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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평론외전 담배값, 꼴갑이네

담배값 꼴갑이네 담배 피는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딴 식인가? 담배 피울 공간도 사라지는 것도 억울한데, 담배 피우는 사람을 야만인(野蠻人) 취급까지 한다. 길거리에서 담배를 물고 있다가 오만상을 찡그리며 지나는 사람의 뒤통수를 볼라치면 왠지 죄인이 된듯 한 기분이 든다. 나랏님을 비롯한 국민의 대표라는 국회의원님들의 생각도 그런 것 같다. ‘담배는 인체에 백해무익인데도 피우는 사람이 줄어들지 않으니, 담배값을 올려서라도 금연을 시켜 국민들의 건강을 증진시키겠다’ 취지는 좋은 듯 한데, 공감은 ‘글쎄올시다’이다 오래 전 서울대학교 의대의 모교수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국가가 국민들을 담배 중독에 빠트려 놓고 그걸 통해 한 해 수 조 원의 세금 수입을 올리는 것은 마약장사로 떼 돈을 버는 조직 폭력배가 하는 짓과 다름이 없다’ 교수님의 논리대로라면 국가는 담배의 제조와 판매를 금지시켜야 마땅하다. 근데, 금지하기는 커녕, 담배값 인상이야기가 솔솔 나온다. 입에 문 담배 연기에서 뭔가 수상한 냄새가 솔솔 난다. 여기서 굳이 담배 예찬론을 적고 싶지 않다. 다만 흡연과 금연 여부는 당사자의 의지에 달린 것이지 국가가 개입할 일은 아니라는 사실을 적시하고 싶다. 어린아이가 생각해도, 국민건강을 위해서라면 담배 제조와 판매를 금지하는게 제대로 된 처방이기 때문이다. 담배 판 세금은 어디다 쓰느냐 따위의 천박한 질문은 하고 싶지 않다. 꾸짖을만한 것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담배를 적극 권장한 나랏님도 계셨다. 정조임금은 결연한 담배 예찬론자였다. 그는 ‘하늘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이 풀을 내렸는데, 하늘을 도와 정치를 하는 임금은 마땅히 백성들에게 혜택을 두루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천명했다. 담뱃값을 올려서라도 국민 건강을 염려하시는 분과 담배를 권장한 분 중에 어떤 분이 옳은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분명한 차이는 정조 임금에게 있어 담배는 백성들이 근심을 풀 수 있는 기호 식품인 반면, 지금의 나랏님에게 담배는 세금 징수용인 차이가 있을 뿐이다.백성의 마음을 걱정하는 임금은 성군(聖君)이며,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임금은 걸주(桀紂)와 다름없음을 알았으면 하는 바람만 간절하다. 담배의 해악에 대해서도 천편일률적인 적용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 독극물을 애용하면서도 비교적 장수한 사람도 있다. 파이프를 입에 물고 살았던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은 무려 92세까지 살았고, 하루 담배 10갑을 피운 공초 오상순시인은 70세, 소설가 박경리 여사는 83세, 담배의 대명사였던 임어당은 82세까지 살았다. 담배는 다양한 이름이 있다. 남쪽에서 와서 남초(南草), 신비한 약효가 있어 남령초(南靈草), 술처럼 사람을 취하게 해서 연주(烟酒), 차(茶)처럼 피로를 해소시켜서 연다(烟茶), 한 번 멋보면 잊을 수 없어 상사초(相思草), 근심을 잊게 해주어서 망우초(忘憂草)라고도 한다. 담배 예찬론자는 아니지만, 한마디 하고 싶다. 담뱃값 인상 꼴깝이네.

  • 202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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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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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평론 진주 경제의 이상한 역설

