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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사람) 7. 장충석(張忠錫)- 아낌없이 주는 나무 썸네일 이미지

피플&스토리 (진주사람) 7. 장충석(張忠錫)- 아낌없이 주는 나무

추담(楸潭) 장충석(張忠錫) 근검절약, 사회봉사 외길 경상남도가 경남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선정한 ‘자랑스런 경남 100인’ 중의 한 사람인 진주사람 추담(楸潭) 장충석(張忠錫, 1922~2011). 그의 삶을 되돌아보면, 오로지 ‘근검절약’과 ‘사회봉사’의 외길을 걸어 왔음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는 대한민국 제1호 세무사로서 한국세무사회의 창립멤버이자, 사회봉사단체인 진주라이온스클럽 창단멤버로 47년간 봉사했다. 만학도(晩學徒)의 삶 역시 그에게는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여는 신선한 시도였다.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의 눈에는 지역의 인재육성이라는 새로운 삶의 목표가 들어왔다. 고희를 맞은 1991년에 추담장학재단이 설립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추담장학재단은 지금도 그의 뜻을 이어 지역발전을 위한 연구와 인재육성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경남탄생 100주년을 맞아 경남도가 선정한 ‘자랑스런 경남인상’을 수상한 것은 자랑스런 진주사람이자 그의 삶이 타인의 모범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일이었다. 추담의 행적은 캡술에 보관돼 후세 사람들에게 길이길이 그 전범(典範)이 되고 있다.사후에 경상대학교에 그의 시신과 장기 기증을 약속한 추담은 일일이 기록하기 힘들 정도의 봉사활동을 해왔고, 그 결과 2001년 ‘제1회 진주시민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게 된다. 그리고 10년 후인 2011년 추담 장충석은 영원히 진주를 떠났다. 추담은 2001년 제1회 진주시민상, 2002년 대통령상, 2006년 경남문화상을 수상했으며 2007년에는 제44회 저축의 날을 맞이하여 저축 유공자로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훈하기도 했다. 저서에는『삶의 지평』『旅窓에 비친 南美大陸』가 있다. 자린고비 세무사 추담 장충석은 대한민국 제1호 세무사로서 한국세무사회의 창립 멤버이다. 1962년 2월 10일, 은행집회소에서 열린 한국세무사회 창립총회에서 133명의 회원 가운에 당당히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세무사로서의 그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세무사로서의 삶을 시작한 그의 미래가 탄탄대로가 될 것임은 누구도 의심치 않았다. 더군다나 1호 세무사라는 자부심과 그의 앞에 열린 탄탄대로는 무작정 걷기만 해도 부와 영예는 예약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진주에서 유명한 ‘자린고비 세무사’로 불렸다. 자신의 집에서 회계사무소까지 왕복 8km에 이르는 거리를 하루도 빠짐없이 도보로 출퇴근을 했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 흔한 자동차 한 대도 사지 않고 평생을 걸어다녔으니 더 할말이 없다. 하지만 그의 그러한 근검절약 정신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추담의 어머니가 몸소 실천한 봉사하는 삶을 보고 배우며 자랐기 때문이다. 추담의 어린시절 어머니의 삶은 다음과 같았다. ‘제가 어릴때 어머니께서는 끼니 때가 되어 거지가 찾아 오면, 당신의 밥을 거지에게 주고 굶을 때가 많았다’ 2007년 저축의 날을 맞아 저축유공자로 선정돼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은 추담의 회고담이다.어머니의 근검절약과 봉사하는 삶을 배우고 자란 추담에게 ‘절약과 봉사’는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흔한 자동차 한 대도 없이 도보로 출퇴근했던 그의 삶이 결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남을 위해 살자’는 생활신조는 그렇게 자신의 인생 대부분을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한 삶을 살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생활신조는 일상생활에서 철저히 실천되었다.