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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스토리 (진주사람) 1. 아인 박종한

아인(亞人) 박종한(朴鐘漢) 시대의 참스승으로 살다 경남사학(慶南私學)의 염원을 남명정신에 두고, 평생을 교육에 헌신한 진주교육계의 거목 아인(亞人) 박종한(朴鐘漢, 1925~2012). 아인은 반진단(般震團)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전개한 애국지사이며, 반진구국(般震救國) 정신을 건학 이념으로 대아중·고등학교를 설립해 오민교육을 실시한 교육자이자, 이 시대의 참스승이다.반진구국과 오민사회건설을 바탕에 둔 그의 교육이념은 오민교육과 오민박물관 개관, 경의정(敬義情) 학생다도교육, 창렬사 참배, 화랑숙(花郞塾)교육, 충무공백의종군 등으로 이어져 경남사학 교육의 표준이 되었다. 특히 학교교육에 다도를 접목한 아인은 문교부에서 전국의 장학사를 대상으로 ‘다도교육지도안’을 발표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아인은 민족문화재가 가진 정신을 올바로 계승하는 민학회(民學會) 발족과 ‘민학지’ 발간에 이어, 전국 최초로 서울에 ‘진주향토문화사전(晋州鄕土文化史展)’을 개최해 천년 진주의 역사와 전통을 전국에 알리기도 했다.진주정신의 바탕이 되는 남명정신을 계승하고자 ‘남명제(南冥祭)’를 창설했고, 한민족현창회를 창설해 민족제단을 건립하는 등 민족정신 현창에 노력했다. 남명제는 ‘남명정신을 사학에 보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시됐다. ‘학교교육은 학자를 배출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할 수 있는 생활인을 기르는데 목적을 둔다’는 아인의 교육이념을 엿볼 수 있다.한국차문화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초의선사가 기거했던 ‘일지암’을 찾아 복원한 아인은 진주다도회 창립은 물론 최범술, 김미희, 박동선 등과 (사)한국차인회를 창립했으며, ‘차의 날 선언문’을 직접 작성해 진주 촉석루에서 ‘차의 날’을 선포하는 등 한국 차문화에 기여한 공로로 ‘한국의 차(茶) 스승’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아인은 하버드대학과 MIT, 예일대학 등의초청강연에서 한국 차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기도 했다.아인의 생애 전반은 오민교육이 바탕이 된 경남사학의 발전을 염원한 교육자의 삶과 평생을 차(茶)와 함께 한 한국 다도(茶道)의 선구자로 기억되고 있다. 아인 박종한 선생 탄신 100주년 기념식(2025. 5. 17) 반진구국의 정신 대아고등학교의 창설정신은 항일투쟁단체인 반진단(般震團)의 반진정신(般震精神)에서 비롯됐다. 아인은 육당 최남선의「조선역사(朝鮮歷史)」라는 책을 읽다가, 옛날 우리 민족이 고조선을 세우기 전에 ‘진(震)(東夷族의 故國名)’이라는 나라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대아고등학교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던 ‘반진문(般震門)’이 나오게 되었고, 대아고등학교의 창설정신으로 자리잡게 된다.아인은 최소해(崔小海), 김대성(金大成), 서병도(徐炳道) 등 8명과 뜻을 모아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을 예측하고 민족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반진단(般震團)’이라는 항일투쟁단체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1943년 8월의 일이다.반진단 결성 이듬해인 1944년 7월 하순경, 단원들은 부산의 부두폭파를 목표로 삼고 차근차근 실천해 나갔다. 독립군이 은닉해 놓은 군자금과 무기매설 장소를 표시한 지도 한 장을 확보한 단원들은 군자금과 무기찾기에 나섰다. 당시 진주 요시노국민학교(현 중안초등학교)에서 촉탁으로 교편을 잡고 있던 아인은 자신의 한 달치 월급 40원을 여비로 제공했다. 하지만 일경의 불심검문에 걸려 단원들이 체포되고 만다. 당시 반진단의 아지트였던 부산 대신동 최소해의 하숙집에는 벌써 일본경찰이 들이닥쳐 반진단의 혈서연판장과 독립선언문, 사제폭탄을 모조리 압수해 간 뒤였다. 아인도 무사할 수가 없었다. 수업도중 경남도경 조선인 형사 2명에 의해 연행되어 진주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그때가 1944년 11월 24일의 일이었다.이후 6개월동안 각 경찰서를 전전하며 고문을 당했고, 예심에 회부되어 부산형무소에 수감된 것은 이듬해 6월이었다. 혹독한 고문으로 영어의 몸이 된 반진단원들은 그로부터 두 달 후 광복으로 풀려나게 되었다.비록 반진단은 가시적인 항일투쟁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대동아공영의 기치아래 역사를 거스르는 일제의 단발마적 발악과 조선인들의 체념어린 ‘황민화 정책’에의 동화의식이 풍미하던 태평양전쟁 말기에 순수하고 뜨거운 민족의식을 보여 주기에 충분했다.아인은 광복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자유아시아학생연맹’을 결성했다. 세계의 각축장이 된 아시아의 발전을 위해서는 아시아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그의 신념 때문이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아인은 ‘아시아의 안목을 가진 지도자’ 육성이 시급하다는 판단 아래, 선친인 만암의 전 유산을 기본 재산으로 대아중·고등학교를 설립해 교육자의 길을 걷게 된다.대아고등학교의 ‘대아(大亞)’라는 교명은 ‘아시아의 안목을 가진 큰 지도자를 길러 내겠다’는 아인의 희망이 담겨 있다. 대아학당과 오민교육 1946년 4월 8일. 반진단원들이 아인의 자택에 모였다. 당시 나라는 좌우익으로 갈라져 사회는 극도의 혼란 상태를 맞고 있었고, 반진단원들은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했다. 아인은 각계 분야에 필요한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현실을 인식하고 육영사업에 뜻을 두게 된다. 