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주평론외전 지금 장난 치세요?
지금 장난 치세요? 악조건 속에서도 굳세게 잘 자라는 식물이 있다. 근데, 하루는 쨍쨍 내리쬐는 햇볕에 두었다가, 열흘 동안은 서릿발 같은 냉골에 둔다면 자라날 길이 없다. 안 죽으면 그나마 천만다행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쩌다 한 번 날아든 희소식에 잠시 동안 희희낙락할 때가 있다. 근데 열흘 내내 치욕적인 흑역사만 써내려 가는 상황이 계속된다면 도저히 버텨낼 재간이 없게 된다. 우울증에 걸려 세상과 등지지 않으면 그나마 천만다행이다. 근데 요상하게도 요즘 세상이 그렇다. 옛날과 달리 ‘살면서 어쩌다가 한 번 나쁜 일이 생기는 세상’이 아니라, ‘어쩌다가 한 번 좋은 일이 생기는 세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살이가 점점 팍팍해지고 있다는 넋두리가 점점 늘어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국시대를 살았던 맹자(孟子)는 ‘일일폭지(日日暴之) 십일한지(十日寒之)’라는 글귀로 당시 정치상황을 풍자했다. ‘내가 왕을 뵙는 때가 적으니 이것은 하룻 동안 햇볕을 쪼이는 것과 같고, 내가 물러 나오면 아첨하는 자들이 잡되게 나와 뵙는 날이 많으니 이것은 열흘 동안 차갑게 하는 것이다. 왕에게 선한 양심의 싹이 있다고 한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我見王之時少 猶一日暴之也 我退則諂諛雜進之日多 是十日暴之也 雖有萌蘖之生 我亦安能如之何哉) 하루 잠깐은 햇볕이 들었다 한들, 열흘 동안 계속 간신들의 차갑고 축축한 그림자가 정치의 하늘을 뒤덮고 있다면, 국민들이 어찌 행복한 삶을 꿈꾸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그렇잖아도 힘든 삶과 힘겨루기를 하는 판에 정치마저 희망보다는 절망의 그림자가 더욱 짙으니 더욱 그러하다. 정치 이야기야 며칠 밤을 세우면서도 할 자신이 있다. 다만 건강을 생각해서 자제할 뿐이다. 무려 2,000년 전 맹자의 말씀을 지금 되새겨 보면, 참 세상 안 변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서민들의 삶이 지금이나 그때나 얼마나 달라졌는지 돌아보자. 과연 누구의 잘못 때문인가. 그런데 현실 정치는 여전히 간신들이 득세하고 있고, 서민들의 삶은 여전히 퍽퍽하다. 그래서 어떤 정치인은 선거에서 이렇게 말했다.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오래전 이야기이다.당시 선거판에서 엄청난 유행이 되었다. 동네 꼬마 녀석들도 ‘살림살이 좀 나아졌습니까’라고 조롱을 하고 다녔으니 말이다. 그 살림살이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다시 한번 자문자답해 본다. ‘그래 살림살이는 좀 나아지셨습니까?’ 고사성어(故事成語)인 ‘지록위마(指鹿爲馬)’를 생각해 본다. 온갖 거짓말들이 진실의 탈을 쓴 채, 세상을 횡행(橫行)했다. 꽤 오래된 일이지만, ‘담뱃값 인상은 세금 때문이 아니라 국민건강을 위해서다’ ‘56조 부채는 남겼지만, 자원외교 실패는 아니다’ ‘정치개입은 맞지만 선거개입은 아니다’ 등등이다. 요즘 세상이라고 크게 달라진건 없다. 여전히 ‘거짓말 천국’을 양산해 내고 있다.지금 국민들은 헷갈린다. 무엇이 사슴(鹿)이고, 무엇이 말(馬)인지 말이다. 그런데 이 애매모호한 문제는 이 사람에게 물어보면 명쾌하게 해결된다. 바로 대한민국의 도덕(道德) 교과서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초등학생이다. 아마 물어보면 눈꼬리를 치켜 올리며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지금 장난치세요?’ 이렇게 아이들도 정확하게 아는 세상을 어른들만 모른척, 부하뇌동하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들의 시간들이 썩은 미소를 날리며 우리 곁을 지나가고 있다.