근검절약하는 삶을 산 추담은 무려 400여개가 넘는 통장을 가질만큼 넉넉했지만, 3천원짜리 점심을 사먹을만큼 그의 검소한 생활은 그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절약하는 습관에 이어 그만의 재테크 비법을 소개하기도 했다. 세무사라는 직업을 갖게 된 이후, 그는 진주의 한 금융기관과 거래를 했다. “한 금융기관과 거래를 하면 신용도도 쌓이고 VIP 대접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만의 노하우다. 추담장학재단 설립 추담이 오로지 돈을 버는데만 매달린 것은 아니다. 평소의 경제관념을 알게 해주는 그만의 신념이 있었다. ‘돈 버는 자랑을 하지 말고, 돈 쓰는 자랑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자린고비 세무사로 이름났던 추담은 이렇게 아껴 모은 돈으로 1991년 ‘추담장학재단’을 설립하게 된다. 1991년 10월 고희연을 맞은 추담은 추담연구장학재단 발기인 총회를 열고, 12월 18일에는 1억원을 출자해 재단설립신청을 하면서,「추담장학재단」이 결실을 맺게 된다.추담장학재단은 현재 5억원의 출자금을 기반으로 지역의 어려운 학생들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을 전하는 소중한 재단으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1992년에 등록허가를 마친 추담장학재단은 이듬해인 1993년 제1회 연구비 및 장학금 수여식을 갖고 교수(2명)와 학생(12명)에게 총 1천만원을 지급하게 된다. 이어 1994년에는 1,550만원, 1994년에는 5,000만원을 출자한데 이어 1995년에는 1,980만원, 1997년에는 2,480만원 등 지난 2001년까지 수혜금액은 2억1,590만에 이르렀다. 추담이 별세한 2011년부터는 장학재단이 경상대학교로 이관되면서「추담연구재단」으로 명칭은 변경됐지만, 추담의 설립 취지에 맞게 교수와 학생에게 연구지원금과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추담은 추담장학재단 설립과 관련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생을 두고 나 자신의 힘으로 남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길 늘 기대해 왔다. 비록 만학도의 몸이긴 하지만 69세 되던 해에 경상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사과정을 거치면서 낙후된 지방대학의 육성 발전을 위해 견실한 장학재단의 설립이 시급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추담장학재단을 설립하게 된 것이다.” 당시 추담이 가졌던 지방대학의 발전과 인재육성의 중요성. 그것은 만학도로서의 삶을 산 추담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만학도(晩學徒)의 삶 69세의 만학도 추담 장충석이 석사모를 쓰던 날, 그의 지나온 삶에 대한 언론의 관심이 집중됐다. 자린고비 세무사에 저축왕으로 이름났던 추담이 만학도(晩學徒)로서의 새로운 삶을 걷게 된 이유는 여러모로 언론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던 것이다.‘배움에 있어서는 청춘’이라는 이야기를 자신있게 할 수 있었던 건, 추담이 비교적 넉넉한 세무사 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학문에의 끊임없는 욕구 때문이었다. ‘어떤 형태로든 기회만 닿으면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고 말해왔던 추담은 끊임없는 업무와 노령으로 인한 건강쇠약으로 소망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던중 지난 1988년 경상대학교에서 1년 과정의 경영자반 학생을 모집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1년 정도면 늙은이도 어떻게든 할 수 있을것 같았다’는 추담은 선뜻 마음을 내어서 원서를 제출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원서마감과 동시에 경영자과정이 없어지게 되었다. 