그후 아인은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들어가 경제학을 전공, 학업에 전념했다. 그러나 일찍이 그의 가슴속에 불붙었던 조국애는, 조국의 운명을 바꾸는 일로 바뀌었다. 조국의 운명이 바로 아시아의 운명이며, 조국의 현실이 바로 아시아의 현실이라는 냉엄한 현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아인은 기성 정치인을 배출하는 것 보다는 앞으로 조국의 지도자가 될 학생들의 결속과 유대 필요성을 자각하게 된다. 철기 이범석 장군의 지지와 후원을 얻어 그 조직과 결성을 위하여 일본으로 건너갈 준비를 하고 있던 중 민족상잔의 비극 6․25전쟁과 맞닥뜨리게 된다. 결국 아인은 학업은 물론 ‘자유아시아학생연맹’의 꿈도 모두 중단한 채, 노부모를 모시고 선영이 있는 남해의 재실로 피난길을 떠났다.휴전이 성립되던 해, 아인은 선친의 유산을 기본재산으로 반진단의 구국정신을 계승하는 재단법인 하천학원 대아중․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이사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그때가 1953년 12월 23일의 일이다. 당시 아인의 마음속에는 ‘조국의 통일과 자유가 아시아의 독립과 자유에 있음을 자각하여 밖으로는 아시아 학생연맹을 조직하고, 안으로는 신생 조국의 지도자를 양성한다’는데 있었다. 1973년 12월 29일에는 대아고등학교가 매 학년 10학급으로 증설 인가를 받았고, 이후 학교는 급속한 발전을 이루게 된다.그러나 학교가 커가면서 아인의 고민도 덩달아 많아지기 시작했다. 당시 대부분의 학교들은 진학위주의 시험교육을 우선했다. 교사가 학생에게 지식을 팔고, 교직은 돈을 벌기 위한 가장 손쉬운 직업을 전락되어 가고 있었다. 이와같은 풍조는 전국적으로 확산됐고, 아인은 학교교육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그리하여 참된 교육은 학교교육보다 가족적인 사제동행(師弟同行)의 사숙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실시한 교육이 화랑숙(花郞塾)교육이다. 그러나 60여명의 학생을 선발해 24시간 교육을 실시했지만 이 역시 채 2년이 못돼 좌절되고 말았다.아인의 오민교육(五民敎育)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1970년 4월 8일, 아인은 손문의 삼민주의(三民主義) 구국이념을 참고해「오민교육(五民敎育)」이라는 책을 저술하고, 대아학원에 오민교육(五民敎育)을 실시하게 된다.아인의 오민교육은 손문의 ‘삼민주의(三民主義, 民族 民生 民權)’에 민성(民性)과 민복(民福)을 추가해 감응과 체험을 위주로 하는 전인교육(全人敎育)이었다.아인은 즉시, 오민에 기초한 교육을 실시했다. 민성교육(民性敎育)으로는 모현단에 봉안된 민족선사 추모교육(智)과 세계선사추모교육(情), 오성다도를 통한 정서안정교육(意)이 실시되었다. 그리고 민생교육(民生敎育)으로는 민족후생생활사교육과 세계후생생활사교육, 능률적 자습교육이 실시되었다.민족교육(民族敎育)으로는 민족제단 교육과 세계 호국사교육, 충무공 추모행군, 민권교육(民權敎育)으로는 민중운동사교육, 세계인권운동사교육, 국민주체의식교육이 행해졌고, 민복교육(民福敎育)으로는 민족문화사교육, 세계문화사교육, 예능창작교육등이 실시되었다. 다도교육과 차문화운동 아인은 대아고등학교에서 현대 한국 차문화운동의 시초가 된 다도교육을 실시했다. 대아고등학교는 한국 차문화의 발원지가 되었고, 우리나라 차문화사(茶文化史)에서 아주 중요한 일로 기록되었다.한국 차문화의 발원지이자 한국차인회 발족의 계기가 된 대아고등학교의 다도교육은 1969년에 시작되었다. 학생들의 정서안정을 위한 다도교육은 비록 정규시간은 아니지만 교장실에서 교장이 직접 지도했다. 당시 다도교육에 사용한 찻 잔을 ‘경의잔(敬義盞)’이라 불렀는데, 이는 당시 진주지방에 종사로 계셨던 남명(南冥)선생의 경의정신을 흠모했던 아인의 아이디어였다.이러한 대아고등학교의 다도교육은 신문지상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알려지면서 ‘대아고등학교=차(茶)’라는 등식이 성립되었다. 그후 대아고등학교의 다도교육은 사단법인 한국차인회 발족의 계기가 되었고, 현 한국차문화의 요람이 되었다. 아인은 진주다도회를 결성했다. 대아고등학교 교장실에 삼현여고의 최재호, 선명의 강명찬, 미도양화점 김창문, 제일극장 최규진, 경상대학교 김재생 등이 참여했다. 첫사업으로 일본의 차인들을 초청해 문화교류를 시작했고, 효당 최범술을 고문으로 추대해 ‘대아다법(大亞茶法)’ 등 한국 고유의 다도를 정립해 나가기 시작했다. 진주에서 출발한 다도(茶道)는 최범술, 김미희, 박동선 등 몇몇 차인들이 참여한 가운데 ‘사단법인 한국차인회’ 창립으로 이어졌다. 서울 오류동 박동선의 자택에서 한국차인회 발기회가 열리고 1980년 서울 무역회관에서 한국차인회 설립총회가 개최되었다. 당시 아인은 ‘아인 차문화 운동 30주년’을 맞는 뜻 깊은 해였다.아인은 1970년대 말, 차문화 운동을 추진하던 중 한국 차문화의 정체성을 찾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 차(茶)의 성지인 초의선사의 ‘일지암’을 재건하는데 전력을 기울이게 된다. 일지암은 초의선사가 1824년(순조24)에 건립했다. 초의선사는 1866년 입적할 때까지 40여년간 이곳에서 다인들의 교과서인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을 펴냈고,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과 교류하며 차문화의 중흥을 도모한 한국차의 성지이다.아인은 1979년 몇차례의 답사 끝에 대둔산에 있었던 일지암을 찾아냈고, 조자용, 김봉호, 김두만 등과 거동이 불편했던 해남 박응송 스님과 함께 초의선사의 일지암지를 표시한 표시목을 박은 뒤, 1979년 4월에 일지암을 재건했다.일지암을 재건한 아인은 1981년 5월 25일, 진주정신의 상징인 촉석루에 전국의 100여명의 차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차의 날’을 제정하고 선포했다. 아인이 차의 날을 제정한 것은 전국에 우리고유의 ‘차문화’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우리 차를 마시는 운동을 추진하면서 부터이다. 차의 날은 입춘에서부터 100일이 되는 날인 5월 25일로 정했다. 