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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OF 진주2) 15. 진주 막걸리의 역사(feat. 진주곡자와 교방막걸리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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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경규/진주향당 상임고문

  • 작성일

    2026.08.25 PM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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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

진주 고유의 문화인 교방문화의 바탕 위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전통 누룩 제조회사의 존재, 그리고 진주의 막걸리 역사를 잇고 있는 막걸리 제조업체가 모여 진주 막걸리의 옛 위상을 찾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진주 막걸리 역사를 말하다

진주곡자와 교방 막걸리 축제

 

농사일에 지칠 즈음, 어김없이 등장하는 걸쭉한 막걸리 한 사발과 두부, 신 김치 한 조각만으로도 고된 노동이 한순간의 보람으로 변했던 새참의 기억이 있으실 것이다. 양은 주전자를 들고 아버지 술 심부름을 다녔던 양조장의 기억은 이제 가물 가물하지만, 양조장 주인에게 얻어 먹은 술지게미에 취해 비틀거리며 집으로 걸어가던 추억은 비교적 또렷하다. 

대학 시절, 어깨에 잔뜩 힘을 준 선배 옆에서 받아 마시던 막걸리에 사이다를 섞은 ‘막사의 추억’이 엊그제 같은데, 국가 행사의 만찬 건배주로 등장한데 이어, 유명 백화점 식품관에 자리잡은 프리미엄 막걸리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막걸리는 ‘국민주’로 자리하고 있다. 

현대 문학계의 거성으로 평가받는 천상병 시인은 막걸리를 좋아했다. 직업도 수입도 없었던 시인의 소일거리는 지인들에게 돈을 얻어 막걸리를 사서 마시는 일이었다. 시인을 딱하게 여긴 김동길 교수가 양주를 선물했는데, 양주를 팔아 막걸리를 사마셨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막걸리 애호가였다. 전통주인 막걸리를 청와대 만찬주로 사용할 만큼 막걸리에 진심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역시 매달 막걸리를 청와대로 배달시켜 먹을 만큼 막걸리 매니아였다.

「막걸리 빚기」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막걸리를 무형문화재로 등록한다는 건 한국인의 정체성이 깃든 공동체 음식임과 동시에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한 것이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찾아가는 양조장’을 선정하고 있다. 지역에서 운영되고 있는 예스러운 양조장부터 현대식 양조장을 선정해 지역축제와 관광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꾸며나가고 있다. 젊은 세대들의 막걸리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이는 곧 막걸리의 다양화와 산업화에 밑거름이 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일제강점기 진주의 주조업과 토종기업

 

일본제국주의 전시경제 체제가 시작된 1930년 후반부터 쌀이 전략물자로 통제되면서 전통주 생산에 큰 타격을 받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걸리를 비롯한 전통주는 전국적으로 가장 인기있는 주종의 지위를 유지한다. 진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진주대관(晋州大觀)』은 일제강점기 진주의 갖가지 기록을 정리한 진주안내서이다. 이 책은 1940년대 진주의 경제와 금융 동향은 물론 상공업 추세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특히 상공업 분야에 ‘조선주조업(朝鮮酒造業)’에 대한 기록이 있다. 

당시 진주의 주조업의 현황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진주세무서가 발표한 1939년 간세 추측액이 조선주(탁주)와 약주가 35만원으로 1위를 차지했고 청주가 6만원으로 그 뒤를 이었다. 여기에 ‘조선주 및 청주의 양조 석수는 해마다 비약적으로 증가를 보이고 있으며 근년의 상황은 실로 눈부신 전진을 보이고 있다’는 전망도 내놓았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진주의 주조업은 당시 상공계를 주름잡고 있었다.

진주대관에 나타난 조선 술(탁주) 관련 기록은 흥미롭다. ‘조선 술은 보편적으로 일반 기호에 적당하여 왕왕 식사대용으로 마시고 있어 자가양조가 성행했다.’고 평가했다. 일제는 국가재원 확보를 위해 주세령을 발표와 면허제도를 실시했다. 1927년에는 조선주 면허 인원이 90명에 조석고(造石高)가 9,800석에 이르렀다. 이듬해인 1928년에는 면허 인원을 4명으로 줄였고, 1931년에는 진주양조합자회사 1개소로 집약했다. 

일제강점기 진주의 주조업은 1928년 면허인원 축소에 따라 4개였다. 특히 이들 기업들은 모두 진주 사람이었다. 당시 진주에서 주조업을 한 기업은 ‘진주양조합자회사(대표 김백용)’, ‘영남약주제조주식회사(사장 정상진)’, ‘진양주조주식회사(사장 이명후)’, ‘유곡주조합명회사(대표 김백용)’이다. 일본인이 경영했던 회사로는 ‘진주주조회사(사장 신야무성)’이 있었다.

진주 최초의 주조업체은 ‘진주양조합자회사’이다. 1930년 9월 1일 창업했으며 자본금은 3만원이었다. 소재지는 진주부 수정정 542번지이다. 대표 사원은 김백용(金伯容)이며 지배인은 김원용, 업무집행사원은 구종학이다.

진주양조합자회사에 이어 ‘영남약주제조주식회사’가 1935년 6월 28일 창업했다. 소재지는 진주부 동봉정(계동) 25번지이다. 취체역 사장에 정상진(鄭相珍)이며, 자본금은 5만원이다. 상무 취체역에는 김재희, 취체역 지배인에는 김백용, 감사역에 이명후, 박경수, 오명진이다.

‘진양주조주식회사’는 1936년 4월 1일 창업했으며 자본금은 8만원이다. 소재지는 진주부 대정동(강남동) 73번지이다. 취제역 사장은 이명후(李明厚), 전무 취제역 남상천, 취제역 이우종이다.

‘유곡주조합명회사’는 1939년 4월 1일 창업했으며 자본금은 1만5천원이다. 소재지는 진주부 유곡리 487번지이다. 대표사원은 김백용(金伯容), 지배인 김의용, 업무집행사원 박경수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한국전쟁으로 진주의 조선주 기업들은 생산설비와 인력 수급에 애로를 겪었고, 1965년 주세법 개정으로 수출용을 제외한 주류에 쌀 사용이 금지되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쌀 대신 보리와 밀로 대체된 막걸리는 인기를 잃었고 희석식 소주 등에 자리를 내주고 만다. 

진주대관에는 당시 진주의 경제를 지탱했던 상공인 현황을 기록하고 있다. 진주 경제를 이끌었던 제회사(諸會社)로는 진주합동운송주식회사(정상진), 진주하주운송주식회사(황한철), ㈜광신상회(허용백), ㈜강문현상점(강문현), 진흥주식회사(박규석), ㈜협성상점(최지환), 진주합동인쇄주식회사(정창화), ㈜인풍당한약방(박문호), ㈜진주정미소(정명수), (합)삼이상회(정대화), 진주상공주식회사(허만채), 선만물산합명회사(허윤구)가 있었다.

정미업으로는 김봉규 정미소, 이무화 정미소, 윤태중 정미소, 오주환 정미소, 조용태 정미소, 김순규 정미소, 권대우 정미소, 이정식 정미소, 정상언 정미소가 있었다. 지역별로는 옥봉정미소, 대안정미소, 봉산정미소, 동봉정미소, 수정정미소가 영업을 했다.

개인공장의 경우, 포목상·직물상으로 구인회(具仁會) 상점을 비롯해 기계기구상에 최대원, 약종상·약제상에 원준옥(元準玉) 창신당이 있다. 서점(書店)으로는 조학제(趙鶴濟), 자전거상 김용주(金容柱), 인쇄업에 합동인쇄소, 직물·생사업에 추겸호(秋謙鎬), 악기점에 이중영(李中英) 등이 있었다.

진주의 요리집으로는 망월(동성동), 진주관(대안동), 금곡원(대안동), 옹아헌(중안동), 경성관(장대동), 군현관(장대동), 연승관(장대동), 건흥관(본성동) 등이 있었다.

 

대한민국 전통 누룩의 맥을 잇다

 

막걸리 맛의 핵심은 누룩이다. 막걸리에 사용되는 누룩에 따라 맛과 향이 달라진다. ‘메주없는 장(醬)을 상상할 수 없듯이 누룩없는 한국 술은 상상할 수 없다.’는 격언이 있을 정도이다. 누룩이 막걸리의 개성을 좌우한다는데 이견은 없다. 막걸리를 빚는 양조장은 넘쳐 나지만 전통방식으로 누룩을 생산하는 업체는 전국적으로 손에 꼽을 정도라는게 안타까울 뿐이다. 