- 2025-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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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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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향기 관례(冠禮)와 계례(笄禮)의 사회적 의미
관례(冠禮)와 계례(笄禮)의 사회적 의미 ○ 오늘 고전산책은 어떤 내용입니까? ▶ 옛날에는 성년의 날이 되면 전통적인 성인의식인 관례와 계례가 치러졌습니다. 일반적으로 관례는 전통사회에서 행해졌던 남자들의 성인의식으로 성인이 되었음을 상징하기 하기 위해 갓을 씌우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남자가 스무 살이 되면 땋아 내렸던 머리를 걷어 올려 상투를 틀고 어른의 복색을 입히고 초립이라는 관을 씌워주었고, 여자는 15세가 되면 비녀를 꽃아 주는 예가 있었는데 이것을 관례라고 했습니다.오늘 고전산책에서는 고전속에 나타난 관례(冠禮)와 계례(笄禮)의 사회적 의미를 알아보겠습니다. ○ 관례는 남자들의 성년의식이고, 계례는 여자들의 성인의식이라고 알고 있는데, 관례와 계례는 언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까? ▶ 우리나라의 관례식은 고려말 『주자가례』의 유입과 더불어 사대부 계층에 정착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성인의식과 비슷한 신라시대의 원화(源花)와 화랑(花郞)과 같은 제도가 있었습니다. 또한 고려사에는 광종때 왕자에게 원복례(元服禮)를 행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고려시대에 이미 관례가 행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사대부 집안에서 『주자가례』등의 예서(禮書)에 따라 관례를 치르는 것이 일반화되어 널리 행해졌습니다. 하지만 1894년 갑오경장 이후 단발령이 내려져 두발을 깎게 됨으로써 전통적으로 거행되던 관례도 점차 사라지게 되었습니다.앞서 말씀하셨듯이 관례가 남자들의 성년의식이라면, 계례는 여자들의 성년의식입니다. 여자들의 경우는 15세에 계례를 하는 것이 원칙이고, 15세 이전에 결혼을 하게 되면 결혼하기 전에 날을 정해 계례를 행했습니다. 다만 전통사회에서는 남녀간의 내외법이 엄격해서 남자들은 여자들의 성년의식인 계례를 볼 수 없었습니다.최근들어 성균관을 비롯한 각 대학이나 단체에서 성년의식의 하나로 관례를 치르는 곳이 많아지고 있는데요, 여기서 잠시 관례와 계례의 절차와 사회적 의미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일반적으로 관례는 진행하는 절차상 가례(加禮), 초례(醮禮), 자례(字禮)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가례는 한마디로 관을 씌워주는 예를 말합니다. 남자의 경우 머리를 빗겨 올려 상투를 틀고 세 종류의 관, 즉 치포관, 갓, 유건을 씌워주고 옷을 갈아입히는 예입니다. 여자의 경우 머리에 쪽을 지어 비녀를 꼽는 의식으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러한 의식은 미성년자와 성년을 분리하는 분리의례의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다음으로 초례는 한마디로 술을 맛보는 예를 말합니다. 술로써 예를 행하는 절차로 보시면 되는데 일종의 경과의례 혹은 정화의례에 해당됩니다. 초례를 행할 때 어른이 성인이 되는 사람에게 술을 주고 절을 두 번 하게 되는데, 이는 새로운 지위나 관계, 또는 새로운 질서의 형성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초례는 성인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그리고 자례는 관례를 하는 사람 또는 계례를 하는 사람에게 새로운 이름인 자(字)를 지어 주는 절차로 이는 성인사회로의 합류를 의미하는 통합의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 고전속에서 관례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 중국 유가 5경(五經) 중의 하나인 예기(禮記) 관의(冠義)편에 관례의 중요성을 이야기한 구절이 있습니다. 