 그리고 동성동 진주성 외성 동벽 구간에서도 해자로 추정되는 자료가 확인되었다. 지금의 중앙동행정복지센터 앞길이다.진주성 내 경상우병영 병마우후(종3품)의 집무공간인 중영(中營)이 복원되었다. 진주성정화사업 이후 촉석문(矗石門)과 공북문(拱北門) 등 문루(門樓) 이외에 건축물로는 진주성 내에서 최초로 복원된 건물이다.진주성 중영 복원을 계기로 진주성 원형 찾기에 대한 지역사회의 기대가 높아졌다. 진주시가 지난 2020년에 수립한 「진주성 종합정비계획 수립(2020)」 용역 역시 진주성 발굴과 정비라는 시대적 요청에 답하는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다. 진주성의 역사성을 회복함과 동시에 진주의 미래 먹거리 마련이라는 실천의 발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잃어버린 진주성을 찾아 나서다 진주성 외성 찾기는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지적원도를 바탕으로 하되, 현 진주성 내성의 좌표값을 기준으로 진주성 외성의 위치와 좌표 값 도출로 진주성 외성과 대사지의 위치를 비정하고자 했다. 공간적 범위는 진주성 외성과 대사지이며, 시대적 범위는 일제강점기 훼철 이전의 진주성이다.진주성 외성 찾기는 ▲1910년대 지적원도와 2023년 지적도와의 대조 ▲진주성 외성 발굴지의 현재 좌표값 특정 ▲현 지적도 상의 진주성 외성과 대사지 비정 ▲특정된 좌표값을 기준으로 외성곽 및 외성길 개발 ▲진주성 외성과 구도심·재래시장과의 연계 방안 도출을 핵심과제로 삼았다. 연구는 ▲지적원도 검토 및 분석 ▲구 지적원도와 현 지적원도의 대조 ▲진주성 외성과 대사지 구간의 예측 ▲실측 ▲보전 ▲GIS(지리정보시스템)활용 ▲진주성 외성과 대사지 좌표값 특정순으로 진행되었다. 진주성 관련 관광 콘텐츠 개발과 활용 진주성 외성 찾기를 통해 이루고자 한 목표가 있다. 진주성의 성곽 문화자원을 활용해 진주를 대표하는 새로운 관광콘텐츠 개발에 이어 구도심과 재래시장 활성화의 계기 마련이었다. 진주성 외성을 찾는 과정에서 진주성 외성을 활용한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하고 제안했다. 진주성은 조선시대 고지도에 그 형태가 표기돼 있지만 현재는 내성(內城)만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대사지 매립을 시작으로 193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 진주성 외성(外城)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도시화를 위해 성벽을 허문 자리에는 근대식 건물이 들어섰고, 대사지는 외성의 성벽으로 채워졌다. 그렇게 진주성 외성은 무려 9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땅 속에 묻힌 채, 기억에서 잊혀지고 있다.진주성 외성 찾기를 하면서 염두에 두었던 것은 진주성 성곽을 활용한 관광자원화였다. 진주성 외성의 주요 시설지에 대한 발굴 조사와 현장 측량을 토대로 진주성 외성임을 인식할 수 있는 표식의 설치에 주목했다. 서울의 한양도성의 경우, 미디어 스마트 폴과 안내판 설치 등으로 한양도성의 역사를 전하고 있다. 진주성 외성 스마트 미디어 폴 설치진주성 외성의 주요 시설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토대로 진주성 외성임을 인지할 수 있는 표식의 설치가 필요했다. 현재 발굴조사를 통해 시설지로 확인되어 표식설치가 가능한 곳은 5곳 정도로 파악되었다. ▲남문(南門) 추정지(진주대첩기념광장~옛 중앙파출소 골목) ▲동장대(東將臺) 추정지(대흥주차장 인근) ▲신북문(新北門) 추정지(기업은행 인근) ▲외성 북벽 추정지(진주우체국 앞 도로) ▲구북문(舊北門)추정지(공북문 옆 구 진주문화원 인근)이다. 진주성 관문(關門)인 남문(南門) 재현 진주성 내성과 외성을 포함하는 진주성 관문의 설치 필요성이 매우 높다. 남문은 진주성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자, 향후 진주성 복원 및 정비사업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사전사업으로서의 중요성을 가진다. 진주성 숏 다큐멘터리 제작 진주성 외성 찾기 사업의 결과물인 진주성 숏 다큐 제작을 통해 진주시민들에게 진주성 외성 찾기에 대한 중요성을 알리고 진주성 복원과 정비에 대한 필요성을 제고하기 위해 필요하다.촉석루와 남문, 중영을 3D 영상 제작을 시작으로 향후 진주성 내성과 외성을 포함한 진주성 3D 제작을 통해 진주성의 역사성을 대내외에 알려야 한다. ICT기술 기반(AR글래스) 콘텐츠 개발 ICT(Information & Communication Technology), 즉 정보통신기술을 기반으로 한 AR글래스를 통해 진주성에 대한 접근을 편리하게 함과 동시에 모바일 에플리케이션을 활용한 진주성 활용 등을 통해 진주성 외성 컨텐츠를 개발해야 한다. 진주성 특화골목 개발 진주성 외성 찾기를 통해 진주성-구도심, 진주성-재래시장을 연결하는 ‘특화골목’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 진주성 외성 찾기를 통해 진주성-구도심, 진주성-재래시장을 연결하는 ‘특화골목’의 조성 필요성을 제기했다. 진주성 특화골목은 ‘동장대 특화골목’과 ‘공북문 특화골목’ 등 2개소이다. •동장대 특화골목현재 동장대 추정지인 대흥주차장에서 북쪽 방향 200m지점을 지나 대로변 건너편에는 중앙시장이 위치하고 있다. 동장대-중앙시장에 이르는 이 특화골목은 가칭 ‘동장대 특화골목’으로 진주성 외성 탐방 이후 자연스럽게 중앙시장으로 연결함으로써 재래시장 활성화에 기여하는 측면을 강조할 수 있다. •공북문 특화골목공북문 특화골목은 진주시교육지원청 사거리-공북문에 이르는 골목길이다. 진주시교육지원청 사거리 입구에서 진주성 공북문의 모습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이 골목에는 커피숍 등 다양한 상점이 즐비해 있는 것은 물론 진주성과 연결되는 구도심 활성화에도 기여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진주 최초 ‘진주성 3D’ 제작 진주 최초로 진주성 3D 영상을 제작했다.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진주성도(晋州城圖) 원본을 토대로 최대한 조선시대 진주성을 구현하고자 했다. 진주성 3D에는 현전하는 건축물인 촉석루, 의기사, 촉석문, 서장대, 의기사, 공북문, 중영 등을 3D 작업을 통해 구현했다. 이와 함께 진주 내성의 선화당과 남문, 신북문, 대사지 등도 3D로 구현해 옛 모습을 볼 수 있게 했다.진주성 3D는 현재 완성도 측면에서는 낮은 단계에 있으나 진주지역 최초로 구현했다는 점에 큰 의의를 둘 수 있으며, 향후 지속적인 보완 작업을 통해 완성도를 높여 나갈 예정이다.더불어 진주성 3D를 활용해 초·중·고교 교육자료로 활용하는 한편 진주지역 각계각층을 대상으로 홍보자료로 활용할 계획이다. 진주성 외성 찾기 필요성 진주성은 진주 미래 100년을 책임질 소중한 자산 중의 하나이다. 진주성에 녹아 있는 천년 역사의 흔적과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성곽 문화자원을 발굴·활용한 관광자원 개발의 가능성 역시 무한대이다.진주성 외성 찾기, 혹은 진주성 원형찾기를 통해 ‘진주성의 정체성 확보와 이를 활용한 진주관광 미래 100년 마스트 플랜의 밑그림 그리기’가 필요하다. 다만 도심 속 건물에 파묻혀진 외성의 복원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진주성 외성 찾기가 그 대안이 될 수 있다. 진주성 외성 찾기는 기존의 연구성과물을 바탕으로 세밀한 측량작업을 통해 진주성 외성의 위치를 특정함과 동시에 남문(南門), 동장대(東將臺), 구북문(舊北門) 등 외성을 구성하고 있는 성곽 문화자원의 발굴로 영역을 확대해야 한다. 