막걸리는 ‘방금 막 거른 술’이라 뜻을 가지고 있고 ‘탁하게 빚은 술’이라고 해서 탁주라고 부르기도 한다. 약주와 청주의 개념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막걸리와 같은 방식으로 술을 빚고 발효시킨 술덧에서 술지게미를 걸러내어 맑게 만든 술이다. 곡류 중 쌀을 원료로 하고 누룩을 1% 이상 사용하면 약주, 1% 미만을 사용하면 일본 사케 방식인 청주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막걸리는 곡류(쌀, 밀, 보리 등) 원료에 국(누룩, 입국 등)과 물을 섞어 일정한 온도에서 발효시킨 술덧을 체 등으로 걸러 제조한 술이다. 탁주의 주원료는 멥쌀, 누룩 그리고 물이다. 멥쌀 고두밥을 찐 뒤에 이를 식혀서 물과 함께 빻은 누룩을 비벼 항아리에 담는다. 항아리를 25도 전후의 따뜻한 곳에 놓아두면 술이 발효되기 시작하여 빠르게는 4~5일 만에, 더디게는 7~8일 만에 완성된다.

 

대한민국 전통 누룩의 맥을 잇는 기업이 있다. 전통 누룩제조업체인 ‘진주곡자(대표 이진형)’와 광주에서 전통누룩을 제조하는 ‘송학곡자’다. 최근에 경북 상주의 ‘상주곡자’가 경영난으로 문을 닫으면서 한국에서 전통 누룩을 전문으로 생산하는 곳은 진주곡자와 송학곡자 뿐이다.

진주곡자는 8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지난 1945년 시작된 진주곡자는 1974년 연구소를 시작으로 진주곡자공업연구소라는 이름으로 무려 3대에 걸쳐 80년간 전통누룩을 제조하는 회사로 대한민국 전통 누룩의 대명사가 되고 있다. 전국의 수많은 양조장의 70% 가량이 진주곡자의 누룩을 사용한다는 점은 대한민국 전통주의 맥을 잇고 있다는 증명에 다름 아니다.

진주곡자는 옛 문헌에 나오는 방식 그대로 누룩을 제조하고 있다. 최근에는 현대의 과학적인 관리 환경을 접목해 적정한 온도와 습도의 유지 조절을 취한 최적 관리 자동화시스템을 갖추고 대량생산에도 뛰어들었다.

진주곡자공업은 1974년 한국곡자 진주영업소가 문을 닫으며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다. 한국곡자 당시에는 외진형 대표의 외조부가 운영했고, 이대표의 부친이 진주곡자로 이름을 바꿔 가업을 이었다. 대학에서 마케팅을 전공했던 이대표는 2002년 진주곡자에 들어와 대를 이었다.

진주곡자공업은 진주의 특산물인 앉은뱅이 밀을 이용해 누룩을 제조하고 있다. 진주시 금곡면의 금곡정미소가 앉은뱅이밀의 종자를 지켜오고 있다. 앉은뱅이밀은 껍질이 얇고 가루가 매우 부드럽다. 쫄깃한 식감과 고소한 맛이 특징이며 글루텐 함량도 일반 밀에 비해 적은 것이 특징이다. 앉은뱅이밀을 사용하는 진주곡자의 누룩을 사용한 막걸리는 맛과 향은 물론 유산균의 생존 지속 유효기간이 길어서 ‘막걸리 고유의 맛과 향’을 낸다.

‘막걸리 빚기’가 국가지정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수원양조협동조합이 젊은세대를 겨냥해 출시한 ‘행궁둥이’를 선보였다. 누룩에 대한 고민을 거듭하다가 최종적으로 진주곡자의 누룩을 사용했다는 일화도 있다. 진주곡자의 누룩이 가진 역사성과 가치가 빛나는 대목이다.

진주곡자공업은 우리 것을 지켜가는 소중한 진주의 토종기업이다.

 

진주랑 교방 막걸리 축제

 

막걸리 빚기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시작된 ‘막걸리 빚기’는 오랫동안 한반도 전역에서 전승, 향유되었고, 전국에 분포한 양조장을 중심으로 막걸리의 지역별 특색이 뚜렷하다는 점이 지정 이유이다. 하지만 막걸리 빚기 문화를 계승하고 보존하려는 노력은 그리 많지 않다. 국가 차원의 세심한 배려와 투자가 필요한 부분이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지역관광과 연계하는 문화·체험공간으로 ‘찾아가는 양조장’을 선정해 전통 막걸리를 통한 지역경제활성화를 꾀하고 있다. 현재 전국적으로 59개소가 운영중이다. 찾아가는 양조장은 지역의 우수한 양조장을 선정해 전통주 시음과 만들기 체험으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아쉽게도 진주에는 ‘찾아가는 양조장’이 없다.

대한민국에서 생산되는 전통주를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전통주 갤러리’도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서울 북촌에서 시작된 전통주 갤러리에서는 전국에서 생산되는 전통주 시음과 구입이 가능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전통주인 막걸리를 활용한 이러한 다양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정작 ‘대한민국 전통 누룩의 본산’인 진주는 진주의 전통주를 활용한 지역경제활성화 노력이 전무하다. 일제강점기, 진주에서 조선 주조업을 이끌었던 토종기업과 80년 진주곡자이 건재하지만 관심이 그리 높지 않다. 

최근 지역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교방음식과의 연계를 통한 진주 막걸리 살리기 사례가 곧 ‘진주랑 교방 막걸리 축제’이다. 이 축제는 진주 막걸리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지닌 진주곡자의 누룩으로 만든 진주 막걸리의 우수성을 대내외에 알리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더불어 교방문화를 통해 전해진 진주냉면의 함께 먹은 육전을 비롯해 진주의 특산물을 활용한 전(煎)을 활용한 축제이다. 현재는 기획단계에 있지만 ‘진주 고유 교방문화+대한민국 대표 전통 누룩+진주 막걸리’가 결합된 새로운 진주의 관광콘텐츠로 자리잡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진주랑 교방 막걸리 축제는 전통 막걸리와 음식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개념의 축제에서 벗어나 MZ세대와 기성세대가 함께 어울리는 공간으로 준비하고 있다. 

 

‘막걸리와 치즈’.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젊은 세대에게는 이미 익숙한 조합이다. 이대형 경기도농업기술원 농업연구사의 기고를 소개한다. 

 

개인적으로 ‘막걸리에 어울리는 치즈는 없을까 ’라는 생각을 한 적 있다. 호기심에 테이스팅을 했었다. 외국에서는 술을 거창한 요리가 아닌 치즈, 초콜릿 그리고 빵 등 편하게 즐길 수 있는 핑거 푸드와 함께 마시는 경우가 많다. 와인은 치즈, 위스키는 다크초콜릿과 맛의 조합이 좋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 막걸리를 발효식품인 치즈와 먹는다면 재미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브리, 그라나 파다노, 고르곤졸라 등 우리에게 익숙한 치즈와 함께 일반 막걸리와 고급 막걸리 등을 시음했었다. 브리는 향이 약한 막걸리와 어울린다면 감칠맛이 강한 그라나 파다노는 신맛이 나는 막걸리와 찰떡궁합이었다. 단맛과 향이 강한 막걸리는 고르곤졸라 치즈와 짝꿍이었다. 불협화음을 낼 거 같던 막걸리와 치즈의 조합은 뜻밖에 시너지를 내서 매우 흥미로웠다. 

