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경규/진주향당 상임고문
2026.08.21 PM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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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계리
창촌리에서 25번 진주시도의 북쪽으로 달리면 원계리다. 동남쪽에 도량마을, 중앙에 원계마을, 가장 북쪽에 동월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원계리는 전형적인 동서고저 지형이다. 서쪽으로는 덕천강이 흐르고 그 주변으로 논밭과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 반해, 동쪽은 해발 고도 약 300m의 산지로 재궁산, 마항골, 독산 등에 둘러싸여 있다.
도량마을
도량마을은 원계리의 가장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써, 하동과 진주를 연결하는 길목이란 뜻에서 도량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출렁이는 강물이 보이는 풍경은 선비들이 가장 선호하는 풍경이었을 터, 그 증거 하나가 이곳 덕천강변에 있다. 마을 남쪽 덕천강 주변에 농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는데, 주변에 세 개의 바위가 더 있었더란다. 너럭바위는 아니더라도 여러 사람 어울려 풍류를 즐기기에 손색이 없는 조건이었는지 예부터 선비들이 즐겨 찾았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농바위에는 삼락대(三樂臺)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원계마을
삐그덕대는 놀이기구, 기린이며 호랑이같은 석조장, 이순신 장군 동상, 세종대왕 동상, 그리고 교장선생님의 지겨운 훈시가 있었던 교단까지. 폐교가 된 원계초등학교에 아직도 남아있는 것들이다.
원계초등학교를 지나자 진짜 마을로 들어선 느낌이다. 원계라는 마을 이름은 옛날 사곡에서 살던 밀양손씨가 옮겨와 살면서 '엥기'라 부른데서 유래돼 이후 원계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지는데, 다른 마을에 비해 눈여겨 볼만 한 것들이 많다.
원계리 노거수
마을에 정자나무나 마을을 보호하는 당산나무가 있는 경우는 흔하지만,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를 보기란 그리 흔치 않다. 그 흔치 않은 구경을 원계마을에서는 실컷 할 수 있다.
원계경로당 앞에, 지난 1982년 도지정 보호수로 지정된 원계리 노거수가 떡 하니 버티고 섰기 때문이다. 수령 550년으로 경남에서도 오래된 느티나무로 손꼽히는 원계리 노거수는 그 높이만 12m에 나무 내부가 큰 동공으로 되어있는 등 매우 기이한 형태를 띠고 있다. 게다가 전체 폭이 워낙 넓어서 서 있는 것인지 누워있는 것인지 분간이 힘들 정도다. 몸체의 중간을 쇠봉에 의지하고 있는 형편이긴 하지만, 튼튼한 둥치며 푸른 잎들이 건재함을 과시한다.
이렇게 유명세를 타는 나무라면 남다른 사연도 있을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노거수에 나뭇잎이 일시에 피면 그해에 풍년이 온다는 전설이 마을에 전해져 온다고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 한 가지! 누가 말하지 않아도 주민들은 마을의 재난을 노거수가 막아주고 있다고 선한 마음으로 믿고 있다는 점이다.
이충무공진배미유적지
월계마을에서 꼭 보고 넘어가야 할 한 가지를 꼽으라면 아마 누구라도 진배미 유적지를 선택할 것이다.
진배미는 이순신 장군의 인생에 있어 대전환점을 맞은 곳이다. 조선 수군의 총지휘관인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하루 아침에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는 신세로 전락했을 때, 다시금 삼도수군통제사의 임명 교서를 받고 전의를 다지며 군사를 훈련시킨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이후, 마을사람들은 원계리 앞 큰 들판이었던 이곳을 가리켜 ‘진뱀이’라고 부르고 있다.
진뱀이의 ‘진’은 군사들의 대오가 있는 곳을, ‘뱀이’란 ‘논뱀이’의 준말로 ‘논두렁으로 둘러싸인 논의 하나하나의 구역’을 뜻함으로써, 즉 진뱀이란 군사들의 대오가 있는 논을 말한다.