아인은 직접 ‘차의 날 제정선언문’을 작성하고 낭독했다.아인은 선언문에 이렇게 적고 있다.‘차의 날을 기하여 많은 국민들이 차(茶)와 인연을 맺어 찬란하였던 민족의 차문화(茶文化)가 이 땅에 다시 꽃 피워질 것을 확신하면서 5월 25일을 차의 날로 선언하는 바이다’아인은 1981년, ‘경의정(敬義情) 학생다도’를 정립하는 것은 물론 전교생에게 다도교육을 실시했다. 당시 아인의 다도교육은 전국의 언론으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애다흥국(愛茶興國)’에 평생을 헌신한 아인은 학생들에게 3가지 행다법(行茶法)을 가르쳤다. ‘조신(調身)’ ‘조식(調息)’ ‘조심(調心)’이 그것이다. 조신은 ‘몸을 바로 세우는 것’이고, 조식은 ‘1분 18식의 단전호흡방법’이며, 조심은 ‘차의 오감(五感)에 의식을 집중시키는 것’이었다.아인은 차(茶)가 정서안정에 도움이 된다는 확신을 가졌다. 1981년 학교가 이현동으로 이사할 당시 다실(茶室)을 지을 정도로 학생들에 대한 다도교육은 그에게 중요한 교육이었다.이러한 아인의 다법은 학교일선에서 물러난 1985년 이후 오성다도(五性茶道)로 완성돼 차인들에게 전수되고 있다.아인의 차정신은 남명정신과 맞닿아 있다. 아인이 남명제를 창설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이다. 아인은 당시 각 사립학교의 설립정신을 조사했지만, 대부분의 사학들은 설립이념이 없었다. 그래서 아인은 당시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위대한 실천 철학자 남명이 세운 사학정신을 경남사학의 정신으로 삼기로 결심했다. 1977년 남명의 475회 생신을 맞아 경남체육관에서 ‘제1회 남명제(南冥祭)’를 개최했다. 남명제에는 술 대신 맑은 차를 올렸다. 아인은 남명제 창설을 통해 ‘학교교육은 학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배운 것을 실천하는 생활인을 기르는 곳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나라에 남명보다 더 훌륭한 교육자는 없다는 그의 신념이 반영된 것이다.이렇게 아인은 민족정신을 실천하는 교육자이자, 한국 차의 스승으로 자리잡았다. 진주차례회의 4인방(아인 박종한, 의재 허백련, 효당 최범술, 차농 김재생) 차(茶) 그리고 하천다숙아인은 다도강연을 비롯해 다기(茶器) 제작에 관심을 쏟았다. 당시 아인이 제작한 다기는 무애사발(이도다완), 오행다완, 경의잔 등이었다. ‘경의잔(敬義盞)’은 아인 스스로 ‘경이직내 의이방외(敬以直內 義以方外)’ 즉, ‘경(敬)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義)로써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반듯하게 한다’는 남명의 정신을 다도에 접목하고 스스로 실천한 것이다.국내외적으로 다도강의를 통한 ‘차문화 활성화’를 위한 활동도 쉬지 않았다. 1991년 이후 차 교육에 매진한 아인은 300여개 단체에 1만여명이 넘는 다인들에게 차교육을 실시했으며, 미국 하버드대학과 MIT, 예일대학 등의 초청강연에서 한국 차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개최된 ‘제1회 한국차인회 다도연구발표회’에서 아인은 ‘한국다도의 정신’에 대해 강연해 일본의 다도와 확연히 구분되는 한국의 전통 다도를 알려 나갔다.아인은 ‘다산의 차 사랑’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한 공로를 인정받아 제2회 다산 대상에서 문화예술부문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사단법인 다산연구소로부터 다산 정약용선생의 삶에 밴 차 정신을 널리 알리고, 한국 차 산업을 일으켜 차 문화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공로상’을 수상했다. 1998년에는 초의문화재단으로부터 ‘초의상’을 수상했으며, 한국차인연합회의 ‘명원차문화공로상’을 수상했다.(사)국제차문화교류협력재단은 2012년 11월 13일, 평생을 후학양성과 차문화발전을 위해 헌신한 아인을 ‘한국의 차 스승’으로 추존했다. ‘한국 다도의 실천자이며, 우리 다문화 정착화의 주춧돌이셨던 고 아인 박종한 선생님을 한국 다문화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한민국 차인들의 마음을 담아 한국의 차 스승(師表)로 추존한다’ 고 이유를 밝혔다. 남해군 설천면 덕산리에 위치한 하천다숙(荷泉茶塾)은 현대 차문화운동의 선구적 산실이다. 아인이 차문화운동의 계몽적 차원에서 이름 붙인 하천다숙은 최근 한국전통건축으로 선정돼 국가문화재로 등록되었다.‘하천재의 물리적인 공간과 정신적인 공간이 그대로 후손에게 연계되면서 이 지역은 물론 국제적으로 공개된 건축물로 생활을 예술화하고 예술을 철학화하는 계몽적 차생활 문화공간’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아인은 만년에 하천다숙에 기거하면서 오성다도의 사상과 철학을 집대성한 ‘오성다도’ 등의 차 관련 서적을 집필했다. 오성다도는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근대 차문화사는 물론 한국 차 철학을 정립한 저서로 평가받고 있다. 이외에도 아인은「오민교육」「한국인의 차 생활사」등을 집필했다.2012년 5월 7일, 진주교육계의 거목인 아인 박종한은 세상을 떠났다.항일 애국지사, 교육자, 차인들의 사표(師表)였던 아인의 뜻을 기려 진주시민들은 진주시민상을 수여했다. 진주차례회와 일본 나고야 차도회의 한일차문화교류(1970년) ▲학·경력1943 진주공립중학교, 진주고등학교 졸업1950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재학중 한국전쟁으로 학업 중단1953 대아중·고등학교 설립1969대아고등학교 다도교육 실시1976 진주향토문화사전 개최1977 남명제 창설, 헌다례 복원1978 아인요 설립1979 (사)한국차인회 설립1979 일지암 재건1981 차의 날 창설1982 무애사발, 오행다완, 경의잔 창작1993 한민족현창회 창설1994 오성다도 정립2007 하천다숙에 차의 날 선언기념비 제막 ▲포상1989 (사)한국차인회 창설 공로패1998 차문화공로상(한국다도협회)1998 초의상(초의문화재단)2000 명원차문화공로상(한국차인연합회)2008 한국차인대상 교육공로상2012 한국의 차 스승( 사 국제차문화교류협력재단)