결국 추담은 ‘큰 맘 먹고’ 석사과정에 등록을 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만학도로서의 삶은 박사학위를 취득하는데까지 이르게 된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경상대학교 경영행정대학원에 진학하긴 했지만, 칠순을 눈 앞에 둔 노령의 몸으로 경영전공서적을 들여다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난생 처음 대하는 영어는 큰 고민거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담은 1학년 1학기를 우수한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기도 했다.추담은 끊임없는 노력으로 계속 장학생에 선발됐다. 그런 그가 떠올린 생각 하나. ‘나는 장학금을 받지 않아도 공부를 할 수 있는 형편이지만 젊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결국 추담은 자신이 받은 장학금을 가난한 학생에게 주기를 권하며 자신은 사양했다. 그의 만학도로서의 삶은 계속 이어졌다. 2학년때는 그 어렵다는 종합시험도 거뜬히 통과한 추담은 논문심사도 무사히 통과했다. 그의 석사학위 논문은「기업합병에 따른 세무회계처리에 관한 연구」이다.1989학년도 학위수여식에 참석한 추담은, 69세의 최고령 학위수여자로 주위의 부러움과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만학도로서의 첫 꿈이 비로소 이루어지던 순간이었다.추담의 학력을 보면 1946년 9월 30일 진주사범 교원양성학과 졸업, 1957년 경남대학교 졸업, 1990년 8월 25일 경상대 경영대학원(경영학석사) 졸업에 이어, 5년 뒤인 1995년에는 경남대학교 대학원 경영학 박사과정을 밟았다. 그의 나이 74세였다.세무사로서의 그의 삶이 그랬듯이 만학도로서의 삶 역시, 그에게는 하나의 끊임없는 도전이었고 결국에는 화려한 꽃을 피워냈다. 자랑스런 경남인 추담은 경상남도가 경남도 탄생 100주년을 맞아 선정한 ‘자랑스런 경남인 100인’에 선정됐다. 경남의 명예를 드높인 경남인 100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된 영예를 얻은 것이다. 그의 삶 곳곳에 깃들어 있는 교훈은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자린고비 세무사, 저축왕, 장학재단, 만학도로 대표되는 추담의 삶에 있어 또 하나의 흔적을 찾는다면 단연 ‘지역에 대한 봉사’이다. 1964년 국제 라이온스클럽 진주라이온스클럽 창립 멤버로 새로운 지역봉사의 지평을 열었다. 진주라이온스클럽 창단 이후 47년간 계속된 그의 사회봉사활동 경력은 아직도 모범사례로 남아 있다. 시내에 거주하고 있는 동거인 합동결혼식을 개최한 것은 물론 1991년 고희연때에는 2명의 소년 소녀 가장에게 각 200만원의 성금으로 국민주택에 입주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민주화 시민정신운동과 관련해 김동길 교수 초청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지역의 정신문화 개선에도 그 흔적을 남겼다.1992년 4월에는 180만원의 봉사금을 쾌척해 국제재단 Melvin Jonce Fellow 회원이 되었으며, 1996년에는 경남탄생 100주년에 즈음하여 ‘자랑스런 경남 100인’에 선정되어 캡슐에 그의 공적이 보관되어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진주발전을 위한 그의 헌신도 적지 않았다. 이남두 진주시장 재임시절에는 ‘민간인 토지감정평가 위원’에 위촉돼 남강교~새벼리 도로 2차선 확장 공사 당시 강남동과 칠암동쪽 토지를 감정가로 매입하여 현재와 같은 4차선 보도를 설치하는데 공헌을 했다.또한 진주시 지방세 심의위원으로 활동한 것은 물론 한국산업경제학회 고문으로 경제부분에서 활약을 하기도 했다. 삶의 지평 추담은 지난 1997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마지막 삶의 목표에 대해 밝힌 적이 있다. 평생을 근검절약과 봉사로 살아온 그의 마지막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만년에 배움에 대한 열의로 가득찼던 그가 가진 마지막 소망은 진주의 인재를 키우는 장학사업이었다.추담장학재단은 그가 작고한 뒤에도 여전히 지역의 인재들에게 꿈과 희망이 되고 있지만, 그의 속내는 진주발전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많이 연구자들과 학생들에게 혜택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사람이 밥을 하루에 한 그릇을 먹든, 두 그릇을 먹든, 죽을 때는 돈 한 푼 가져 갈 수 없어. 