한편, 1975년 12월 이순신 장군의 호국정신과 얼을 되살리기 위해 옛 훈련장의 일부지역에 문화공보부 기념물 제16호로 높이 약 4m, 너비 1.1m 정도의 ‘이충무공 군사훈련 유적비(李忠武公 軍事訓練 遺蹟碑)”가 세워졌다. 이 유적비는 도로에서 100미터 떨어진 곳, 비닐하우스 단지 사이에 있는데 마을 주민들에겐 남다른 자부심의 공간이기도 하다. 외지 관광객이 찾아와 길이라도 물을라 치면 손짓으로 함부로 가르쳐 주는 법 없이 자청해 대뜸 길 안내를 나설 정도라니 말이다.
손경례 고택
이충무공진배미유적지를 둘러보았다면 이번엔 당연히 손경례 고택을 둘러볼 차례다. 이곳은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이 1597년(선조 30) 7월 27일에 머물렀던 곳으로, 며칠이 지난 8월 3일에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교서를 받은 곳으로 더욱 유명하다.
위치를 찾는 것도 어렵지 않다. 원계리 노거수가 서 있는 뒤편으로 언덕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손씨 재실이 보이고, 그와 이웃한 집에 손경례의 후손들이 지금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대문을 걸어잠궈놓은 상태F 함부로 드나들 순 없지만, 그들에게 청을 넣으면 언제든 이순신 장군의 흔적을 찾을 수 있도록 집을 공개하고 있다.
목조기와집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규모인 고택 마당에는 여기가 바로 이충무공이 재임명교서를 받은 유적지임을 알리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양정 하경복 묘
원계마을과 구태마을을 연결하는 농로에서 조금 떨어진 구릉에 4각 석조분 1기가 눈에 띄인다.
하경복은 본관이 진주로, 무과에 급제한 후 함경도 경성병마절도사,함경도절제사,경상도병마절제사를 지내며 조선 초기 국방 강화에 큰 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온화한 인품의 소유자로 주변에 많은 인덕을 베풀었다고 전해진다.
묘는 1983년 8월 2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53호로 지정되어 현재 잘 관리되고 있다.
동월마을
동월마을은 원계리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산청군 단성면과 인접해 있다.
처음에는 마을이름을 매화정이라고 하였는데, 병자년 대홍수 때 매화나무가 모두 유실되는 바람에 산 밑으로 약간 옮겨내려와 동월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마을 서쪽에는 두뫼산이, 북쪽에는 큰 시리봉과 작은 시리봉이 있다. 특히 큰 시리봉의 꼭대기엔 옛 진양군과 하동군, 산청군 3개군의 경계라 하여 표석이 세워져 있다.
마을을 지날 때마다 표지석을 확인하는 버릇이 발동하여 마을 앞에 잠시 멈춰섰다. 그런데 동월마을 표지석 옆에는 표지석보다 더 큰 크기의 ‘효(孝)’라고 적힌 비석이 서 있다. 마을로 들어서기 전에 부모님께 효도하겠다는 맹세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짧지만 강력한 메시지다.
도로 맞은편에는 딸기집하장과 경로당이 있고, 마을 안쪽으로는 비닐하우스가 즐비하다. 그런데, 마을 안으로 몇 발짝 떼기가 무섭게 오른쪽으로 펼쳐진 넓은 들을 만나게 된다. 당연히 비닐하우스 단지겠거니 하고 걷다가 뜻밖의 풍경에 살짝 당황햐지려는 찰라, 여기가 바로 칠성백이라는 마을주민으 설명에 고개를 끄덕인다. 칠성백이는 마을 서쪽에 있는 큰들이라는 의미다.
옛날 이 들 한 복판에는 북두칠성처럼 생긴 바위 7개가 있었다고 해서 불리워진 이름이라고 한다. 한낱 헛된 입소문이 아니다. 농경지정리로 인해 과거와 달리 위치가 변하고 2개의 바위가 소실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칠성백이 들 맞은 편 비닐하우스 단지 사이에 5개의 바위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마을에서 만난 주민 한 분은 그 모양새를 자신이 분명 보았고 또렷하고 기억하고 있다며 한참을 강조하셨다.