  • 2025-05-27
  • 작성자

    황경규

  • 조회수

    14

(STORY OF 진주 2)  1. 정조, 촉석루를 모방하다 썸네일 이미지

Story of 진주 (STORY OF 진주 2) 1. 정조, 촉석루를 모방하다

진주성(晋州城)과 촉석루(矗石樓)의 제도(制度)를 모방하라는 지시를 내린 조선의 국왕이 있다. 그는 바로 조선 제22대 임금인 정조(正祖)이다. 정조가 수원 화성을 축성할 당시, 조선 최고의 성(城)이었던 진주성과 촉석루를 벤치마킹하도록 한 기록이 있다. 국왕의 동정과 국정에 관한 제반 사항을 수록한 정무 일지인 『일성록(日省錄)』이다. 『일성록(日省錄)』 정조(正祖) 18년(1794년) 10월 19일(癸酉)의 기록이다. 진주성(晉州城)은 고(故) 상신(相臣) 유성룡(柳成龍)이 중국의 성제(城制)를 모방하여 쌓은 것인데, 그 유고(遺稿)를 보면 그의 재지(才智)와 역량은 실로 후인들이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화성의 제도 역시 진주성을 모방하여 견고하고 완전무결함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기대하려는 것이니, 어찌 급급하게 역사를 감독하여 오직 속히 완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겠는가. 만일 고 상신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반드시 내 말이 옳다고 했을 것이다.”(晉州之城卽故相柳成龍之摸倣中國城制者也見其遺稿其才智力量實非後人可及今此華城之制亦所以摸倣晉城而欲其鞏固全完期於永奠豈可急急董役惟以速成爲主乎若使故相在此則必後吾言矣) 수원(水原) 화성(華城)은 정조가 꿈 꾼 새로운 조선이었다. 정조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 새로운 정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신도시 화성을 계획했다. 수원 화성은 당시 최첨단 과학과 건축술이 적용된 역작이자, 동양 성곽(城廓)의 백미로 평가 받고 있다. 정조가 만들고자 한 수원 화성은 상업적 기능과 군사적 기능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평지성이면서 견고한 성(城)이었다. 정조가 이른바 ‘진주성을 모방하여 견고하고 완결무결함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기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조가 수원 화성을 축성할 당시, 제도를 모방할 정도로 조선 최고의 성(城)은 바로 진주성(晋州城)이었다. 정조는 진주성의 제도를 모방하라는 교지를 내리기 1년 전인 정조 17년(1793) 12월 8일, 진주성 촉석루(矗石樓)에 주목했다. 화성 성곽 축조에 관한 경위, 제도, 의식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영남의 여러 성 중에 진주성(晉州城)에 있는 초루(譙樓)가 매우 좋다고 하니 사람을 보내 알아 오게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하니, 조심태가 아뢰기를,“함안 군수(咸安郡守) 심인(沈鏔)은 본래 재주와 슬기가 있다고 일컬어집니다. 곧 임기가 만료된다고 하니, 그로 하여금 몸소 가서 간심하고 나서 도형을 만들어 올라오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嶺南諸城中 晉州城看譙樓甚好云亦送人知來好矣 心泰曰 咸安郡守 沈鏔自有才諝之稱聞瓜期在卽云使之躬往看審仍爲圖形上來之地似好矣) 정조가 말한 ‘진주성에 있는 초루(譙樓)’는 촉석루(矗石樓)를 말한다. 조선 후기 형조판서와 장용영대장을 역임한 무신인 조심태(趙心泰)가 함안군수 심인을 시켜 ‘간심(看審)’ 즉 촉석루를 자세하게 보아 살핀 이후에 촉석루의 도형(圖形)을 만들어 올리게 하겠다고 한 것이다. 정조(正祖)는 진주성과 촉석루에 주목했다. 이는 정조가 꿈꾼 새로운 조선인 화성 축성에 있어 진주성과 촉석루가 제도의 근본이 되었다는 점은 ‘조선시대 진주성과 촉석루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최근에 촉석루(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66호)를 국보(국가지정문화유산)으로 재지정하기 위한 지역사회의 노력이 진행되고 있는 것도 진주성과 촉석루가 가지는 위상을 회복해야 한다는 역사적 소명의 일환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촉석루 3D 유홍준과 촉석루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저자인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MBC의 간판 예능프로그램인 강호동의 「무릅팍 도사」에 출연했다. 스타들의 실제 고민을 속시원하게 해결해 주는 프로그램에서 유 전 청장은 ‘대한민국 문화유산 관리에 가장 큰 불만’을 내놓았다. 그것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을 방문하면 항상 눈에 거슬리는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팻말이었다. 유 전 청장의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목조건축물에는 사람이 살아야 그 건물도 살고 오래 보존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곰팡이와 먼지가 낀다. 천하의 좋은 집도 ‘들어가지 마시오’ 3년이면 흉가가 된다.’ 그러면서 ‘촉석루(矗石樓)’를 그 모범답안으로 제시했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정자 중에 가장 보존이 잘된 곳이 바로 진주의 촉석루이다.’ 유홍준 전 청장의 이 말은 출입 자체를 금기시하는 우리나라의 다른 목조 건물들처럼 ‘들어오지 마시오’가 아니라 국민들이 마음 편히 촉석루에 올라 진주의 아름다운 자연을 느낌과 동시에 촉석루의 산 역사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에 촉석루를 잘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유 전 청장은 JTBC의 시사 교양프로그램인 「차이나는 클라스」에도 출연했다. 이 프로그램에서 촉석루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인 경복궁 경회루, 창경궁의 일반인 개방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경복궁의 경회루를 비롯한 대한민국 대표 문화유적들이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팻말로 일반인들의 출입을 막으면서 ‘문화유산 스스로 고립과 소외를 자청해 보존의 기회를 스스로 상실하고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유 전 청장은 방송을 통해 ‘문화재는 가까이서 보고 향유할 때 비로소 그 가치를 알 수 있다는 사실을 촉석루가 입증하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경남 진주의 촉석루가 가장 잘 보존된 곳이다’ 현재 명지대학교 석좌교수인 유홍준 전 청장은 각종 기고를 통해 문화유산 보존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유 교수는 「유홍준의 문화의 창」이라는 칼럼에서 전국에 퍼져 있는 누정(樓亭)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누정(樓亭)은 자연환경이 낳은 아름다운 연속유산이다. 삼천리 방방곡곡 풍광 좋은 자리와 쉬어 갈 만한 곳에는 반드시 누정이 있었다. 그 이름은 루(樓), 대(臺), 정(亭), 헌(軒)으로 대표되며, 그 중에서 관아에서 지은 누각은 그 고을의 상징적 랜드마크로 규모도 크고 자리앉음새도 탁월하다고 보았다.