진주 경제의 이상한 역설 진주시가 코리아 크레딧 뷰(KCB) 자료를 인용해 진주시의 연간 평균소득이 3,818만 원이라고 발표했다. 월 평균으로 따지면 318만원 수준이며, 경남 18개 시·군 가운데 3위에 해당된다. 경남 평균인 3,611만 원보다 높고, 전국 평균인 3,759만 원보다도 높다. 거기에 경남도 사회조사 결과 소득 만족도까지 경남 시 지역 1위라고 한다. 통계 수치로만 보면 진주는 엄청나게 잘 사는 도시임에 분명하다. 일반적으로 지방자치단체가 통계기관의 수치를 인용하는 것은 ‘홍보용’ 성격이 강하다. 공인된 통계기관에서 발표된 바 있는 시민들이 만족하지 못하는 통계를 ‘최대한 은폐’하고자 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주시가 인용한 통계기관의 성격과 특성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진주시가 인용한 자료는 코리아 크레딧 뷰(KCB)의 자료이다. KCB 자료는 개인신용과 금융관련 데이터를 바탕으로 구축되는 추정 소득 통계이다. 따라서 국세청의 근로소득, 종합소득 신고액이나 가구소득 통계와는 산출방식이 다르다. 따라서 ‘진주시민의 연간 평균 소득’이라는 표현은 부정확하고, ‘KCB 기준 추정 연간 평균소득’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이 통계수치를 보는 시민들은 일반적으로 진주시민 1명이 연간 벌어들이는 소득이 3,818만원이고, 월평균 318만원인 것처럼 인식하게 된다. 더불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내 소득은 그 정도가 아닌데?”‘내 소득은 그 정도가 아닌데?’‘우리 집은 월 318만원도 못버는데?’‘진짜 진주시민 평균소득이 저렇게 높다고?’ 여기서 바로 평균의 함정이 발생한다. 평균의 함정이란 ‘평균값 하나가 데이터의 전체적인 분포나 치명적인 예외상황을 감춰 잘못된 의사결정을 내리게 만드는 현상’을 말한다. 예를들면 평균 수심이 1m인 강을 건너던 키170cm인 사람이 익사했다. 강의 시작점은 20cm로 아주 얕고, 중간은 3m로 매우 깊다면 평균 수심은 1m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평균 수심이 1m니까 내 키보다 낮아서 안전하겠지”라고 생각하고 뛰어들면 죽음이라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이는 평균이 ‘극단적인 위험인 최대 수심3m’를 감추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평균이라는 놈은 참 재미있다. 어떤 집의 가장은 연봉 2천만 원이고, 어떤 집의 가장은 2억 원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이 두 집안의 가장의 수익을 평균 내놓고 “평균 수익이 1억 1천만 원이다.”라고 한다면 연봉 2천만 원 받는 사람은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자문하게 된다. “내가 1억 1천만 원을 언제 벌었지?”이처럼 평균은 전체 규모를 보는 데는 유용하지만 전형적인 시민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평균 소득이 높다고 해서 시민의 생활이 평균치 만큼 좋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에 진주시가 진심으로 진주시민의 경제현실을 보여주고자 했다면, 전체 진주시민들의 연평균 소득을 정확하게 가리키는 통계수치를 인용했어야 했다. 평균 하나만 발표할 것이 아니라 최소한 다음과 같은 지표도 함께 발표했어야 한다는 뜻이다.중도층 시민의 현실을 파악할 수 있는 중위소득과 시민들과의 소득격차를 확인할 수 있는 소득 5분위별 분포, 연령별 소득, 근로자 평균 임금, 가구소득 등의 지표가 제시되었어야 했다. KCB라는 특정 통계기관이 발표한 자료를 토대로 ‘진주시민의 연평균 소득이 3,818만원이다.’라고 하는 것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34만 진주시민의 연 평균 소득이 3,818만원’인 것도 아니다. 평균의 함정을 이용한 전형적인 홍보 마케팅 이상으로 봐주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경남도 사회도 조사에서 진주시가 소득 만족도 경남 3위라는 순위만으로 진주시민이 경제적으로 잘 살고 있다는 결론을 내려서도 안된다. 이 수치가 인용된 것도 다 이유가 있다.KCB 자료 진주시민 연평균 소득 3위와 경남지역 소득 만족도 1위라는 진주시의 발표는 언뜻 보면 매우 좋은 그림을 만든다. ‘평균소득도 경남 상위권, 소득 만족도도 경남 시 지역 1위’라는 자료만으로 ‘진주시는 소득도 높고, 소득 만족도 최상위권인 살기좋은 진주’로 변신하게 되는 것이다.그런데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생긴다. 바로 이 두 통계의 지표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KCB 연간 평균 소득은 금융과 신용데이터를 활용한 추정 경제소득지표이고, 경남도 사회조사 소득만족도 조사는 시민에게 물어본 주관적 만족도이다. 즉 KCB는 ‘돈을 얼마나 번다고 추정’한 것이고, 경남도 사회만족도 조사는 ‘시민이 자기 소득에 얼마나 만족한다고 답했느냐’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자료를 섞어 놓고서는 ‘진주시는 소득도 높고 시민도 만족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상당한 주의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소득 만족도는 단순히 소득액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소득만족도는 절대소득이 아니라 생활비 주거비 부채 등을 함께 반영하는 주관적 지표이기 때문이다. 진주시 연평균소득이 3,818만원에 소득 만족도 경남 3위라는 발표만 놓고 보면 이렇게 생각이 들것이다. “우리 진주, 생각보다 괜찮은 동네네?” 그런데 여기서 의문점이 하나 생긴다. ‘시민은 돈을 잘 버는데, 진주라는 도시는 왜 돈을 잘 못 벌까?’ 시민이 돈을 잘 벌면 도시도 돈을 잘 벌 것 같은데, 진주는 조금 묘하다. 이른바 연평균 소득이 3,818만원으로 시민 지갑 수준은 경남 3위인데, 도시의 생산성은 못미치는 것이다. 여기서 GRDP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이름부터 어렵지만 지역내총생산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진주라는 땅에서 얼마만큼의 부가가치를 만들어냈느냐”를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KCB가 묻는 것은 “진주에 사는 당신, 얼마 버십니까?”에 가깝고, GRDP가 묻는 것은 “진주라는 동네, 돈 얼마 만들어냈어?”에 가깝다. 이는 질문이 다른 것이다. 최근 언론에 보도된 진주의 GRDP에 관한 기사를 보면 진주의 지역내총생산 수준을 확인할 수 있다.2021년 진주 1인당 GRDP는 2,525만원으로 경남 18개 시군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경남 평균인 3,408만원에 비해 74% 수준이며,함안군의 6,325만원의 43%, 인접한 사천시의 4,529만원의 59.7%에 불과했다. 2024년에는 진주의 1인당 GRDP는 약 2,631만원으로 전국 평균 4,948만원에 한참 모자르는 수치이다. 알기 쉽게 표현하면 KCB는 사람 지갑 검사이고 GRDP는 도시 지갑 검사이다. 결론을 내자면 진주는 사람 지갑은 괜찮은데, 도시 지갑이 영 시원찮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주 경제의 역설이다. 진주시민 평균 소득 3,818만 원. 어찌됐던 진주에 대한 희망적인 자료로 보인다. 그런데 이 통계수치를 단순히 ‘진주가 잘산다’라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즉, 이 숫자를 자랑으로만 볼 게 아니라 숙제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민소득이 이 정도라면 이제 진주라는 도시의 생산력도 그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현재 진주에 필요한 것은 “진주시민 여러분, 우리 생각보다 잘삽니다!”라는 홍보가 아니라, “이제는 진주에서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산업을 만들겠습니다.”라는 정책과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진주의 청년에게 물어봐야 한다. 이게 정말 중요하다. 진주시 평균소득이 3,818만 원이라고 하는데 20대~30대 청년에게 “당신의 연봉은 얼마입니까?”에 이어 “진주에서 그 연봉 계속 받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어봐야 한다.만약 여기서 청년들의 답이 달라진다면 문제가 있다.현재 진주에 사는 사람들의 평균소득이 높다는 것과 진주의 미래세대가 진주에서 높은 소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도시의 미래는 현재 주민의 평균소득만 가지고 판단하는 게 아니다. 다음 세대가 얼마를 벌 수 있느냐도 매우 중요하다. 경남도 빅데이터 분석에서도 평균소득과 함께 중위소득, 소득 불평등 등을 별도로 분석하고 있다. 최근의 분석을 보면 진주경제의 미래는 어둡다.중위소득은 사실상 정체했고, 소득불평등 지수는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진주 경제가 참 재미있다. 사람은 괜찮은데 도시는 영 신통치 않다. 시민 지갑은 괜찮은데 도시 지갑은 좀 더 두꺼워져야 한다는 숙제를 안고 있다. 따라서 진주의 경제정책은 “우리 시민들 잘삽니다.” 에서 끝날 게 아니라 “우리 도시가 돈을 벌게 만들겠습니다.”로 가야 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우리 자녀들이 다른 도시로 돈 벌러 떠나지 않아도 되게 하겠습니다.”라는데 까지 가야 한다. 진주의 미래세대에게 희망을 줄 수 없는 도시는 이미 수명을 다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한타령 하나. 어쩌면 진주는 사람은 적지 않은데 생산이 부족하고소비는 있는데 부가가치가 부족하고인재는 있는데 일자리가 부족한 ‘3부족 도시’는 아닐까?

  • 202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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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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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of 진주 (STORY OF 진주2) 15. 진주 막걸리의 역사(feat. 진주곡자와 교방막걸리축제)