더불어 진주성 외성 찾기가 진주관광미래 100년을 책임지는 킬러콘텐츠의 보고(寶庫)라는 강점을 갖고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진주성은 경상남도의 역사적 전통성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경남도의 수부도시라는 상징성을 회복하는 길은 진주성의 복원이 될 것이다. 경남을 찾은 외국인들이 가장 인상깊은 곳으로 ‘진주성’을 꼽았다.(2008년 경상남도 관광실태조사) 외국인은 진주성을 경남의 상징물, 즉 랜드마크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진주성 복원(외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회의론적 태도에서 벗어나지 않은 한 진주성 복원은 요원하다. 일본의 오사카성(大阪城)의 천수각과 구마모토(熊本城)의 복원 사례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오사카성 천수각은 1665년 소실 이후, 266년이 흐른 1931년에 복원이 되었다. 성채가 견고하기로 유명한 구마모토성도 1877년 소실된 이후, 83년이 지난 1960년부터 복원이 시작되어 현재도 진행중이다. 일제강점기부터 그 모습을 잃기 시작한 진주성 외성의 복원 프로젝트를 수립해야 한다. 이는 진주를 벗어나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업이 될 것이다.
- 2025-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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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황경규/진주향당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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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131

Story of 진주 (STORY OF 진주 2) 1. 정조, 촉석루를 모방하다
진주성(晋州城)과 촉석루(矗石樓)의 제도(制度)를 모방하라는 지시를 내린 조선의 국왕이 있다. 그는 바로 조선 제22대 임금인 정조(正祖)이다. 정조가 수원 화성을 축성할 당시, 조선 최고의 성(城)이었던 진주성과 촉석루를 벤치마킹하도록 한 기록이 있다. 국왕의 동정과 국정에 관한 제반 사항을 수록한 정무 일지인 『일성록(日省錄)』이다. 『일성록(日省錄)』 정조(正祖) 18년(1794년) 10월 19일(癸酉)의 기록이다. 진주성(晉州城)은 고(故) 상신(相臣) 유성룡(柳成龍)이 중국의 성제(城制)를 모방하여 쌓은 것인데, 그 유고(遺稿)를 보면 그의 재지(才智)와 역량은 실로 후인들이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화성의 제도 역시 진주성을 모방하여 견고하고 완전무결함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기대하려는 것이니, 어찌 급급하게 역사를 감독하여 오직 속히 완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겠는가. 만일 고 상신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반드시 내 말이 옳다고 했을 것이다.”(晉州之城卽故相柳成龍之摸倣中國城制者也見其遺稿其才智力量實非後人可及今此華城之制亦所以摸倣晉城而欲其鞏固全完期於永奠豈可急急董役惟以速成爲主乎若使故相在此則必後吾言矣) 수원(水原) 화성(華城)은 정조가 꿈 꾼 새로운 조선이었다. 정조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 새로운 정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신도시 화성을 계획했다. 수원 화성은 당시 최첨단 과학과 건축술이 적용된 역작이자, 동양 성곽(城廓)의 백미로 평가 받고 있다. 정조가 만들고자 한 수원 화성은 상업적 기능과 군사적 기능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평지성이면서 견고한 성(城)이었다. 정조가 이른바 ‘진주성을 모방하여 견고하고 완결무결함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기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조가 수원 화성을 축성할 당시, 제도를 모방할 정도로 조선 최고의 성(城)은 바로 진주성(晋州城)이었다. 정조는 진주성의 제도를 모방하라는 교지를 내리기 1년 전인 정조 17년(1793) 12월 8일, 진주성 촉석루(矗石樓)에 주목했다. 화성 성곽 축조에 관한 경위, 제도, 의식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영남의 여러 성 중에 진주성(晉州城)에 있는 초루(譙樓)가 매우 좋다고 하니 사람을 보내 알아 오게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하니, 조심태가 아뢰기를,“함안 군수(咸安郡守) 심인(沈鏔)은 본래 재주와 슬기가 있다고 일컬어집니다. 곧 임기가 만료된다고 하니, 그로 하여금 몸소 가서 간심하고 나서 도형을 만들어 올라오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嶺南諸城中 晉州城看譙樓甚好云亦送人知來好矣 心泰曰 咸安郡守 沈鏔自有才諝之稱聞瓜期在卽云使之躬往看審仍爲圖形上來之地似好矣) 정조가 말한 ‘진주성에 있는 초루(譙樓)’는 촉석루(矗石樓)를 말한다. 조선 후기 형조판서와 장용영대장을 역임한 무신인 조심태(趙心泰)가 함안군수 심인을 시켜 ‘간심(看審)’ 즉 촉석루를 자세하게 보아 살핀 이후에 촉석루의 도형(圖形)을 만들어 올리게 하겠다고 한 것이다. 정조(正祖)는 진주성과 촉석루에 주목했다. 이는 정조가 꿈꾼 새로운 조선인 화성 축성에 있어 진주성과 촉석루가 제도의 근본이 되었다는 점은 ‘조선시대 진주성과 촉석루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최근에 촉석루(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66호)를 국보(국가지정문화유산)으로 재지정하기 위한 지역사회의 노력이 진행되고 있는 것도 진주성과 촉석루가 가지는 위상을 회복해야 한다는 역사적 소명의 일환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촉석루 3D 유홍준과 촉석루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저자인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MBC의 간판 예능프로그램인 강호동의 「무릅팍 도사」에 출연했다. 스타들의 실제 고민을 속시원하게 해결해 주는 프로그램에서 유 전 청장은 ‘대한민국 문화유산 관리에 가장 큰 불만’을 내놓았다. 그것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을 방문하면 항상 눈에 거슬리는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팻말이었다. 유 전 청장의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목조건축물에는 사람이 살아야 그 건물도 살고 오래 보존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곰팡이와 먼지가 낀다. 천하의 좋은 집도 ‘들어가지 마시오’ 3년이면 흉가가 된다.’ 그러면서 ‘촉석루(矗石樓)’를 그 모범답안으로 제시했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정자 중에 가장 보존이 잘된 곳이 바로 진주의 촉석루이다.’ 유홍준 전 청장의 이 말은 출입 자체를 금기시하는 우리나라의 다른 목조 건물들처럼 ‘들어오지 마시오’가 아니라 국민들이 마음 편히 촉석루에 올라 진주의 아름다운 자연을 느낌과 동시에 촉석루의 산 역사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에 촉석루를 잘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유 전 청장은 JTBC의 시사 교양프로그램인 「차이나는 클라스」에도 출연했다. 