쓸데없는 물욕이 사람을 망치는 길이야” 추담의 말속에는 욕심없이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사는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삶에 제법 어울리는 삶을 사는 것도 중요하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내가 진주에서 살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았는데, 이제는 사회에 환원하고 싶어” 그는 생전에 한 푼이라도 더 아껴 장학금을 만들고 싶어했고, 그 장학금으로 지역발전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어 우수한 인재가 육성되어 장래 진주의 발전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고자 했다.추담은 생을 마감하기 전에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은 학구파였으며, 여전히 집에서 그의 직장까지 왕복 8km의 거리를 걸어다녔으며, 3천원 짜리 소박한 밥으로 점심을 해결하는 자린고비 세무사였다.담배를 피우지도 않았고, 매일 아침 세숫물을 변기에 부어 물을 아꼈던 추담. 평생을 세무사로 살았지만 자신의 명의로 된 재산이라고는 땅 한평도 없다. 그리고 추담은 자신의 시신과 장기를 경상대 의과대에 기증하기로 약속했고 실천했던 ‘아낌없는 삶’을 살았다. 진주시민상 수상 진주시의 명예를 빛내거나 지역발전에 공이 있는 진주시민을 대상으로 수여하고 있는 ‘제1회 진주시민상’에 추담이 선정됐다.진주시민상은 체육 및 지역발전에 공헌해온 사람에 대해 부문별로 시상을 해왔던 진주시문화상이 대상자가 줄고 권위가 없다는 지적에 따라 2001년부터 진주의 명예를 빛냈거나 지역사회 발전에 공헌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을 선정해 시상하는 상이다.추담이 처음으로 제정된 진주시민상에 선정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적어도 그가 걸어왔던 89년 삶 가운데 거의 대부분이 진주에 있었고, 그의 다양한 활동 역시 진주발전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저축유공자로 선정돼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은 뒤 그의 인터뷰는 너무나 평범하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었다.“요즘 대학까지 애들 교육하려면 돈도 많이 든다는데 국민 저축률이 떨어져서 걱정입니다.적게 벌더라도 아껴 쓰고 장래를 위해 반드시 저축해야 한다”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그 일은 추담은 평생을 실천했다. 오늘날 자신만의 삶의 방향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럴때 추담 장충석이 걸어온 길을 한 번 되돌아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그는 그의 삶의 원천이었던 세무사 생활에 한 치의 빈틈도 없었고, 어머니의 근검절약 정신을 이어받아 검소했으며, 자신을 위해 돈을 쓰기 보다는 사회를 위해 사랑의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자신은 한 평의 땅도 소유하지 않은 채 자연으로 돌아갔다.진주사람 추담 장충석은 그렇게 살았다. ▲ 학력1946. 9. 30 진주사범 교원양성과 졸업1957. 3. 15 경남대학교 경제학과 졸업1990. 8. 25 경상대학교 경영대학원졸업(경영학석사)1995. 3. 경남대학교 대학원 경영학박사과정 ▲경력1946~1950 초등학교 교사1951~1961 재무부산하 세무서 주사1961~2011 한국 제1호 세무사개업1964. 10. 17 진주라이온스클럽 창립멤버1992~ 추담장학재단 설립 ▲포상1975. 5 경남팔각회 총재 공로패1980. 10 진주경찰서장 감사패1980. 10 라이온스 317-C지구총재 표창패1984. 11 라이온스 한국복합지구의장 공로패1988. 4 한국세무사회장 거북이금상패1992. 4 한국세무사회장 공로패1994. 5 부산지방세무사회장 봉사상1996. 8 라이온그창시자 Melvin Jonce Fellow상1994. 한국세무사회장 봉사상1999. 진주시장 표창장1996. 8 자랑스런 경남도민상2001. 10 진주시민상2002 대통령상2006 경남문화상2007 국민훈장 목련장