진주 막걸리 역사를 말하다진주곡자와 교방 막걸리 축제 농사일에 지칠 즈음, 어김없이 등장하는 걸쭉한 막걸리 한 사발과 두부, 신 김치 한 조각만으로도 고된 노동이 한순간의 보람으로 변했던 새참의 기억이 있으실 것이다. 양은 주전자를 들고 아버지 술 심부름을 다녔던 양조장의 기억은 이제 가물 가물하지만, 양조장 주인에게 얻어 먹은 술지게미에 취해 비틀거리며 집으로 걸어가던 추억은 비교적 또렷하다. 대학 시절, 어깨에 잔뜩 힘을 준 선배 옆에서 받아 마시던 막걸리에 사이다를 섞은 ‘막사의 추억’이 엊그제 같은데, 국가 행사의 만찬 건배주로 등장한데 이어, 유명 백화점 식품관에 자리잡은 프리미엄 막걸리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막걸리는 ‘국민주’로 자리하고 있다. 현대 문학계의 거성으로 평가받는 천상병 시인은 막걸리를 좋아했다. 직업도 수입도 없었던 시인의 소일거리는 지인들에게 돈을 얻어 막걸리를 사서 마시는 일이었다. 시인을 딱하게 여긴 김동길 교수가 양주를 선물했는데, 양주를 팔아 막걸리를 사마셨다는 일화는 유명하다.노무현 전 대통령도 막걸리 애호가였다. 전통주인 막걸리를 청와대 만찬주로 사용할 만큼 막걸리에 진심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역시 매달 막걸리를 청와대로 배달시켜 먹을 만큼 막걸리 매니아였다.「막걸리 빚기」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막걸리를 무형문화재로 등록한다는 건 한국인의 정체성이 깃든 공동체 음식임과 동시에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한 것이다.농림축산식품부는 ‘찾아가는 양조장’을 선정하고 있다. 지역에서 운영되고 있는 예스러운 양조장부터 현대식 양조장을 선정해 지역축제와 관광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꾸며나가고 있다. 젊은 세대들의 막걸리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이는 곧 막걸리의 다양화와 산업화에 밑거름이 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일제강점기 진주의 주조업과 토종기업 일본제국주의 전시경제 체제가 시작된 1930년 후반부터 쌀이 전략물자로 통제되면서 전통주 생산에 큰 타격을 받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걸리를 비롯한 전통주는 전국적으로 가장 인기있는 주종의 지위를 유지한다. 진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진주대관(晋州大觀)』은 일제강점기 진주의 갖가지 기록을 정리한 진주안내서이다. 이 책은 1940년대 진주의 경제와 금융 동향은 물론 상공업 추세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특히 상공업 분야에 ‘조선주조업(朝鮮酒造業)’에 대한 기록이 있다. 당시 진주의 주조업의 현황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진주세무서가 발표한 1939년 간세 추측액이 조선주(탁주)와 약주가 35만원으로 1위를 차지했고 청주가 6만원으로 그 뒤를 이었다. 여기에 ‘조선주 및 청주의 양조 석수는 해마다 비약적으로 증가를 보이고 있으며 근년의 상황은 실로 눈부신 전진을 보이고 있다’는 전망도 내놓았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진주의 주조업은 당시 상공계를 주름잡고 있었다.진주대관에 나타난 조선 술(탁주) 관련 기록은 흥미롭다. ‘조선 술은 보편적으로 일반 기호에 적당하여 왕왕 식사대용으로 마시고 있어 자가양조가 성행했다.’고 평가했다. 일제는 국가재원 확보를 위해 주세령을 발표와 면허제도를 실시했다. 1927년에는 조선주 면허 인원이 90명에 조석고(造石高)가 9,800석에 이르렀다. 이듬해인 1928년에는 면허 인원을 4명으로 줄였고, 1931년에는 진주양조합자회사 1개소로 집약했다. 일제강점기 진주의 주조업은 1928년 면허인원 축소에 따라 4개였다. 특히 이들 기업들은 모두 진주 사람이었다. 당시 진주에서 주조업을 한 기업은 ‘진주양조합자회사(대표 김백용)’, ‘영남약주제조주식회사(사장 정상진)’, ‘진양주조주식회사(사장 이명후)’, ‘유곡주조합명회사(대표 김백용)’이다. 일본인이 경영했던 회사로는 ‘진주주조회사(사장 신야무성)’이 있었다.진주 최초의 주조업체은 ‘진주양조합자회사’이다. 1930년 9월 1일 창업했으며 자본금은 3만원이었다. 소재지는 진주부 수정정 542번지이다. 대표 사원은 김백용(金伯容)이며 지배인은 김원용, 업무집행사원은 구종학이다.진주양조합자회사에 이어 ‘영남약주제조주식회사’가 1935년 6월 28일 창업했다. 소재지는 진주부 동봉정(계동) 25번지이다. 취체역 사장에 정상진(鄭相珍)이며, 자본금은 5만원이다. 상무 취체역에는 김재희, 취체역 지배인에는 김백용, 감사역에 이명후, 박경수, 오명진이다.‘진양주조주식회사’는 1936년 4월 1일 창업했으며 자본금은 8만원이다. 소재지는 진주부 대정동(강남동) 73번지이다. 취제역 사장은 이명후(李明厚), 전무 취제역 남상천, 취제역 이우종이다.‘유곡주조합명회사’는 1939년 4월 1일 창업했으며 자본금은 1만5천원이다. 소재지는 진주부 유곡리 487번지이다. 대표사원은 김백용(金伯容), 지배인 김의용, 업무집행사원 박경수이다.일제강점기 이후 한국전쟁으로 진주의 조선주 기업들은 생산설비와 인력 수급에 애로를 겪었고, 1965년 주세법 개정으로 수출용을 제외한 주류에 쌀 사용이 금지되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쌀 대신 보리와 밀로 대체된 막걸리는 인기를 잃었고 희석식 소주 등에 자리를 내주고 만다. 진주대관에는 당시 진주의 경제를 지탱했던 상공인 현황을 기록하고 있다. 진주 경제를 이끌었던 제회사(諸會社)로는 진주합동운송주식회사(정상진), 진주하주운송주식회사(황한철), ㈜광신상회(허용백), ㈜강문현상점(강문현), 진흥주식회사(박규석), ㈜협성상점(최지환), 진주합동인쇄주식회사(정창화), ㈜인풍당한약방(박문호), ㈜진주정미소(정명수), (합)삼이상회(정대화), 진주상공주식회사(허만채), 선만물산합명회사(허윤구)가 있었다.정미업으로는 김봉규 정미소, 이무화 정미소, 윤태중 정미소, 오주환 정미소, 조용태 정미소, 김순규 정미소, 권대우 정미소, 이정식 정미소, 정상언 정미소가 있었다. 지역별로는 옥봉정미소, 대안정미소, 봉산정미소, 동봉정미소, 수정정미소가 영업을 했다.개인공장의 경우, 포목상·직물상으로 구인회(具仁會) 상점을 비롯해 기계기구상에 최대원, 약종상·약제상에 원준옥(元準玉) 창신당이 있다. 서점(書店)으로는 조학제(趙鶴濟), 자전거상 김용주(金容柱), 인쇄업에 합동인쇄소, 직물·생사업에 추겸호(秋謙鎬), 악기점에 이중영(李中英) 등이 있었다.진주의 요리집으로는 망월(동성동), 진주관(대안동), 금곡원(대안동), 옹아헌(중안동), 경성관(장대동), 군현관(장대동), 연승관(장대동), 건흥관(본성동) 등이 있었다. 대한민국 전통 누룩의 맥을 잇다 막걸리 맛의 핵심은 누룩이다. 막걸리에 사용되는 누룩에 따라 맛과 향이 달라진다. ‘메주없는 장(醬)을 상상할 수 없듯이 누룩없는 한국 술은 상상할 수 없다.’는 격언이 있을 정도이다. 누룩이 막걸리의 개성을 좌우한다는데 이견은 없다. 막걸리를 빚는 양조장은 넘쳐 나지만 전통방식으로 누룩을 생산하는 업체는 전국적으로 손에 꼽을 정도라는게 안타까울 뿐이다. 