잠시 소개를 해드리겠습니다.무릇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것은 예의(禮義)이다. 예의의 시작은 용모를 바르게 하고, 안색을 가지런히 하고, 말을 순하게 하는데에 달려 있다. 용모가 바르게 되고, 안색이 가지런하고, 말이 순하게 된 뒤에야 예의가 갖추어져서 군신관계가 바르게 되고 부자가 친하게 되고 어른과 어린 사람이 화목하게 된 뒤라야 예의가 확립된다.그러므로 관례를 한 뒤라야 의복이 갖추어지고, 의복이 갖추어진 뒤라야 용모가 바르게 되고, 안색이 가지런해지고, 말이 순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관례는 예의의 시작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날 성왕들은 관례를 중요하게 여겼다는 구절이 있습니다.그리고 예서(禮書)에 의하면 관례와 계례는 어른으로서의 책임을 일깨우는 예(禮)로써 장차 아들로서 자식의 도리를 다하게 하고, 아우로서 동생의 도리를 다하게 하며 신하로서 신하의 할 일을 다하게 하고 남보다 젊은 사람으로써 젊은이의 도리를 다하게 하려는데 뜻이 있다고 했습니다.그런데 현대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관례의 무용론을 내세우는 이들도 있습니다. 관례라는 것이 한갓 머리모양을 바꾸는 의식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이러한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하지만 관례와 계례의 참 뜻은 머리 모양을 바꾸는 외형적인데에 있지 않고, 어른으로서의 자부와 책무를 일깨우는데 있습니다. 특히 청소년문제가 사회정책적 문제로 부상하고 있는 지금, 남녀 모두가 성년이 되는 나이가 되면 본받고 존경받을 만한 학문과 덕식을 갖춘 어른을 모시고 그 어른의 집례하에 성년의식을 거행함으로써 성년이 되는 남녀에게 성인으로서의 긍지를 갖게 하고 어른으로서의 사회에 대한 책임을 느끼게 해 어엿한 사회인으로 참여하게 하는 것도 한가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그리고 관례를 치르고 나면 달라지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 관례를 치른 이후에는 어린이가 아니고 어른이기 때문에 먼저 대접이 달라집니다. 말씨를 전에는 낮춤말씨 ‘해라’라고 말하지만 관례후에는 보통말씨 ‘하게’로 높여서 말하게 됩니다. 평소에 함부로 부르던 이름도 관례나 계례 때 받은 자(字)나 당호(堂號)를 부르게 됩니다.절도 전에는 어른에게 절하면 어른이 앉아서 받았지만 관례 후에는 답배를 하게 되고, 품삯도 반품에서 온품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관례는 허혼, 즉 결혼을 허락한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서구에서는 성년식을 통해 청소년에게 장차 누릴 권리와 의무를 일깨우는 계기로 삼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날 우리의 권리와 의무에 대한 인식은 지금의 서구에서의 그것과 전혀 다릅니다. 요즘의 청소년들은 어버이에 대한 효도, 스승에 대한 존경, 국가에 대한 충성이 의무가 아니라 어느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권리로 치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전통사회에서는 어버이를 받드는 것은 은혜 때문이고, 스승을 높이는 것은 도를 전해 받았기 때문이라는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비록 이러한 시각차이에서 오늘날 사회가 도를 잃었다는 자탄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최근에는 관례와 같은 옛 전통이 조금씩 되살아나면서 잃어버린 예의 시작이 무엇인지를 되찾자는 자성의 목소리도 덩달아 높아지고 있습니다.