  • 2026-05-06
  • 작성자

    황경규/진주향당 상임고문

  • 조회수

    28

(STORY OF 진주2) 11. 1966년 화마(火魔)가 중앙시장을 삼키다 썸네일 이미지

Story of 진주 (STORY OF 진주2) 11. 1966년 화마(火魔)가 중앙시장을 삼키다

1966 화마가 중앙시장을 삼키다 진주에는 ‘날三子’라는 말이 있다. 진주에서 돈 벌어서 부자가 된 사람은 3대 째가 되면 진주를 떠나야 한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말이다. 이는 시장교역(市場交易)의 이동성(移動性)을 의미한다. 더불어 객지에서 오는 사람들이 많다는 의미와 함께 치부(致富)한 재산은 자손들이 관리하기 어렵다는 뜻도 갖고 있다. 더불어 1862년 진주농민항쟁운동과 형평운동, 경남도청 이전 당시 촉석루와 배다리를 가득 메워 진주의 정신을 보여준 이들도 바로 진주의 상인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진주의 시장역사(市場歷史)는 진주시민이 새로운 문물을 교환하고 개척하는 역사(交換開拓史)이면서 민권운동의 중심 세력사(勢力史)이자, 진주의 모든 행사의 전위사(前衛史)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예로부터 인구가 모이고 농업이 풍성하며 교통의 중심지인 진주에 자연스럽게 저자(市場)가 생겨난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리고 시장에 구름 같이 사람이 모여 들면서 진주는 전국 5대 시장의 하나로 발전해 나갔다. 이후 ‘진주장(晋州場)’으로 불렸던 중앙시장은 경남 경제의 총본산이었던 진주상무사의 중심 교역장으로 발전했다. 더불어 중앙시장을 비롯한 진주지역의 시장(市場)은 진주 경제의 뿌리인 시장경제(市場經濟)의 출발점임과 동시에 진주 서민들의 경제생활을 주도하는 든든한 버팀목으로 오늘에 이어지고 있다. 성내시장(城內市場)과 북문통시장 진주에는 사전(四廛)이 있었다. 진주에는 장터가 두 군데 있었는데 첫 번째 시장이 관아(官衙)의 감독을 받았던 성내시장(城內市場)이다. 당시 성내시장은 옛 세무서 앞에서 제일극장까지였다. 지금의 공북문 앞에서 촉석문까지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민간 시장의 형태로 농산물을 교역했던 농산물 장터인 북문통 시장이다. 옛 경찰서 자리이다. 그리고 당시에는 점포 형식이 아닌 노점이었다. 갑오개혁을 거치면서 시전의 특권이 완전히 폐지되고 상인들의 자유화가 이루어지면서 진주장(晋州場)은 크게 번성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일본 자본이 상륙하면서 시장은 그 기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당시 성내 시장은 현재의 진주경찰서 서쪽에서 한동안 성시를 이루었으나 끝내 사라지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일본인과 일본 자본이 대안동과 동성동 일대를 사실상 점거하면서 시장의 확장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에 따라 성내시장과 성외시장은 통합을 이루게 되고 명칭도 진주시장진흥회(晋州市場繁榮會)로 바뀌면서 조국의 해방을 맞게 된다. 이것이 근대 진주 시장의 시작이다. 옛날 중앙시장 거리들 사단법인 진주중앙시장번영회가 지난 1982년 발간한 『진주중앙시장 백년사(1982. 금호인쇄)』를 보면 일제강점기 당시의 시장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있다. 진주시장의 과도기는 1910년 일제의 강제 한일합방에서 3·1운동 이후, 1930년까지이다. 당시 성내장터는 이미 폐철된지 오래였고, 지금 장터는 진주의 대사지 건너 북문과 남문의 동북쪽에 있었던 정식 공설시장이 번창했다. 시장 서쪽에는 북문통(北門通)이라는 신작로개 개설되었고, 시장 쪽으로 경찰서, 의용소방대가 있었으며, 서쪽 편에 금융조합, 상업은행, 남쪽에 식산은행이 있었다. 