막걸리는 ‘방금 막 거른 술’이라 뜻을 가지고 있고 ‘탁하게 빚은 술’이라고 해서 탁주라고 부르기도 한다. 약주와 청주의 개념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막걸리와 같은 방식으로 술을 빚고 발효시킨 술덧에서 술지게미를 걸러내어 맑게 만든 술이다. 곡류 중 쌀을 원료로 하고 누룩을 1% 이상 사용하면 약주, 1% 미만을 사용하면 일본 사케 방식인 청주라고 한다.일반적으로 막걸리는 곡류(쌀, 밀, 보리 등) 원료에 국(누룩, 입국 등)과 물을 섞어 일정한 온도에서 발효시킨 술덧을 체 등으로 걸러 제조한 술이다. 탁주의 주원료는 멥쌀, 누룩 그리고 물이다. 멥쌀 고두밥을 찐 뒤에 이를 식혀서 물과 함께 빻은 누룩을 비벼 항아리에 담는다. 항아리를 25도 전후의 따뜻한 곳에 놓아두면 술이 발효되기 시작하여 빠르게는 4~5일 만에, 더디게는 7~8일 만에 완성된다. 대한민국 전통 누룩의 맥을 잇는 기업이 있다. 전통 누룩제조업체인 ‘진주곡자(대표 이진형)’와 광주에서 전통누룩을 제조하는 ‘송학곡자’다. 최근에 경북 상주의 ‘상주곡자’가 경영난으로 문을 닫으면서 한국에서 전통 누룩을 전문으로 생산하는 곳은 진주곡자와 송학곡자 뿐이다.진주곡자는 8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지난 1945년 시작된 진주곡자는 1974년 연구소를 시작으로 진주곡자공업연구소라는 이름으로 무려 3대에 걸쳐 80년간 전통누룩을 제조하는 회사로 대한민국 전통 누룩의 대명사가 되고 있다. 전국의 수많은 양조장의 70% 가량이 진주곡자의 누룩을 사용한다는 점은 대한민국 전통주의 맥을 잇고 있다는 증명에 다름 아니다.진주곡자는 옛 문헌에 나오는 방식 그대로 누룩을 제조하고 있다. 최근에는 현대의 과학적인 관리 환경을 접목해 적정한 온도와 습도의 유지 조절을 취한 최적 관리 자동화시스템을 갖추고 대량생산에도 뛰어들었다.진주곡자공업은 1974년 한국곡자 진주영업소가 문을 닫으며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다. 한국곡자 당시에는 외진형 대표의 외조부가 운영했고, 이대표의 부친이 진주곡자로 이름을 바꿔 가업을 이었다. 대학에서 마케팅을 전공했던 이대표는 2002년 진주곡자에 들어와 대를 이었다.진주곡자공업은 진주의 특산물인 앉은뱅이 밀을 이용해 누룩을 제조하고 있다. 진주시 금곡면의 금곡정미소가 앉은뱅이밀의 종자를 지켜오고 있다. 앉은뱅이밀은 껍질이 얇고 가루가 매우 부드럽다. 쫄깃한 식감과 고소한 맛이 특징이며 글루텐 함량도 일반 밀에 비해 적은 것이 특징이다. 앉은뱅이밀을 사용하는 진주곡자의 누룩을 사용한 막걸리는 맛과 향은 물론 유산균의 생존 지속 유효기간이 길어서 ‘막걸리 고유의 맛과 향’을 낸다.‘막걸리 빚기’가 국가지정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수원양조협동조합이 젊은세대를 겨냥해 출시한 ‘행궁둥이’를 선보였다. 누룩에 대한 고민을 거듭하다가 최종적으로 진주곡자의 누룩을 사용했다는 일화도 있다. 진주곡자의 누룩이 가진 역사성과 가치가 빛나는 대목이다.진주곡자공업은 우리 것을 지켜가는 소중한 진주의 토종기업이다. 진주랑 교방 막걸리 축제 막걸리 빚기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시작된 ‘막걸리 빚기’는 오랫동안 한반도 전역에서 전승, 향유되었고, 전국에 분포한 양조장을 중심으로 막걸리의 지역별 특색이 뚜렷하다는 점이 지정 이유이다. 하지만 막걸리 빚기 문화를 계승하고 보존하려는 노력은 그리 많지 않다. 국가 차원의 세심한 배려와 투자가 필요한 부분이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지역관광과 연계하는 문화·체험공간으로 ‘찾아가는 양조장’을 선정해 전통 막걸리를 통한 지역경제활성화를 꾀하고 있다. 현재 전국적으로 59개소가 운영중이다. 찾아가는 양조장은 지역의 우수한 양조장을 선정해 전통주 시음과 만들기 체험으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아쉽게도 진주에는 ‘찾아가는 양조장’이 없다.대한민국에서 생산되는 전통주를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전통주 갤러리’도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서울 북촌에서 시작된 전통주 갤러리에서는 전국에서 생산되는 전통주 시음과 구입이 가능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다.전통주인 막걸리를 활용한 이러한 다양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정작 ‘대한민국 전통 누룩의 본산’인 진주는 진주의 전통주를 활용한 지역경제활성화 노력이 전무하다. 일제강점기, 진주에서 조선 주조업을 이끌었던 토종기업과 80년 진주곡자이 건재하지만 관심이 그리 높지 않다. 최근 지역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교방음식과의 연계를 통한 진주 막걸리 살리기 사례가 곧 ‘진주랑 교방 막걸리 축제’이다. 이 축제는 진주 막걸리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지닌 진주곡자의 누룩으로 만든 진주 막걸리의 우수성을 대내외에 알리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더불어 교방문화를 통해 전해진 진주냉면의 함께 먹은 육전을 비롯해 진주의 특산물을 활용한 전(煎)을 활용한 축제이다. 현재는 기획단계에 있지만 ‘진주 고유 교방문화+대한민국 대표 전통 누룩+진주 막걸리’가 결합된 새로운 진주의 관광콘텐츠로 자리잡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진주랑 교방 막걸리 축제는 전통 막걸리와 음식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개념의 축제에서 벗어나 MZ세대와 기성세대가 함께 어울리는 공간으로 준비하고 있다. ‘막걸리와 치즈’.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젊은 세대에게는 이미 익숙한 조합이다. 이대형 경기도농업기술원 농업연구사의 기고를 소개한다. 개인적으로 ‘막걸리에 어울리는 치즈는 없을까 ’라는 생각을 한 적 있다. 호기심에 테이스팅을 했었다. 외국에서는 술을 거창한 요리가 아닌 치즈, 초콜릿 그리고 빵 등 편하게 즐길 수 있는 핑거 푸드와 함께 마시는 경우가 많다. 와인은 치즈, 위스키는 다크초콜릿과 맛의 조합이 좋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 막걸리를 발효식품인 치즈와 먹는다면 재미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브리, 그라나 파다노, 고르곤졸라 등 우리에게 익숙한 치즈와 함께 일반 막걸리와 고급 막걸리 등을 시음했었다. 브리는 향이 약한 막걸리와 어울린다면 감칠맛이 강한 그라나 파다노는 신맛이 나는 막걸리와 찰떡궁합이었다. 단맛과 향이 강한 막걸리는 고르곤졸라 치즈와 짝꿍이었다. 불협화음을 낼 거 같던 막걸리와 치즈의 조합은 뜻밖에 시너지를 내서 매우 흥미로웠다. 진주 고유의 문화인 교방문화의 바탕 위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전통 누룩 제조회사의 존재, 그리고 진주의 막걸리 역사를 잇고 있는 막걸리 제조업체가 모여 진주 막걸리의 옛 위상을 찾고자 하는 것이 ‘진주랑 교방 막걸리 축제’이다.