그러면서 조선의 3대 누각(樓閣)으로 진주(晋州) 촉석루(矗石樓)·밀양(密陽) 영남루(嶺南樓)·평양(平壤) 부벽루(浮碧樓)를 꼽았다. 이외에도 남원 광한루, 삼척 죽서루, 안주 백상루, 청풍 한벽루도 대표적인 누각으로 선정했다.유 교수는 이들 누정(樓亭)에 있는 기문(記文)에도 주목했다. 청풍 한벽루 기문을 쓴 조선 태종 때 문신인 하륜(河崙)의 글을 소개했다.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누각을 관리하는 일은 한 고을 수령된 자의 마지막 일감에 지나지 않지만, 그 누각이 관리되는 것만 보아도 고을의 행정실태를 미루어 알 수 있으니 어찌 작은 일이라 하겠는가” 호정(浩亭) 하륜(河崙)이 지은 「촉석루기(矗石樓記)」도 소개할 필요가 있다. 하륜은 촉석루기에서 촉석루를 둘러싼 풍광의 아름다움과 진주사람의 기상, 그리고 명승에 어울리는 자연경관에 대해 담담하게 적고 있다. 누의 규모가 크고 높으며 확 트여서 굽어보면 긴 강이 그 아래로 흐르고 여러 봉우리가 바깥쪽에 벌려져 있다. 가정집의 뽕나무 밭과 삼밭, 고대(高臺)의 화훼가 그 사이로 은근히 비친다. 사람의 기상이 맑고 풍속이 온후하며, 농부와 누에치는 아낙네는 그 일에 부지런하고 효자와 어진 후손은 그 힘을 다 쏟는다. 방아노래는 마을에 연이어 울리고 장단 맞춘 뱃노래가 벼랑을 따라 퍼진다. 새들이 무성한 숲에서 절로 날고, 물고기와 자라는 헤엄치고 자맥질하여 한 구역(一區)의 만물에 이르기까지 제 자리를 얻어서 모두가 볼만하다. 유홍준 교수는 대한민국 문화유산으로서의 촉석루가 가지는 가치를 결코 평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촉석루는 경복궁의 경회루와 창경궁의 일반개방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촉석루가 갖고 있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문화유산과의 차별점은 ‘국민들과 함께 호흡하는 문화유산’으로 오랜 기간동안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계기도 마련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촉석루는 조선시대에 이어 오늘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누각(樓閣)으로 그 명성을 잇기에 충분하다. 다시, 촉석루 조선의 3대 누각(樓閣)인 진주 촉석루·밀양 영남루·평양 부벽루가 갖는 문화유산으로서의 현주소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현재 조선의 3대 누각인 촉석루·영남루·부벽루의 위상이 어떠한지 확인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밀양의 영남루는 지난 2023년 12월 국보(國寶)로 지정되었다. 평양의 부벽루는 국보 제17호이다. 반면 촉석루는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전소된 후 재건되었지만 아직도 위상을 회복하지 못하고 시도유형문화유산에 머물고 있다. 촉석루의 냉혹한 현주소이다.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되기 위해서는 국경을 초월할 만큼 독보적이고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더불어 등재과정에서 우리의 문화유산을 세계사적 시각에서 인식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여기에서 ‘연속유산’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대표적으로는 조선왕릉이다.최근에 ‘주목할만한 연속유산’의 하나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 바로 ‘누정(樓亭)’이다. ‘다시, 촉석루’라는 명제를 떠올려야 하는 이유이다.지난 2023년 12월 밀양의 영남루와 삼척의 죽서루가 보물(寶物)에서 국보(國寶)로 승격되었다. 향후 이들 누정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유적의 보존실태에 대한 심사준비는 물론 건축, 문학, 역사 등의 학술대회를 통해 인문학적 가치를 쌓아 나갈 것으로 보인다.밀양루의 역사를 살펴보자. 국보로 승격된 밀양(密陽)의 영남루(嶺南樓)는 일제강점기(1933년) 보물로 지정되었고, 1955년 국보로 승격되었다. 하지만 1962년 1월 제정된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문화재 재평가로 보물로 격하되었다. 밀양루의 국보 지정을 위해 밀양시는 지난 2014년 시민운동 차원에서 국보 승격을 위한 노력을 진행하다가 결국 취하하고 만다. 대신 영남루의 원래 지형 복원을 위해 난립한 건축물을 매입한 후 원형 복원 노력을 추진했다. 2022년에는 영남루의 건축사적·인문학적 가치를 담은 「영남루 국보 승격 학술보고서」를 제출했고,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이듬해인 2023년 12월 28일 국보(國寶)로 지정되었다.국보(國寶)였던 촉석루의 옛 위상을 다시 되찾아야 한다는 지역사회의 노력이 전개되고 있다. 촉석루는 고려 고종 26년(1241)에 건립된 이래, 783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무려 아홉 차례에 걸쳐 중수(重修)와 보수(補修)를 거치면서 묵묵히 제 자리를 지켜왔다.일제강점기인 1937년에는 보물 제276호로 지정되었다가, 1948년에는 국보 제276로 지정되었다. 한국전쟁으로 전소되면서 1956년에는 국보 지정이 해제되었고 1960년에 진주시민들의 힘으로 촉석루가 재건되었다. 이후 1983년에는 경상남도 지방문화재자료에 그치면서 2004년 지역사회에서 촉석루 국보환원운동이 일어났지만 무위에 그쳤다. 다시 2020년에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제666호 지정되었다.최근 촉석루의 원형복원을 입증할 결정적인 문서가 발견되면서 ‘촉석루의 국가지정문화유산 지정을 위한 노력’이 전개되고 있다.조현신 경남도의회 의원이 경남연구원에 촉석루 국가지정문화유산 재지정을 위한 정책현안 과제를 의뢰한 결과, 촉석루가 원형복원됐다는 사실을 증명할 자료를 입수한 것이다. 이번에 발견된 4건의 자료는 ▲일제강점기 촉석루 실측도(1937년) ▲한국전쟁 당시 소실 후 재건공사 설계도(1957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촉석루 조속복구 특별지시에 따른 원상복구 승인요청 공문 ▲원형으로 재건공사를 허가했다는 내용의 언론보도이다.이로써 국보-소실-복원의 반복이라는 불행한 역사를 안고 있는 촉석루의 국가지정문화유산 재지정에 청신호가 켜졌다. 지난 2014년 문화유산 승격 신청 당시 부결된 과제를 해결하고 조선 3대 누각의 명성을 회복할 기회를 마침내 갖게 된 것이다. 경상남도 역시 ‘조선 3대 누각’인 촉석루의 국가지정문화유산 지정을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진주성(晋州城) 촉석루(矗石樓)를 바라보면 눈 맛이 난다. 수다스런 단청도, 주책없는 니스칠도 없다. 단아하고 기품이 있으며 일체 속악(俗惡)한 것이 발을 붙이지 못한다. 추한 것들이 진정 아름다운 것들을 짓밟는 행패 속에 얼마 남지 않은 진주의 자산(資産)이자, 진주정신(晋州精神)이 살아 숨 쉬는 곳이 바로 촉석루이다. 『촉석루(矗石樓)』라는 책을 쓰면서 서문에 적은 글이다. 촉석루가 진주를 중심으로 한 인문질서의 핵심이자, 이상적인 공간으로 표현함과 동시에 촉석루가 진주의 역사성·정체성·유일성을 대표하는 ‘진주문화의 자긍심’이라는 점도 말하고 싶었다. 새로운 조선을 꿈꾼 정조가 수원 화성을 축성하면서 모방한 진주성(晋州城)과 촉석루(矗石樓). 조선시대 이래 대한민국 최고의 성(城)과 누각(樓閣)으로 명성을 떨쳤던 진주성과 촉석루의 위상을 되찾아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 2025-05-27
  • 작성자