당시 중앙시장의 의령길(시장 중앙) 남쪽에 ‘보리전’과 ‘쌀전’이 있었다. 길 양편에는 ‘잡화전(雜貨廛)’와 ‘포목전(布木廛)’, ‘고무신전’이 있었다. 북쪽으로는 ‘비단전’과 ‘야채전’, 그리고 장새미골목쪽으로는 ‘나무전’이 있었다. 고정점포는 객주업자가 제일 처음 지었고, 병자년(1936) 물난리 이후에는 고정된 현대식 점포가 들어섰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중앙시장은 그야말로 폐허가 된다. 포탄에 산산조각난 시장의 모습은 아비규환 그 이상이었다. 하지만 중앙시장 상인들은 그 폐허를 딛고 일어선다. 그리고 중앙시장이 제 자리를 잡아가는 와중에 최대의 시련과 마주친다. 바로 1966년 중앙시장의 대화재이다. 진주중앙시장을 삼키다, 1966년 대화재 사단법인 진주중앙시장번영회는 지난 1982년 『진주중앙시장 백년사(1982. 금호인쇄)』를 발간했다. 당시 안승균 진주중앙시장번영회장은 발간사에서 ‘고종 21년(1884) 1월에 결성된 진주상무사(晋州商務社)의 사전청금록을 근거로 백년사라는 표제를 붙였다. 경남 경제의 총본산으로서 진주장은 그 중심 교역장이었으나 그 밖의 기록은 찾을 수가 없었다’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중앙시장 백년사’에는 중앙시장 관계자들의 증언과 1966년 중앙시장을 덮쳤던 대화마(大火魔)에 대한 기록과 생생한 사진이 실려 있어 중앙시장에 대한 기록물로서의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중앙시장이 불길에 휩싸인 것은 1966년 2월 6일 오후 10시이다. 화마가 덮친 중앙시장은 다음 날인 2월 7일 아침 나절이 되기도 전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성한 점포가 거의 없었다. 상인들은 땅을 치며 통곡했다. 그렇게 중앙시장은 불과 몇 시간 만에 모든 것을 잃었다. 중앙시장 대화재 이튿날인 2월 7일 진주시내 기관장과 상공인, 금융관계인, 유지들로 구성된 ‘화재대책위원회’가 긴급소집되었다. 중앙시장 대화재 수습방안 등이 논의되었다.중앙시장 대화재 소식이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1966년 2월 8일 중앙조사반이 화재현장을 방문했다. 진주중앙시장회의실에서 중앙조사반에게 화재복구 계획을 설명한데 이어 정부의 도움을 요청했다. 상인은 물론 진주시민들의 성금답지가 이어졌고 중앙시장은 신속하게 복구되었다. 화재 후 불과 3개월 여만인 1966년 5월 수정동과 대안동 일대의 가설시장이 문을 열었다. 중앙시장 복구공사 기공식은 1966년 5월 20일이다. 당시 기공식에는 하병렬 회장과 진주지역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중앙시장 복구공사는 7개월만인 1966년 12월 15일 완공되었다. 당시 중앙시장 화재로 피해를 입은 옥봉북동 이재민을 위한 주택 52동도 신축되어 제공되었다. 이후 중앙시장은 여러차례의 변화를 꾀하면서 오늘날 진주를 대표하는 시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중앙시장을 비롯한 진주의 재래시장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정부차원의 재래시장 활성화 정책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재래시장 활성화는 요원한 실정이다. 중앙시장 백년사에 ‘진주시장사 서설’을 쓴 이명길 전 한국예총 진주지부장의 글 가운데 중앙시장과 관련한 일화가 적혀 있다. 사실 처음 이름과 이야기라 묻기도 하고 자료를 찾아 보기도 했지만 알 수 없었다. 기인(奇人) 설대장사 박돌(朴乭)과 三수, 상인후견인 이무엽(李武燁), 진주시(晋州式) 놀음선수인 서울 덕수(德洙), 글 잘 쓰는 문술(文述)과 두 덕수(德洙), 설치기 조득제(趙得濟) 일화를 잘 아시는 분의 친절한 설명을 기대한다.