 

진주 고유의 문화인 교방문화의 바탕 위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전통 누룩 제조회사의 존재, 그리고 진주의 막걸리 역사를 잇고 있는 막걸리 제조업체가 모여 진주 막걸리의 옛 위상을 찾고자 하는 것이 ‘진주랑 교방 막걸리 축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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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룡(翼龍), 진주 하늘을 지배하다고고(古古)한 자연사,진주익룡발자국전시관 백악기(白堊紀) 익룡(翼龍)이 진주의 하늘을 지배했다. 일억 일천만 년 전 백악기 익룡의 땅이었던 진주(晋州)는 자연사(自然史)의 보고(寶庫)이다. 중생대 백악기 공룡(恐龍)은 진주 땅의 지배자였다.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육식공룡의 화석을 보유한 화석산지(化石産地) 진주는 1억여 년 전 백악기 자연유산(自然遺産)의 보물창고임에 손색없다. 진주에는 4개의 공룡화석산지가 있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천연기념물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다. 공룡축제로 전국적인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경남 고성군은 화석 관련 천연기념물이 2개에 불과하다. ‘화석산지(化石産地) 진주(晋州)’의 가치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세계 최대의 중생대 익룡 발자국 화석이 전시된 진주익룡발자국전시관에서 ‘고고(古古)한 자연사 여행’을 떠나 본다. 익룡(翼龍), 진주 하늘을 날다 세계 최대 규모의 중생대 익룡 발자국 화석이 발견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물갈퀴 새’를 포함해 새 발자국 화석 642개와 육식공룡인 수각류의 발자국 화석 67개가 발굴되었다. 당시 이 화석산지는 문화재계와 학계를 비롯한 전 세계적으로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진주는 다양한 중생대 백악기 생물들의 흔적인 화석이 존재하고 있는 세계 최대, 최고의 화석산지로 고고학계에 등장했다. 진주혁신도시 조성 공사 중 발견된 천연기념물 제543호 진주 호탄동 익룡·새·공룡 발자국 화석산지가 바로 그곳이다. 경남 진주 혁신도시 개발 사업 조성 공사 구역 내 입회 조사를 실시하던 중 토목공사 구역의 퇴적층에서 익룡 발자국 화석, 새 발자국 화석, 수각류 발자국 화석 등의 화석이 대규모로 발견되었다. 발굴 조사에서 발견된 익룡 발자국은 개수, 밀집도, 그리고 보존 형태 등에서 국내 최대로 발견되어 학술적 가치와 그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2011년 10월 14일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진주익룡발자국전시관’에 백악기 하늘을 지배했던 익룡과 다양한 화석들이 전시되어 있다. 익룡발자국자연유산적 가치 세계 최대 규모의 익룡발자국 화석이 매우 다양한 크기와 형태로 발견되었다. 이는 중생대 백악기 당시 익룡의 행동 특성 연구와 익룡의 해부학적 특성을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갖고 있다. 특히 단일 지역 내에서 최고의 생물 다양성 군집을 이루고 있다는 점은 전 지구적인 백악기 공룡시대의 고생태와 고환경 이해에 있어 중요한 자연사적 가치를 갖고 있다. 이 지역에 분포하는 백악기 진주층은 호수 또는 호수주변부 퇴적환경에서 형성되었으며 발자국 화석의 생성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했다.고고학계에 따르면 세계 최대 규모의 익룡 발자국을 비롯해 매우 잘 보존된 도마뱀 발자국, 세계 최소 랩터 발자국 등 진주에서 발견된 우수한 화석들이 가지는 가치와 중요성이 높다. 국내에서는 1996년 전남 해남에서 아시아 최초로 300여 점의 익룡 발자국이 발견된 이후, 경남 하동, 사천, 거제 등지에서도 나타났다. 하지만 진주의 화석산지는 규모 면에서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가장 많이 산출된 곳으로 관심을 모았다. 특히 발자국 화석의 경우에는 걸어 다닌 흔적인 ‘보행렬’도 5개 이상 발견이 된 것은 물론 보존 상태도 양호한 것으로 나타났다. 진주는 진주익룡발자국전시관을 개관하고, 익룡 발자국 2,500여점을 비롯해 중생대 백악기 생물들의 화석을 전시함과 동시에 1억 1천만년 전 익룡과 공룡 등 당시 동물들의 발자국 화석을 보유한 진주의 고고학적 가치를 대내외에 알리고 있다. 진주 호탄동 익룡·새·공룡 발자국 화석산지에서 발견된 주요 발자국 화석은 익룡 발자국 2,486개, 새 발자국 1,220개, 육식공룡 발자국 122개, 초식공룡 발자국 47개, 척추동물 발자국 11개 및 악어·도마뱀·개구리·포유류 발자국 등 약 4,000여개인 것으로 보고되었다.현재 진주익룡발자국전시관에 전시된 주요 화석은 다음과 같다. ▲밀집된 익룡 발자국 화석 ▲ 아주 작은 아기 익룡의 발자국 ▲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개구리의 발자국 ▲ 세계에서 가장 작은 육식 공룡인 랩터의 발자국 ▲ 중생대 백악기 호수에 살았던 악어와 거북의 발자국 ▲ 가느다란 발가락 자국들이 선명하게 남겨진 도마뱀 발자국 ▲ 캥거루처럼 뒷발 두 개로만 깡충깡충 뛰어다니던 뜀걸음형 포유류의 발자국 ▲ 수컷 육식 공룡이 짝짓기를 위해서 암컷 육식 공룡을 유혹했던 구애 흔적 ▲ 네 발로 걸어 다닌 포유류의 발자국 ▲ 정체를 알 수 없는 대형 척추동물의 발자국 등이다. 진주익룡발자국전시관의 진주화석관(晋州化石館)에는 진주혁신도시 조성 공사 중 발견된 1억 1천만 년 전 살았던 익룡 발자국 화석뿐만 아니라 희귀한 도마뱀 발자국과 세계에서 가장 작은 랩터 발자국, 캥거루쥐 발자국까지 다양한 발자국 화석이 전시되어 있다. 도마뱀 보행열희귀한 도마뱀 발자국 진주익룡발자국전시관)에는 전 세계에서 단 3개만 발견된 1억 1천천만년 전 도마뱀 발자국이 전시되어 있다. 도마뱀은 무게가 가벼워 발자국을 남기기 어렵고 서식지가 달라 공룡에 비해 화석으로 발견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랩터 발자국 거대한 육식공룡의 이미지와 달리 세계에서 가장 작은 공룡인 랩터 발자국이 발견되었다. 발자국 길이가 1cm로 ‘진주에서 발견된 드로마에오사우루스의 발자국’이라는 의미로 ‘드로마에오사우리포미페스 라루스(Dromaeosauriformipes rarus)라고 불린다. 일반적으로 랩터는 세 개의 발가락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먹이를 낚아 채기 위해 위로 휘어져 있어 두 개의 발자국을 남긴다. 최초 발견, 억어 발자국 화석 혁신도시 조성 공사 중 가장 먼저 발견된 화석은 중생대 백악기 공룡과 함께 생활한 악어(鰐魚) 발자국 화석이다. 