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of 진주 (STORY OF 진주2) 13. 일제의 심장을 겨누다-진주소싸움
일제의 심장을 겨누다진주소싸움 대한민국 최고의 전통을 가진 진주 소싸움은 진주의 기상(氣像)을 닮았다. 진주 사람들이 일제강점기 일제의 탄압을 이겨내고 견디게 한 촉매제가 바로 ‘남강 백사장의 소싸움’이었던 것이다. 진주 발(發) 소싸움 소식이 들려오면 진주 인근에서 몰려든 인파로 남강 백사장은 인산인해가 되었다. 탄탄한 근육질 몸매의 싸움소의 긴장감 넘치는 혈투가 벌어지면 수만 군중의 함성은 하늘을 진동시켰다. 백사장을 뒤 덮은 차일과 인파 속에서 진주 양조장 술이 동이 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진주 남강 백사장에서 벌어진 진주 소싸움은 일제강점기 진주 사람들의 마음속에 싸인 울분을 토해내는 해방공간이자, ‘일제의 심장을 겨누는 화살(矢)과 같은 존재’였다. 대한민국 지방지의 효시인 경남일보의 주필이던 위암 장지연은 「진양잡영(晉陽雜詠」에서 소싸움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가을 풀 우거지고 밭갈이 쉬었기로 목동들은 한가한데, 억센 소 힘이 솟아 그 분기가 산과 같네. 뒤엉킨 뿔싸움 다투어 충돌하니 제(齊)나라 군대가 절묘한 승리로 묵적(墨翟)군을 파하고 돌아오는 듯 하네. 일제는 삼일독립운동과 기생걸인독립운동 이후, 황급히 진주 소싸움을 금지시켰다. 이처럼 진주 소싸움은 조선과 일본의 대리전(代理戰)의 성격을 가졌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전통놀이였다. 진주 소싸움의 역사 진주 소싸움에 대한 기록이 있다. 한민족대백과사전에는 ‘삼국시대 전승 기념 잔치에서 비롯되어 고려 말부터 진주를 중심으로 자생한 고유의 민속놀이’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소싸움의 기원을 백제를 이긴 신라의 전승 기념잔치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소를 많이 잡아 먹어 소들을 위령하기 위해 시작되었는 설이 있다. 북한과학원이 발간한 「조선의 민속놀이편」에는 ‘진주 일대에서 줄다리기와 더불어 소싸움은 연중 가장 큰 행사’라 적고 있다. 이처럼 진주 소싸움은 오랜 전승 과정을 통해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 구성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진주에서 소싸움이 처음 개최된 것은 1884년이다. 당시 소싸움은 진주성 성내(城內)와 성외(城外) 마을간 벌였던 소싸움이 최초의 기록이다. 1909년에는 위암 장지연이 진주 소싸움의 정경을 묘사한 시(詩)를 경남일보에 게재했다. 1913년에는 추석에 진주와 창원에서 투우대회가 개최되었다. 1917년에는 남강 백사장에서 개최된 소싸움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朝鮮)』에 「진주의 투우(鬪牛)」가 소개되었고, 당시 진양군수인 일본인 야마시타(山下正導)가 경성일보 등에 「진주 명물 투우」라는 기고문을 실었다. 특히 야마시타가 기고한 글을 통해 진주 소싸움의 정황을 상세히 알 수 있다. 야마시타에 의하면, 진주의 소싸움은 남강 강변에서 열린 우시장의 성행으로 자연스럽게 개최되었고 주로 초파일과 백중, 추석 명절의 정례적 행사였다고 한다. 1884년 진주에서 벌어진 소싸움의 경우, 성안마을에 사는 부호인 김선여와 성밖 마을의 호농인 오작지 두 사람이 평소에 우량소를 키우며 서로 과시하는 과정에서 소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이 싸움을 계기로 마을 대항의 소싸움이 읍치에서 벌이는 성대한 소싸움으로 변모되었는데, 1897년경에는 고을민의 후원으로 우승상금을 마련했고 군수도 상금과 상품을 내걸면서 소싸움의 규모가 확대되었다. 진주 읍치의 성 안과 성 밖 마을들이 벌이는 소싸움이 끝난 다음날 도동면과 진주읍의 승부가 이어졌고, 17일에는 도동면과 금산면의 승부가 펼쳐졌다. 이와같이 19세기 말 진주에서는 마을 단위는 물론 고을 단위의 대동놀이로서 소싸움이 전승되었고 주민들은 싸움소를 자신이 속한 지역을 대표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이 놀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후 소싸움은 경남지역으로 확산되었다. 1926년에는 진주, 김해, 마산, 통영, 산청 등지에서 투우대회를 개최했으며, 1927년에는 의령, 합천, 하동, 거창에서 투우대회가 개최되었다. 이후 해를 거듭하면서 투우대회를 개최하는 지역이 증가했다. ‘진주는 투우놀이가 성하여 천의 군중과 함께 으르렁 으르렁 거리는 모습이 일대장관이더라’ 진주 소싸움은 일본을 바짝 긴장하게 만들었다. 삼일만세운동으로 일제가 진주 소싸움을 강제로 중단시켰다. 이후 일제의 축산장려정책으로 1923년 재개된 이후 진주를 중심으로 경남지역으로 1930년대 까지 전승되었다. 해방 이후, 진주에서는 1949년 추석을 맞아 남강 백사장에서 전국 투우대회를 개최했다. 1961년에 이르러서는 진주에서 투우단체가 결성되었다. 그리고 1964년에는 진주 개천예술제의 외곽행사로 투우대회가 개최되면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1969년 남강댐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전 대통령 방문 기념 투우대회도 개최되었다. 전국 소싸움대회의 원조인 진주가 소싸움으로 위상을 갖게 된 것은 2006년 전국 최초로 진주전통소싸움경기장을 건설하면서 부터이다. 청도는 이듬해인 2007년에 청도소싸움경기장을 개장했다. 2011년에는 진주에서 ‘토요상설소싸움대회’가 시작되었다. 더불어 매년 10월에 개최되는 진주남강유등축제와 개천예술제 기간에 열리는 ‘진주 전국 민속 소싸움 대회’는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대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최근에는 소싸움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필요성이 제기된 적이 있다. 의령군이 지난 2023년 채택한 「소싸움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필요성에 관한 보고서」는 소싸움을 문화재로 인정받음으로써 소싸움의 민속문화적 요소들을 발굴하고 복원·전승 체계를 확고히 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른바 겜블링 소싸움과의 차별화를 통해 소싸움 대회 및 싸움 소 농가의 자긍심 고취와 지속성을 확보하고 현존하는 전통 농경민속문화의 대표격인 소 싸움을 통해 국민 여가 활동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더불어 문화재 지정에 의한 소싸움의 활성화를 통해 지역 일자리 창출과 경제활성화라는 긍정적인 기대도 명시했다. 현재 소싸움은 진주를 중심으로 의령과 청도에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진주 소싸움 우표와 싸움소 은퇴식 ‘진주의 독특한 투우’가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면서 기념우표도 발행되었다. 