어디 별 이야기 뿐이겠는가. 마을 입구 오른편에 위치한 동월마을 동산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성성한데, 이곳은 일명 토끼가 달을 올려다보는 언덕이라 하여 망월동산으로 불리기도 한단다.
이밤..., 동월마을 망월언덕에는 북두칠성이 떨어지듯 달이 떨어지기를 바라는, 그래서 동화 속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길 바라는 토끼 한 마리가 귀를 쫑긋 세우고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미천면 효자리 효자마을 모든 가치의 우선이 효였던 시절이 있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삶의 의무처럼 존중받던 시절에도 충을 넘어서는 단 하나의 가치가 바로 부모에 대한 자식의 효성이었다. 부모의 말씀을 거역한다는 걸을 상상할 수조차 없던 때. 그때가 언제일까..., 문득 이 세상에는 없는 일인 냥 궁금해진다. 자식이 있어도 혼자 외로이 늙어가는 노인들이 늘고, 중년에 접어든 사람들은 자식에게 봉양받을 거라는 생각 따위는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속 편하다고 말하는 요즘, 자식들은 떳떳하게 효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보험금 몇 푼을 위해 부모의 목숨을 앗아가는 세상을 바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면, 너무 비관적인 생각일까? 그런 생각을 할 즈음, 무방비 상태에서 적의 공격을 당할 때처럼 마음을 뒤흔드는 마을이 눈 앞에서 펼쳐진다. 가난하지만 효자 효부가 많아 주위의 부러움을 사는 마을, 이름 효자리 효자마을이다. 1914년, 진주군 안간면 효자동 일부로서 효자리라 하였는데, 미천면 효자리는 효잠․독점․무동을 합한 지역으로 미천면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진주를 기준으로 해서 보면 가장 먼 곳에 위치해 있으면서 산청군 생비량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한데 합쳐진 세 마을을 면면을 살펴보자만, 효잠마을은 수원 백씨가 대성을 이루고 살았으며, 마을안에는 최근 건립한 숭효제가 있다. 또 독점마을은 밀양 박씨가 대성을 이루었으며 효잠 저수지 뒤편에 밀양 박씨 규정공파의 재실인 우석정이 있다. 무동마을은 마을 뒷산이 춤추는 사람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조씨가 많이 살았다. 모든 마을이 집현산 자락에 걸쳐져 있는데, 독점과 무등은 특히나 더 골이 깊어 외부인의 출입이 거의 상태라고 한다. 효자마을이란 지명은 아무렇게나 붙여진 게 아님을 역설하듯, 마을에는 효자비와 효부비가 있다.백갑수 덕수 형제의 효행을 적은 효자백갑수덕수형제행적비가 추계마을 입구에 있고, 효열부광산김씨의 비가 도로변에 있다. 효자마을이 워낙 깊은 골 가운데 있어 사람들이 보기 쉬운 곳에 비를 세웠다고 한다. 효자 효부의 내력은 과거에 그친 것이 아니다. 가난한 살림을 꾸리면서 시아버지 병수발에 남편 병수발, 거기에 시동생 병수발까지 하는 사람들이, TV나 라디오에서 소개되는 아름다운 미담이 이곳에서는 생활이 되어있는 것이다. 그래서 혼자 사는 노인들조차 마음이 편히 산다고 한다. 외로움이야 인간으로 태어난이상 짊어지고 가야할 고단한 숙제일 따름이고. 하지만, 마을을 들어서면 집현산에 포위라도 당한 듯 눌러앉은 모습이다. 골이 워낙 깊어 한 겨울에도 골 안과 밖의 온도차가 5℃까지 난다고 하니, 골이 얼마나 깊은 지 짐작이 가고도 남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마을은 경제적으로는 척박한 인상을 풍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난 1968에 준공한 저수지가 있어 물 걱정은 하지 않고 살아도 된다는 점이다. 효자마을과 독점마을 사이에 위치한 저수지는 그리 큰 규모는 아니지만, 주민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물 공급원으로, 지난 해엔 확장공사까지 끝마쳐 웬만한 가뭄에도 끄덕없다. 