발견된 화석수는 2,486개이다. 악어는 앞다리는 5개의 발가락, 뒷다리는 4개의 발가락을 갖고 있다. 뜀걸음 포유류 발자국 화석 코리아살티페스 진주엔시스(Koreasaltipes Jinjuensis)는 ‘진주에서 발견된 한국의 뜀걸음 발자국’이라는 의미의 학명이다. 이 발자국 화석은 캥거루처럼 두 발로 깡충깡충 뛰어다녔던 작은 포유류이다. 진주익룡발자국전시관의 진주화석관(晋州翼龍館)에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익룡 발자국 화석들이 전시되어 있다. 진주에 살았던 익룡으로 추정되는 듕가리프테루스의 뼈 화석(복제)가 대표적이다. 수각류 발자국세계 최고 익룡 발자국 화석산지 진주혁신도시에서 발굴된 익룡 발자국은 8개의 발굴 지층에서 2,500여 개가 발견되었다. 대부분의 발자국은 1, 4, 8층에서 800여 개씩 발견되었다. 특히 일부 익룡 발자국에는 물갈퀴와 발톱까지 선명하게 남아 있어 ‘최대 최고의 익룡 발자국 화석산지’라는 명성을 얻었다. 진주에 살았던 익룡 진주에서 발견된 익룡 화석은 ‘듕가리프테루스 화석(Dsunggaripterus Weii)’와 ‘안항구에라 화석(Anhangguera Blittersdorfi)’이다. 듕가리프테루스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끝이 뾰족하고 길쭉한 턱으로 위로 굽어있고, 턱 앞부분은 이빨이 없으나 턱 뒤쪽에는 강하고 뭉툭한 이빨을 가지고 있어 부리로 조개 등을 찾아 이빨로 부숴 먹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안항구에라는 포르투칼어로 ‘늙은 악마’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약 4.6m의 큰 날개를 가지고 있는 중형급 익룡이다. 세계 최고(最古)의 개구리 발자국 진주에서 발견된 개구리 발자국은 세계적으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4번째 발견이다. 개구리 발자국 화석을 보면 4개의 앞발과 뒷 발자국이 보존되어 있고, 연속적인 뜀걸음 보행렬(hopping trackway)이 관찰된다. 새 발자국 화석들이 함께 보존되어 있는데, 이것을 통해 새들이 개구리를 잡아먹기 위해서 이곳을 돌아다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개구리 발자국 화석은 최소 1억 1천만 년 전에 개구리가 점프 능력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증거이다. 전 세계가 진주를 주목하다 진주 호탄동 익룡·새·공룡 발자국 화석산지에 전 세계의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논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들 논문들 중에 주목을 받고 있는 논문은 ▲ 세계에서 가장 작은 랩터 공룡 발자국(사이언티픽 리포트)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개구리발자국(백악기연구) ▲가장 큰 도마뱀 발자국(사이언티픽 리포트) ▲동북아시아 최초의 악어발자국(백악기연구) ▲뜀걸음형 포유류 발자국 ▲육식 공룡 발자국 화석 등 백악기 공룡생태계를 알 수 있는 다양한 화석들에 대한 연구였다.‘진주에서 최초로 발견된 화석’으로 이름이 명명된 것은 3종류이다. ‘드로마에오사우리포미페스 라루스’(Dromaeosauriformipes rarus), ‘네오사우로이데스 이노바투스’(Neosauroides innovatus), ‘코리아살티페스 진주엔시스’(Koreasaltipes jinjuensis)다. 더불어 새로운 종류의 익룡 발자국으로 테라이크너스 그라실리스(Pteraichnus gracilis)로 명명된 화석이 있다. 한국, 일본, 스페인에서 보고되었던 소형 익룡 발자국과 비교해 앞발자국에서 뒤쪽을 향하는 세 번째 발가락이 길이가 더 길고, 좁고 긴 형태를 보이고 있는 이 소형 익룡 발자국 화석은 중생대 백악기 동안 호수에서 퇴적된 진주층에서 발견되었으며 약 1억 700만 년 전에 살았던 익룡이 남긴 발자국이다. 중생대 백악기 화석산지의 중심, 진주 진주는 전 세계적인 화석산지의 중심이다. 현재 진주의 화석산지는 ▲진주 유수리 백악기 화석산지(천연기념물 제390호) ▲진주 가진리의 새발자국 및 공룡발자국 화석산지(천연기념물 제395호) ▲진주 정촌면 백악기 공룡·익룡발자국 화석산지(천연기념물 제566호) ▲진주 호탄동 익룡·새·공룡 발자국 화석산지(천연기념물 제543호)가 있다. 진주 가진리의 새 발자국 및 공룡 발자국 화석산지 천연기념물 제395호로 새와 공룡의 발자국이 함께 남아 있는 드문 경우에 해당하는 화석산지이다. 약 1억년 전 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된 세계적인 공룡과 새 발바국 화석산지이다. 원래 해발 55m 정도의 구릉지였다. 경남과학교육원 신축과정에서 화석이 발견되었다. 발굴 결과, 5개 지역에서 새 발자국 2,500개, 공룡 발자국 80개, 양 날개 길이가 20m에 달하는 익룡 발자국 20개가 발견되었다. 새발자국은 3종으로 나뉘는데 가장 큰 발자국은 길이가 419m에 달한다. 땅의 겉표면이 말라 거북이등처럼 갈라져 터진 모양과 물결자국 등도 발견되었다. 진주 유수리 백악기 화석산지 천연기념물 제390호이다. 이 화석산지는 약 1억 년전 중생대 백악기에 물과 바람에 의해 모래와 진흙이 쌓이면서 만들어진 퇴적층으로 두 개의 공룡화석층이 150m 사이를 두고 발견되었다. 대한민국 최초로 용각류의 지골, 발가락 뼈, 새끼 공룡의 좌골화석, 종류를 알 수 없는 두개골 화석 2점, 장골편 등 147점에 달하는 공룡화석이 발굴되었다. 오래된 토양층이나 나무 그루터기 화석, 숯 화석, 각종 과거 생물의 생활 흔적 화석 등 다양한 화석들이 발견되었다. 이는 공룡이 살던 당시의 환경과 화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진주 정촌면 백악기 공룡·익룡발자국 화석산지 천연기념물 제566호이다. 중생대 백악기의 공룡과 익룡을 비롯해 1만 여개의 발자국 화석이 대거 발견되었다. 단일 화석지로 높은 밀집도와 다양성이 있는 화석 산지로 보고되었다. 세계적으로 희귀한 사례로 보고되었다 7,000여개의 공룡 발자국이 집단 보행을 하는 화석이 발견된 것이다. 특히 2cm 남짓한 아주 작은 크기의 발자국부터 50cm가량 되는 대형 육식 공룡 발자국까지 나타났다.이 화석산지는 발자국의 밀집도, 다양성, 학술적 가치 측면에서 독보적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더불어 1억 년전 대한민국에 살았던 동물들의 행동양식, 서식환경, 고생태 등을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정보를 담고 있다. 진주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주요 화석산지이다. 진주 권역에 집중된 공룡 발자국 등의 화석의 보관과 관리, 연구의 필요성이 매우 높다. 현재 중생대 백악기 화석산지인 진주에 국립지질유산센터의 설립을 추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2026-08-25
  • 작성자