예기에서 말했듯이 관례가 예의 시작이었고, 옛날 성군들도 관례를 중요시 한만큼 오늘날을 사는 우리들도 성인의 날을 맞아 관례에 대한 사회적 의미를 새롭게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 2025-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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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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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of 진주 (STORY OF 진주2) 5. TV속 진주 -영화와 드라마에서 진주를 발견하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진주를 발견하다바보상자 속 진주 영화(MOVIE)와 드라마(DRAMA)는 각박한 현대 생활의 탈출구이다. 명절에 친구, 연인들과 찾던 영화관의 추억과 안방극장의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은 드라마는 시간이 지나도 그 영향력을 잃지 않고 있다. 386세대라면 기억하실 것이다. 추석과 명절이면 만날 수 있었던 ‘성룡’과 한때 홍콩 느와르를 주름잡았던 ‘주윤발’은 ‘홍콩영화 폐인’이라는 신조어를 만들기도 했다. 물론 한참 오래전의 일이다.OTT(Over The Top)가 주름잡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플랫폼으로 사용자가 원할 때 방송을 볼 수 있는 일종의 VOD 서비스이다. 물론 영화나 드라마가 주는 추억을 제공하는 서비스는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자유의지에 따라 골라볼 수 있는 새로운 플랫폼이다. 대표적으로 넷플릭스, 디즈니 플러스, 티빙, 애플 TV+, 웨이브 등이 뜨고 있다. 안방극장을 독차지했던 아침드라마와 지상파방송이 타격을 입고 있다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그럼에도 영화와 드라마가 가진 파워는 여전하다. 여행코스를 정할 때 ‘00영화 촬영지’ 또는 ‘00드라마 촬영지’ 등의 인기 명소를 최우선으로 찾아보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격언에 어울리지 않게 ‘맛집 찾기’은 어느새 후 순위로 밀려난 지 오래이다. 이처럼 방송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명소(名所)’로 등극하는 지역이 많아지고 있다. 영화와 드라마 등의 미디어 촬영 장소로 노출된 이후, 지역의 인지도와 방문자 수가 급증하는 사례가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천재적인 두뇌와 자폐 스펙트럼을 동시에 가진 신입 변호사 우영우의 대형 로펌 생존기를 다룬 ENA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우영우 팽나무 에피소드’가 촬영된 창원 동부마을은 30가구, 60여 명이 농사를 지으며 사는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 드라마가 방영된 2022년 하루 평균 1천여 명이 방문하는 유명세를 겪었다. 그리고 ‘우영우 팽나무 가는 길’ 팻말과 우영우를 상징하는 고래벽화가 생기면서 이른바 ‘핫플’로 등극했다. 드라마와 영화가 가진 영향력 덕분에 방송 프로그램 홍보를 위한 예산을 따로 세우는 지방자치단체들이 늘어날 정도였다. ‘드라마와 영화 속에서 자신이 사는 고장을 발견하는 재미’와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일깨우는 동기부여의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역사 도시 진주는 천년의 역사와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그래서 드라마와 영화 촬영지로도 사랑받고 있다. 영화(映畫) 논개(論介) 임진왜란 당시 왜장을 껴안고 의암에서 순국한 의기 논개(義妓 論介)를 다룬 영화는 2편이다. 윤봉춘(尹逢春) 감독의 영화 「論介」는 1956년 개봉했다. 주연은 김삼화(金三和)와 최성호(崔星湖)이다. 당시 영화 포스터를 보면 ‘韓國 最高의 大스펙타클 超巨作’이라는 선전 문구가 눈에 띈다. 그리고 ‘矗石樓의 悲話 倭將을 끼여 않고 죽은 論介의 설음은?’