이 프로그램에서 촉석루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인 경복궁 경회루, 창경궁의 일반인 개방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경복궁의 경회루를 비롯한 대한민국 대표 문화유적들이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팻말로 일반인들의 출입을 막으면서 ‘문화유산 스스로 고립과 소외를 자청해 보존의 기회를 스스로 상실하고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유 전 청장은 방송을 통해 ‘문화재는 가까이서 보고 향유할 때 비로소 그 가치를 알 수 있다는 사실을 촉석루가 입증하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경남 진주의 촉석루가 가장 잘 보존된 곳이다’ 현재 명지대학교 석좌교수인 유홍준 전 청장은 각종 기고를 통해 문화유산 보존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유 교수는 「유홍준의 문화의 창」이라는 칼럼에서 전국에 퍼져 있는 누정(樓亭)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누정(樓亭)은 자연환경이 낳은 아름다운 연속유산이다. 삼천리 방방곡곡 풍광 좋은 자리와 쉬어 갈 만한 곳에는 반드시 누정이 있었다. 그 이름은 루(樓), 대(臺), 정(亭), 헌(軒)으로 대표되며, 그 중에서 관아에서 지은 누각은 그 고을의 상징적 랜드마크로 규모도 크고 자리앉음새도 탁월하다고 보았다.그러면서 조선의 3대 누각(樓閣)으로 진주(晋州) 촉석루(矗石樓)·밀양(密陽) 영남루(嶺南樓)·평양(平壤) 부벽루(浮碧樓)를 꼽았다. 이외에도 남원 광한루, 삼척 죽서루, 안주 백상루, 청풍 한벽루도 대표적인 누각으로 선정했다.유 교수는 이들 누정(樓亭)에 있는 기문(記文)에도 주목했다. 청풍 한벽루 기문을 쓴 조선 태종 때 문신인 하륜(河崙)의 글을 소개했다.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누각을 관리하는 일은 한 고을 수령된 자의 마지막 일감에 지나지 않지만, 그 누각이 관리되는 것만 보아도 고을의 행정실태를 미루어 알 수 있으니 어찌 작은 일이라 하겠는가” 호정(浩亭) 하륜(河崙)이 지은 「촉석루기(矗石樓記)」도 소개할 필요가 있다. 하륜은 촉석루기에서 촉석루를 둘러싼 풍광의 아름다움과 진주사람의 기상, 그리고 명승에 어울리는 자연경관에 대해 담담하게 적고 있다. 누의 규모가 크고 높으며 확 트여서 굽어보면 긴 강이 그 아래로 흐르고 여러 봉우리가 바깥쪽에 벌려져 있다. 가정집의 뽕나무 밭과 삼밭, 고대(高臺)의 화훼가 그 사이로 은근히 비친다. 사람의 기상이 맑고 풍속이 온후하며, 농부와 누에치는 아낙네는 그 일에 부지런하고 효자와 어진 후손은 그 힘을 다 쏟는다. 방아노래는 마을에 연이어 울리고 장단 맞춘 뱃노래가 벼랑을 따라 퍼진다. 새들이 무성한 숲에서 절로 날고, 물고기와 자라는 헤엄치고 자맥질하여 한 구역(一區)의 만물에 이르기까지 제 자리를 얻어서 모두가 볼만하다. 유홍준 교수는 대한민국 문화유산으로서의 촉석루가 가지는 가치를 결코 평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촉석루는 경복궁의 경회루와 창경궁의 일반개방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촉석루가 갖고 있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문화유산과의 차별점은 ‘국민들과 함께 호흡하는 문화유산’으로 오랜 기간동안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계기도 마련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촉석루는 조선시대에 이어 오늘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누각(樓閣)으로 그 명성을 잇기에 충분하다. 다시, 촉석루 조선의 3대 누각(樓閣)인 진주 촉석루·밀양 영남루·평양 부벽루가 갖는 문화유산으로서의 현주소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현재 조선의 3대 누각인 촉석루·영남루·부벽루의 위상이 어떠한지 확인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밀양의 영남루는 지난 2023년 12월 국보(國寶)로 지정되었다. 평양의 부벽루는 국보 제17호이다. 반면 촉석루는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전소된 후 재건되었지만 아직도 위상을 회복하지 못하고 시도유형문화유산에 머물고 있다. 촉석루의 냉혹한 현주소이다.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되기 위해서는 국경을 초월할 만큼 독보적이고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더불어 등재과정에서 우리의 문화유산을 세계사적 시각에서 인식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여기에서 ‘연속유산’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대표적으로는 조선왕릉이다.최근에 ‘주목할만한 연속유산’의 하나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 바로 ‘누정(樓亭)’이다. ‘다시, 촉석루’라는 명제를 떠올려야 하는 이유이다.지난 2023년 12월 밀양의 영남루와 삼척의 죽서루가 보물(寶物)에서 국보(國寶)로 승격되었다. 향후 이들 누정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유적의 보존실태에 대한 심사준비는 물론 건축, 문학, 역사 등의 학술대회를 통해 인문학적 가치를 쌓아 나갈 것으로 보인다.밀양루의 역사를 살펴보자. 국보로 승격된 밀양(密陽)의 영남루(嶺南樓)는 일제강점기(1933년) 보물로 지정되었고, 1955년 국보로 승격되었다. 하지만 1962년 1월 제정된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문화재 재평가로 보물로 격하되었다. 밀양루의 국보 지정을 위해 밀양시는 지난 2014년 시민운동 차원에서 국보 승격을 위한 노력을 진행하다가 결국 취하하고 만다. 대신 영남루의 원래 지형 복원을 위해 난립한 건축물을 매입한 후 원형 복원 노력을 추진했다. 2022년에는 영남루의 건축사적·인문학적 가치를 담은 「영남루 국보 승격 학술보고서」를 제출했고,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이듬해인 2023년 12월 28일 국보(國寶)로 지정되었다.국보(國寶)였던 촉석루의 옛 위상을 다시 되찾아야 한다는 지역사회의 노력이 전개되고 있다. 촉석루는 고려 고종 26년(1241)에 건립된 이래, 783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무려 아홉 차례에 걸쳐 중수(重修)와 보수(補修)를 거치면서 묵묵히 제 자리를 지켜왔다.일제강점기인 1937년에는 보물 제276호로 지정되었다가, 1948년에는 국보 제276로 지정되었다. 한국전쟁으로 전소되면서 1956년에는 국보 지정이 해제되었고 1960년에 진주시민들의 힘으로 촉석루가 재건되었다. 이후 1983년에는 경상남도 지방문화재자료에 그치면서 2004년 지역사회에서 촉석루 국보환원운동이 일어났지만 무위에 그쳤다. 다시 2020년에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제666호 지정되었다.최근 촉석루의 원형복원을 입증할 결정적인 문서가 발견되면서 ‘촉석루의 국가지정문화유산 지정을 위한 노력’이 전개되고 있다.조현신 경남도의회 의원이 경남연구원에 촉석루 국가지정문화유산 재지정을 위한 정책현안 과제를 의뢰한 결과, 촉석루가 원형복원됐다는 사실을 증명할 자료를 입수한 것이다. 