게다가 우석정과 어우러진 모습이 아름다워 지친 일상의 시름을 덜어주고 있다. 식수 또한 풍부한 편에 속한다. 효자리에는 마을 앞까지 상수도가 들어와 있지만, 실제로 상수도를 연결해서 이용하는 주민들은 적은 편이고, 집현산에서 내려오는 물과 지하수를 더 많이 이용하고 있다. 물 맛이 기가 막히다는 자랑이 뒤를 잇는다. 미천면은 진주시 관내에서도 밤나무가 많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마을이 깊은 골짜기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겨울철에는 해를 보는 시간이 짧아 시설작목 재배가 곤란해 주민들은 논농사 외에 밤나무로 소득을 올렸던 것이다. 밤생산이 소득은 좋은 편이긴 하지만 워낙 일손이 부족해 수확에 많은 어려움을 겪어 왔는데, 지금은 그나마 수령이 많아서 대부분 베어내고 그 자리에 단감 나무를 심어 소득을 보충하고 있다. 돈이 있다고 행복한 것도 돈이 없다고 불행한 것도 아니라는 것은 효자마을은 골짜기 깊은 곳에 숨어 조용히 웅변하고 있다. 가끔 외식을 하고 때가 되면 그거면 됐다는 식으로 용돈이나 내미는 것이 효가 아니라는 것을, 효는 마음이 즐겁도록 하는 것이라는 것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새삼 깨닫게 된다.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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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평 무 채종지 당촌(堂村) 당촌(堂村)은 ‘一文山 二大坪’이라는 말이 나오게 한 곳이다. 남강댐으로 인한 수몰이전만 하더라도 가구수가 100호가 넘었던 대촌(大村)인데다 무 종자채종으로 경제적으로도 윤택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1973년 2월 26일 법률 제2555호로 종묘관리법이 제정되기 전까지만 해도 당촌의 무 종자 생산량은 72kg들이 400가마를 생산한 대평면내 최고의 무 채종지였다. 당촌리 김덕용(金德龍)은 면내에서 생산된 무 종자를 600여가마를 수집해 대전 전주 흥농종묘지사(興農種苗支社)로 80여가마를 내다 팔고, 나머지는 강원도, 경기도 등 전국각지에 내다파는 무 거상(巨商)이었다.그러나 종묘관리법 제정 이후에는 이곳 당촌에서는 무 종자를 생산하지 못하게 되었고, 대전 전주 흥농종묘지사에서 종자를 생산해 「진주 대평 무」라 이름붙여 전국에 보급하고 있다. 또 일제강점기에 대평면내에서 벼 공출을 제일 많이 한 곳이 이곳 당촌(堂村)마을이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당시 원활한 공출미 수송을 위해 일제가 건설한 당촌교와 지하교이다. 물론 준공년도일이 표시된 일본왕연호는 해방직후 정으로 쪼아진 채 삭제돼 있다. 조선조 말엽에 1만2,000여평이나 되는 못이 있어 대평리 어은마을에 보(洑)를 막던 안상영이라는 부자가 당촌리와 내촌리 일대에 논을 만들려고 못둑을 만들다가 실패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당촌리 지하(池下) 삼거리는 경제적으로 윤택한 곳이었다. 무 종자를 구하러 오는 상인들로 북적였고 마을안에 큰 상점이 있어 늘 많은 사람들이 왕래를 했던 곳이다.대평면내 여느 마을처럼 당촌도 희망찬 미래를 기대할 수 없는 곳이다. 남강댐 보강공사가 끝나면 마을 전역이 수몰지구로 편입되는 것이다. 당촌마을 사람들은 비옥한 땅을 송두리째 내주어야 했던 것처럼 일부는 이주단지로 또 일부는 진주시내로 이주하기를 희망하고 있으며 29세대 정도만이 잔류를 이야기하고 있다.한동안 풍요롭고 평화로웠던 농촌공동체가 남강댐 건설이라는 시대적 요청 앞에 순식간에 붕괴되고 만 당촌마을. 예로부터 사람이 많이 모여 산 곳에 이름 붙여졌던 당(堂)이라는 글자를 따서 이름지어졌던 당촌(堂村)마을은 이제 변변한 집 한 채 없는 마을로 전락했다.