1937년 발행한 「조선도읍대관」 진주읍 편에서 ‘진주 소싸움 우표’ 발행 소식을 전한 것이다. 진주 소싸움을 진주의 독특한 투우로 평가하면서 우편국에서 기념 우표를 발행했다. 이 우표에는 진주성 촉석루와 진주 소싸움 장면이 실려있다. 당시 진주 소싸움이 가진 위상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소싸움대회가 마치면 싸움 소의 은퇴식이 열리기도 했다. 은퇴식에서 우주(牛主)와 소가 관객들 앞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고 ‘죽으면 무덤을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의 시간도 가진다. 2009년에는 의령의 싸움소 ‘범이’가 은퇴식을 가졌고, 다음 해 범이가 죽자, 우주인 하영효씨는 정중하게 장례식을 치르고 봉분과 비석을 세워주었다고 한다. 당시 ‘범이’의 은퇴식은 mbc뉴스 등 언론매체를 통해 방송되기도 했다. 이외에도 은퇴식을 가진 싸움소는 박성권의 ‘깡패’, 진순호씨의 ‘강남스타’가 있다. 진주 소싸움 캐릭터 ‘맹우(猛牛) 진주 소싸움을 상징하는 캐릭터 ‘맹우(猛牛)’가 등장한 것은 진주에서 개최된 전국 민속 소싸움대회 캐릭터로 선정되면서 부터이다. ‘맹우(猛牛)’는 일제강점기에 유명세를 날렸던 진주 전통 소싸움 대회에서 명성을 날린 싸움소의 이름이다. ‘맹우(猛牛)’가 캐릭터로 선정된 것은 소싸움을 하던 도중 뿔이 부러지는 극한 상황을 극복하고 우승을 차지한 전설적인 진주의 싸움소이다. 캐릭터는 맹우의 힘찬 모습과 우리 민족의 얼이 담긴 흰 옷을 입혀 왜침에 항거한 백의민족의 강인함으로 표현했다. 뿔치기·목치기·후려치기, 소싸움 기술 싸움소의 등장은 1970년대 이후 농기구 사용의 일반화로 농사 소의 이용이 줄어들면서 부터이다. 대회에 출전하는 싸움소는 평소 순발력과 지구력을 키우기 위해 엄청난 체력 운동을 병행했다. 식단도 호박, 인삼에 이어 쓰러진 소도 뻘떡 일으켜 세운다는 낙지에 이르기까지 상상을 초월하는 영양 식단이었다. 그리고 싸움소는 싸움 기술을 연마했다. 소싸움 기술로는 일반적으로 치는 기술, 거는 기술, 미는 기술, 복합 기술 등이 있다. 치는 기술은 상대방 싸움소를 들이 받으면서 타격을 주는 기술로 들치기, 머리치기, 뿔치기, 옆치기, 후려치기가 있다. 거는 기술은 뿔을 이용해 상대를 걸어서 누르거나 들어 올리는 기술로 뿔걸이가 있다. 미는 기술은 힘으로 밀어 붙이는 기술로 밀치기, 목치기, 주둥이 뜨기가 있다. 복합 기술은 두 가지 이상의 기술을 연속으로 펼치는 기술이다. 대표적으로 연타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소싸움 기술은 싸움소를 기른 집안에서 대대로 이어진 지식과 민간에 전해지는 지식이 합쳐진 민속 지식으로 볼 수 있다.이러한 싸움소의 기술을 생생히 접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진양호 공원내 상설 소싸움 경기장이다. 특히 소싸움을 중계하는 해설자의 달변은 소싸움의 새로운 묘미와 재미를 알게 해준다. 경기장에서 최고의 스타는 싸움소를 제외하고는 단연 소싸움 해설자이다. 소싸움의 위기, ‘동물학대 논란’ ‘소싸움=동물학대’라는 동물·환경보호단체들의 반대가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문화재청(국가유산청)은 ‘소싸움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을 보류하고 학술조사를 선행한 후, 추진 여부를 결정키로 한다. 이른바 ‘소싸움의 위기’가 시작된 것이다. 당시 문화재위원들은 이들 단체들의 문제 제기에 대해 ‘세시풍속으로서의 소싸움과 현재 각 지역에서 상설 운영되는 소싸움의 동일시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역사성과 전승 주체, 지역주민들의 참여, 사행성, 동물 학대 등 문제 소지가 있는 부분은 학술조사를 통해 면밀히 따져야 할 일이라고 판단했다. 세시풍속이었던 ‘소싸움’이 ‘소 힘겨루기’라는 명칭으로 변경된다. 지난 2009년에 창립된 (사)한국민속소싸움협회도 2022년 (사)대한민속소힘겨루기협회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전승위기를 기회로 소싸움은 오랜 전승 과정에서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 구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대한민국 지방종합예술제의 효시인 개천예술제 등 지역축제와 결합하면서 관광자원화의 길도 열었다. 현재 전국 10개 시·군과 2개의 광역자치단체에서 소싸움 관련 조례를 제정했고, 4개의 시·군에서는 소싸움 전용 경기장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소싸움 관련 기술과 민속 지식의 전승 등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의 필요충분조건을 갖추고 있다. 소싸움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을 미룰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소싸움이 가진 한민족의 전통적인 민속문화적 요소를 발굴·복원·계승하는 것은 물론 소싸움 지속적인 전승의 문화적 기반을 마련하는 것을 더 이상 늦출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과 중국 등의 소싸움이 문화재로 지정된데 비해 대한민국의 소싸움은 전승 세대 부족 현상과 소싸움을 동물권 침해로 보는 견해 등으로 전승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이대로라면 세대를 초월한 한민족의 전통 문화유산인 소싸움은 결국 존폐의 기로에 서고 말 것이다. 소싸움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은 소싸움대회와 싸움소 농가의 자긍심 고취와 전승 지속성 확보, 국민여가 활동의 다양성 기여, 전통문화유산의 보존과 계승 등 소싸움의 미래를 결정짓는 변곡점이 될 수 있다. 소싸움의 명운이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소싸움을 동물권 침해로 보는 일부의 견해에 대해서는 다툼의 여지가 있다. 소싸움을 바라보는 시각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좀 더 깊은 숙의가 필요하다. 마권(馬券) 발행 처럼 소싸움에 대한 온라인 배팅 허용 문제 역시 냉철한 판단이 필요하다. 이러한 협의의 논란이 소싸움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에 걸림돌이 되어서는 결코 안된다는 뜻이다. 일제의 심장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전통의 진주 소싸움이 동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지금이라도 진주 소싸움의 주인공인 ‘맹우(猛牛)’가 갖고 있는 힘찬 모습과 우리 민족의 얼이 담긴 흰 옷을 입고 왜침에 항거한 진주 사람들의 강인함을 대내외에 알릴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진주 소싸움은 일제의 심장을 겨눈 진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 2026-06-29