  • 2026-08-25
  • 작성자

    황경규/진주향당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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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사람) 8. 정규섭(鄭奎燮) - 역사되찾기 헌신한 진주선비 썸네일 이미지

피플&스토리 (진주사람) 8. 정규섭(鄭奎燮) - 역사되찾기 헌신한 진주선비

일제강점기 광명회(光明會)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항일애국지사이며, 북관대첩비 반환운동으로 한민족의 잃어버린 역사 되찾기에 평생을 헌신한 진주선비 농운(農雲) 정규섭(鄭奎燮 ).농운의 생애는 일제에 대한 항거에서 시작된다. 신사참배와 우리말 사용금지 등 민족말살 정책이 극에 달했던 1944년, 이른바 ‘광명회(光明會)’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면서 농운은 치열한 삶의 한가운데 놓이게 된다.학생신분이었던 농운은 조선인으로서의 긍지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학생들과 우리의 역사를 공부하고 독립군의 활약상을 알리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결국 농운은 ‘진해 헌병대 사건’에 연루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7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해방 직전 병보석으로 풀려나게 된다. ‘광명회’ 사건은 농운이 국가발전의 근본이 인재양성에 있음을 절감하고 교육현장에 뛰어들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1948년 교단에 선 농운은 1977년까지 30여년 동안 진주와 인근지역의 초등학교 교직자로서의 새로운 길을 걷게 된다. 농운에게 있어 교단(敎壇)은 치열함 그 자체일 수 밖에 없었다. 일제강점기 한민족이 겪었던 수난의 역사를 마감하는 길이 오직 교육에 있다고 생각했기에 교단에서의 그의 삶은 고단했다. 하지만 교육에 대한 그의 열정은 교단을 걸어 내려올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적어도 그에게 교단은 간절함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다.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의 13대 종손인 농운은 농포를 기리는 사당인 충의사와 부조전을 지키며 선조의 유업을 이으며 살았다. 그러던 중 일본 동경 정국신사에 농포의 북관대첩비가 발견됐다. 농운은 북관대첩비 반환이 한민족의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는 길임을 인식하고, 북관대첩비 반환운동에 여생을 바치게 되고 마침내 2005년 환수의 기적을 이루게 된다.농운 정규섭은 일제에 항거한 항일애국지사이자, 인재육성을 위한 교직자이며, 한민족의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는 일에 평생을 헌신한 진주선비로 기억되고 있다. 광명회와 항일독립운동 패전 막바지에 처한 일본은 학생들까지 민족말살정책에 끌여들였다. 일상생활에서의 일본어 사용은 물론이고 궁성요배(宮城遙拜), 신사참배(神社參拜), 등․하교시의 봉안전예배(奉安殿禮拜)를 강요했다. 더나아가 학생들을 근로보국대(勤勞報國隊)라는 미명하에 최후진지 구축 매립공사나 비행장 축조공사에 몰아넣었다.해방을 1년도 채 남겨두지 않은 1944년, 울산 비행장 건설공사에 동원됐던 농운과 학생들은 쉴사이도 없이 진해비행장 건설공사에 투입되었다. 당시 동원된 학생의 수는 어림잡아 300여명이 넘었다. 민둥산을 파서 바다를 메우는 중노동이 쉴새없이 이어졌고 다치는 학생들도 부지기수였다.이때 이른바 ‘광명회(光明會)’ 사건이 터졌다. 노역이 시작된지 약 일주일 정도 되었던 1944년 9월 23일, 농운을 포함한 11명의 학생이 체포되었다. 당시 체포된 학생은 정규섭, 강필진, 김용실, 류한성, 박노근, 장선택, 전용순, 정원혁, 조용, 하익봉 등 광명회 소속 학생들이었다.광명회는 친구인 박노근과 하익봉의 아버지가 광복군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일제말살정책에 반발, 학생신분으로 일제에 저항할 수 있는 투쟁을 벌이기 위해 만든 항일단체였다. 광명회는 방과후에 우리 민족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 뿌리와 조선인으로서의 긍지를 지닐 수 있도록 노력했다.광명회 소속학생들은 진해헌병대로 끌려갔고, 잔인한 고문이 시작되었다. 항일운동과 조선독립을 위한 모임 결성 여부, 유사조직의 유무, 한인선생의 배후유무에 대한 자백강요가 이어졌다.체포된 지 40일 만인 11월 2일 농운과 그의 친구들은 부산지검으로 송치돼 검사의 심문을 받은 뒤 부산형무소에 수감된다. 당시 죄명은 ‘치안유지법 제5조 위반’. 사상범의 죄명을 뒤집어 쓴 농운은 갖은 고문과 고초에 시달리다, 해방 두 달 전 가까스로 병보석으로 풀려나게 된다.하익봉은 세상을 떠나고 농운을 비롯한 나머지 7명은 그 이후 오랫동안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며 살았다.이후, 이 사건 연루자들과 생존 동기생들은 이러한 역사적 사건이 아무런 역사적 평가없이 사라지면 안된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국가보훈처에 서훈을 신청했다. 하지만 보훈처는 당시 이들의 구체적인 항일운동관련 활동사항과 옥고사실을 뒷받침할 객관적 자료가 미흡하다는 이유로 서훈대상에서 제외했다.하지만 농운 정규섭은 1990년 항일독립운동을 한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게 된다. 일제에 항거한 학생독립운동 모임인 광명회(光明會) 사건은 60년만에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공로도 인정받게 되면서 농운이 가졌던 마음의 상처도 치유되었다.농운에게 있어 ‘광명회’ 사건은 인재양성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고, 곧바로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인재육성과 한민족 역사찾기 농운에게 있어 교단에서의 삶은 특별했다. 학생시절에는 항일정신을 가슴에 새겼고, 광명회라는 단체를 통해 실천했던 정신을 교육을 통해 이어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농운은 1948년 진주 귀곡초등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교단에서의 삶을 시작한다.교단에 선 농운은 학생들에게 고난으로 점철된 우리의 과거 역사를 통해 미래인재육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교단에 선 기간은 30여년의 세월이었고 내동초등학교에서 교직생활을 마감했다. 1977년 농운은 교단을 떠났고, 대통령 표창과 문교부장관 표창, 진양교육회장 표창, 경남도지사 표창, 경상남도 교육감 표창을 받았다.교단을 떠난 농운 정규섭은 한민족 역사찾기로 눈을 돌렸다. 수백년동안 종가를 이어온 농포공파의 직계종손으로서 그에게는 숙원이 있었다. 그것은 일제가 강탈해 간 농포 정문부 장군의 북관대첩비를 고국인 대한민국으로 가져오는 일이었다.임진왜란 당시 북한 함경도 길주 주변에서 당시 28세의 젊은 나이에 의병들과 함께 왜군을 크게 무찌르면서 ‘북관대첩비’의 주인공이 된 농포의 직계후손들이 진주 주변에 정주하게 된 사연도 남다르다.당시 서울에 살다가 북평사라는 외직을 맡은 농포 정문부는 임란당시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하지만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이 일어났고, 당시 와병(臥病) 중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원수 직책을 수행하지 않았다는 모함에 몰려 불행히도 옥사를 했다. 이 때문에 농포는 옥중에서 슬하의 두 아들에게 ‘벼슬을 구하지 말고 인심과 지형이 순후(淳厚)한 진주지방으로 가 살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한다. 지금의 농포 후손들이 진주에 터를 잡은 이유이다.그런 농운에게 북관대첩비 반환은 필생의 숙원사업이 되기에 충분했다.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는 임진왜란 때 정문부(鄭文孚)를 대장으로 한 함경도 의병의 전승을 기념한 비석으로, 숙종 때 북평사(北評事) 최창대(崔昌大)가 함경북도 길주군 임명에 세운 비이다.북관대첩비는 높이 187cm, 너비 66cm, 두께 13cm로 1,500자 비문에 정문부가 거느린 함경도 의병이 가토 기요마사가 거느린 왜군을 무찌른 사실과 왜란이 일어나자 반란을 일으켜 함경도로 피난한 두 왕자를 왜적에게 넘긴 국경인(鞠敬仁)을 처형한 전말 등이 상세히 적혀 있다.1905년 러․일전쟁 당시 함경지방에 진출한 일본군 제2예비사단 여단장 소장 이케다 마시스케(池田正介)가 주민들을 협박해 비석을 탈취했다. 그리고 이케다는 비석을 일본으로 옮겼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잊혀졌다. 