이번에 발견된 4건의 자료는 ▲일제강점기 촉석루 실측도(1937년) ▲한국전쟁 당시 소실 후 재건공사 설계도(1957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촉석루 조속복구 특별지시에 따른 원상복구 승인요청 공문 ▲원형으로 재건공사를 허가했다는 내용의 언론보도이다.이로써 국보-소실-복원의 반복이라는 불행한 역사를 안고 있는 촉석루의 국가지정문화유산 재지정에 청신호가 켜졌다. 지난 2014년 문화유산 승격 신청 당시 부결된 과제를 해결하고 조선 3대 누각의 명성을 회복할 기회를 마침내 갖게 된 것이다. 경상남도 역시 ‘조선 3대 누각’인 촉석루의 국가지정문화유산 지정을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진주성(晋州城) 촉석루(矗石樓)를 바라보면 눈 맛이 난다. 수다스런 단청도, 주책없는 니스칠도 없다. 단아하고 기품이 있으며 일체 속악(俗惡)한 것이 발을 붙이지 못한다. 추한 것들이 진정 아름다운 것들을 짓밟는 행패 속에 얼마 남지 않은 진주의 자산(資産)이자, 진주정신(晋州精神)이 살아 숨 쉬는 곳이 바로 촉석루이다. 『촉석루(矗石樓)』라는 책을 쓰면서 서문에 적은 글이다. 촉석루가 진주를 중심으로 한 인문질서의 핵심이자, 이상적인 공간으로 표현함과 동시에 촉석루가 진주의 역사성·정체성·유일성을 대표하는 ‘진주문화의 자긍심’이라는 점도 말하고 싶었다. 새로운 조선을 꿈꾼 정조가 수원 화성을 축성하면서 모방한 진주성(晋州城)과 촉석루(矗石樓). 조선시대 이래 대한민국 최고의 성(城)과 누각(樓閣)으로 명성을 떨쳤던 진주성과 촉석루의 위상을 되찾아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 2025-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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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황경규/진주향당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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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250

Story of 진주 의기 논개(義妓 論介)
의 기 논 개(義 妓 論 介) 촉석루를 뒤로 하고 가파른 바윗길(危巖)을 내려와 의암(義巖)에 오르면 시퍼런 남강 물 빛 속에 서릿발 친 여인의 눈매와 손가락 마디마디 피 멍이 물 든 가락지 낀 여인의 한(恨)이 비친다. 의기 논개(義妓 論介)가 지금 이 시간에도 진주성(晋州城) 의암(義岩) 아래 시퍼런 물속 저 어딘가에서 흉악한 왜추(倭酋)를 부둥켜 안은 채 아직도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듯하다. ‘진주성의 아우성 소리를 흘러간 과거의 아우성이 아니라, 현재 이 시점의 아우성으로 듣는 사람이 진주에 얼마나 있겠는가?’ 최근 일본의 경제침략이 노골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의기 논개의 정신이 무엇이며,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하는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논개는 진주의 관기(官妓)이다 논개는 진주의 관기였다.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의 어우야담(於于野談) 권1 인륜편 효열조에서 논개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다. 이른바 구전되어 오던 논개의 순국 사실이 기록된 최초의 문헌이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논개는 진주의 관기이다(論介者 晋州官妓也)’라는 기록으로, ‘논개는 진주의 관(官)에 소속된 기생’이라는 뜻이다. 유몽인은 사회의 멸시를 받던 기녀의 몸으로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친 의열(義烈)에 감동해 어우야담에 순국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이에 진주의 선비 정대륭(鄭大隆, 1599~1661)은 인조 7년(1629)에 논개가 순국한 남강의 바위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이어 경종 2년(1722)에는 「의암사적비(義巖事蹟碑)」를 세워 논개의 정신을 기렸다. 『충렬실록』에 의하면 정식은 당시의 우병사 최진한(崔鎭漢)으로 하여금 논개의 포상문제를 조정에 계청(啓請)하도록 끈질기게 요청하도록 했다. 이러한 노력들이 이어지면서 관기(官妓)였던 논개가 의기(義妓)로 불려지게 되는 계기가 마련된다. 의로운 기생(義妓)으로 되살아나다 영조 16년(1740) 병사 남덕하(南德夏)가 다시 의기(義妓) 정포(旌褒)를 계청했다. 그리고 마침내 논개의 의혼(義魂)을 봉안하는 사당인 「의기사(義妓祠)」가 건립되었다. 의기사는 ‘의로운 기생을 모시는 사당’이라는 뜻이다. 더불어 논개를 추모하는 제(祭)가 매년 국고의 지원을 받아 성대히 치러지면서 지루하게 끌어왔던 국가의 공식적인 포상절차가 마무리 된 것이다. 의기사는 500년 조선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기생에게 내린 사당이라는 의미가 있으며, 이른바 ‘진주의 관기(官妓)’였던 논개가 ‘의로운 기생(義妓)’으로 공인된 역사적 사건이었다.고종 5년(1868)에는 목사 정현석(鄭顯錫)의 노력으로 매년 6월에 300여명의 여기(女妓)가 가무를 곁들여 3일간 치제하는 대규모 추모행사인 ‘의암별제(義巖別祭)’를 개최했다. 의기 논개의 제향은 영조 16년 이래 250여년간 진주의 기생들이 매년 음력 6월 29일에 봉행하다가 1992년에는 ‘의암별제’가 복원되어 매년 봉행되고 있다. 논개의 순국사실이 알려진 이후, 논개 선양을 위한 진주사람들의 쉼없는 노력의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비록 논개의 신분이 천한 기생임에도 불구하고 충절(忠節)과 의열(義烈)의 교훈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의기 논개를 노래하다 의기 논개의 충절은 시대를 초월하여 많은 시인묵객들의 가슴을 두드렸고 수많은 문학작품으로 되살아났다. 이들 작품들이 공통으로 가지는 문제의식은 바로 항일의식(抗日意識)이다. 의기 논개가 가진 정신이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산(茶山) 장약용(丁若鏞)은 ‘진주의기사기(晋州義妓祠記)’를 지어 의기 논개의 정신을 기렸다. ‘보잘것없는 한 여자가 적장을 죽여 보국(報國)을 하였으니 군신(君臣)간의 의리가 환히 하늘과 땅 사이에 빛나서, 한 성에서의 패배가 문제되지 아니했다. 이 어찌 통쾌한 일이 아닌가.’ 심산 김창숙 선생도 ‘의기암’이라는 시를 통해 매국노를 준엄하게 꾸짖었다. ‘빼어나다 우리나라 역사에/기생으로 의암을 남겼구나/한심하다 고기로 배부른 자들/나라 저버리고 아직도 무얼 탐하는가’ 의기 논개 바로 알기 ‘의기 논개를 바로 알자’는 문제제기의 근본에는 논개의 출생이나 성장과정에 대한 다양한 이설(異說)이 있기 때문이다. 진주지역 이외에서는 논개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주장이 있다. ‘논개는 전라도 장수의 양반가문 출신이고, 성은 주씨이며, 최경회의 첩실 혹은 황진의 애인이다’ 인터넷 공간에 ‘논개’라는 단어를 치면 대부분 앞과 같은 내용이 펼쳐진다. 진주시민들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국민들이 ‘의기 논개’를 잘못 알고 있고, 잘못 부르고 있는 것이다. 논개의 신분과 출생에 대한 주장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조선 조정에서 내린 의암, 의암사적비, 의기사 등 논개와 관련한 역사적 유적이 진주에 소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진주가 곧 의기 논개의 역사현장이라는 의미이다. 