-
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
조회수
67
진주평론외전 정수리 찬물 한 바가지
대체 젊다는 것은 무엇이던가. 거짓과 협잡이 난무하는 패악질을 두 눈 치켜 뜨고 맞서 자존을 지켜나가는 일이 아니던가. 더 나아가 기득권에 빌붙는 타락한 시대정신을 비웃고, ‘옳은 것’ 보다는 ‘유리한 것’만 찾아다니는 세상의 부조리를 깨뜨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던가. 주제넘게도 붓 한 자루 꼬나 쥔 시퍼런 청춘이 오래 전, 이 거칠고 거친 세상에 뛰어 들 때는 적어도 그랬다. 그리고 지금껏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천년 도시 진주의 속내에 정제돼 있는 진주정신의 살아있음을 말이다. 더불어 노쇠해 가는 육체가 정신의 격무를 견디지 못해 파탄하는 그 날까지 버티리라 다짐했다. 그것이 진주에서 살아 갈 수 있는 유일한 힘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정작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나도 모르게 어설픈 투사가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사람과의 일에서 단지 서로 의견이 조금 다를 뿐인데도 결코 상대방을 인정할 수 없었다. 남의 일은 단점을 들춰내고, 무턱대고 비난의 화살을 쏘아댔다. 그것이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이었기에 그랬다. 그리고 거기에서 새롭게 맛보는 작은 특권과 기득권은 달콤했다. 그러나 그것들이 단지 껍데기일 뿐 이었다는 사실을 알아 채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거머쥔 작은 특권과 기득권을 지키려고 날마다 저지르는 불평등과 불공평에 눈을 감는 내 안의 거짓된 모습에도 개혁과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읽던 책을 내려 놓는 순간,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정수리에 찬 물 한 바가지가 쏟아졌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언제부턴가 우리는 내 안의 거짓을 찾기 보다는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는데 더 익숙해져 있기에 더욱 그랬다.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겉으로는 올곧은 정신을 내세우면서도, 속으로는 자신만의 기득권을 쫓는 타락한 시대정신들이 많으리라. 어쩌면 나 자신도 그 중의 한 명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나와 주변 세계에 대한 고민의 끈을 놓지 않는 원동력이 되는 ‘정신의 탄력’이란 명제는 여전히 유효해야 한다. 그것이 진주정신이든 다른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혹시라도 한심하고 타락한 시대정신이 천년의 속내를 키워 온 진주정신을 왜곡하고 무참히 짓밟도록 내려 둘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다짐한다. 모래 위엔들 어떠랴. 무엇이든 세워라. 대신 끝이 뾰족하고 날카로워야 한다. 스치기만 해도 크고 오래 남을 상처가 남을 정도면 더 좋다. 설사 실패해 뼈에 사무치는 고통이 찾아와도 괜찮다. 그럴수록 다음 기회는 그만큼 재빠르게 오니까 말이다. 수없이 마음을 다잡고, 미리 예단해 미적거리지도, 꼼지락거리지도 말자. ‘말면 말지’ 하는 마음도 접어 두자. 구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하고, 구함이 많을수록 번잡스런 것이 세상 이치지만 도전하지 않으면 이루어지는 것은 단언코 없다.무엇을 세우든, 시작부터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예감한다. 또한 누구도 쉽게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편안하게 사는 게 어떠냐는 회유도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갖가지 이유가 따라 붙을 수도 있다. 어쩌면 지지부진하다가 슬며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없던 일’이 될 수도 있다. 예측하고 시작했으니 괜찮다. 그 정도야 지금껏 수없이 겪어왔던 일이고 견뎌냈던 일이 아니던가. 그러나 단 하나만 믿자. 진실은 다래끼 돋은 눈꼽에도 끼어 있고, 미운 며느리 속옷에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무엇이든 세워야 한다. 설사 허황된 꿈에 머물지라도, 이상만 가지고 처절한 현실의 벽을 허물려고 한 맹자의 우활(迂闊)함이라 비판받아도 좋다. 대신 절대 겁내지 말아야 한다. 상처가 남으면 어떠랴. 또 뼈에 사무치는 고통이면 어떠랴. 지금 뭔가를 세운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붓 한 자루 꼬나 든 시퍼런 청춘이 세월을 돌고 돌아 다시 세상에 뛰어든다. 딱 봐도 무모하다. 우활하다. 가시밭길이다. 근데 난 괜찮다. 함께 가는 길동무가 있기에 그렇다. 세울 것이다. 끝이 뾰족하고 날카로운 그 무엇인가를.
- 2026-06-29
-
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
조회수
123
Story of 진주 (STORY OF 진주2) 12. 1889 함안군수 오횡묵의 진주 나들이
1889 함안군수 오횡묵의 진주 나들이함안군총쇄록 조선시대 개항기의 문신·학자로 ‘조선시대 함안의 역사와 마을을 기록한 함안총쇄록(咸安叢瑣錄)’의 저자 함안군수(咸安郡守) 오횡묵(吳宖黙)이 진주(晋州) 나들이를 한 기록이 있다. 함안총쇄록 진주 편을 보면 오횡묵 군수는 1889년 5월 23일 소촌역(召村驛)을 시작으로 말티고개, 촉석루, 향교, 진주성 남문, 대사지, 함옥헌, 동장대 등 진주를 대표하는 공간을 탐방하면서 주요 건물의 위치와 구조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물론 시(詩)와 소감을 남겼다. 이는 1890년 이후 진주의 상황을 자세하게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오횡묵 군수의 진주 나들이를 토대로 ‘1890년 이후 진주의 모습’을 재구성했다. 참고로 함안군수 오횡묵은 1890년부터 1893년까지 함안군수를 지냈다. 함안총쇄록에 남겨진 진주의 기록을 그대로 옮기고 별도의 해설을 적어 보았다. 오횡묵 군수는 진주에 맨 먼저 도착한 곳은 문산의 소촌역(召村驛)이었다. 10리쯤 이르니 소촌역이 있었는데 호수가 천호(千戶) 쯤이었다. 마을의 모습이 부유해 보이고 사람과 물건이 번성해 보였다. 곧 영남 제일의 역이다.(倒十里有召村驛 可量近千戶 村容殷富 人物繁盛 乃嶠南第一察訪道也) 소촌역은 진주목(晉州牧)이 관장했던 관도(官道)인 소촌도(召村道)의 찰방역(察訪驛)이었다. 더불어 조선시대 41개 역도(驛道) 가운데 소촌역을 비롯한 16개 속역(屬驛)을 관장하던 문산찰방(文山察訪) 관할의 역이었다. 당시 소촌역의 인구수를 알기 어렵다. 