그리고 비는 ‘군국일본’의 상징인 도쿄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되어 있었다.그러던 중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에 참석한 이해찬 국무총리와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있던 ‘북관대첩비’반환을 위한 남북당사자 회담을 적극 추진하게 된다.이 소식을 듣고 가장 기뻐한 사람은 농포공의 충의를 기리는 충의사(忠毅祠)를 묵묵히 지키며, 북관대첩비의 반환을 노심초사 기다리고 있던 농운 정규섭이었다. ‘농포공의 북관대첩비가 원래 자리인 함경도 길주에 돌아오면 단숨에 달려가 경건한 마음으로 잔을 올리고 그동안의 불경(不敬)을 사죄드리고 싶다’농운 정규섭에게 있어 일생의 소원이었던 북관대첩비 반환이 바야흐로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농운은 오랜 시간동안 가슴속에 간직해 왔던 반환운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1970년대부터 시작한 반환운동은 수많은 시도에도 불구하고 좌절을 겪었다. 하지만 농운의 반환운동은 쉼이 없었다. 정부기관은 물론이고 언론기관, 학계 등에 지속적으로 반환을 건의해 북관대첩비 반환의 초석을 다져나갔다. 그리고 2005년 6월, 남과 북이 북관대첩비 반환에 합의한 뒤, 일본정부에 요청함으로써 일제 강탈 100년만인 2005년 10월 북관대첩비는 일본 도쿄 야스쿠니 신사를 떠나 조국 대한민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농운은 반환된 북관대첩비를 농포공의 혼(魂)이 서린 충의사에 모시고 싶었다. 그 일은 선조인 농포공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며, 이를 통해 한민족 역사찾기의 역사적 교훈을 후세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농운의 이러한 소망은 2012년 마침내 결실을 맺게 된다. 2012년 12월 1일,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리 소재 충의사 경내에 복제돼 안착된 것이다. 현재 북한대첩비는 원본과 복제본을 포함해 모두 3점이 있다. 북관대첩비원본은 함경북도 길주군에 있으며 북한국보 제193호 지정돼 있다. 문화재청에서는 북관대첩비가 가진 역사적 중요성을 인식해 비문을 탁본한 뒤 복제비를 제작했다. 독립기념관과 경기도 의정부시 정문부 산소, 그리고 충의사 경내의 세워진 복제비가 바로 그것이다. 선비로 살다 항일운동과 교육자로서의 삶, 그리고 북관대첩비 반환에 이르는 농운의 삶은 실로 파란만장했지만, 만년의 그가 할 일은 또 남아 있었다. 그것은 농포 정문부의 종손으로서 삶이었다. 선조의 유업을 잇는 일.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자, 선비로서의 지난(至難)한 삶을 살아가는 일이었다.진주향교의 출입은 만년의 그에게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다. 진주향교 장의와 성균관 유도회 진주지부장을 거친 농운은 2003년 진주향교 전교에 취임한다. 진주향교 전교는 한 지역의 정신적 버팀목이자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자리를 의미했다. 전교에 취임한 농운은 제일 먼저 유림의 화합과 진주향교 활성화를 위한 일을 추진해 나갔다.당시 진주향교에 만연해 있던 유림들간의 불신과 씨족간의 갈등은 진주향교의 활성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이었다. 농운은 우선 불신과 갈등의 원인이 되었던 전임자의 부당한 공덕비를 철거하는 결단을 내린다. 그리고 유림들과 대화의 장을 마련해 불신의 벽을 허물고 씨족간의 갈등을 치유해 나가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지금의 진주향교가 전국 향교 가운데 가장 화합하는 향교로 발전한데는 농운의 기여가 적지 않았다.그리고 진주향교의 고유한 기능인 제사와 교육 가운데 농운 정규섭이 적극적인 관심을 가진 것은 바로 교육이었다. 교육자로서의 삶은 산 농운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당시로서는 변변한 교육시설을 갖추지 못했던 진주향교는 농운의 노력으로 2005년 진주시의 지원을 받아 ‘진주시충효교육원’을 개원하게 된다.진주시충효교육원은 진주향교의 교육기능을 강화하는데 천군만마의 역할을 했다. 그리고 향후 진주향교가 인성교육의 요람으로 성장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을 감안한다면 농운이 전교로 재임할 당시 건립된 충효교육원은 진주향교의 외형적 발전은 물론이고 내적으로도 성장발전하는 기회가 되었음은 물론이다.현재 진주시충효교육원은 연간 8,000명이 넘는 인재들이 다양한 인성교육을 받고 있으며,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경전 강독반도 운영해 진주향교의 교육기능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다. 교육의 활성화에 이어 최근에는 향음주례 시연, 전국한문경전성독대회, 진주목향시 개최 등 다양한 행사 개최는 물론 경남유교대학 운영으로 까지 이어지고 있다.농운 정규섭이 진주향교 발전의 기폭제가 되었던 충효교육원 개원과 더불어 또 하나 평가받는 덕목은 유능한 인재발굴과 진주향교의 발전을 위해 전교의 임기를 3년 단임제로 했다는 점이다. 더욱이 농운이 자신부터 단임제를 시행했다는 사실은 진주향교의 역사에 있어서 새롭게 평가되어야 할 부분이다.농운은 종가에 소장돼 있던 농포 정문부의 유물을 독립기념관과 국립진주박물관에 기증한다. 독립기념관에 기증한 고문서는 교지와 창의, 환도, 하해성문 외 4점이며 국립 진주박물관에는 북관대첩비 비문 탁본과 문집을 기증했다.그리고 농운은 종가에 소장하고 있던 고문헌들을 경상대학교 도서관에 기증을 한다. 경상대학교 박물관에 기증된 고문서들은 주로 해주정씨 문중에 전해왔던 고문서들이었다.농운이 기증한 고문서중에는 선조인 농포 정문부의 문집인 ‘농포집(農圃集)’과 정규원의 문집인 ‘지와문집(芝窩文集)’, 해주정씨 족보 등의 고서와 가호서원 건립과 관련된 각종 고문서류와 교지, 과거시험 답안지인 시권(試券)등이 포함돼 있었다. 이 고문서들은 진주지역 해주정씨 문중의 역사와 가호서원 건립 과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들이었다. 경상대학교는 영남지역의 역사와 사회문화를 연구하는데 도움을 준 농운에게 감사패를 수여했다. ‘선조의 찬란한 역사를 방안에 묵혀 두는 것이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고, 세상에 드러내어 작은 도움이라도 된다면 감사할 따름이다.’ 농운의 바람대로 경상대학교 박물관에 기증된 해주정씨의 고문서들은 1년여에 이르는 정리과정을 거쳐 연구자들에게 소중한 연구자료로 쓰이고 있다. 농운의 삶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농운은 지난 2006년 한국유림의 본산인 성균관 부관장에 취임했다. 농운의 삶이 그랬듯이 성균관 부관장이라는 직책은 그가 걸친 겉옷에 불과했다. 농운은 부관장 시절, 영남지역 유림의 발전을 위한 일에 발벗고 나섰다. 유림으로서의 면모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산청의 효산서원, 함안의 서산서원, 의령의 미연서원의 원임을 맡아 선비로서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농운 정규섭은 농포 선조를 모시고 있는 충의사에 거주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있다. 아흔을 눈앞에 둔 그의 삶에서 충의사와 가호서원은 그의 마지막 안식처이기 때문이다. 가끔 충의사를 찾는 방문객이 있으면 농운은 흰 두루마기에 유건을 쓴 채 단정한 몸가짐으로 그들을 맞이한다.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다. 영락없는 선비다. 그리고 충의사에 세워진 북관대첩비를 자랑스럽게 바라보며 선조 농포공을 이야기한다. 간혹 학생시절 광명회 사건을 말하기도 하고, 교단에서의 삶을 기억하기도 한다. 북관대첩비가 반환되기 까지 겪었던 마음고생이 지금은 옛일이지만 당시의 농운에게는 피가 마르는 시간이었음도 넌저히 비춘다. 희미한 그의 웃음에서 지난 세월을 읽을 수 있다.400년 가문의 전통을 묵묵히 지켜오고 있던 농운 정규섭. 그에게서 ‘전통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도 않을뿐더러, 하루 아침에 없어지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진주시민들은 그에게 진주시민상을 수여했다. ▲ 학력․경력1941~1948 진주 중․고등학교 졸업1944. 9~1945. 4 광명회 사건으로 부산형무소 복역1948~1977 진주귀곡초등학교 교사, 내동초등학교 교감 퇴직1993~1997 해주정씨 대종친회 회장2003.~2006 진주향교 전교 역임2006 성균관 부관장 선임 ▲포상1960. 1 대통령 표창1963.10 진양 교육회장 표창1963. 11 경상남도 도지사 표창1964. 10 경상남도교육장 표창 1970. 5 문교부장관 표창1990 건국훈장 애족장2005. 5 진주시장 감사패