특히 의기사는 조정에서 하사한 이름 그대로 ‘의로운 기생’을 모시는 사당이다. 논개로부터 의기라는 말을 떼버리면 논개의 위상은 그것으로 끝난다. 만약 일부의 주장처럼 앞으로도 계속 주논개나 논개부인으로 부른다면 ‘의기사’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부정하는 꼴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과거 진주사람들은 의기 논개의 죽음을 헛되이 두지 않았다. 일반 백성부터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신분을 초월해서 논개의 의열과 충절을 기렸다. 그리고 마침내 ‘관기(官妓)’에서 ‘의기(義妓)’로, 다시 ‘진주 정신’의 한 맥으로 이어왔다. 그런 반면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 2024-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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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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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712

Story of 진주 공북문(拱北門)
공북문(拱北門) 진주에 경남도청 소재지인 관찰부(觀察府)가 설치된 것은 1896년(건양) 8월이다. 당시 경남도청은 관찰부청 또는 관찰사청이라 불렸고, 지금의 도지사격인 관찰사가 집무실인 선화당에서 도정업무를 보았다. 진주성 내에 소재했던 선화당의 위치는 진주성 북장대 남쪽(진주시 남성동 73-10~11)이며, 현재 과거 선화당 자리에는 경남도청이 있었음을 알리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경상남도 탄생 100주년을 맞아 진주시와 경상남도가 관찰사 집무실인 선화당 복원을 추진했다. 당시 국립진주박물관이 「진주 선화당 복원예정부지 발굴조사서」를 통해 선화당의 실체를 확인했다. 문제는 복원부지에 이미 들어서 있는 사당의 이전이 사업추진의 걸림돌이 되었다. 사당 이전 협상이 결렬되었고, 경상남도 탄생 100주년을 기념 사업으로 추진했던 선화당 복원은 결국 무산되었다. 공북문 복원 사업 선화당 복원은 경상남도의 도청 소재지라는 진주의 역사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역사적인 사업이었다. 이에 진주시민들은 경상남도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사업의 완성을 강력히 염원했다. 이러한 진주시민들의 간절한 바람은 진주성의 내성(內城)을 지키기 위해 건립되었던 공북문(拱北門) 복원 사업으로 이어졌다.경남문화재연구원의 「진주성 공북문」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조사 보고서(2000년 2월)에 따르면 공북문은 임진왜란 이후, 병사 이수일이 진주성을 개축했던 1603년(선조 31)에 세워진 것으로 조사됐다.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진주성 병풍도」에는 공북문이 내성의 북문으로 홍예문(虹霓門) 위로 2층의 누각을 올린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는 국립진주박물관의 진주성 병풍도와 서울대학교 규장각의 진주성도와 동일하다.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진주성도 중 공북문. 진주성에 축조된 문(門) 가운데 2층으로 누각을 올린 것은 당시 내성(內城)의 공북문(拱北門)과 외성(外城)의 예화문(禮化門, 남문)이 있다. 이는 북쪽에 있는 왕을 바라보는 문으로 위엄을 갖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다른 문보다 높게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더불어 공북문 바로 앞으로 진무청(鎭撫廳)과 중영(中營)이 자리잡고 있어 공북문이 내성의 정문인 것을 알 수 있다.경남문화재연구원의 공북문에 대한 발굴조사는 공북문 복원을 위한 기초자료 수집에 있었지만, 진주성정화사업 추진 당시에 751동에 이르는 민가철거 과정에서 극심한 유구의 파괴와 퇴적층의 교란으로 정상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아쉬운 일이다.공북문 복원 사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진주성정화사업이 진주성의 역사성을 담보하지 못한 실패한 사업이라는 점은 향후 진주성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복원사업 추진에 있어서도 큰 걸림돌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공북문은 경상남도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추진되었던 선화당 복원사업의 무산을 대체한 사업이었지만, 지금은 촉석문과 함께 진주성을 대표하는 성문(城門)으로 자리하고 있다. 공북문은 2002년 5월 1일, 홍예식 2층 다락루로 복원되었다. 공북문은 200년 5월 1일 복원되었다.공북문 성벽 석각 공북문과 함께 진주성 축성(築城)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귀한 글귀가 있다. 바로 ‘공북문 성벽 석각(拱北門城壁石刻)’이다. 공북문 성벽 석각은 진주성 공북문의 서쪽 성벽의 하단부에 새겨져 있는 글귀이다. 석각은 가로 80cm, 세로 25cm 크기의 석재에 ‘강희십구년산음마병중초사천곤양하동단성함양육관일초(康熙十九年山陰馬兵中哨泗川昆陽河東丹城咸陽六官一哨)’라고 적혀 있다. 해석해보면 ‘강희 19년(1680년 숙종 6) 산 북쪽의 마병 소속의 초(哨) 병력과 사천, 곤양, 하동, 단성, 함양 등 여섯 고을의 초 병력이 힘을 모아 쌓다’라는 뜻이다.이 글귀는 진주성 수축 당시 동원되었던 사천, 함양, 단성, 하동, 곤양 등지의 백성이 자신들이 수축한 성벽 구간에 대한 일종의 구역의 표시이다. 이 공북문 성벽 석각은 진주성 축성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역사적으로 귀중한 사료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공북문 성벽 석각은 진주성 축성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공북문의 의미 공북문(拱北門)이라는 명칭은 ‘충성을 다하는 신하의 예(禮)’를 의미한다. ‘공(拱)’이라는 단어는 ‘공수(拱手, 두 손을 앞으로 모아 포개어 잡음)하여 가슴까지 올려 절하다’라는 뜻이며, ‘북(北)’은 ‘남면(南面, 군주가 정사를 볼 때 신하들이 앉아 있는 남쪽으로 얼굴을 향함)한 임금을 올려다 보는 방향’이다. 따라서 ‘공북(拱北)’은 ‘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향해 공수를 하고 절을 올린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진주성(晋州城)은 진주성 우물복원(2013년 11월)과 공북문 복원(2002년 5월 1일)에 이은 중영(中營) 복원사업 추진으로 차츰 진주성 본래의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다. 최근에는 진주시가 ‘진주성 종합정비계획’ 용역을 통해 진주성 복원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진주성복원은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진주시의 역사적 정체성을 확보하는 매우 중요한 사업이자, 한국전쟁으로 전소된 촉석루 중건사업 이후 진주 최대 역사(役事)가 될 것이다.