이라는 소개 문구도 보인다. 한국영화주식회사(韓國映畵株式會社)가 제작한 이 영화의 원작(原作)은 유치진(柳致眞, 1905~1974)이다. 출연자로는 성소민, 이해룡, 김승호, 윤상희, 김미선, 고춘반, 조항, 임운학, 김칠성이다. 한국영상자료원(KOFA)의 한국 영화 데이터 베이스에서 열람할 수 있다. 이형표 감독의 영화 「논개」는 1972년 개봉했다. 주연은 김지미, 신성일, 최불암이다. 주연 배우로는 김지미, 신성일, 최불암을 비롯해 김성원, 오경아, 주증녀, 박암, 신일룡, 박옥초, 최삼, 문태선, 박혜숙, 손전, 이예성, 조덕성, 정미경, 이연숙, 연운경, 김월성, 한명환, 노사강, 김경오, 추봉, 박일, 장인한, 김승남, 임동훈, 박달, 박양미, 전숙, 최석, 박부양, 이운규, 이영우, 박상진, 하옥진, 최용해 등이다. 영화 「살인의 추억」과 죽봉터널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은 한국 영화사에 큰 족적을 남긴 작품 중의 하나이다. 2003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경기도 화성 연쇄 부녀자 살인 사건을 다루었다. 뛰어난 연출과 배우들의 열연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은 이 영화는 개봉 이후 많은 찬사를 받으며 한국 영화의 새로운 기준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았다. “밥은 먹고 다니냐?”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어둠이 잔뜩 내려앉은 터널로 걸어가는 용의자 박현규(박해일 분)에게 박두만(송강호 분)이 던진 대사이지만 영화 전반을 이끌어 가는 핵심적인 질문이기도 했다. 미제사건의 비극과 경찰 조직의 한계를 한꺼번에 보여주는 대목이다.봉준호 감독은 어둠으로 가득한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아 ‘사건이 암흑 터널처럼 해결하기 쉽지 않다는 느낌’을 줄 수 있어 촬영지로 선택했다고 한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촬영된 곳은 바로 진주시 정촌면 화개길 194번지 121에 있는 ‘죽봉터널’이다. 죽봉터널 앞에는 ‘위험장소(투시불량)’이라는 안내판만 덩그러니 붙어 있다. 한국 영화사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영화 「살인의 추억」 촬영지인 진주 죽봉터널에 대한 안내문은 찾아보기 어렵다. 아쉬운 대목이다. 영화 「진주의 진주」와 삼각지 다방 김록경 감독의 독립영화 「진주의 진주」는 철거 예정인 삼각지 다방이라는 문화공간을 지키고 싶은 예술가와 돈을 벌어야 하는 다방 주인과의 갈등을 다룬 영화이다. 주인공의 이름 역시 진주이다. 진주(晋州)라는 공간에 대한 애정이 묻어 있는 영화로 주연에는 이지현, 문선용, 임호준, 이정은 등의 배우가 출연했다.「진주의 진주」의 촬영지는 진주(晋州)이다. 영화에는 오죽광장(진주시 봉곡동)과 진주역(晋州驛) 등 다양한 진주의 명소가 등장한다. 그중에 진주 ‘삼각지 다방’은 진주 지역 문화예술인들이 60여 년간 즐겨 찾는 만남의 장이자, 사랑방으로 이용되었던 실제 공간이다. 김록경감독은 ‘레트로가 유행하지만 정작 오래된 공간은 사라지고 있는 현실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영화’라고 밝혔다. 2024년 개봉했다. TVN 드라마 「철인왕후」와 지신정(止愼亭) ‘조선 중전 영혼 가출 스캔들’이라는 부제가 붙은 「철인왕후」는 불의의 사고로 대한민국 대표 허세남 영혼이 깃들어 ‘저 세상 텐션’을 갖게 된 중전 김소용(신혜선 분)과 두 얼굴의 임금인 철종(김정현 분) 사이에서 벌어지는 영혼 가출 스캔들을 다룬 드라마이다.「철인왕후」에서 철종의 별장으로 등장한 곳이 바로 ‘지신정(止愼亭)’이다. 드라마에서 철종이 중전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 앞으로 지신정(止愼亭)이라는 현판이 보인다. 지신정(止愼亭)은 허준(許駿, 1844~1932)의 호(號)이자, 만년에 기거한 곳이다. 허준 선생은 수많은 재산을 자식들에게 물려 주지 않고 친지들과 빈민들에게 나누었다. 그중 일부를 출연해 의연기구인 ‘허씨의장’을 만들었다. 