  • 2026-08-25
  • 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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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평론 민주당이 진주에서 패배하는 이유

민주당이 진주에서 패배하는 이유 민주당 당원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민주당 정치인으로서 진주에서 어떤 이미지를 만들면 좋겠느냐’는 물음에 ‘민주당이 진주에서 패배하는 이유’에 대해 솔직하게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대화는 2시간여 동안 계속되었다. 민주당은 진주에서 진주시장과 국회의원을 배출하지 못했다. 지난 20여년간의 선거를 분석해 보면 꾸준히 일정한 득표층을 확보했음에도 결정적인 벽을 넘지 못했다. 지난 2026년 전국동시지방선거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엇이 문제일까? 민주당 후보 개인의 문제는 아니다. 진주가 가진 정치지형과 전략부재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지만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정치공학적 접근방식이 가진 민주당의 한계가 여실히 반복되고 있지만 돌파하지 못했다. 진주의 정치 환경에 대한 이해 부족 혹은 접근성에서 문제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진주는 오랜 전통의 보수정당 강세지역이다. 진주가 보수의 텃밭으로 자리매김한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공무원과 퇴직공무원의 비중이 높다. 이들은 전통적으로 민주당과 거리를 두는 경향이 높다. 도농복합도시인 진주의 특성상 농촌지역의 보수성이 강한 것도 민주당에게는 약점이다. 더 큰 문제는 진주의 정치가 ‘지역 유지 중심의 인맥정치’가 강하다는 점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민주당은 기초의회에 발을 들여 놓기가 쉽지 않았다. 초창기에는 ‘진주시의회가 지역유지의 놀이터라’는 비아냥이 제기될 정도였다. 지금은 민주당의 지방의회 진출은 많이 나아졌지만 존재감은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정당 보다 사람’이라는 진주의 정치 성향이 민주당에게 불리하게 작용되었다. 따라서 민주당은 시작부터 약 40점 이하에서 선거를 시작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진주에서 민주당 계속해서 패배하는 이유이다. 민주당이 실패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로 분석된다.우선 ‘선거철에만 나타나는 정당’이라는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 평소에는 존재감이 없다는 의미이다. 근데 선거 6개월을 남겨 놓은 시점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기자회견, 현수막, 공약발표를 시작한다. 하지만 시민들은 이렇게 생각한다.“평소에는 안 보이던 사람들이 또 나타났다.” 진주의 정치는 평소의 신뢰가 결정한다는 이야기가 회자되는 이유이다. 지나친 평가일지 모르지만, ‘민주당은 후보만 바뀌었을 뿐 정당은 성장하지 않았다.’는 지적돠 만만치 않다. 예를들면 후보가 낙선하면 조직도 함께 사라졌다. 그 결과 4년 마다 ‘처음부터 시작’하는 비효율성이 반복되었다. 후보중심의 정치가 낳은 폐해이다. 진주가 직면한 수많은 현안에 대한 이슈 선점에도 무관심했다. 최근에는 LH기능 이전, 발전공기업 통합본사 유치, 공공기관 2차이전 등 진주의 미래가 걸린 아젠다가 있지만 민주당은 조용하다. 이뿐만 아니다. 원도심 공동화, 신 경제성장 동력 부재, 청년 유출, 소상공인 문제, 일자리 부족, 도시 미래 전략 부재 등이 명확함에도 나서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민주당이 이러한 이슈를 선점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선거정국 이외에는 시정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좀 더 사실적으로 말하면 국민의힘 의원보다 한참 떨어지는 수준이다. 물론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진주에서는 여당이 국민의힘이고 야당이 민주당’이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이는 지방의회에서 국민힘에 비해 민주당의 역할이 떨어진다는 지적의 우회적인 표현이다. 시민들은 대안을 원하지만 민주당은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비판과 감시의 기능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대안을 제시하는 것 자체가 애초에 무리였는지 모른다. 민주당은 ‘진주의 현안에 대한 대안은 이것이다’라는 인식을 주지 못했다. 사실 민주당 스스로 지역 의제를 만들지 못했다는 사실은 애당초 대안이 있을 수 없었다는 점을 스스로 자인한 꼴이라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는다. 민주당은 국민의힘 의원보다 더 지역의제를 발견하고 대안을 제시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걷는 길을 만들지 못한 것이 최대의 패인이다. 민주당은 전국정치 이슈에만 집중한다. 진주에서 계엄심판, 정권심판, 정권교체 등 전국정치 이슈에만 집중한다. 상대적으로 지역 이슈는 등한시되었다. 진주의 서민들이 원하는 일자리, 교통, 문화 등의 지역 아젠다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는 진주의 보수층은 물론 중도층을 설득하지 못한 결과로 작용되었다. 사실 지방의회에서 민주당 의원들이 지역 의제를 만들어 내고 집행부에 촉구하고 대안을 만들어내는 일은 거의 보지 못했다. 민주당이 진주에서 승리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있다. 민주당은 ‘전국정치’가 아닌 ‘진주정치’를 이야기해야 한다. 진주시장 선거에 있어서 시민들은 ‘민주당 진주시장’이 아니라 ‘진주를 살린 시장’을 필요로 한다. 전국정치에서 벗어나 ‘생활정치’를 일상화해야 한다.진주가 안고 있는 현안에 대해 365일 다뤄야 한다. 선거때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기자회견을 하지만 선거가 끝나면 민주당의 목소리는 찾아보기 어렵다. 왜 이러한 상황이 되풀이 되는지에 대해 되돌아보고 반성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지방의회 의원부터 강해야 한다.진주의 민주당 시의원의 역할에 대해 점수를 매긴다면 후한 점수를 주기 어렵다. 의원 개개인의 활동을 보면 5분 자유발언은 곧잘 하지만 시정질문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지금까지 진주가 안고 있는 수많은 현안에 대해 민주당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그에 반해 국민의힘 의원들은 시정질문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존재감은 물론 진주의 미래에 대한 고민이 있음을 시민들에게 알린다. 근데 민주당은 없다. 의원 개인의 문제로 귀결되는 대목이다.더 불편한 말을 한다면 ‘진주의 민주당 시의원들은 진주의 민주당이 아닌 의원 개인의 민주당에만 골몰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의제를 이끌어내고, 시민들과 토론하고, 성과를 만들어내는데 까지 이르지 못한다는 의미이다.개인적으로 제9대 진주시의회에서 민주당 시의원의 역할에 점수를 매긴다면 40점도 후할 정도이다. 진주는 어떤 정치인을 원하는 것일까?진주는 이념형 정치인이 아니라 생활형 정치인을 필요로 한다. 시민들이 원하는 후보는 진주를 잘 알고, 민원을 잘 해결하고, 싸움보다 성과를 내고, 전문가 이미지를 가진 정치인이다. 그런데 민주당은 당원을 제외하고 민주당과 진주시민의 거리는 결코 가깝지 않다. 민주당 당원이 아니면 터부시하는 경향이 심하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지도 모른다. 그래가지고는 민주당이 진주에서 자리를 잡기는 어려울 것이다. 민주당이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선거가 없는 4년동안 매주 해야 할 일이 있다. 지역현안 브리핑, 정책토론회, 청년간담회, 원도심간담회, 예산 분석, 시민제안 플랫폼 운영, 골목 민원 해결 등이다.이런 활동이 4년 동안 쌓인다면 민주당은 ‘선거때만 나타나는 정당’이 아니라 ‘진주시민들의 아픔을 함께 하는 정당’으로 변모하게 될 것이다. 진주에서 민주당이 패배하지 않기 위한 핵심은 ‘진주시민과의 신뢰의 축적’이다. 민주당이 진주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지역사회 속에서 펼치는 정책과 활동으로 존재감을 쌓아 나가는데서 부터 시작된다. ‘민주당이라서 찍는다’가 아니라 ‘진주를 위해 가장 잘 준비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을 때 비로소 진주의 정치지형을 바꿀 가능성이 생길 것이다. 민주당이 진주에서 승리하는 날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적은 글이다.