다만 ‘찰방(察訪)과 역리(驛吏) 1,714명, 노(奴) 869명, 비(婢) 399명이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따라서 이 기록으로 인해 소촌역 인근의 호수가 1,000호에 달했고 소촌역 일대가 진주 지역 내에서 상당히 번성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교남제일찰방도(嶠南第一察訪道)에서 교남(嶠南)은 ‘조령(鳥嶺)의 남쪽’이라는 뜻으로 ‘경상도’를 말한다. 다음 날, 소촌역을 떠나 나루터에 도착한 오횡묵군수는 인근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새벽에 일어나 알아보니, 뱃사공이 배를 대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평평한 벌판을 바라보니 온갖 곡식이 싱싱했고, 그 앞으로 강이 두르고 있었다. 멀리 수풀이 하늘 속에 떠있었다. 하물며 장마가 막 개이고 아침 해가 비치니 나루의 풍경은 기절하지 않음이 없었다. 어제의 근심과 절망감이 오늘의 상쾌한 심정으로 바뀌었다. 배를 타고 시 한 수 읊었다. 배에서 내려서 7리(里)를 가서 도착한 곳이 마치(馬峙) 즉, 말티고개였다. 이곳에서 진주성에 있던 경상우병영(慶尙右兵營)과 촉석루(矗石樓)를 발견하고는 율시 한 수를 짓는다. 배에서 내려 7리를 가자 마치(馬峙)고개가 있었는데, 소나무가 울창했고 대나무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멀리 병영(兵營)이 보였고 큰 강이 가로질러 흐르고 회칠을 한 성벽 주위로 백성들의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사람들의 집에서 나는 연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 가운데 누각 하나가 반공에 우뚝 솟아 있었는데 바로 촉석루(矗石樓)였다. 이에 율시 한 수를 지었다. 오횡묵 군수가 본 병영은 진주성에 있는 경상우도병마절도영(慶尙右道兵馬節度營)을 말하는 듯하다. 경상우병영은 임진왜란 이후인 1603년 마산 합포에서 진주성으로 옮겨왔다. 병영(兵營)이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는 병마절도사가 있던 영문(營門)을 말한다. 큰 강이 가로질러 흐르는 것은 남강(南江)이다. 주목할 부분은 당시 ‘진주성의 성벽에 회칠(灰漆)을 했다’는 점이다. 회칠은 석회를 칠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어 당시 진주성의 상황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율시(律詩)는 촉석루가 시제(詩題)였다. 고개를 내려가 얼마 되지 않아 위로 돌 절벽이 있었고, 아래로는 강가에 험한 돌다리 사이로 나 있는 한 줄기 길이 1리 가까이 되었다. 몇 백 미터 되는 곳에 향교(鄕校)가 있었고, 또 몇 걸음 안 가서 사정(射亭)이 있었는데, 몇 그루 오래된 나무가 겹겹이 덮고 있었고, 지세가 평평하였다. 정자 북쪽에 못이 하나 있었는데, 훤출한 연꽃줄기가 빽빽이 솟아 바람을 받고 있었다. 이 곳은 진주 병영 동쪽 성의 아래였다. 말티고개에서 진주성의 병영과 촉석루를 본 뒤, 말티고개를 내려와 마주한 돌 적벽은 ‘뒤벼리’이다. 뒤벼리는 이른바 진주층의 표식지를 대표하는 곳이다. 진주층은 중생대 백악기에 쌓인 일련의 퇴적층군을 말하는 것으로 회색 내지 검은색의 사암과 셰일이 교대로 싸인 지층이 바로 뒤벼리 절벽이다. 뒤벼리 옆에서 발견한 사정(射亭)은 진주 궁도의 산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진주 최고(最古)의 국궁장인 람덕정(覽德亭)의 역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진주 최초의 사정은 1879년(고종 16) 이전에는 남강을 사이에 두고 습사를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1879년에 이르러서야 남강변 동쪽 방수림 첩석환수하(疊石環樹下)에 정(亭)을 세우고 남사정이라 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한 사정은 람덕정인 것으로 보인다. 진주 병영 동쪽 성 아래에 있던 정자(亭子)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찾기 어렵다. 오횡묵 군수의 다음 목적지가 진주성 남문(南門)임을 감안하면 이 곳 부근에 정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을 따라 몇 발짝 더 가서 도니 성의 남쪽 문인데, 예화문(禮化門)이라고 편액을 걸었다.공북문(控北門)을 돌아 들어가 군방(軍房)에 속한 영주인 김학봉(金鶴奉)에게 머물렀다. 영주인을 불러 그 지역의 산 이름과 문의 이름을 물으며 서로 말을 주고 받았다. 병영의 주산은 북쪽에 있는 비봉산(飛鳳山)이고, 남쪽은 망진봉(望晉峯)이고, 동쪽은 선학치(仙鶴峙)이고, 서쪽은 청천(菁川) 늪이었다. 진주성의 관문인 남문(南門)은 일제강점기 읍성철거령(1910년)으로 인해 훼철되어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당시 남문의 편액이 ‘예화문(禮化門)’이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으로 가치를 지닌다. 『여지도서』에 실려 있는 경상도우병영지지도에는 외성(外城)에 옹성(甕城)이 설치된 곳은 구북문(舊北門), 신북문(新北門), 남문(南門)이었다. 촉석성(矗石城)은 안팎의 주위가 10리쯤 되는데, 성의 북쪽에는 대사지(大寺池)라는 큰 못이 있었다. 못 남쪽에는 망경대(望景臺)가 있고, 동쪽에는 수정봉(水晶峯)이 있었다. 남쪽은 예화문(禮化門), 서쪽은 의정문(義正門), 북쪽은 지제문(智濟門)이라고 했다.옛날에는 북쪽문을 대인문(對仁門)이라 했고, 내북문(內北門)을 공북문(控北門), 내동문(內東門)을 촉석문(矗石門)이라고 했다. 또 안팎의 수문(水門)이 있는데 이는 병영 안에 물을 길어오는 중요한 길이었다. 촉석성은 진주성(晋州城)을 말한다. 북쪽 문을 대인문(對仁門)이라 한 것은, 과거 진주성의 북쪽에 있던 구북문(舊北門)을 말한다.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진주성도」에는 대인문은 구북문, 지제문은 신북문, 예화문은 남문, 의정문은 서문으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수문(水門)으로는 외수문(外水門), 내수문(內水門 ), 암문(暗門)이 있었다. 동쪽에 동장대(東將臺)가 있는데, 그것을 이름하여 대변청(待變廳)이라고 했다. 서쪽에는 서장대(西將臺)가 있고, 그 아래 산성사(山城寺), 호국사(護國寺)가 있었다. 장대(將臺)의 이름은 봉서루(鳳棲樓)라고 했고, 누의 남쪽에 진남루(鎭南樓)가 있었다. 또 더 가니 북장대(北將臺)가 있었다.또 촉석루(矗石樓)가 있는데, 촉석루에는 남장대(南將臺)라고 써 붙였다. 동쪽에 조그마한 집이 있어 지붕이 촉석루와 이어졌는데 함옥헌(涵玉軒)이라고 편액을 붙였다. 동장대는 조선시대 진주성에 설치됐던 4개의 장대(將臺) 중 가장 바깥 쪽에 위치한 동쪽 누각(樓閣)을 말한다. 동장대의 이칭(異稱)은 ‘대변루(待變樓)’로 알고 있지만, 여기서는 ‘대변청(待變廳)’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최대 격전지였던 동장대의 위상이 감안된 명칭으로 보인다. 촉석루에는 임진왜란 이전에 동서(東西)로 부속 누각이 있었다. 