    황경규/진주향당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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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OF 진주2) 13. 일제의 심장을 겨누다-진주소싸움

일제의 심장을 겨누다진주소싸움 대한민국 최고의 전통을 가진 진주 소싸움은 진주의 기상(氣像)을 닮았다. 진주 사람들이 일제강점기 일제의 탄압을 이겨내고 견디게 한 촉매제가 바로 ‘남강 백사장의 소싸움’이었던 것이다. 진주 발(發) 소싸움 소식이 들려오면 진주 인근에서 몰려든 인파로 남강 백사장은 인산인해가 되었다. 탄탄한 근육질 몸매의 싸움소의 긴장감 넘치는 혈투가 벌어지면 수만 군중의 함성은 하늘을 진동시켰다. 백사장을 뒤 덮은 차일과 인파 속에서 진주 양조장 술이 동이 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진주 남강 백사장에서 벌어진 진주 소싸움은 일제강점기 진주 사람들의 마음속에 싸인 울분을 토해내는 해방공간이자, ‘일제의 심장을 겨누는 화살(矢)과 같은 존재’였다. 대한민국 지방지의 효시인 경남일보의 주필이던 위암 장지연은 「진양잡영(晉陽雜詠」에서 소싸움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가을 풀 우거지고 밭갈이 쉬었기로 목동들은 한가한데, 억센 소 힘이 솟아 그 분기가 산과 같네. 뒤엉킨 뿔싸움 다투어 충돌하니 제(齊)나라 군대가 절묘한 승리로 묵적(墨翟)군을 파하고 돌아오는 듯 하네. 일제는 삼일독립운동과 기생걸인독립운동 이후, 황급히 진주 소싸움을 금지시켰다. 이처럼 진주 소싸움은 조선과 일본의 대리전(代理戰)의 성격을 가졌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전통놀이였다. 진주 소싸움의 역사 진주 소싸움에 대한 기록이 있다. 한민족대백과사전에는 ‘삼국시대 전승 기념 잔치에서 비롯되어 고려 말부터 진주를 중심으로 자생한 고유의 민속놀이’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소싸움의 기원을 백제를 이긴 신라의 전승 기념잔치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소를 많이 잡아 먹어 소들을 위령하기 위해 시작되었는 설이 있다. 북한과학원이 발간한 「조선의 민속놀이편」에는 ‘진주 일대에서 줄다리기와 더불어 소싸움은 연중 가장 큰 행사’라 적고 있다. 이처럼 진주 소싸움은 오랜 전승 과정을 통해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 구성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진주에서 소싸움이 처음 개최된 것은 1884년이다. 당시 소싸움은 진주성 성내(城內)와 성외(城外) 마을간 벌였던 소싸움이 최초의 기록이다. 1909년에는 위암 장지연이 진주 소싸움의 정경을 묘사한 시(詩)를 경남일보에 게재했다. 1913년에는 추석에 진주와 창원에서 투우대회가 개최되었다. 1917년에는 남강 백사장에서 개최된 소싸움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朝鮮)』에 「진주의 투우(鬪牛)」가 소개되었고, 당시 진양군수인 일본인 야마시타(山下正導)가 경성일보 등에 「진주 명물 투우」라는 기고문을 실었다. 특히 야마시타가 기고한 글을 통해 진주 소싸움의 정황을 상세히 알 수 있다. 야마시타에 의하면, 진주의 소싸움은 남강 강변에서 열린 우시장의 성행으로 자연스럽게 개최되었고 주로 초파일과 백중, 추석 명절의 정례적 행사였다고 한다. 1884년 진주에서 벌어진 소싸움의 경우, 성안마을에 사는 부호인 김선여와 성밖 마을의 호농인 오작지 두 사람이 평소에 우량소를 키우며 서로 과시하는 과정에서 소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이 싸움을 계기로 마을 대항의 소싸움이 읍치에서 벌이는 성대한 소싸움으로 변모되었는데, 1897년경에는 고을민의 후원으로 우승상금을 마련했고 군수도 상금과 상품을 내걸면서 소싸움의 규모가 확대되었다. 진주 읍치의 성 안과 성 밖 마을들이 벌이는 소싸움이 끝난 다음날 도동면과 진주읍의 승부가 이어졌고, 17일에는 도동면과 금산면의 승부가 펼쳐졌다. 이와같이 19세기 말 진주에서는 마을 단위는 물론 고을 단위의 대동놀이로서 소싸움이 전승되었고 주민들은 싸움소를 자신이 속한 지역을 대표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이 놀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후 소싸움은 경남지역으로 확산되었다. 1926년에는 진주, 김해, 마산, 통영, 산청 등지에서 투우대회를 개최했으며, 1927년에는 의령, 합천, 하동, 거창에서 투우대회가 개최되었다. 이후 해를 거듭하면서 투우대회를 개최하는 지역이 증가했다. ‘진주는 투우놀이가 성하여 천의 군중과 함께 으르렁 으르렁 거리는 모습이 일대장관이더라’ 진주 소싸움은 일본을 바짝 긴장하게 만들었다. 삼일만세운동으로 일제가 진주 소싸움을 강제로 중단시켰다. 이후 일제의 축산장려정책으로 1923년 재개된 이후 진주를 중심으로 경남지역으로 1930년대 까지 전승되었다. 해방 이후, 진주에서는 1949년 추석을 맞아 남강 백사장에서 전국 투우대회를 개최했다. 1961년에 이르러서는 진주에서 투우단체가 결성되었다. 그리고 1964년에는 진주 개천예술제의 외곽행사로 투우대회가 개최되면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1969년 남강댐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전 대통령 방문 기념 투우대회도 개최되었다. 전국 소싸움대회의 원조인 진주가 소싸움으로 위상을 갖게 된 것은 2006년 전국 최초로 진주전통소싸움경기장을 건설하면서 부터이다. 청도는 이듬해인 2007년에 청도소싸움경기장을 개장했다. 2011년에는 진주에서 ‘토요상설소싸움대회’가 시작되었다. 더불어 매년 10월에 개최되는 진주남강유등축제와 개천예술제 기간에 열리는 ‘진주 전국 민속 소싸움 대회’는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대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최근에는 소싸움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필요성이 제기된 적이 있다. 의령군이 지난 2023년 채택한 「소싸움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필요성에 관한 보고서」는 소싸움을 문화재로 인정받음으로써 소싸움의 민속문화적 요소들을 발굴하고 복원·전승 체계를 확고히 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른바 겜블링 소싸움과의 차별화를 통해 소싸움 대회 및 싸움 소 농가의 자긍심 고취와 지속성을 확보하고 현존하는 전통 농경민속문화의 대표격인 소 싸움을 통해 국민 여가 활동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더불어 문화재 지정에 의한 소싸움의 활성화를 통해 지역 일자리 창출과 경제활성화라는 긍정적인 기대도 명시했다. 현재 소싸움은 진주를 중심으로 의령과 청도에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진주 소싸움 우표와 싸움소 은퇴식 ‘진주의 독특한 투우’가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면서 기념우표도 발행되었다. 1937년 발행한 「조선도읍대관」 진주읍 편에서 ‘진주 소싸움 우표’ 발행 소식을 전한 것이다. 진주 소싸움을 진주의 독특한 투우로 평가하면서 우편국에서 기념 우표를 발행했다. 이 우표에는 진주성 촉석루와 진주 소싸움 장면이 실려있다. 당시 진주 소싸움이 가진 위상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소싸움대회가 마치면 싸움 소의 은퇴식이 열리기도 했다. 은퇴식에서 우주(牛主)와 소가 관객들 앞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고 ‘죽으면 무덤을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의 시간도 가진다. 2009년에는 의령의 싸움소 ‘범이’가 은퇴식을 가졌고, 다음 해 범이가 죽자, 우주인 하영효씨는 정중하게 장례식을 치르고 봉분과 비석을 세워주었다고 한다. 당시 ‘범이’의 은퇴식은 mbc뉴스 등 언론매체를 통해 방송되기도 했다. 이외에도 은퇴식을 가진 싸움소는 박성권의 ‘깡패’, 진순호씨의 ‘강남스타’가 있다. 진주 소싸움 캐릭터 ‘맹우(猛牛) 진주 소싸움을 상징하는 캐릭터 ‘맹우(猛牛)’가 등장한 것은 진주에서 개최된 전국 민속 소싸움대회 캐릭터로 선정되면서 부터이다. ‘맹우(猛牛)’는 일제강점기에 유명세를 날렸던 진주 전통 소싸움 대회에서 명성을 날린 싸움소의 이름이다. ‘맹우(猛牛)’가 캐릭터로 선정된 것은 소싸움을 하던 도중 뿔이 부러지는 극한 상황을 극복하고 우승을 차지한 전설적인 진주의 싸움소이다. 캐릭터는 맹우의 힘찬 모습과 우리 민족의 얼이 담긴 흰 옷을 입혀 왜침에 항거한 백의민족의 강인함으로 표현했다. 뿔치기·목치기·후려치기, 소싸움 기술 싸움소의 등장은 1970년대 이후 농기구 사용의 일반화로 농사 소의 이용이 줄어들면서 부터이다. 대회에 출전하는 싸움소는 평소 순발력과 지구력을 키우기 위해 엄청난 체력 운동을 병행했다. 식단도 호박, 인삼에 이어 쓰러진 소도 뻘떡 일으켜 세운다는 낙지에 이르기까지 상상을 초월하는 영양 식단이었다. 그리고 싸움소는 싸움 기술을 연마했다. 소싸움 기술로는 일반적으로 치는 기술, 거는 기술, 미는 기술, 복합 기술 등이 있다. 치는 기술은 상대방 싸움소를 들이 받으면서 타격을 주는 기술로 들치기, 머리치기, 뿔치기, 옆치기, 후려치기가 있다. 거는 기술은 뿔을 이용해 상대를 걸어서 누르거나 들어 올리는 기술로 뿔걸이가 있다. 미는 기술은 힘으로 밀어 붙이는 기술로 밀치기, 목치기, 주둥이 뜨기가 있다. 복합 기술은 두 가지 이상의 기술을 연속으로 펼치는 기술이다. 대표적으로 연타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소싸움 기술은 싸움소를 기른 집안에서 대대로 이어진 지식과 민간에 전해지는 지식이 합쳐진 민속 지식으로 볼 수 있다.이러한 싸움소의 기술을 생생히 접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진양호 공원내 상설 소싸움 경기장이다. 특히 소싸움을 중계하는 해설자의 달변은 소싸움의 새로운 묘미와 재미를 알게 해준다. 경기장에서 최고의 스타는 싸움소를 제외하고는 단연 소싸움 해설자이다. 소싸움의 위기, ‘동물학대 논란’ ‘소싸움=동물학대’라는 동물·환경보호단체들의 반대가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문화재청(국가유산청)은 ‘소싸움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을 보류하고 학술조사를 선행한 후, 추진 여부를 결정키로 한다. 이른바 ‘소싸움의 위기’가 시작된 것이다. 당시 문화재위원들은 이들 단체들의 문제 제기에 대해 ‘세시풍속으로서의 소싸움과 현재 각 지역에서 상설 운영되는 소싸움의 동일시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역사성과 전승 주체, 지역주민들의 참여, 사행성, 동물 학대 등 문제 소지가 있는 부분은 학술조사를 통해 면밀히 따져야 할 일이라고 판단했다. 세시풍속이었던 ‘소싸움’이 ‘소 힘겨루기’라는 명칭으로 변경된다. 지난 2009년에 창립된 (사)한국민속소싸움협회도 2022년 (사)대한민속소힘겨루기협회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전승위기를 기회로 소싸움은 오랜 전승 과정에서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 구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대한민국 지방종합예술제의 효시인 개천예술제 등 지역축제와 결합하면서 관광자원화의 길도 열었다. 현재 전국 10개 시·군과 2개의 광역자치단체에서 소싸움 관련 조례를 제정했고, 4개의 시·군에서는 소싸움 전용 경기장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소싸움 관련 기술과 민속 지식의 전승 등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의 필요충분조건을 갖추고 있다. 소싸움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을 미룰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소싸움이 가진 한민족의 전통적인 민속문화적 요소를 발굴·복원·계승하는 것은 물론 소싸움 지속적인 전승의 문화적 기반을 마련하는 것을 더 이상 늦출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과 중국 등의 소싸움이 문화재로 지정된데 비해 대한민국의 소싸움은 전승 세대 부족 현상과 소싸움을 동물권 침해로 보는 견해 등으로 전승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이대로라면 세대를 초월한 한민족의 전통 문화유산인 소싸움은 결국 존폐의 기로에 서고 말 것이다. 소싸움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은 소싸움대회와 싸움소 농가의 자긍심 고취와 전승 지속성 확보, 국민여가 활동의 다양성 기여, 전통문화유산의 보존과 계승 등 소싸움의 미래를 결정짓는 변곡점이 될 수 있다. 소싸움의 명운이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소싸움을 동물권 침해로 보는 일부의 견해에 대해서는 다툼의 여지가 있다. 소싸움을 바라보는 시각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좀 더 깊은 숙의가 필요하다. 마권(馬券) 발행 처럼 소싸움에 대한 온라인 배팅 허용 문제 역시 냉철한 판단이 필요하다. 이러한 협의의 논란이 소싸움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에 걸림돌이 되어서는 결코 안된다는 뜻이다. 일제의 심장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전통의 진주 소싸움이 동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지금이라도 진주 소싸움의 주인공인 ‘맹우(猛牛)’가 갖고 있는 힘찬 모습과 우리 민족의 얼이 담긴 흰 옷을 입고 왜침에 항거한 진주 사람들의 강인함을 대내외에 알릴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진주 소싸움은 일제의 심장을 겨눈 진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 2026-08-25
  • 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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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OF 진주2) 12. 1889 함안군수 오횡묵의 진주 나들이