  • 2026-08-21
  • 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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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마을을 찾아서 4.  수곡면 원계리-이순신장군의 흔적을 발견하다 썸네일 이미지

Tour Jinju 자연마을을 찾아서 4. 수곡면 원계리-이순신장군의 흔적을 발견하다

원계리 창촌리에서 25번 진주시도의 북쪽으로 달리면 원계리다. 동남쪽에 도량마을, 중앙에 원계마을, 가장 북쪽에 동월마을이 위치하고 있다.원계리는 전형적인 동서고저 지형이다. 서쪽으로는 덕천강이 흐르고 그 주변으로 논밭과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 반해, 동쪽은 해발 고도 약 300m의 산지로 재궁산, 마항골, 독산 등에 둘러싸여 있다. 도량마을도량마을은 원계리의 가장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써, 하동과 진주를 연결하는 길목이란 뜻에서 도량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출렁이는 강물이 보이는 풍경은 선비들이 가장 선호하는 풍경이었을 터, 그 증거 하나가 이곳 덕천강변에 있다. 마을 남쪽 덕천강 주변에 농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는데, 주변에 세 개의 바위가 더 있었더란다. 너럭바위는 아니더라도 여러 사람 어울려 풍류를 즐기기에 손색이 없는 조건이었는지 예부터 선비들이 즐겨 찾았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농바위에는 삼락대(三樂臺)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원계마을삐그덕대는 놀이기구, 기린이며 호랑이같은 석조장, 이순신 장군 동상, 세종대왕 동상, 그리고 교장선생님의 지겨운 훈시가 있었던 교단까지. 폐교가 된 원계초등학교에 아직도 남아있는 것들이다. 원계초등학교를 지나자 진짜 마을로 들어선 느낌이다. 원계라는 마을 이름은 옛날 사곡에서 살던 밀양손씨가 옮겨와 살면서 '엥기'라 부른데서 유래돼 이후 원계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지는데, 다른 마을에 비해 눈여겨 볼만 한 것들이 많다. 원계리 노거수 마을에 정자나무나 마을을 보호하는 당산나무가 있는 경우는 흔하지만,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를 보기란 그리 흔치 않다. 그 흔치 않은 구경을 원계마을에서는 실컷 할 수 있다. 원계경로당 앞에, 지난 1982년 도지정 보호수로 지정된 원계리 노거수가 떡 하니 버티고 섰기 때문이다. 수령 550년으로 경남에서도 오래된 느티나무로 손꼽히는 원계리 노거수는 그 높이만 12m에 나무 내부가 큰 동공으로 되어있는 등 매우 기이한 형태를 띠고 있다. 게다가 전체 폭이 워낙 넓어서 서 있는 것인지 누워있는 것인지 분간이 힘들 정도다. 몸체의 중간을 쇠봉에 의지하고 있는 형편이긴 하지만, 튼튼한 둥치며 푸른 잎들이 건재함을 과시한다.이렇게 유명세를 타는 나무라면 남다른 사연도 있을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노거수에 나뭇잎이 일시에 피면 그해에 풍년이 온다는 전설이 마을에 전해져 온다고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 한 가지! 누가 말하지 않아도 주민들은 마을의 재난을 노거수가 막아주고 있다고 선한 마음으로 믿고 있다는 점이다. 이충무공진배미유적지월계마을에서 꼭 보고 넘어가야 할 한 가지를 꼽으라면 아마 누구라도 진배미 유적지를 선택할 것이다. 진배미는 이순신 장군의 인생에 있어 대전환점을 맞은 곳이다. 조선 수군의 총지휘관인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하루 아침에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는 신세로 전락했을 때, 다시금 삼도수군통제사의 임명 교서를 받고 전의를 다지며 군사를 훈련시킨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이후, 마을사람들은 원계리 앞 큰 들판이었던 이곳을 가리켜 ‘진뱀이’라고 부르고 있다.진뱀이의 ‘진’은 군사들의 대오가 있는 곳을, ‘뱀이’란 ‘논뱀이’의 준말로 ‘논두렁으로 둘러싸인 논의 하나하나의 구역’을 뜻함으로써, 즉 진뱀이란 군사들의 대오가 있는 논을 말한다.한편, 1975년 12월 이순신 장군의 호국정신과 얼을 되살리기 위해 옛 훈련장의 일부지역에 문화공보부 기념물 제16호로 높이 약 4m, 너비 1.1m 정도의 ‘이충무공 군사훈련 유적비(李忠武公 軍事訓練 遺蹟碑)”가 세워졌다. 이 유적비는 도로에서 100미터 떨어진 곳, 비닐하우스 단지 사이에 있는데 마을 주민들에겐 남다른 자부심의 공간이기도 하다. 외지 관광객이 찾아와 길이라도 물을라 치면 손짓으로 함부로 가르쳐 주는 법 없이 자청해 대뜸 길 안내를 나설 정도라니 말이다. 손경례 고택이충무공진배미유적지를 둘러보았다면 이번엔 당연히 손경례 고택을 둘러볼 차례다. 이곳은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이 1597년(선조 30) 7월 27일에 머물렀던 곳으로, 며칠이 지난 8월 3일에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교서를 받은 곳으로 더욱 유명하다. 위치를 찾는 것도 어렵지 않다. 원계리 노거수가 서 있는 뒤편으로 언덕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손씨 재실이 보이고, 그와 이웃한 집에 손경례의 후손들이 지금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대문을 걸어잠궈놓은 상태F 함부로 드나들 순 없지만, 그들에게 청을 넣으면 언제든 이순신 장군의 흔적을 찾을 수 있도록 집을 공개하고 있다.목조기와집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규모인 고택 마당에는 여기가 바로 이충무공이 재임명교서를 받은 유적지임을 알리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양정 하경복 묘원계마을과 구태마을을 연결하는 농로에서 조금 떨어진 구릉에 4각 석조분 1기가 눈에 띄인다. 하경복은 본관이 진주로, 무과에 급제한 후 함경도 경성병마절도사,함경도절제사,경상도병마절제사를 지내며 조선 초기 국방 강화에 큰 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온화한 인품의 소유자로 주변에 많은 인덕을 베풀었다고 전해진다. 묘는 1983년 8월 2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53호로 지정되어 현재 잘 관리되고 있다. 동월마을동월마을은 원계리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산청군 단성면과 인접해 있다.처음에는 마을이름을 매화정이라고 하였는데, 병자년 대홍수 때 매화나무가 모두 유실되는 바람에 산 밑으로 약간 옮겨내려와 동월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마을 서쪽에는 두뫼산이, 북쪽에는 큰 시리봉과 작은 시리봉이 있다. 특히 큰 시리봉의 꼭대기엔 옛 진양군과 하동군, 산청군 3개군의 경계라 하여 표석이 세워져 있다. 마을을 지날 때마다 표지석을 확인하는 버릇이 발동하여 마을 앞에 잠시 멈춰섰다. 그런데 동월마을 표지석 옆에는 표지석보다 더 큰 크기의 ‘효(孝)’라고 적힌 비석이 서 있다. 마을로 들어서기 전에 부모님께 효도하겠다는 맹세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짧지만 강력한 메시지다.도로 맞은편에는 딸기집하장과 경로당이 있고, 마을 안쪽으로는 비닐하우스가 즐비하다. 그런데, 마을 안으로 몇 발짝 떼기가 무섭게 오른쪽으로 펼쳐진 넓은 들을 만나게 된다. 당연히 비닐하우스 단지겠거니 하고 걷다가 뜻밖의 풍경에 살짝 당황햐지려는 찰라, 여기가 바로 칠성백이라는 마을주민으 설명에 고개를 끄덕인다. 칠성백이는 마을 서쪽에 있는 큰들이라는 의미다. 옛날 이 들 한 복판에는 북두칠성처럼 생긴 바위 7개가 있었다고 해서 불리워진 이름이라고 한다. 한낱 헛된 입소문이 아니다. 농경지정리로 인해 과거와 달리 위치가 변하고 2개의 바위가 소실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칠성백이 들 맞은 편 비닐하우스 단지 사이에 5개의 바위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마을에서 만난 주민 한 분은 그 모양새를 자신이 분명 보았고 또렷하고 기억하고 있다며 한참을 강조하셨다. 어디 별 이야기 뿐이겠는가. 마을 입구 오른편에 위치한 동월마을 동산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성성한데, 이곳은 일명 토끼가 달을 올려다보는 언덕이라 하여 망월동산으로 불리기도 한단다. 이밤..., 동월마을 망월언덕에는 북두칠성이 떨어지듯 달이 떨어지기를 바라는, 그래서 동화 속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길 바라는 토끼 한 마리가 귀를 쫑긋 세우고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 2026-08-21
  • 작성자

    황경규/진주향당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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