동각(東閣)으로는 능허당(凌虛堂, 나중에 함옥헌으로 개칭)과 청심헌(淸心軒)이 있었고 서각(西閣)으로는 쌍청당(雙淸堂)과 임경헌(臨景軒, 나중에 관수헌(觀水軒)으로 개칭)이 있었다. 함옥헌(涵玉軒)은 ‘누각이 넓은 강에 흐르는 옥 같은 강물을 담고 있는 듯한 모습’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촉석루 부속누각 중 최후까지 존속되다가 일본인에 의해 1906년 훼철되었다. 병영(兵營)의 외삼문(外三門)인 망미루(望美樓) 문 밖에는 기둥 모양의 높은 표석(標石)이 하나 서 있는데, 이 병영은 지형이 가는 배 모양이기 때문에 이 돛대를 세워 둔 것이라 한다. 현 진주성 영남포정사문루(嶺南布政司門樓)의 별칭이 망미루(望美樓)이다. 문 밖에 있었던 기둥 모양의 표석(標石)은 현재 없고 ‘하마비(下馬碑)’만 있다. 하마비를 표석으로 표현한 것인지는 알기 어렵다. 하지만 병영의 지형이 ‘가는 배 모양’이어서 ‘돛대’를 상징하는 표석을 세웠다는 사실은 무척 흥미롭다. 내삼문(內三門)인 원수아문(元帥衙門)은 영우병마원문(嶺右兵馬轅門)이라고 편액을 달았다.동헌(東軒)은 운주당(運籌堂)이라고 했는데, 양위합(養威閤), 완대헌(緩帶軒), 은표각(隱豹閣), 한광루(閑曠樓)라고도 했다. 서쪽의 누각은 주변루(籌邊樓)라고 했고, 또 의추각(疑秋閣)이라고 했는데 촉석루(矗石樓)를 마주하여 우뚝하였다. 동쪽에 누각 하나가 있는데, 공진당(拱辰堂) 영하루(暎荷樓)라고 했다. 당(堂)의 바깥 동쪽에 있는 것을 백화당(百和堂)이라고 했는데, 곧 막부(幕府)였고 문의 이름은 예라문(禮羅門)이라고 했다. 경상우도병마절도영(慶尙右道兵馬節度營)의 부속건물 명칭을 자세히 알 수 있다.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 소장 「진주성도」에 나타난 각 기관의 건물 명칭 표기와 비교해 더 자세하다. 먼저 계명대학교 진주성도에 표기된 ‘삼문(三門)’이 바로 원수아문(元帥衙門)이며, 편액은 영우병마원문(嶺右兵馬轅門)임을 알 수 있다. 동헌의 명칭도 운주당을 비롯해 양위합, 완대헌, 은표각, 한광루 등의 다양한 이름을 갖고 있었다. 동쪽의 누각은 백화당, 서쪽의 누각은 주변루임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은 향후 경상우도병마절도영의 복원이 이루어지면 사료로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닐 것으로 보인다. 동쪽에 중영(中營)이 있는데 우후(虞候)가 거처하는 곳이었다. 정당(政堂)은 찬주헌(贊籌軒)이라고 했는데, 또 망일헌(望日軒)이라고도 했다. 최근 진주성에 복원된 중영(中營)은 경상우병영 우후(虞候)의 군영이다. 우후는 경상우병영의 병마절도사를 보좌하는 종3품의 외관직으로 병마절도사의 참모장이다. 현재 복원된 중영의 편액은 ‘중영(中營)’이다. 하지만 이 기록에 의하면 1890년 당시 중영의 편액은 ‘찬주헌(贊籌軒)’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횡묵 군수는 촉석루 누각에서 진주를 내려다 보며 다음과 같이 소회를 적었다. 촉석루로 향하여 가서 누각 위로 걸어서 올라갔다.평상복으로 갈아입고 행장(行狀)과 담배는 꾸려 싸도록 했다. 경치를 두루 보니 누각은 성 가에 다달아 있는데, 큰 강이 그 아래로 흘러가고 있었고 장사 배와 고기잡이 배들이 혹은 물에 떠 있기도 하고 혹은 매어 있기도 했다. 뱃노래가 하늘거리고 수풀은 푸른 빛을 띠고 있었고 큰 벌판은 아득했고 여러 산들은 기이하니 정말 영남의 경치 좋은 곳이자, 군사 방어상 중요한 곳이었다. 누각은 수 십간으로 촉석루(矗石樓) 석 자로 편액되어 있었는데 일곱 살 먹은 아이가 이 글씨를 썼다고 한다. 필체가 힘이 있고 굳세었는데 한 글자가 집 한 칸에 다 찰 정도였다. 당시 붓을 놀릴 때를 상상해 보니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던 바에서 훨씬 뛰어났다. 옛날부터 이름난 학사(學士)나 유람객들이 남긴 시(詩)와 기문(記文), 발문(跋文) 등등이 즐비하게 걸려 있었다.눈을 들어 보니 정말 찬란하였고 그 능력을 자랑하고 재주를 드러내고 문채가 돋보이는 것이 후세의 사람들로 하여금 한 마디 말을 토하고 솜씨를 한 번 발휘할 수 없게끔 만들었다.이 곳은 비록 좋은 문장이 많이 모인 곳이라 해도 과장하는 말이 아니다. 그 가운데 신유한(申維翰)의 시는 중국 사람들에게 칭찬 받았다고 한다. 함안군수 오횡묵은 촉석루에서 남긴 소회를 뒤로 하고, 개양(開陽)과 조사(皂沙)의 주막에 들른 뒤 십수교(十水橋)를 끝으로 ‘진주 나들이’를 마무리했다. 함안총쇄록(咸安叢瑣錄)은 오횡묵이 함안군수로 재직한 1890년부터 1893년까지 각종 업무를 비롯해 부임지의 전반적인 상황을 매일 자세하게 기록한 일기 형식의 글로 내제(內題)는 ‘경상도함안총쇄록(慶尙道咸安叢瑣錄)이다. 이 책은 책머리에 지도를 싣고, 부임 절차와 부임 도중 지나치는 지방에 대해 기록하고 있어 다른 지방의 실태 파악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함안총쇄록에 실려있는 진주 관련 기록은 당시 진주의 자연경관과 읍치 등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기록물이다.
- 2026-06-15
-
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
조회수
149
주간평론 화투판 꼬라지
화투판 꼬라지 일제강점기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오락거리는 단연 ‘화투’였다. 밤이면 사랑방이나 주막에서 화투판이 벌어졌고, 농한기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화투를 즐기기도 했다. 근데 문제는 이 화투판이 심하면 가산탕진에 자식까지 내다 팔게 하는 또 다른 마약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정치판도 선거판도 도긴개긴이다. 화투가 불러온 이같은 망조(亡兆)는 국제통화기금시대를 지나, 경제가 겨우 허리를 펴고 있다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소위 ‘육백’ ‘삥오도시’ ‘섯다’ ‘짓고땡’ ‘아도사키’로 이어졌고, 급기야 한때는 ‘박정희 고스톱’ ‘전두환 고스톱’ 으로 부활해 막가기도 했다. 한때는 그랬다. 화투판 풍경을 보자. ‘현금 박치기’ ‘안면 몰수’ ‘촌수 불문’으로 불리는 화투판은 ‘어머님 죽어요’ ‘아버님 쌌어요’라는 막가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상가의 밤샘 고스톱은 그래도 양반 축에나 꼈지만, 해외 공항 로비에서 신문지를 깔고 서너 명 둘러앉아 고스톱을 치는 광경은 각종 언론을 도배하기도 했다. 화투판이 정치판과 다를 게 없다는 비아냥 속에서 이른바 ‘화투판의 불문율’이 회자되기 시작했다. 화투판의 불문율에 칠 것 없으면 ‘비풍초똥팔삼’을 버리라는 말이 있다. 점수도 잘 안 나고 광도 아니고 띠도 아닌 애매한 패들을 빗대어 부르는 표현이다. 근데 이러한 패를 요즘 선거판에 비춰보면 하나도 틀린 게 없다. 하나씩 풀어보자. ‘비’는 비리와 각종 의혹에도 질끈 눈을 감아버리고 일단 ‘모르쇠’로 버티는 사람이다. 사실 결과는 뻔하지만 우선 살고 보자는데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고(go) 스톱(stop) 구분이 잘 안되는 경우이다. ‘풍’은 살랑살랑 바람 부는 대로 이곳저곳 떠돌며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곳만 기웃거리는 사람이다. 