    황경규/진주향당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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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평론 한국국제대학교 폐교 부지에 진주교방문화단지 조성하자

진주 청년 기업가와 만남을 가질 기회가 있었다. ‘진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잠시 고민하더니 ‘변함은 없는데 변화(變化)도 없는 곳이 진주이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사실 변함이 없는 건 좋은데 변화가 없다는 것은 청년 세대를 비롯한 지역 구성원에게 주어지는 기회 역시 충분치 않다는 뜻으로 읽힌다. 지역소멸 시대에 ‘과연 진주는 변화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진지하게 답해야 하는 시기임은 분명해 보인다.올해는 경남도청이 부산으로 이전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경남도청의 부산 이전은 실로 경남 수부 도시였던 진주의 위상 하락과 소멸, 그 이상을 의미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진주시민들의 격렬한 이전 반대 운동이 지역의 생사 여부를 건 투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경남도청의 부산 이전 100년을 맞은 진주의 현주소는 어떠한가. 과연 100년 전 진주시민들의 그 간절한 마음을 갖고 진주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는지 자문자답해야 한다. 한국국제대학교가 파산 선고를 받고 폐교된 지 1년 8개월이 지났다. 자산매각이 난항을 겪으면서 폐교된 캠퍼스는 점차 흉물로 변해가고 있다. 한국국제대학교 폐교가 지역경제와 시민의 삶과 직결되는 중대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진주 발전을 위한 특별한 공간으로 재탄생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은 제시되지 않고 있다. 진주출신 경남도의회 의원들이 ‘한국국제대 부지 활용 대정부 건의안’을 발의하고, 진주시의회에서도 5분 발언을 통해 대안 마련을 촉구했지만 진주시는 태도는 여전히 미지근하다. ‘변화가 없다는 것은 도전하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이라는 청년 기업가의 말을 여기서 다시 한번 떠올릴 필요가 있다. 경남에서 첫 파산이라는 불명예를 안은 한국국제대학교 폐교 부지 활용을 위해서는 용도변경 등 국회와 정부 차원의 법과 제도 정비라는 우선 과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정부 지원으로 지자체가 폐교부지를 매입해 지역사회를 위한 공적 용도로 활용하는 방안도 있다. 물론 당장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진주대첩역사공원을 완성하는데 17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지역사회가 한국국제대학교 폐교 부지 활용 방안을 위한 토론회 등과 같은 공론의 장을 만드는 일이 우선일 것이다.한국국제대학교 폐교 부지에 ‘진주교방문화단지(晋州敎坊文化團地)’를 조성하는 것을 제안하고 싶다. 진주교방문화는 천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형성된 진주만의 고유하면서도 독창적인 문화유산이다. 한국교방문화학회가 교방문화의 이론적 토대를 구축한 지 오래이고, 진주시의회 교방문화연구회도 ‘교방문화 특화관광도시 진주 조성 방안’ 등의 용역 결과를 내놓으면서 진주교방문화에 대한 인식개선은 물론 지역사회의 관심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이제는 실천만이 남아 있다.한국국제대학교 폐교 부지에 진주교방문화의 진수를 담아낸 진주교방문화단지 조성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대한민국 유일무이의 문화콘텐츠이자, 새로운 킬러 콘텐츠로 지역의 관광산업과 지역경제활성화에 큰 몫을 담당해 낼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의기 논개, 산홍, 기생독립운동 등이 갖는 진주교방문화의 정신사적 가치와 의암별제, 전통가무, 교방음식 등 교방문화의 문화·예술사적 가치를 활용한다면 지역소멸에 대비하는 단초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진주교방문화단지에 진주교방청, 진주교방역사관, 진주교방체험관, 교방음식관, 숙박시설인 교방촌을 조성하자. 그리고 이를 통해 대한민국 전역에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는 지역소멸에 대비하자.진정 ‘변화하는 진주’를 바라는 정치인이 있다면 적극적인 동참을 기대하고 또 기대한다.