1889 함안군수 오횡묵의 진주 나들이함안군총쇄록 조선시대 개항기의 문신·학자로 ‘조선시대 함안의 역사와 마을을 기록한 함안총쇄록(咸安叢瑣錄)’의 저자 함안군수(咸安郡守) 오횡묵(吳宖黙)이 진주(晋州) 나들이를 한 기록이 있다. 함안총쇄록 진주 편을 보면 오횡묵 군수는 1889년 5월 23일 소촌역(召村驛)을 시작으로 말티고개, 촉석루, 향교, 진주성 남문, 대사지, 함옥헌, 동장대 등 진주를 대표하는 공간을 탐방하면서 주요 건물의 위치와 구조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물론 시(詩)와 소감을 남겼다. 이는 1890년 이후 진주의 상황을 자세하게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오횡묵 군수의 진주 나들이를 토대로 ‘1890년 이후 진주의 모습’을 재구성했다. 참고로 함안군수 오횡묵은 1890년부터 1893년까지 함안군수를 지냈다. 함안총쇄록에 남겨진 진주의 기록을 그대로 옮기고 별도의 해설을 적어 보았다. 오횡묵 군수는 진주에 맨 먼저 도착한 곳은 문산의 소촌역(召村驛)이었다. 10리쯤 이르니 소촌역이 있었는데 호수가 천호(千戶) 쯤이었다. 마을의 모습이 부유해 보이고 사람과 물건이 번성해 보였다. 곧 영남 제일의 역이다.(倒十里有召村驛 可量近千戶 村容殷富 人物繁盛 乃嶠南第一察訪道也) 소촌역은 진주목(晉州牧)이 관장했던 관도(官道)인 소촌도(召村道)의 찰방역(察訪驛)이었다. 더불어 조선시대 41개 역도(驛道) 가운데 소촌역을 비롯한 16개 속역(屬驛)을 관장하던 문산찰방(文山察訪) 관할의 역이었다. 당시 소촌역의 인구수를 알기 어렵다. 다만 ‘찰방(察訪)과 역리(驛吏) 1,714명, 노(奴) 869명, 비(婢) 399명이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따라서 이 기록으로 인해 소촌역 인근의 호수가 1,000호에 달했고 소촌역 일대가 진주 지역 내에서 상당히 번성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교남제일찰방도(嶠南第一察訪道)에서 교남(嶠南)은 ‘조령(鳥嶺)의 남쪽’이라는 뜻으로 ‘경상도’를 말한다. 다음 날, 소촌역을 떠나 나루터에 도착한 오횡묵군수는 인근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새벽에 일어나 알아보니, 뱃사공이 배를 대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평평한 벌판을 바라보니 온갖 곡식이 싱싱했고, 그 앞으로 강이 두르고 있었다. 멀리 수풀이 하늘 속에 떠있었다. 하물며 장마가 막 개이고 아침 해가 비치니 나루의 풍경은 기절하지 않음이 없었다. 어제의 근심과 절망감이 오늘의 상쾌한 심정으로 바뀌었다. 배를 타고 시 한 수 읊었다. 배에서 내려서 7리(里)를 가서 도착한 곳이 마치(馬峙) 즉, 말티고개였다. 이곳에서 진주성에 있던 경상우병영(慶尙右兵營)과 촉석루(矗石樓)를 발견하고는 율시 한 수를 짓는다. 배에서 내려 7리를 가자 마치(馬峙)고개가 있었는데, 소나무가 울창했고 대나무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멀리 병영(兵營)이 보였고 큰 강이 가로질러 흐르고 회칠을 한 성벽 주위로 백성들의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사람들의 집에서 나는 연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 가운데 누각 하나가 반공에 우뚝 솟아 있었는데 바로 촉석루(矗石樓)였다. 이에 율시 한 수를 지었다. 오횡묵 군수가 본 병영은 진주성에 있는 경상우도병마절도영(慶尙右道兵馬節度營)을 말하는 듯하다. 경상우병영은 임진왜란 이후인 1603년 마산 합포에서 진주성으로 옮겨왔다. 병영(兵營)이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는 병마절도사가 있던 영문(營門)을 말한다. 큰 강이 가로질러 흐르는 것은 남강(南江)이다. 주목할 부분은 당시 ‘진주성의 성벽에 회칠(灰漆)을 했다’는 점이다. 회칠은 석회를 칠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어 당시 진주성의 상황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율시(律詩)는 촉석루가 시제(詩題)였다. 고개를 내려가 얼마 되지 않아 위로 돌 절벽이 있었고, 아래로는 강가에 험한 돌다리 사이로 나 있는 한 줄기 길이 1리 가까이 되었다. 몇 백 미터 되는 곳에 향교(鄕校)가 있었고, 또 몇 걸음 안 가서 사정(射亭)이 있었는데, 몇 그루 오래된 나무가 겹겹이 덮고 있었고, 지세가 평평하였다. 정자 북쪽에 못이 하나 있었는데, 훤출한 연꽃줄기가 빽빽이 솟아 바람을 받고 있었다. 이 곳은 진주 병영 동쪽 성의 아래였다. 말티고개에서 진주성의 병영과 촉석루를 본 뒤, 말티고개를 내려와 마주한 돌 적벽은 ‘뒤벼리’이다. 뒤벼리는 이른바 진주층의 표식지를 대표하는 곳이다. 진주층은 중생대 백악기에 쌓인 일련의 퇴적층군을 말하는 것으로 회색 내지 검은색의 사암과 셰일이 교대로 싸인 지층이 바로 뒤벼리 절벽이다. 뒤벼리 옆에서 발견한 사정(射亭)은 진주 궁도의 산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진주 최고(最古)의 국궁장인 람덕정(覽德亭)의 역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진주 최초의 사정은 1879년(고종 16) 이전에는 남강을 사이에 두고 습사를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1879년에 이르러서야 남강변 동쪽 방수림 첩석환수하(疊石環樹下)에 정(亭)을 세우고 남사정이라 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한 사정은 람덕정인 것으로 보인다. 진주 병영 동쪽 성 아래에 있던 정자(亭子)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찾기 어렵다. 오횡묵 군수의 다음 목적지가 진주성 남문(南門)임을 감안하면 이 곳 부근에 정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을 따라 몇 발짝 더 가서 도니 성의 남쪽 문인데, 예화문(禮化門)이라고 편액을 걸었다.공북문(控北門)을 돌아 들어가 군방(軍房)에 속한 영주인 김학봉(金鶴奉)에게 머물렀다. 영주인을 불러 그 지역의 산 이름과 문의 이름을 물으며 서로 말을 주고 받았다. 병영의 주산은 북쪽에 있는 비봉산(飛鳳山)이고, 남쪽은 망진봉(望晉峯)이고, 동쪽은 선학치(仙鶴峙)이고, 서쪽은 청천(菁川) 늪이었다. 진주성의 관문인 남문(南門)은 일제강점기 읍성철거령(1910년)으로 인해 훼철되어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당시 남문의 편액이 ‘예화문(禮化門)’이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으로 가치를 지닌다. 『여지도서』에 실려 있는 경상도우병영지지도에는 외성(外城)에 옹성(甕城)이 설치된 곳은 구북문(舊北門), 신북문(新北門), 남문(南門)이었다. 