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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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동(Hyundong 賢洞) 집현산(集賢山)이 높이 솟은 곳에 월아산(月牙山)이 안대가 되고, 남강(南江)이 띠가 되어 동부(洞府)를 에워싸고 수림과 계곡이 아름다운 곳에 시내를 끼고 앉은 현동(賢洞)마을.현동(賢洞)은 예로부터 수많은 인재(人才)가 많이 배출되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초등교육의 본산(本山)인 집현초등학교(集賢初等學校)가 건재하고, 해마다 수재(秀才)를 길러 내는 현동(賢洞). 집현면(集賢面)의 3대 명당(明堂) 중의 하나로 알려진 현동은 강인한 민족정신의 발로(發露)를 엿볼수 있음과 동시에 ‘살아서 꿈틀대는 집현의 정기(精氣)’를 음미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동리의 얼굴이자 역사인 느티나무가 600년의 세월을 품고 말없이 서있고, 들판의 여문 곡식처럼 알알이 익어가는 현동의 역사(歷史)는 후학(後學)들의 자양분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현동(賢洞)은 일제강점기 이래로 당하(堂下)로 부르다가 1995년 10월1일부터 현동(賢洞)이라는 고유지명을 찾게 되었다. 현동의 지명유래를 보면 지금으로부터 300년전 지금의 봉강(鳳降)과 당하(堂下)를 합쳐 현동(賢洞)으로 불렀는데, 그 뒤에는 서편이라 불렸으며, 그후 당하마을 뒤편 큰 정자나무 아래에 안씨들이 많이 산다고 해서 ‘당안’이 되었고, 다시 일제강점기 당시, 지내마을과 현동마을 사이의 사랑등이라는 산 능성에 큰 집이 한 채 있었는데, 그 아래에 있는 동네라 하여 당하(堂下)로 부르게 된 것이다. 이처럼 일본이 민족말살 정책의 하나로 우리의 지기(地氣)를 차단하기 위해 강제로 동명(洞名)을 당하(堂下)로 바꾸었지만, 주민들의 의지(意志)로 고유의 지명을 되찾은 것은 지난 1995년이다.진주시는 일제시대때 임의로 바뀐 우리의 고유 지명을 찾아 민족정기를 회복한다는 차원에서 고유지명 찾기 운동을 폈다.그 결과 집현면의 당하(堂下)를 원래 지명인 현동(賢洞)으로 바꾸자는 뜻을 모았고, 마을주민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압도적인 찬성으로 고유지명을 되찾게 된 것이다. 현동(賢洞)은 지명(地名)에 걸맞게 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순흥안씨 조상의 위패를 모신 집현정사(集賢精舍)와 숭조사(崇祖祠), 절충장군의 묘, 보호수 등 마을의 역사를 비춰 볼 수 있는 거울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전형적인 농촌마을로 2000년 10월31일 현재 66세대 235명의 주민들이 벼농사를 주로 하고 있는 현동은 농가의 50%가 딸기재배를 하며 고소득을 올리고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현동․새터․몽골 등이 있다. 집현초등학교에서 북서쪽으로 500m 지점에 위치한 현동마을은 수령이 600년인 느티나무와 함께 역사를 써왔다. 그 옛날 마을의 이름을 강제로 빼앗겼던 아픔도 간직하고 있고, 마을주민들의 희노애락을 세월속에 묻어 놓고 오늘에야 하나 하나 그 잎들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느티나무는 마을사람들의 회의장소로 기능했으며, 마을축제때는 더없이 좋은 잔치마당이기도 했다. 수백년의 세월을 간직했음직한 ‘들돌’은 풍성한 수확의 계절에 마을 청년들이 힘자랑하는 도구이기도 했다. 절충장군비가 느티나무와 함께 마을의 역사를 일러주고, 삶을 꾸려 나가는 주민들에게 ‘지난한 삶을 깨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지내천을 주 용수로 사용하고 있는 현동마을사람에게는 또 하나의 추억거리가 있다. 지내천 직강공사를 하기 전에 옛 하천에서 현동 앞들과 덕곡을 연결하는 폭 1m의 나무다리가 세워져 있었는데 대홍수로 없어졌고 내천 보를 이용하곤 했다.