- 2024-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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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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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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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of 진주 비거(飛車) ②
비거(飛車) ② 비거(飛車)를 진주의 대표 역사컨텐츠로 만들기 위해서는 진주시민의 올바른 역사인식과 노력이 필요하다. 일부 문헌(文獻)과 전적(典籍)에만 드러날 뿐 실제 원형이 전해지지 않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논개(論介) 역시 유몽인의 「어우야담(於于野談)」이라는 책에 ‘논개는 진주의 관기이다(論介者晋州官妓也)’라는 한 줄의 기록에서 시작돼 진주를 대표하는 역사컨텐츠가 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거(飛車) 역시 마찬가지이다. 정확한 고증은 쉽지 않지만, 복원 혹은 재현이라는 진주시민들의 노력이 더해진다면 진주의 역사를 빛내는 새로운 역사컨텐츠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다. 비거에 대한 각종 기록과 서적 비거(飛車)는 전라북도 김제 출신의 정평구(鄭平九)가 만들었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디지털김제문화대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정평구는 전라북도 김제 출신으로 무과에 급제한 뒤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에 의해 발탁돼 진주 병영 별군관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김시민 휘하에서 화약을 다루는 임무를 맡았으며, 비거를 만들었다.’정평구와 관련한 기록은 김제군지(1917년대)에서도 발견된다. 정평구가 그의 재간을 이용해 임진왜란 때 쳐들어 온 왜군을 농락했다는 기록을 확인한 것이다. 비거를 만들어 포위된 사람을 구해내고, 군량을 운반했다는 기록도 보인다.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진나라 장화(張華)가 쓴 「박물지(博物志)」와 북송의 시인 소식(蘇軾)의 「금산묘고대시(金山妙高臺詩)」에 비거와 관련한 기록이 보인다. 추측컨대, 정평구가 이들 기록을 응용해 개발한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도 있다. 전쟁기념관 박재관 학예연구관도 비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1592년(선조 25) 10월 왜장 가등광태(加藤光泰)·등원랑(藤元郞) 등이 이끄는 2만 여명의 왜군이 전라도로 진출하기 위해서 그 길목인 진주로 몰려왔다. 왜군의 공격에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은 3,800명의 군사로 결사항전하여 격퇴하였다. 당시 조선군은 조총을 비롯한 여러 가지 장비를 이용했는데, 그 중 특이한 장비의 하나가 비거(飛車)였다.’우리나라 최초의 항공소설을 쓴 고원태씨는 자신의 저서 「잊혀진 우리 나래 비거(飛車, 2001)」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세계최초의 비행기는 우리나라 비거였다. 조선조 정평구라는 발명가가 만들었다.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보다 300년이나 이전에 만들었는데도 고증이 안됐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다 진주의 소설가인 김동민씨도 소설 「비차(연인M&B, 2017)」를 통해 ‘우리의 올바른 역사관과 국가관 및 항공우주산업에 대한 꿈과 희망이 더욱 확대됨은 물론 전 국민적 관심과 인식을 새롭게 정립하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 기획했다’고 밝혔다.이외에도 비거(飛車)에 대한 폭넓은 관심에 힘입어 비거 관련 출판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앞서 소개한 고원태의 「잊혀진 우리 나래 비거(飛車, 2001)」, 김동민의 「비차(연인M&B, 2017)」, 장진선, 장진우(서누)가 집필한 「비차(2011, 파란미디어)」, 박형섭이 지은 「진주성을 나는 비차(2015. 파란자전거)」 등이 비거의 역사와 존재를 알리고 있다. 고원태 작가의 '잊혀진 우리나래 비거' 비거의 재현 혹은 복원 비거(飛車)의 복원(復元) 혹은 재현(再現)에 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지난 2000년 공군사관학교 비거 복원팀이 현재 남아 전하는 기록들을 토대로 비거를 재현하고 실제로 비행하는 실험을 했다. 당시 공군사관학교는 건국대학교와 공동 제작작업을 통해 대략 6개월 간에 걸쳐 임진왜란 당시 사용 가능했던 대나무와 무명천, 마끈 및 화선지 등만을 이용한 1/2 크기의 실물을 재현했다. 당시 재현된 비거는 공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국립과천과학관에도 두 가지 형태의 비거 모형을 전시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전시되어 있는 비거들은 모두 후세에 추정하여 복원한 것들이다. 비거의 모형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그 형상이나 크기가 복원한 비거마다 들쭉날쭉이라 아쉬움을 더하고 있다.2017년에는 인천 하늘고등학교와 인천대학교 연구팀이 비거가 ‘유인 비행체’가 아닌 사람 형상의 허수아비를 태운 뒤 방패연에 매달아 날려 보내는 ‘교란용 비행체’라는 새로운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진주성에서의 현장 실험을 통해 비거가 사람을 태우고 날아 오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더불어 허수아비를 태운 교란용 비행체를 통해 진주성을 공격하는 왜군의 사격 분산을 유도하는 등의 효과를 보았을 것으로 추측했다.이처럼 비거가 실제 존재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논란의 여지가 남아있다. 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기록을 감안한다면 비거에 대한 공식적인 연구와 재현 혹은 복원에 대한 노력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지난 2016년 진주에서 ‘비차발전위원회’라는 민간단체가 만들어진 이후, 최근에는 진주시가 비거(飛車) 복원에 대한 의지를 밝히고 나섰다. 이러한 움직임의 이면에는 비거를 항공역사의 시초로 보고, 우주항공산업과 연계해 비거를 미래 경남의 주력산업으로 이끌고자하는 점이 내포되어 있다. 바람직한 일이다.문제는 정확한 용어의 선택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만약 비거 복원(飛車 復元)에 무게를 둔다면 철저한 고증을 거쳐 원형 그대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비거 재현(飛車 再現)에 무게를 둔다면 비거가 내포하고 있는 역사성을 바탕으로 원형에 가깝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건국대학교가 복원한 비거 모형 비거는 진주의 역사이다 비거는 이미 진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임진왜란과 진주대첩’이라는 역사성과 공간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진주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이 될 가치도 충분하다. 비거 복원 혹은 재현에 대한 진주시의 의지와 민간단체의 노력도 뒷받침 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비거를 진주의 역사로 인식하고 계승 발전시키려는 노력이다.공군사관학교와 건국대학교 기계공학부 교수, 전문가들로 구성된 비거 복원팀이 거둔 성과는 비거에 대한 우리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현재의 기록만으로 완전히 밝혀내지 못하지만 추진장치의 비밀이 밝혀진다면 비거의 형태나 크기는 지금과 달라질 수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떤 형태로든지 비거는 존재했고, 그 비거가 하늘을 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점이다.진주가 노력한다면 비거는 진주의 역사가 된다.