촉석성(矗石城)은 안팎의 주위가 10리쯤 되는데, 성의 북쪽에는 대사지(大寺池)라는 큰 못이 있었다. 못 남쪽에는 망경대(望景臺)가 있고, 동쪽에는 수정봉(水晶峯)이 있었다. 남쪽은 예화문(禮化門), 서쪽은 의정문(義正門), 북쪽은 지제문(智濟門)이라고 했다.옛날에는 북쪽문을 대인문(對仁門)이라 했고, 내북문(內北門)을 공북문(控北門), 내동문(內東門)을 촉석문(矗石門)이라고 했다. 또 안팎의 수문(水門)이 있는데 이는 병영 안에 물을 길어오는 중요한 길이었다. 촉석성은 진주성(晋州城)을 말한다. 북쪽 문을 대인문(對仁門)이라 한 것은, 과거 진주성의 북쪽에 있던 구북문(舊北門)을 말한다.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진주성도」에는 대인문은 구북문, 지제문은 신북문, 예화문은 남문, 의정문은 서문으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수문(水門)으로는 외수문(外水門), 내수문(內水門 ), 암문(暗門)이 있었다. 동쪽에 동장대(東將臺)가 있는데, 그것을 이름하여 대변청(待變廳)이라고 했다. 서쪽에는 서장대(西將臺)가 있고, 그 아래 산성사(山城寺), 호국사(護國寺)가 있었다. 장대(將臺)의 이름은 봉서루(鳳棲樓)라고 했고, 누의 남쪽에 진남루(鎭南樓)가 있었다. 또 더 가니 북장대(北將臺)가 있었다.또 촉석루(矗石樓)가 있는데, 촉석루에는 남장대(南將臺)라고 써 붙였다. 동쪽에 조그마한 집이 있어 지붕이 촉석루와 이어졌는데 함옥헌(涵玉軒)이라고 편액을 붙였다. 동장대는 조선시대 진주성에 설치됐던 4개의 장대(將臺) 중 가장 바깥 쪽에 위치한 동쪽 누각(樓閣)을 말한다. 동장대의 이칭(異稱)은 ‘대변루(待變樓)’로 알고 있지만, 여기서는 ‘대변청(待變廳)’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최대 격전지였던 동장대의 위상이 감안된 명칭으로 보인다. 촉석루에는 임진왜란 이전에 동서(東西)로 부속 누각이 있었다. 동각(東閣)으로는 능허당(凌虛堂, 나중에 함옥헌으로 개칭)과 청심헌(淸心軒)이 있었고 서각(西閣)으로는 쌍청당(雙淸堂)과 임경헌(臨景軒, 나중에 관수헌(觀水軒)으로 개칭)이 있었다. 함옥헌(涵玉軒)은 ‘누각이 넓은 강에 흐르는 옥 같은 강물을 담고 있는 듯한 모습’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촉석루 부속누각 중 최후까지 존속되다가 일본인에 의해 1906년 훼철되었다. 병영(兵營)의 외삼문(外三門)인 망미루(望美樓) 문 밖에는 기둥 모양의 높은 표석(標石)이 하나 서 있는데, 이 병영은 지형이 가는 배 모양이기 때문에 이 돛대를 세워 둔 것이라 한다. 현 진주성 영남포정사문루(嶺南布政司門樓)의 별칭이 망미루(望美樓)이다. 문 밖에 있었던 기둥 모양의 표석(標石)은 현재 없고 ‘하마비(下馬碑)’만 있다. 하마비를 표석으로 표현한 것인지는 알기 어렵다. 하지만 병영의 지형이 ‘가는 배 모양’이어서 ‘돛대’를 상징하는 표석을 세웠다는 사실은 무척 흥미롭다. 내삼문(內三門)인 원수아문(元帥衙門)은 영우병마원문(嶺右兵馬轅門)이라고 편액을 달았다.동헌(東軒)은 운주당(運籌堂)이라고 했는데, 양위합(養威閤), 완대헌(緩帶軒), 은표각(隱豹閣), 한광루(閑曠樓)라고도 했다. 서쪽의 누각은 주변루(籌邊樓)라고 했고, 또 의추각(疑秋閣)이라고 했는데 촉석루(矗石樓)를 마주하여 우뚝하였다. 동쪽에 누각 하나가 있는데, 공진당(拱辰堂) 영하루(暎荷樓)라고 했다. 당(堂)의 바깥 동쪽에 있는 것을 백화당(百和堂)이라고 했는데, 곧 막부(幕府)였고 문의 이름은 예라문(禮羅門)이라고 했다. 경상우도병마절도영(慶尙右道兵馬節度營)의 부속건물 명칭을 자세히 알 수 있다.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 소장 「진주성도」에 나타난 각 기관의 건물 명칭 표기와 비교해 더 자세하다. 먼저 계명대학교 진주성도에 표기된 ‘삼문(三門)’이 바로 원수아문(元帥衙門)이며, 편액은 영우병마원문(嶺右兵馬轅門)임을 알 수 있다. 동헌의 명칭도 운주당을 비롯해 양위합, 완대헌, 은표각, 한광루 등의 다양한 이름을 갖고 있었다. 동쪽의 누각은 백화당, 서쪽의 누각은 주변루임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은 향후 경상우도병마절도영의 복원이 이루어지면 사료로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닐 것으로 보인다. 동쪽에 중영(中營)이 있는데 우후(虞候)가 거처하는 곳이었다. 정당(政堂)은 찬주헌(贊籌軒)이라고 했는데, 또 망일헌(望日軒)이라고도 했다. 최근 진주성에 복원된 중영(中營)은 경상우병영 우후(虞候)의 군영이다. 우후는 경상우병영의 병마절도사를 보좌하는 종3품의 외관직으로 병마절도사의 참모장이다. 현재 복원된 중영의 편액은 ‘중영(中營)’이다. 하지만 이 기록에 의하면 1890년 당시 중영의 편액은 ‘찬주헌(贊籌軒)’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횡묵 군수는 촉석루 누각에서 진주를 내려다 보며 다음과 같이 소회를 적었다. 촉석루로 향하여 가서 누각 위로 걸어서 올라갔다.평상복으로 갈아입고 행장(行狀)과 담배는 꾸려 싸도록 했다. 경치를 두루 보니 누각은 성 가에 다달아 있는데, 큰 강이 그 아래로 흘러가고 있었고 장사 배와 고기잡이 배들이 혹은 물에 떠 있기도 하고 혹은 매어 있기도 했다. 뱃노래가 하늘거리고 수풀은 푸른 빛을 띠고 있었고 큰 벌판은 아득했고 여러 산들은 기이하니 정말 영남의 경치 좋은 곳이자, 군사 방어상 중요한 곳이었다. 누각은 수 십간으로 촉석루(矗石樓) 석 자로 편액되어 있었는데 일곱 살 먹은 아이가 이 글씨를 썼다고 한다. 필체가 힘이 있고 굳세었는데 한 글자가 집 한 칸에 다 찰 정도였다. 당시 붓을 놀릴 때를 상상해 보니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던 바에서 훨씬 뛰어났다. 옛날부터 이름난 학사(學士)나 유람객들이 남긴 시(詩)와 기문(記文), 발문(跋文) 등등이 즐비하게 걸려 있었다.눈을 들어 보니 정말 찬란하였고 그 능력을 자랑하고 재주를 드러내고 문채가 돋보이는 것이 후세의 사람들로 하여금 한 마디 말을 토하고 솜씨를 한 번 발휘할 수 없게끔 만들었다.이 곳은 비록 좋은 문장이 많이 모인 곳이라 해도 과장하는 말이 아니다. 그 가운데 신유한(申維翰)의 시는 중국 사람들에게 칭찬 받았다고 한다. 함안군수 오횡묵은 촉석루에서 남긴 소회를 뒤로 하고, 개양(開陽)과 조사(皂沙)의 주막에 들른 뒤 십수교(十水橋)를 끝으로 ‘진주 나들이’를 마무리했다. 함안총쇄록(咸安叢瑣錄)은 오횡묵이 함안군수로 재직한 1890년부터 1893년까지 각종 업무를 비롯해 부임지의 전반적인 상황을 매일 자세하게 기록한 일기 형식의 글로 내제(內題)는 ‘경상도함안총쇄록(慶尙道咸安叢瑣錄)이다. 이 책은 책머리에 지도를 싣고, 부임 절차와 부임 도중 지나치는 지방에 대해 기록하고 있어 다른 지방의 실태 파악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함안총쇄록에 실려있는 진주 관련 기록은 당시 진주의 자연경관과 읍치 등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기록물이다.