  • 2026-05-05
  • 작성자

    황경규/진주향당 상임고문

  • 조회수

    32

진주평론 로고

진주평론 주최 진주사투리문화제 잘 마쳤습니다

진주평론이 주최한 2026 진주사투리문화제가 지난 4월 18일(토)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 일원에서 개최되었습니다.사투리경연대회에 참여해 주신 경연자 여러분의 수준 높은 사투리 구사실력과 알찬 준비로 행사가 더욱 빛났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일반부에는 문옥희님이 유치초년부에서는 정서우 학생이 최우수상을 받았습니다. 우천예보로 인해 한 차례 행사가 연기되었음에도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진주평론은 진주사투리의 전승과 보전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특히 이번 행사는 진주의 청년CEO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무료 봉사로 더욱 뜻깊은 행사였습니다. 진주사투리문화제에 힘을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진주평론 황경규 적습니다.

  • 2026-04-24
  • 작성자

    jhrso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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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평론 기득권이 사람의 뇌를 바꾼다

기득권이 사람의 뇌를 바꾼다 거의 난장판을 방불케 하는 오늘날의 세태 속에서 유독 정치만이 정연하기를 바라는 건 어쩌면 개인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헤게모니를 둘러싸고 철 따라 때 따라 이합집산(離合集散)하며 기득권을 쫓는 집단이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는 그 오래된 환상 속에서 늘 헤맬 뿐이다. 짐작컨대 아직도 우리 진주는 기득권 패거리의 망령으로부터 벗어나기에는 아직 멀다. 개혁(改革). 무릇 그 개혁을 외쳐 온 지가 언제부터인가. 그러나 그 개혁은 민망하게도 우리의 열망과 비례하지 않았다. 어쩌면 기득권 세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빌미만 제공했을 뿐이다. 그래서 사회 일각에서 외쳐대는 개혁은 여전히 실감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권력에 빌붙은 자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길어지고 있다. 반면 권력의 눈 밖에 난 자들의 보호장치는 점차 허물어지고 있다. 선거 때마다 새로운 귀속의 대상을 찾아 헤매는 정체성의 위기에 내몰린 지도 오래이다. 장밋빛 그림은 오직 권력자와 기득권의 몫일 뿐이라는 회의 섞인 우려가 사회 전반에 가득 채워지고 있다. 그것이 오늘날 진주의 현주소라면 오버센스한 것일까? 이대로 간다면 극단의 길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그 누군들 극치의 어둠을 거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짧게 본다면 어둠의 현실은 더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의 긴 호흡으로 본다면 끝내 어둠의 현실에 고분고분하지 않을 진주시민다운 저력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천년 진주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깨어난 인간이라야 어둠의 역사를 빛으로 구원한다’는 함석헌 옹의 말투를 빌리자면 그렇다. 선거를 앞두고 시민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정치의 하늘을 여는 일이다. 정치의 하늘이란 무엇인가. 오염된 세력들의 ‘헤쳐 모여’가 아니라 진주의 새로운 대의를 여는 일이다. 그리고 이 땅의 정치인들이 선거 때마다 그토록 앵무새처럼 되뇌어온 ‘민심 천심’의 그 하늘이다. 진주의 정치가 리더를 자처하는 자들의 독단과 기득권의 밀실거래만으로 좌지우지되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선거를 앞두고 질문을 던진다. 왜 기득권과 권력자들은 하늘에 묻지 않고, 그들 스스로 하늘인 양 위장하고 있는가. 이번에야 말로 제대로 된 보석을 잘 살펴 가리고 골라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진주의 하늘을 뒤덮고 있는 ‘힘 있는 쪽의 유리’, ‘힘 없는 쪽의 불리’라는 오래되고 케케묵은 공식을 이 땅에서 지워낼 수 있다.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어버린 이 땅의 질서를 되찾는 길은 단 하나이다. 그것은 난장판을 다듬어 내고 정연한 저자 마당을 펴내고자 하는 진주시민들의 각성과 행동이다. 천년 진주를 지탱했던 도리(道理)가 땅에 떨어졌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예의염치가 사라지고, 과거 진주를 이끌었던 앞소리꾼의 기개와 절개 역시 아침이슬처럼 사라진 지 오래다. ‘권력과 이권’의 유혹 앞에 앞뒤 가리지 않고 불나방처럼 달려든다. ‘인간성의 상실’은 참아도 ‘기득권의 상실’은 참을 수 없다는 식이다. 권력과 기득권을 움켜 쥔 사람들이 도덕적 우월감까지 누리면서 그걸 무기 삼아 시민에게 호통을 치고 있으니, 이 어찌 놀라운 진주의 현실이 아닌가.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을 맞아 남명 조식의 단성소(丹城疎)와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을 꺼내 읽어 본다. 단성소는 권력 앞에서 당당히 진실을 말한 양심선언이며, 서리망국론은 서리들의 무능으로 인해 국가와 조직이 무너지는 구조를 꿰뚫어 본 정치철학이다. 남명이 무소불위의 권력 앞에 던진 이 두 가지 질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해야 한다. 그리고 이번 지방선거는 남명의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이어야 한다. 그래야 천년 진주임이 증명된다고 굳게 믿는다. ‘기득권이 사람의 뇌를 바꾼다.’는 말을 실감하게 되는 요즘이다.

  • 2026-04-16
  • 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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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사투리문화제 4월 18일에 개최합니다

우천으로 연기된 진주사투리문화제를 오는 4월 18일(토) 오전 10시에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 일원에서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진주사투리 경연대회와 각종 체험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가족과 함께 나들이도 하시고 사투리 경연대회 참가하시기를 빕니다. 이번에는 우천 불구하고 행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진주사투리문화제에 많은 관심과 참석 부탁드립니다. 진주평론 황경규 적습니다.

  • 2026-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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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진주사투리문화제 우천 예보로 인해 잠정 연기되었습니다.

진주사투리문화제가 우천 예보로 인해 잠정 연기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행사 대부분이 야외 행사인지라 우천 예보에도 불구하고 진행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ㅏ. 최대한 빠른 시일내에 행사 날짜를 잡고 안내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더 좋은 행사로 찾아뵙겠습니다. 진주사투리문화제 추진위원회 일동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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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hrso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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