겉으로는 ‘어른행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네 아이들조차 손가락질하는 줄은 모르는 사람들이다. ‘초’는 초치고 다니는 사람들을 이름인데, 겨우 먹고 사는 민초들의 멱살을 잡고 대장 앞에 무릎을 꿇리는게 도와주는 일인 양 착각하니 불쌍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이다. 정치를 종교로 생각하는 부류가 이들이다. ‘똥’은 말 그대로 구린내 나는 자들인데, 각종 특혜 의혹 제기에도 ‘깨끗한 놈 있으면 나와 봐라는 식’으로 제 식구 감싸기는 물론이고 주변의 손가락질에는 깔끔하게 고개 돌려 외면하시는 분들이다. ‘팔’은 겉만 보면 팔팔해 보이는데 속은 팍삭 늙은 분을 말하는데, 내거는 기치는 가히 개혁적으로 보이지만 마무리는 ‘상전 눈치보기’의 대가여서 저래도 되나 싶은 분이다. ‘삼’은 평생을 로터리에 서서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손바닥에 침을 뱉어 갈 길 점치는 자이니, 높은 자리에서 배 불리 먹고도 성에 안 차는 사람이다. 앞장서서 내뱉는 해괴한 말주변은 우리를 아연실색케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비풍초똥팔삼'은 버려야 한다는 화투판 선각자들의 얘기가 맞는 듯하다. 아끼다가는 ‘피박’ ‘멍박’ ‘설사’로 피칠갑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옛 어르신들은 화투판과 정치판에 빠진 사람을 보고 ‘모기가 피 빨아 먹듯 돈을 빨아 먹는다’고 했다. ‘화투판은 피를 빨아 먹는 게임’이라는 농담과 궤를 같이 한다. 오래된 잡지에 실린 ‘모기’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정치판이나 화투판에서도 상통하는 글이다. ‘이 땅에 사람으로 태어나 10g도 안되는 너와 더 이상 씨름하고 싶지 않다. 압사한 너의 시체에 경악하거나, 니가 사라진 장롱 위를 노려보며 버티는 것도 인간으로서 할 짓이 아니다. 너, 돌아가라. 네 친구들인 파리와 바퀴벌레에게도 조심하라고 일러라. 나 오늘 홈키파 사왔다.’
- 2026-06-11
-
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
조회수
253
주간평론 기득권 카르텔은 지방선거에서 손 떼라
정치는 결국 신뢰다. 유권자들은 완벽한 정치인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평소 자신의 언행과 과거 정치적 행보에 대해 최소한의 도의적인 책임을 지는 모습을 기대한다. 근데 최근 선거 양상을 보면 특정 정당의 도움으로 권력을 잡고도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탈당하거나 무소속을 선택하는 정치인들의 모습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제각각 내세우는 명분은 다양하지만 유권자들의 시선은 차갑다. 유권자를 정치적 명분의 도구로 이용하거나 볼모로 잡는 삼류정치의 전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정당정치는 정치적 우산이 아니다. 일종의 정치적 약속이다. 공천 과정에서 촉발된 문제는 정당 내부에서 해결해야 마땅하다. 절대로 유권자에게 그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된다. 정당의 그늘 속에서 막대한 권력을 행사하다가, 정당 내에서 처지가 불리해지면 ‘이제는 시민만 믿고 간다’는 말로 무소속 명분을 포장하는 주장들은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받아들이기 어렵다. 더 심각한 것은 대부분의 무소속 출마자들이 마치 ‘정의로운 결단’처럼 포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연 그럴까. 유권자의 눈에는 ‘권력에 대한 강한 집착’으로 보일 뿐이다. 더 큰 문제는 ‘보이지 않는 손’의 선거 개입 의혹이다. 정치권을 중심으로 일부 행정 조직, 관변단체, 동창회, 퇴직 공무원의 선거 개입 의혹은 그동안 끊임없이 제기되어 온 문제이다. 물론 전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이들 일부 보이지 않는 손들은 오랜 기간 형성된 인맥과 영향력을 선거에 개입시켜 개인의 기득권 추구를 최우선 목표로 삼는다. 특정 후보의 권력 연장의 도구로 자처함을 부끄럽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지역사회에서는 이러한 보이지 않은 손을 ‘기득권 카르텔’이라고 부른다. 지방선거가 오랜 기간동안 지역 권력을 공유해온 기득권 카르텔간의 권력다툼의 장이 된 점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방선거에서 일부 행정 조직과 퇴직 공무원 등의 선거 개입은 단순한 개인적 정치 활동과는 차원이 다르다. 시민들은 그것을 ‘개인 권력 쟁취의 연장선’으로 본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이른바 이들이 가진 권력과 영향력을 선거판에 동원해 기득권이나 이권을 챙기려는 의도가 저변에 깔려있다는 점이다. 지방자치단체의 출자·출연기관의 중요 직책 대부분을 퇴직 공무원이 독차지하고 있음을 보면 알 수 있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현 공무원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선거 때마다 정치 권력에 줄 서는 문화가 반복되면서 ‘공직사회의 중립성’은 무너져 왔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유권자들이 더 강한 피로감을 느끼는 것은 일부 관변단체를 비롯한 동창회 등의 조직적인 움직임이다. 선거철만 되면 대놓고 특정 후보 주변으로 몰려드는 모습은 시민들에게 심각한 허탈감을 안긴다. 시민을 위한 단체인지, 권력에 집착하는 단체인지 헷갈릴 정도이다. 더 큰 문제는 지역 여론을 왜곡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일부 관변 네트워크가 선거를 좌우하려는 시도를 계속 이어간다면 지방자치를 해치는 ‘낡고 병든 정치문화’로 낙인 찍혀 시민들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특정 관변단체들의 노골적인 선거 개입은 ‘단체 기득권 챙기기’에 불과할 뿐이다. 특정 관변단체의 비호를 받는 후보가 있다면 시민들은 표로써 반드시 심판해야 한다. 이제 ‘시민은 무엇을 심판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차례이다. ‘시민과 정당과의 약속을 저버린 정치’, ‘관변단체와 동창회 등의 조직 동원 정치’, ‘일부 퇴직 공무원과 행정 권력의 그림자’, ‘시민 위에 군림하는 기득권 권력 문화’를 심판해야 한다. 이제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시민을 악용하려는 후보에게는 철퇴를 내려야 한다. 그리고 시민을 위해 권력을 사용하는 후보를 잘 선택해야 진주의 선거문화가 건강해진다. 정치권력에 기생하는 기득권 카르텔은 당장 지방선거에서 손을 떼야 한다.