- 2024-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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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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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662

Story of 진주 비거(飛車) ①
비거(飛車) ① 진주의 천년역사를 관통하는 핵심 컨텐츠는 단연 임진왜란이다. 국난극복의 역사현장인 사적 제118호인 진주성과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대첩, 7만 민관군이 순국한 계사순의, 의기 논개의 충절은 진주의 역사성을 담보하고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자리하고 있다.최근 임진왜란 당시에 진주성에 등장했던 세계 최초의 비행기로 추측되는 ‘비거(飛車)’가 새로운 역사컨텐츠로 주목받고 있다. 비거의 존재시기가 426년 전인 임진왜란 당시이고, 당시 학자들의 문집에만 전해질 뿐,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역사적으로 검증된 기록에 보이지 않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하지만, 비거(飛車)가 ‘임진왜란과 진주대첩’이라는 역사성과 공간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진주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이 될 가치는 충분하다. 비거(飛車)에 대한 여러 가지 문헌상의 기록 비거에 대한 문헌상의 기록은 여러 곳에서 보인다. 신경준(申景濬)의 《여암전서(旅庵全書)》,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한글학자 권덕규의 《조선어문경위(朝鮮語文經緯》, 일본 역사서 《왜사기(倭史記)》 등에서 ‘비거’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신경준(申景濬)의 《여암전서(旅庵全書)》 잡저(雜著) 거제책(車制策)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洪武年間倭寇圍嶺邑有隱者敎邑守以車法登城放之一去三十里此亦飛車之類也人之才智不可測度有如是夫(홍무(洪武: 명나라 신종의 연호) 년간에 왜구가 영읍(嶺邑: 영남지방의 고을)을 포위하자, 어떤 은자가 읍수에게 이 거법을 가르쳐 주어 성에 올라가 쏘아 단번에 30리를 가게 하였다. 이것이 또한 비거의 종류이다. 사람의 재주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 신경준의 여암전서(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비거변증설(飛車辨證說)에도 비거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壬辰倭酋猖獗也嶺南孤城方被重圍亡在昕夕有人與城主甚善而素抱異術迺作飛車飛入城中使其友乘而飛出行三十里而卸於地上以避其鋒(임진년 왜추가 창궐 했을 때 영남의 고립된 성이 바야흐로 겹겹이 포위를 당하여 망하는 것이 조석지간에 달려 있었습니다. 이 때 어떤 이가 성주와 매우 친하였는데 평소 매우 색다른 기술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비거를 제작하여 성중으로 날아 들어가 그의 벗을 태워 날아 30리를 난 뒤에 지상에 착륙하여 왜적의 칼날에서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 기록을 살펴보면 비거의 형태와 구조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기록에 의하면 비행원리는 동체에 있는 가죽 주머니 아래쪽에 뚫려 있는 구멍을 열어 압축공기를 아래로 분출시키면서 그에 따른 반작용과 함께 공기 방석작용으로 이륙할 수 있는 힘을 얻는 방식인 것으로 예측된다.이와 동시에 비거에 탄 4명이 날개를 움직이는 줄과 연결된 기계장치를 움직여 양쪽 날개를 상하로 움직임으로써 비거가 지면에서 떠오르면서 앞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비거는 공중에서 약 100장(200m) 정도까지 떠오를 수 있었으며, 상승기류를 타면 30리까지 날아 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비거는 조선 과학자들의 꿈과 정신 조선의 학자 이규경과 신경준은 비거에 관심을 갖고 그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겨두었다. 결과적으로 400여년이 지난 지금, 이 기록 덕분에 비거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비거(飛車)를 발명한 16세기 사람 정평구, 18세기의 윤달규, 그리고 19세기 이규경과 신경준에 이르기 까지 오랜시간 동안 사라지지 않고 기록으로 이어져온 조선의 비행기인 비거(飛車).KBS 역사스페셜은 비거(飛車)를 주제로 한 ‘조선시대 우리는 하늘을 날았다’ 라는 프로그램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거는 과학기술로 백성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겠다는 조선시대 과학자들의 꿈과 정신을 말해주고 있다.’ 비거(飛車)에 대한 기록이 알려지면서 언론의 관심도 매우 높았다. 매일신보(每日新報)는 1914년 8월, 한강 변에서 개최된 비행대회를 소개하면서 ‘정평구라는 사람이 진주성에서 기계를 만들어 공중을 날아 벗을 구해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육당 최남선은 1915년에 간행된 《청춘》 4호에 ‘비행기의 창작자는 조선인이다’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비거를 만든 사람이 정평구이며 신경준과 이규경의 글을 처음으로 널리 알리게 되면서 비거가 큰 주목을 받게 된다. 이후 신한민보(新韓民報), 개벽(開闢), 조선어문경위(朝鮮語文經緯), 독립신문(獨立新聞) 등에는 민족의식 고취를 목적으로 비거에 대한 기사가 자주 게재됐고, 동아일보도 1936년 1월 1일자 신문에 「기록에만 남은 鄭平九 飛車」라는 제하의 기사를 게재하고, ‘300년전 우리 조선(朝鮮)에서 비행기 발명(飛行機發明)한 사실(事實)’이라는 내용을 전재했다. ‘飛車’ 어떻게 부를 것인가 문헌상의 기록을 보면 ‘飛車’라는 한자로 기록되어 있어, 호칭의 기준이 애매하다. 그러나 국어사전 등에 수록된 한글 발음이 ‘비거(飛車)’로 수록된 것으로 볼 때 ‘비거’로 호칭하는 것이 옳은 것으로 보인다.‘車’라는 한자가 통용되는 사례를 볼 때 크기가 작은 것은 ‘차’라고 읽었고, 큰 것은 ‘거’라고 읽었던 사실에 비추어볼 때 ‘飛車’는 당시의 우마차 보다 훨씬 큰 구조물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飛車’가 ‘비차’로 호칭되기 시작한 것은 2000년 4월 8일 KBS 역사스페셜에서 방영된 ‘조선시대 우리는 하늘을 날았다’ 이후부터 비차라는 이름으로 병기하거나 괄호 속에 넣는 방법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하지만 이후 MBC, KBS 라디오방송 등 비거관련 프로그램의 바른 용어 사용으로 최근에는 ‘비거’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화되고 있다.실례로 비거가 복원되어 전시되어 있는 국립과천과학관의 설명 패널에도 ‘조선시대의 비행기 비차’였지만 최근 ‘조선시대의 비행기 비거’로 설명 채널을 바꿨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 2024-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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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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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6