내천의 물이 많을 때는 신발을 벗고 왕래하기도 해 아직도 그 나무다리를 기억하고, 지나온 삶을 되새기는 마을사람들은 ‘평범한, 너무 평범한 그 때의 마을풍경’을 지금도 생생히 전한다. 새터마을은 새로 만들어진 동네라는 뜻에서 이름 붙여 졌는데, 집현초등학교가 소재하고 있는 마을이다. 풍수지리적으로 볼때 새터는 ‘만석꾼’이 날 자리라는 말이 전해 내려 올 정도로 좋은 지형을 갖고 있다. 집현면의 3대 명당을 꼽을 때 흔히 집현초등학교 자리와 집현면 사무소, 응석사를 꼽곤 하는데 새터는 바로 집현초등학교가 위치해 있는 ‘양지터’로 손꼽히고 있다.현재 양지터는 해마다 가구수가 늘어 나고 있는 추세이며, 딸기재배로 인해 농가소득도 꽤 괜찮은 고소득마을로 알려지고 있다.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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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마을을 찾아서 -연재를 시작하며 전국적으로 면지(面誌) 발간 붐이 일었다. 아마 2000년 초의 일로 기억한다. 진주에서 처음으로 명석면지가 발간 된 이후 각 읍면에서 면지 발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우연한 기회에 집현면지를 집필하게 되었다. 짧은 글들은 기회가 생길때 마다 쓰곤 했지만 한 지역의 역사를 담은 책을 저술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냥 한 번 해보자하는 마음으로 집현면지 집필에 도전했다.특정 지역의 역사, 문화, 인물 등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거의 2년 가까이 걸린듯 하다. 집현면지편찬위원회가 구성되고 마을 어른들과 함께 집현면 곳곳을 다니며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특히 마을마다 구술을 해주신 어른들의 도움이 컸다.집현면의 자연마을 곳곳을 찾아다녔다.특별할게 없이 평범한 마을들과 사람들과의 만남은 당시로서는 꽤나 신선했다.도심에서 허비하는 일상의 시간들과 다른 특별한 만남으로 느낀것 같다. 2년이 넘는 시간동안 이루어진 집현면지 편찬작업은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동네 어르신들이 함께 한 가운데 출판기념회를 열고 '집현면지' 출간을 기념했다. 집현면지 집필 이후 , 대평면지, 미천면지, 수곡면지를 집필하는 기회를 가졌다.진주의 면단위 지역의 역사를 집대성한 면지발간은 이후 경남역사문화연구소 '진주향당'이 결성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면지 집필을 하면서 자연마을을 찾아다니며 적은 글이 면지에 수록된 '자연마을을 찾아서'이다. 글을 적은지 최소 20년의 시간이 지났다.다시 자연마을을 찾아서 20년 전과 비교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오늘에 이르고야 말았다. 진주평론 홈페이지가 만들어지면서 직접 집필한 4개 지역의 면지(집현면, 대편면, 미천면, 수곡면)에 수록된 자연마을에 대한 기록을 게재하기로 했다.물론 시간이 많이 지나면서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만큼 발전된 자연마을도 있겠지만, 그 반대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자연마을을 찾아서를 연재하는 이유는 지금에야 돌아보게 되는 글쓰기에 대한 열망을 되살리고픈 마음이 더 크다.40대 초반에 적은 글들을 환갑이 지난 지금에야 들여다 보면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도 되리라 생각한다. 부끄러운 글들이 많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20년 전 추억을 되새기면서 한 편 한 편 살펴보고 조심스레 올린다. 많은 격려를 부탁드린다.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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