  • 2025-05-27
  • 작성자

    황경규/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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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수 경남도지사 좌하 2 썸네일 이미지

주간평론 박완수 경남도지사 좌하 2

박완수 경남도지사 좌하 2 초대합니다. 조만간 진주에 오실 계획이 있으시면 부디 귀한 시간을 내시어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을 방문해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가능하시다면 대규모 공연이 있는 날이면 좋겠습니다. 공연 한 시간 전에 도착하신다면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 주차 전쟁으로 발을 동동 구르는 안쓰러운 도민들의 모습을 직접 확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별안간 초대장을 보내 드린 이유는 도지사님이 직접 방문하시어 이 아수라장 같은 현장을 목격하셔야만 십 수 년 동안 질질 끌어온 주차장 문제 해결의 단서를 비로소 마련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입니다. 혹시 바쁜 일정으로 인해 오시지 못해도 무방합니다. 보시고 문제없다고 생각하시면 이대로 두셔도 상관없습니다. 도민들의 지속된 개선 요구를 외면한 것이 이미 한 두해가 아니기에 그렇습니다.과거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 개관 이후, 주변 상권은 엄청난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리모델링 이후에 침체기에 접어들었고 지금은 끝이 보이지 않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습니다.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고 보시면 될듯합니다. 공연이 없는 날에는 주차장은 텅 비어 있고 사람 구경은 하기 어렵습니다. 반면 공연이 있는 날에는 주차 전쟁으로 도민들은 공연을 감상한 뒤에 차 한잔 마실 수 있는 여유 따위를 가질 겨를도 없이 짜증을 내며 돌아가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 관장이 교체되어도 사정은 그대로 입니다.최근 언론보도를 접했습니다.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 사용료 인상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가 상승분을 감안한다면 무려 12년 간 동결된 공연장 사용료 역시 현실화되어야 마땅합니다. 누가 반대하겠습니까. 다만 현재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이 당면한 문제에 대한 현실 인식과 해결 방안에 대해서는 여전히 침묵한다면 도민들은 흔쾌히 동의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공연료 인상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도민들은 의문을 가질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박수를 보내기 어려운 도정의 일부분이 될 것입니다.경남도립예술단 창단을 계기로 건립된 경남도문화예술회관 주차장 부지 속의 경남도립예술단창작관의 활성화 여부도 챙겨봐 주십시오. 경남도립예술단은 지역 예술 생태계 활성화와 도민의 문화 향유권 향상을 위해 창단되었습니다. 현재 경남도립극단만이 이 시설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공연 준비 이외에는 창작관의 활용도가 높지 않다는 지적입니다. 더불어 주차장 부족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 원흉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다른 종목의 경남도립예술단 창단 계획은 없으신지요? 만약 없으시다면 도민들이 공유하는 공간으로 활용하는 것은 어떠신지요. 지난 2017년에 수립된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 중장기 발전 방안도 챙겨봐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2022년 현행화를 목표로 한 이 발전 방안은 지금은 그야말로 휴지조각이 되었습니다. 당시 발전 방안을 보면 현황과 문제점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추진 방향 역시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듯합니다. 대공연장 1개소로 공연 수용 애로와 공연장 객석 수 대비 주차공간 부족, 부대시설 및 편의시설 부족 등입니다. 근데 계획은 실로 거창했지만 달라진 것은 별로 없습니다. 현 상황을 감안한다면 단언컨대,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이 경상남도를 대표하는 위상을 갖고 있다고 말하기조차 부끄럽습니다. 경남도민들은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이 갖는 건축사적 가치와 역사성에 대해 여전히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경상남도의회에서도 여러 차례에 걸쳐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의 전체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 요구를 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박완수 경남도지사 좌하’라는 이름으로 두 번째 올리는 글입니다. 도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답장을 기대합니다.

  • 2025-04-01
  • 작성자

    황경규/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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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평론 진주문화원의 품격