- 2026-05-18
-
작성자
황경규/진주향당 상임대표
-
조회수
324
피플&스토리 (진주사람) 7. 장충석(張忠錫)- 아낌없이 주는 나무
추담(楸潭) 장충석(張忠錫) 근검절약, 사회봉사 외길 경상남도가 경남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선정한 ‘자랑스런 경남 100인’ 중의 한 사람인 진주사람 추담(楸潭) 장충석(張忠錫, 1922~2011). 그의 삶을 되돌아보면, 오로지 ‘근검절약’과 ‘사회봉사’의 외길을 걸어 왔음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는 대한민국 제1호 세무사로서 한국세무사회의 창립멤버이자, 사회봉사단체인 진주라이온스클럽 창단멤버로 47년간 봉사했다. 만학도(晩學徒)의 삶 역시 그에게는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여는 신선한 시도였다.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의 눈에는 지역의 인재육성이라는 새로운 삶의 목표가 들어왔다. 고희를 맞은 1991년에 추담장학재단이 설립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추담장학재단은 지금도 그의 뜻을 이어 지역발전을 위한 연구와 인재육성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경남탄생 100주년을 맞아 경남도가 선정한 ‘자랑스런 경남인상’을 수상한 것은 자랑스런 진주사람이자 그의 삶이 타인의 모범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일이었다. 추담의 행적은 캡술에 보관돼 후세 사람들에게 길이길이 그 전범(典範)이 되고 있다.사후에 경상대학교에 그의 시신과 장기 기증을 약속한 추담은 일일이 기록하기 힘들 정도의 봉사활동을 해왔고, 그 결과 2001년 ‘제1회 진주시민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게 된다. 그리고 10년 후인 2011년 추담 장충석은 영원히 진주를 떠났다. 추담은 2001년 제1회 진주시민상, 2002년 대통령상, 2006년 경남문화상을 수상했으며 2007년에는 제44회 저축의 날을 맞이하여 저축 유공자로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훈하기도 했다. 저서에는『삶의 지평』『旅窓에 비친 南美大陸』가 있다. 자린고비 세무사 추담 장충석은 대한민국 제1호 세무사로서 한국세무사회의 창립 멤버이다. 1962년 2월 10일, 은행집회소에서 열린 한국세무사회 창립총회에서 133명의 회원 가운에 당당히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세무사로서의 그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세무사로서의 삶을 시작한 그의 미래가 탄탄대로가 될 것임은 누구도 의심치 않았다. 더군다나 1호 세무사라는 자부심과 그의 앞에 열린 탄탄대로는 무작정 걷기만 해도 부와 영예는 예약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진주에서 유명한 ‘자린고비 세무사’로 불렸다. 자신의 집에서 회계사무소까지 왕복 8km에 이르는 거리를 하루도 빠짐없이 도보로 출퇴근을 했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 흔한 자동차 한 대도 사지 않고 평생을 걸어다녔으니 더 할말이 없다. 하지만 그의 그러한 근검절약 정신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추담의 어머니가 몸소 실천한 봉사하는 삶을 보고 배우며 자랐기 때문이다. 추담의 어린시절 어머니의 삶은 다음과 같았다. ‘제가 어릴때 어머니께서는 끼니 때가 되어 거지가 찾아 오면, 당신의 밥을 거지에게 주고 굶을 때가 많았다’ 2007년 저축의 날을 맞아 저축유공자로 선정돼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은 추담의 회고담이다.어머니의 근검절약과 봉사하는 삶을 배우고 자란 추담에게 ‘절약과 봉사’는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흔한 자동차 한 대도 없이 도보로 출퇴근했던 그의 삶이 결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남을 위해 살자’는 생활신조는 그렇게 자신의 인생 대부분을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한 삶을 살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생활신조는 일상생활에서 철저히 실천되었다.근검절약하는 삶을 산 추담은 무려 400여개가 넘는 통장을 가질만큼 넉넉했지만, 3천원짜리 점심을 사먹을만큼 그의 검소한 생활은 그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절약하는 습관에 이어 그만의 재테크 비법을 소개하기도 했다. 세무사라는 직업을 갖게 된 이후, 그는 진주의 한 금융기관과 거래를 했다. “한 금융기관과 거래를 하면 신용도도 쌓이고 VIP 대접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만의 노하우다. 추담장학재단 설립 추담이 오로지 돈을 버는데만 매달린 것은 아니다. 평소의 경제관념을 알게 해주는 그만의 신념이 있었다. ‘돈 버는 자랑을 하지 말고, 돈 쓰는 자랑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자린고비 세무사로 이름났던 추담은 이렇게 아껴 모은 돈으로 1991년 ‘추담장학재단’을 설립하게 된다. 1991년 10월 고희연을 맞은 추담은 추담연구장학재단 발기인 총회를 열고, 12월 18일에는 1억원을 출자해 재단설립신청을 하면서,「추담장학재단」이 결실을 맺게 된다.추담장학재단은 현재 5억원의 출자금을 기반으로 지역의 어려운 학생들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을 전하는 소중한 재단으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1992년에 등록허가를 마친 추담장학재단은 이듬해인 1993년 제1회 연구비 및 장학금 수여식을 갖고 교수(2명)와 학생(12명)에게 총 1천만원을 지급하게 된다. 이어 1994년에는 1,550만원, 1994년에는 5,000만원을 출자한데 이어 1995년에는 1,980만원, 1997년에는 2,480만원 등 지난 2001년까지 수혜금액은 2억1,590만에 이르렀다. 추담이 별세한 2011년부터는 장학재단이 경상대학교로 이관되면서「추담연구재단」으로 명칭은 변경됐지만, 추담의 설립 취지에 맞게 교수와 학생에게 연구지원금과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추담은 추담장학재단 설립과 관련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생을 두고 나 자신의 힘으로 남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길 늘 기대해 왔다. 비록 만학도의 몸이긴 하지만 69세 되던 해에 경상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사과정을 거치면서 낙후된 지방대학의 육성 발전을 위해 견실한 장학재단의 설립이 시급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추담장학재단을 설립하게 된 것이다.” 당시 추담이 가졌던 지방대학의 발전과 인재육성의 중요성. 그것은 만학도로서의 삶을 산 추담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만학도(晩學徒)의 삶 69세의 만학도 추담 장충석이 석사모를 쓰던 날, 그의 지나온 삶에 대한 언론의 관심이 집중됐다. 자린고비 세무사에 저축왕으로 이름났던 추담이 만학도(晩學徒)로서의 새로운 삶을 걷게 된 이유는 여러모로 언론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던 것이다.‘배움에 있어서는 청춘’이라는 이야기를 자신있게 할 수 있었던 건, 추담이 비교적 넉넉한 세무사 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학문에의 끊임없는 욕구 때문이었다. ‘어떤 형태로든 기회만 닿으면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고 말해왔던 추담은 끊임없는 업무와 노령으로 인한 건강쇠약으로 소망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던중 지난 1988년 경상대학교에서 1년 과정의 경영자반 학생을 모집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1년 정도면 늙은이도 어떻게든 할 수 있을것 같았다’는 추담은 선뜻 마음을 내어서 원서를 제출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원서마감과 동시에 경영자과정이 없어지게 되었다. 