  • 2026-08-25
  • 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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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OF 진주2) 11. 1966년 화마(火魔)가 중앙시장을 삼키다

1966 화마가 중앙시장을 삼키다 진주에는 ‘날三子’라는 말이 있다. 진주에서 돈 벌어서 부자가 된 사람은 3대 째가 되면 진주를 떠나야 한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말이다. 이는 시장교역(市場交易)의 이동성(移動性)을 의미한다. 더불어 객지에서 오는 사람들이 많다는 의미와 함께 치부(致富)한 재산은 자손들이 관리하기 어렵다는 뜻도 갖고 있다. 더불어 1862년 진주농민항쟁운동과 형평운동, 경남도청 이전 당시 촉석루와 배다리를 가득 메워 진주의 정신을 보여준 이들도 바로 진주의 상인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진주의 시장역사(市場歷史)는 진주시민이 새로운 문물을 교환하고 개척하는 역사(交換開拓史)이면서 민권운동의 중심 세력사(勢力史)이자, 진주의 모든 행사의 전위사(前衛史)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예로부터 인구가 모이고 농업이 풍성하며 교통의 중심지인 진주에 자연스럽게 저자(市場)가 생겨난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리고 시장에 구름 같이 사람이 모여 들면서 진주는 전국 5대 시장의 하나로 발전해 나갔다. 이후 ‘진주장(晋州場)’으로 불렸던 중앙시장은 경남 경제의 총본산이었던 진주상무사의 중심 교역장으로 발전했다. 더불어 중앙시장을 비롯한 진주지역의 시장(市場)은 진주 경제의 뿌리인 시장경제(市場經濟)의 출발점임과 동시에 진주 서민들의 경제생활을 주도하는 든든한 버팀목으로 오늘에 이어지고 있다. 성내시장(城內市場)과 북문통시장 진주에는 사전(四廛)이 있었다. 진주에는 장터가 두 군데 있었는데 첫 번째 시장이 관아(官衙)의 감독을 받았던 성내시장(城內市場)이다. 당시 성내시장은 옛 세무서 앞에서 제일극장까지였다. 지금의 공북문 앞에서 촉석문까지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민간 시장의 형태로 농산물을 교역했던 농산물 장터인 북문통 시장이다. 옛 경찰서 자리이다. 그리고 당시에는 점포 형식이 아닌 노점이었다. 갑오개혁을 거치면서 시전의 특권이 완전히 폐지되고 상인들의 자유화가 이루어지면서 진주장(晋州場)은 크게 번성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일본 자본이 상륙하면서 시장은 그 기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당시 성내 시장은 현재의 진주경찰서 서쪽에서 한동안 성시를 이루었으나 끝내 사라지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일본인과 일본 자본이 대안동과 동성동 일대를 사실상 점거하면서 시장의 확장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에 따라 성내시장과 성외시장은 통합을 이루게 되고 명칭도 진주시장진흥회(晋州市場繁榮會)로 바뀌면서 조국의 해방을 맞게 된다. 이것이 근대 진주 시장의 시작이다. 옛날 중앙시장 거리들 사단법인 진주중앙시장번영회가 지난 1982년 발간한 『진주중앙시장 백년사(1982. 금호인쇄)』를 보면 일제강점기 당시의 시장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있다. 진주시장의 과도기는 1910년 일제의 강제 한일합방에서 3·1운동 이후, 1930년까지이다. 당시 성내장터는 이미 폐철된지 오래였고, 지금 장터는 진주의 대사지 건너 북문과 남문의 동북쪽에 있었던 정식 공설시장이 번창했다. 시장 서쪽에는 북문통(北門通)이라는 신작로개 개설되었고, 시장 쪽으로 경찰서, 의용소방대가 있었으며, 서쪽 편에 금융조합, 상업은행, 남쪽에 식산은행이 있었다. 당시 중앙시장의 의령길(시장 중앙) 남쪽에 ‘보리전’과 ‘쌀전’이 있었다. 길 양편에는 ‘잡화전(雜貨廛)’와 ‘포목전(布木廛)’, ‘고무신전’이 있었다. 북쪽으로는 ‘비단전’과 ‘야채전’, 그리고 장새미골목쪽으로는 ‘나무전’이 있었다. 고정점포는 객주업자가 제일 처음 지었고, 병자년(1936) 물난리 이후에는 고정된 현대식 점포가 들어섰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중앙시장은 그야말로 폐허가 된다. 포탄에 산산조각난 시장의 모습은 아비규환 그 이상이었다. 하지만 중앙시장 상인들은 그 폐허를 딛고 일어선다. 그리고 중앙시장이 제 자리를 잡아가는 와중에 최대의 시련과 마주친다. 바로 1966년 중앙시장의 대화재이다. 진주중앙시장을 삼키다, 1966년 대화재 사단법인 진주중앙시장번영회는 지난 1982년 『진주중앙시장 백년사(1982. 금호인쇄)』를 발간했다. 당시 안승균 진주중앙시장번영회장은 발간사에서 ‘고종 21년(1884) 1월에 결성된 진주상무사(晋州商務社)의 사전청금록을 근거로 백년사라는 표제를 붙였다. 경남 경제의 총본산으로서 진주장은 그 중심 교역장이었으나 그 밖의 기록은 찾을 수가 없었다’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중앙시장 백년사’에는 중앙시장 관계자들의 증언과 1966년 중앙시장을 덮쳤던 대화마(大火魔)에 대한 기록과 생생한 사진이 실려 있어 중앙시장에 대한 기록물로서의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중앙시장이 불길에 휩싸인 것은 1966년 2월 6일 오후 10시이다. 화마가 덮친 중앙시장은 다음 날인 2월 7일 아침 나절이 되기도 전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성한 점포가 거의 없었다. 상인들은 땅을 치며 통곡했다. 그렇게 중앙시장은 불과 몇 시간 만에 모든 것을 잃었다. 중앙시장 대화재 이튿날인 2월 7일 진주시내 기관장과 상공인, 금융관계인, 유지들로 구성된 ‘화재대책위원회’가 긴급소집되었다. 중앙시장 대화재 수습방안 등이 논의되었다.중앙시장 대화재 소식이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1966년 2월 8일 중앙조사반이 화재현장을 방문했다. 진주중앙시장회의실에서 중앙조사반에게 화재복구 계획을 설명한데 이어 정부의 도움을 요청했다. 상인은 물론 진주시민들의 성금답지가 이어졌고 중앙시장은 신속하게 복구되었다. 화재 후 불과 3개월 여만인 1966년 5월 수정동과 대안동 일대의 가설시장이 문을 열었다. 중앙시장 복구공사 기공식은 1966년 5월 20일이다. 당시 기공식에는 하병렬 회장과 진주지역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중앙시장 복구공사는 7개월만인 1966년 12월 15일 완공되었다. 당시 중앙시장 화재로 피해를 입은 옥봉북동 이재민을 위한 주택 52동도 신축되어 제공되었다. 이후 중앙시장은 여러차례의 변화를 꾀하면서 오늘날 진주를 대표하는 시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중앙시장을 비롯한 진주의 재래시장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정부차원의 재래시장 활성화 정책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재래시장 활성화는 요원한 실정이다. 중앙시장 백년사에 ‘진주시장사 서설’을 쓴 이명길 전 한국예총 진주지부장의 글 가운데 중앙시장과 관련한 일화가 적혀 있다. 사실 처음 이름과 이야기라 묻기도 하고 자료를 찾아 보기도 했지만 알 수 없었다. 기인(奇人) 설대장사 박돌(朴乭)과 三수, 상인후견인 이무엽(李武燁), 진주시(晋州式) 놀음선수인 서울 덕수(德洙), 글 잘 쓰는 문술(文述)과 두 덕수(德洙), 설치기 조득제(趙得濟) 일화를 잘 아시는 분의 친절한 설명을 기대한다.

  • 2026-08-25
  • 작성자

    황경규/진주향당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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