제14대 진주문화원장 선거를 앞두고 진주문화원의 새길 찾기라는 기고를 한 적이 있다. 4년 전의 일이다. 진주문화원의 미래 100년 비전을 제시하는 후보가 선택되기를 기대했다. 백지상태의 문화 불모지에서 지역문화의 새 지평을 열었던 진주문화원의 초심을 회복하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는 의미와 진주문화원의 품격이 곧 진주의 품격이 된다는 문화계 원로들의 바람도 담았다.과거 진주문화원은 서부 경남의 문화 선도 기관이라는 명예를 잃고 전국 문화원 가운데 사고 문화원으로 낙인찍힌 적도 있다. 지역문화의 구심점이 아닌 특정 사조직이나 지방 권력의 하수인 혹은 지역문화 권력자들의 견고한 모임으로 퇴색했다는 비아냥도 감수해야 했다. 그런 점에서 특정 세대에 편중된 사업과 특정 세대만의 전유물로 인식되어 온 진주문화원의 새길 찾기는 진주문화원의 명예와 품격을 되찾는 중요한 기회였음은 물론이다. 진주문화원장의 선출 방식과 운영시스템의 파격적인 변화의 필요성도 제기했다. 선거가 치러질 때마다 극단적인 파벌을 양산하는 기존의 선거방식을 고수하기보다는 문화적 소양과 비전을 갖춘 인재를 원장으로 추대하는 방식으로의 전환이 없다면 진주문화원의 옛 위상을 되돌릴 방법은 없다고 전망했다. 결론만 놓고 본다면 진주문화원은 새길 찾기를 희망하지 않았다. 진주문화원의 명예와 위상은 내팽개치고 ‘오로지 당선’을 위해 아무 거리낌없이 오래된 폐단을 그대로 답습했다. 진주문화원장 선거 직후, ‘불법 선거 의혹’과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등의 논란에 휩싸인 건 물론이다. 진주문화원장 선거 결과, 투표인 수 대비 투표용지가 더 많이 발견되었고, 회원의 신상정보가 담긴 회원명부가 유출돼 선거에 이용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쯤 되면 역대 진주문화원장 선거 가운데 가장 최악의 선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재판부는 진주문화원장 선거 무효 확인 소송 1심에서 선거 무효 판결을 내린 것은 물론 본안 소송 종료까지 진주문화원장의 직무집행을 정지시켰다.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에 대해서는 벌금을 선고했다. 이같은 재판부의 판결만으로 현 진주문화원이 역사상 최악의 진주문화원이라는 불명예를 떠안기에 충분했다. 더불어 진주문화원을 구성하는 구성원 모두가 스스로 새길 찾기를 등한시한 결과이기도 하다. 현재 진주문화원은 원장 직무대행 체제로 운영되고 있으며, 제15대 진주문화원장 선거를 또다시 목전에 두고 있다.이제는 진주문화원의 새길 찾기를 희망하지 않는다. 뻔한 결말이 보이는 삼류영화를 벗어나기 힘들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문화정책의 변화와 패러다임의 전환 따위의 시대적 변화에 따른 환골탈태를 적시하는 것도 의미 없어 보인다. 차기 진주문화원장 선거를 앞두고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보면 변화나 개혁의 여지가 전혀 없어 보이기에 그렇다. 진주문화원의 품격 회복이 아니라 권력만을 욕망하는 공간으로 또다시 전락한다면 바랄 수 있는 것은 단언컨대 없다. 진주문화원 회원들의 각성만이 정답일 것이다.진주문화원은 그동안 지역문화의 컨트롤 타워에서 마당쇠 역할까지 자임해 왔다. 그동안 진주문화원이 진주 문화에 끼친 영향력역시 절대로 적다고 할 수 없다. 명실상부한 민간 문화조직의 원조라는 자부심으로 지역문화의 좌표 역할을 수행하는데도 부족함이 없었다는데 전적으로 동의한다.문제는 앞으로 진주문화원장이 되고자 하는 후보들의 냉철한 자기반성과 비전제시에 있다. 진주문화원의 수장은 진주의 문화계를 대표하는 자리이다. 만약 출마 의지가 있다면 진주문화원의 100년 미래를 위한 비전을 시민들에게 제시해야 한다. 단지 자리 욕심만 내는 후보가 당선된다면 진주문화원의 미래는 지금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바라건대, 제15대 진주문화원장 선거가 과거의 점철된 오욕을 씻어내고 새로운 진주문화원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 2025-02-17
  • 작성자

    황경규/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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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평론 2025년 12월 14일

정치인과 권력자들은 자신이 갖고 있던 권력을 하루아침에 잃게 되면 마치 주먹으로 온몸을 두들겨 맞는 듯한 엄청난 통증을 느낀다고 한다. 이른바 권력 상실의 고통이다. 워싱턴 포스트는 미국 제37대 대통령인 리처드 닉슨이 ‘범죄 드라마’를 능가하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백악관을 떠나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닉슨은 백악관에 주저앉아 양탄자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이렇게 외쳤다. ‘단순한 주거침입이 어떻게 이런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무슨 일을 한 거야,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냐고.’ 권력 상실의 고통은 인간만 느끼는 건 아니다. 침팬지 서식 집단에서도 발견된다. 우두머리 침팬지가 어느 날 젊은 수컷의 도전을 받았다. 힘 겨루기를 하다가 사실상 패배를 직감하는 순간, 우두머리 침팬지는 갑자기 썩은 과일처럼 나무에서 떨어진 후에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몸부림을 치고, 비참하게 소리를 마구마구 질러댔다고 한다. 국민에게 탄핵이라는 성적표를 받아 든 윤석열 대통령은 과연 어땠는가. 하늘처럼 섬겨야 할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눈 행위와 의회해산 시도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헌정질서를 짓밟은 내란죄임이 명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차례의 담화를 통해 지금까지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고 강변하고 있다. 국민들은 과연 그가 무엇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건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권력자’를 단죄하기 위해 국민의 이름으로 탄핵을 했다. 어찌 보면 닉슨과 침팬지처럼 추악한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일 지경이다. 권력은 멀쩡하던 사람의 뇌를 바꾼다고 한다. 정치인 고 김종필은 ‘괜찮던 사람도 청와대만 들어가면 사람이 바뀐다’고 했다. 권력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자신의 정당성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게 되고 결국에는 모든 상황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진다고 한다. 권력에 눈이 먼 권력자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모범 사례이다. 과거 대한민국은 오만한 권력자에 의해 민주주의가 짓밟히는 국가적 위기에 처했던 사례가 발생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는 깨어있는 국민들이 있었다. 화염병과 돌멩이로 군사독재 정권과 맞서 싸웠던 국민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또렷하게 기억한다. 어둠을 밝히는 촛불로 국정농단을 일삼았던 정치인을 단죄했던 국민들이 있었다는 사실 또한 우리는 분명히 기억한다. 그리고 2024년 12월 14일, 그 추운 겨울의 차디찬 콘크리트 바닥에서 오색찬란한 응원봉과 깃발을 흔들며 반헌법적 비상 계엄와 내란음모 시도를 날려버린 자랑스런 대한민국 국민이 있었다는 사실 역시 우리는 기억한다. 이렇게 대한민국의 역사는 군사독재, 국정농단, 내란을 일으킨 역사의 죄인은 반드시 처단된다는 사실을 명명백백히 증언하고 있다. 부패는 권력의 숙명이다. 그래서 권력은 부패하며,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혹시 지금도 자신이 절대권력을 가졌다고 착각하는 정치인과 권력자들이 아직도 계신다면 꼭 들려 드리고 싶은 헌법 조문이 있다.‘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바로 대한민국 헌법 제1조이다.이제는 동네를 돌아다니는 강아지조차 달달 외울 법한 이렇게 간단한 법조문이 그렇게 기억하기 어려운지 이해가 안된다. 아니면 기억하기 싫은 것인지 궁금하다. 앞서 보여준 국민들의 역사적 단죄가 두렵다면 이 평범한 사실을 한시라도 까먹지 마시고 지금이라도 몸소 실천하시길 권해드리고 싶다. 국민의 힘으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온전히 지켜낸 자랑스럽고 자랑스러운 역사적 그날은, 2024년 12월 14일이다.

  • 2025-02-07
  • 작성자

    황경규/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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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