결국 추담은 ‘큰 맘 먹고’ 석사과정에 등록을 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만학도로서의 삶은 박사학위를 취득하는데까지 이르게 된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경상대학교 경영행정대학원에 진학하긴 했지만, 칠순을 눈 앞에 둔 노령의 몸으로 경영전공서적을 들여다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난생 처음 대하는 영어는 큰 고민거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담은 1학년 1학기를 우수한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기도 했다.추담은 끊임없는 노력으로 계속 장학생에 선발됐다. 그런 그가 떠올린 생각 하나. ‘나는 장학금을 받지 않아도 공부를 할 수 있는 형편이지만 젊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결국 추담은 자신이 받은 장학금을 가난한 학생에게 주기를 권하며 자신은 사양했다. 그의 만학도로서의 삶은 계속 이어졌다. 2학년때는 그 어렵다는 종합시험도 거뜬히 통과한 추담은 논문심사도 무사히 통과했다. 그의 석사학위 논문은「기업합병에 따른 세무회계처리에 관한 연구」이다.1989학년도 학위수여식에 참석한 추담은, 69세의 최고령 학위수여자로 주위의 부러움과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만학도로서의 첫 꿈이 비로소 이루어지던 순간이었다.추담의 학력을 보면 1946년 9월 30일 진주사범 교원양성학과 졸업, 1957년 경남대학교 졸업, 1990년 8월 25일 경상대 경영대학원(경영학석사) 졸업에 이어, 5년 뒤인 1995년에는 경남대학교 대학원 경영학 박사과정을 밟았다. 그의 나이 74세였다.세무사로서의 그의 삶이 그랬듯이 만학도로서의 삶 역시, 그에게는 하나의 끊임없는 도전이었고 결국에는 화려한 꽃을 피워냈다. 자랑스런 경남인 추담은 경상남도가 경남도 탄생 100주년을 맞아 선정한 ‘자랑스런 경남인 100인’에 선정됐다. 경남의 명예를 드높인 경남인 100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된 영예를 얻은 것이다. 그의 삶 곳곳에 깃들어 있는 교훈은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자린고비 세무사, 저축왕, 장학재단, 만학도로 대표되는 추담의 삶에 있어 또 하나의 흔적을 찾는다면 단연 ‘지역에 대한 봉사’이다. 1964년 국제 라이온스클럽 진주라이온스클럽 창립 멤버로 새로운 지역봉사의 지평을 열었다. 진주라이온스클럽 창단 이후 47년간 계속된 그의 사회봉사활동 경력은 아직도 모범사례로 남아 있다. 시내에 거주하고 있는 동거인 합동결혼식을 개최한 것은 물론 1991년 고희연때에는 2명의 소년 소녀 가장에게 각 200만원의 성금으로 국민주택에 입주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민주화 시민정신운동과 관련해 김동길 교수 초청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지역의 정신문화 개선에도 그 흔적을 남겼다.1992년 4월에는 180만원의 봉사금을 쾌척해 국제재단 Melvin Jonce Fellow 회원이 되었으며, 1996년에는 경남탄생 100주년에 즈음하여 ‘자랑스런 경남 100인’에 선정되어 캡슐에 그의 공적이 보관되어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진주발전을 위한 그의 헌신도 적지 않았다. 이남두 진주시장 재임시절에는 ‘민간인 토지감정평가 위원’에 위촉돼 남강교~새벼리 도로 2차선 확장 공사 당시 강남동과 칠암동쪽 토지를 감정가로 매입하여 현재와 같은 4차선 보도를 설치하는데 공헌을 했다.또한 진주시 지방세 심의위원으로 활동한 것은 물론 한국산업경제학회 고문으로 경제부분에서 활약을 하기도 했다. 삶의 지평 추담은 지난 1997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마지막 삶의 목표에 대해 밝힌 적이 있다. 평생을 근검절약과 봉사로 살아온 그의 마지막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만년에 배움에 대한 열의로 가득찼던 그가 가진 마지막 소망은 진주의 인재를 키우는 장학사업이었다.추담장학재단은 그가 작고한 뒤에도 여전히 지역의 인재들에게 꿈과 희망이 되고 있지만, 그의 속내는 진주발전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많이 연구자들과 학생들에게 혜택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사람이 밥을 하루에 한 그릇을 먹든, 두 그릇을 먹든, 죽을 때는 돈 한 푼 가져 갈 수 없어. 쓸데없는 물욕이 사람을 망치는 길이야” 추담의 말속에는 욕심없이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사는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삶에 제법 어울리는 삶을 사는 것도 중요하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내가 진주에서 살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았는데, 이제는 사회에 환원하고 싶어” 그는 생전에 한 푼이라도 더 아껴 장학금을 만들고 싶어했고, 그 장학금으로 지역발전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어 우수한 인재가 육성되어 장래 진주의 발전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고자 했다.추담은 생을 마감하기 전에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은 학구파였으며, 여전히 집에서 그의 직장까지 왕복 8km의 거리를 걸어다녔으며, 3천원 짜리 소박한 밥으로 점심을 해결하는 자린고비 세무사였다.담배를 피우지도 않았고, 매일 아침 세숫물을 변기에 부어 물을 아꼈던 추담. 평생을 세무사로 살았지만 자신의 명의로 된 재산이라고는 땅 한평도 없다. 그리고 추담은 자신의 시신과 장기를 경상대 의과대에 기증하기로 약속했고 실천했던 ‘아낌없는 삶’을 살았다. 진주시민상 수상 진주시의 명예를 빛내거나 지역발전에 공이 있는 진주시민을 대상으로 수여하고 있는 ‘제1회 진주시민상’에 추담이 선정됐다.진주시민상은 체육 및 지역발전에 공헌해온 사람에 대해 부문별로 시상을 해왔던 진주시문화상이 대상자가 줄고 권위가 없다는 지적에 따라 2001년부터 진주의 명예를 빛냈거나 지역사회 발전에 공헌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을 선정해 시상하는 상이다.추담이 처음으로 제정된 진주시민상에 선정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적어도 그가 걸어왔던 89년 삶 가운데 거의 대부분이 진주에 있었고, 그의 다양한 활동 역시 진주발전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저축유공자로 선정돼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은 뒤 그의 인터뷰는 너무나 평범하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었다.“요즘 대학까지 애들 교육하려면 돈도 많이 든다는데 국민 저축률이 떨어져서 걱정입니다.적게 벌더라도 아껴 쓰고 장래를 위해 반드시 저축해야 한다”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그 일은 추담은 평생을 실천했다. 오늘날 자신만의 삶의 방향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럴때 추담 장충석이 걸어온 길을 한 번 되돌아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그는 그의 삶의 원천이었던 세무사 생활에 한 치의 빈틈도 없었고, 어머니의 근검절약 정신을 이어받아 검소했으며, 자신을 위해 돈을 쓰기 보다는 사회를 위해 사랑의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자신은 한 평의 땅도 소유하지 않은 채 자연으로 돌아갔다.진주사람 추담 장충석은 그렇게 살았다. ▲ 학력1946. 9. 30 진주사범 교원양성과 졸업1957. 3. 15 경남대학교 경제학과 졸업1990. 8. 25 경상대학교 경영대학원졸업(경영학석사)1995. 3. 경남대학교 대학원 경영학박사과정 ▲경력1946~1950 초등학교 교사1951~1961 재무부산하 세무서 주사1961~2011 한국 제1호 세무사개업1964. 10. 17 진주라이온스클럽 창립멤버1992~ 추담장학재단 설립 ▲포상1975. 5 경남팔각회 총재 공로패1980. 10 진주경찰서장 감사패1980. 10 라이온스 317-C지구총재 표창패1984. 11 라이온스 한국복합지구의장 공로패1988. 4 한국세무사회장 거북이금상패1992. 4 한국세무사회장 공로패1994. 5 부산지방세무사회장 봉사상1996. 8 라이온그창시자 Melvin Jonce Fellow상1994. 한국세무사회장 봉사상1999. 진주시장 표창장1996. 8 자랑스런 경남도민상2001. 10 진주시민상2002 대통령상2006 경남문화상2007 국민훈장 목련장
- 2026-05-06
-
작성자
황경규/진주향당 상임고문
-
조회수
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