Story of 진주 남강댐과 진양호
남강댐과 진양호 남강댐이 올해로 준공 55년을 맞았다. 낙동강치수사업의 일환으로 지난 1969년 건설된 이래, 서부경남 100만 지역민에게 생명수를 공급하고, 홍수피해 등 재해로부터 지역민의 안전을 담보해 온 남강댐은 우리나라 다목적 댐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이듬해인 1970년에는 남강댐 건설로 형성된 인공호수인 진양호(晋陽湖)가 건설되었다. 무려 7년 6개월간의 공사 기간을 거쳐 준공된 진양호는 진주 8경중의 하나로 지정될 만큼 수려한 자연경관을 자랑하며 진주시와 서부경남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자리매김해왔다. 남강댐과 진양호의 건설은 서부경남의 재해예방 첨병역은 물론, 진주에 부족했던 문화레저 공간을 제공하며 지역민과 함께 영욕의 50년 세월을 함께 해왔다. 남강댐 건설의 역사 남강댐 건설에 대한 최초의 논의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20년(1796) 5월 8일 임자(壬子)의 기록에 의하면, 장재곤(張載坤)이라는 사람이 ‘경상도 13개 읍의 농지화 가능성’을 위한 제방 건설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제기한다.“진주 너우니(廣灘)와 지소두(紙所頭) 아래에 제방을 만들고 방수로를 사천만으로 뚫으면 낙동강 하류 경상도 13개 읍이 홍수의 위험으로 벗어나 좋은 농지로 만들 수 있다”시대를 앞선 장재곤의 이러한 건의는 경상도 관찰사인 이태영(李泰永)의 장계에 의해 ‘거짓말’로 낙인되어 실현을 보지 못했다. 진주는 예로부터 풍수해로 인한 자연재해가 많았다. 진주의 대표적인 풍수해와 관련한 기록을 살펴보면, 일제강점기인 1920년 경신년 대홍수를 시작으로 1925년 을축년 홍수와 1933년 계유년 홍수, 1959년 사라호 태풍에 의한 홍수 등이 있었다.그 가운데 1936년에 발생한 병자년 대홍수는 진주지역에 전무후무한 큰 참화(慘禍)를 안겼다. 당시 기록을 보면 1936년의 병자년 대홍수는 칠암동, 본성동, 남성동, 동성동, 장대동, 대안동, 중안동, 계동, 인사동, 봉곡동, 상봉동 등이 침수되는 피해를 입었다. 특히 인사동과 대안동, 장대동, 본성동, 동성동 등은 완전 침수라는 대재앙을 맞이해야 했다.당시 피해상황을 보면 사망 5명(진주읍 4명, 대평면 1명), 완전히 파괴된 가옥 500여채를 비롯해 반파가옥(1,397채) 등의 피해를 입었고, 토지의 침수는 물론 도로·교량·제방 등의 유실로 인해 당시 520만원이라는 초유의 피해액을 기록하기도 했다. 낙동강치수사업과 남강댐의 건설 일제강점기인 1920년부터 1925년까지 낙동강 개수계획 수립 당시 남강댐 지점을 선정하고 1926년 개수공사에 착수해 1934년 완료되었다. 1932년 8월에는 진주시민들이 ‘남강치수문제 진주시민대회’를 개최하는 등 진주를 비롯한 서부경남의 홍수피해 방지를 위한 남강치수문제의 해결을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남강치수문제는 지지부진했고, 1936년 병자년 대홍수 이후에야 낙동강 홍수 피해 복구와 사천만 방수로 굴착공사가 시작되었다. 당시 추진된 남강치수사업에 대한 기록은 동아일보 기사(1938년 10월 1일)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동아일보는 기사를 통해 남강치수공사의 연혁과 향후계획에 대해 자세히 보도했다.남강댐 1차 착공의 일환이자 낙동강 홍수피해 복구를 위한 사천만 방수로 굴착공사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1943년 공사가 중단된다. 해방 이후 1949년 중단된 공사가 다시 시작되었지만 이듬해인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또다시 공사는 중단되었다.전후복구 시기인 1962년 4월 남강댐 공사가 다시 시작되었다. 박정희정부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사업에 남강댐 건설이 포함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다목적댐으로 건설하게 된 것이다. 이후 남강댐은 7년여의 사업기간을 거쳐 마침내 1969년 10월 7일 준공하게 되지만 1981년 9월 진주를 휩쓴 대홍수로 인해 남강댐 보강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를 계기로 1989년 남강댐 숭상공사에 들어간 구 남강댐은 1998년 7월 16일 폭파되어 자취를 감췄고, 1999년 현재의 남강댐으로 그 면모를 일신하게 된다. 대홍수로 인해 촉석루에 빨래를 널어 건조하는 모습(1933년) / 윤방 진주의 대표적인 관광단지 진양호의 탄생 남강 다목적댐은 수력발전을 비롯해 농업용수공급, 홍수방지, 관광 등 여러 가지 용도를 목적으로 건설한 댐이었다. 특히 남강댐은 다른 댐들과 달리 홍수조절과 관광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따라서 남강댐에 ‘진양호’라는 관광단지가 조성된 것이다.진양호는 경호강과 덕천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인공호수로 유역 면적 2,285㎢, 저수량 1억 3600만 톤으로 7년 6개월의 공사 기간을 거쳐 1970년에 준공되었다. 그 후 1999년 10월 댐 보강 공사가 완공되어 현재는 저수량 3억 920만 톤 규모로 확대되었다.수려한 자연경관과 어우러진 진양호는 진주시민과 서부경남도민들이 이용하는 관광지이자 휴식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진양호 공원은 전망대와 동물원을 제외하고는 관광객들이 이용할만한 공원시설이 적어 관광객의 감소 등 쇠락의 길을 걸어왔다. 진양호 공원 활성화에 대한 요구는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지만 구체적인 활성화방안 마련에 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남강댐과 진양호의 새로운 도전 남강댐 준공 50돌을 맞아 한국수자원공사는 ‘미래 50년 비전 선포식’을 가졌다. 최신 기술이 결합된 수력현대화사업을 비롯한 다양한 비전사업은 물론 남강댐 수몰지구와 인근 지역민을 위한 지역환원사업으로 새로운 남강댐의 출발을 알렸다.진양호 역시 진주시의 ‘진양호 르네상스 프로젝트’의 추진으로 공원기반시설정비와 레저·문화·생태가 어우러진 복합문화 체험공간으로 재탄생할 예정이다. 진주시는 진양호공원 활성화를 위해 가족과 함께 편안하고 쾌적하게 즐길 수 있는 진양호 근린공원과 지역관광과 연계한 찾고 싶은 문화공원, 4계절 축제와 이벤트가 있는 특별한 모험공원, 울창한 숲과 자연이 함께 하는 건강한 힐링공원 등이 조성된다.남강댐의 새로운 출발과 진양호의 부흥 프로젝트가 가시화된다면, 지역민과 애환을 함께 한 남강댐과 진양호는 명실상부한 전국 최고의 대표공원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보인다.
- 2024-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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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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