『진양속지 증보』에 기록된 지신정(止愼亭)과 관련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주의 동쪽 지수면 승산촌의 목양산(木陽山) 아래 신독곡(愼獨谷)에 있는데, 승선(承宣) 허준(許駿)이 짓고 연재(淵齋) 송병준(宋秉濬)이 명명한 집이다.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가 기문을 지었다.’철인왕후에서는 지신정과 함께 진주 비단이 소재로 등장하기도 했다. 철인왕후는 20부작으로 2020년 12월 12일부터 2021년 12월 14일까지 방송되었다. SBS 드라마 「더 킹 : 영원의 군주」와 문산성당(文山聖堂) 「더 킹 : 영원의 군주」는 악마에 맞서 차원의 문(門)을 닫으려는 이과(理科)형 대한제국 황제 이곤(이민호)가 주인공이다. 그리고 문과(文科)형 대한민국 형사 정태이 두 세계를 넘나드는 공조를 그린 로맨스 드라마이다. 이곤 역에 이민호, 정태을 역에 김고은이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더 킹 : 영원의 군주」에서 주인공인 이곤이 정태을에게 부모님의 러브스토리를 들려 주며 함께 거니는 배경으로 나온 공간이 바로 문산성당(文山聖堂)이다. 문산성당은 진주시 문산읍 소문리에 있는 성당이다. 1899년 진주 최초의 성당으로 진주 본당 이외에 24개의 공소 중에 소촌 공소가 1905년 소촌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뒤에 지금의 문산성당이 되었다.문산성당의 교회당과 강당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있어 지방에서 활동한 외국인 선교사들의 실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건물이다. 특히, 현재 강당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은 한옥 성당 건물로서, 한국 성당 건축 양식의 변화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더 킹 : 영원의 군주는 16부작으로 2020년 4월 17일~6월 12일까지 방영되었다. TVN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와 촉석루(矗石樓)·진양호(晋陽湖) 「60일 지정생존자」는 미국 드라마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대통령을 잃은 나라에서 유일하게 살아 남은 한 사람의 60일간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이다. 갑작스러운 국회의사당 폭탄 테러로 대통령을 잃은 대한민국에서 환경부 장관 박무진이 60일간의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지정되면서 테러의 배후를 찾아내고 가족과 나라를 지키며 성장하는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이다. 박무진 역의 지진희를 비롯해 허준호, 배종옥, 이준혁, 강한나 등의 스타들이 출연했다.「60일 지정생존자」에서 박무진 대통령 권한대행이 자신을 통수권자로 인정하지 않고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정보를 접수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관문(최재성 역) 합참의장을 찾아간다. 박무진 대통령 권한대행과 이관문 합참의장이 만난 곳이 바로 촉석루(矗石樓)이다. 그리고 이관문 합참의장에게서 쿠데타를 막겠다는 답변을 듣지 못한 박무진 권한대행이 “잠깐 쉬었다 가죠”라는 말과 함께 석양이 지는 진양호(晋陽湖)를 바라보며 회상에 잠기는 모습이 방영되었다.진주의 촉석루(矗石樓)는 진주성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며 진양호(晋陽湖)는 수려한 자연경관을 자랑하며, 진주와 서부경남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진주 8경의 하나인 진양호 노을과 석양으로 유명하다.「60일 지정생존자」는 16부작으로 2019년 7월 1일~8월 20일까지 방영되었다. KBS2 드라마 「징크스의 연인」과 논개시장(論介市場) 드라마 「징크스의 연인」은 세상 모든 것이 불행한 자신의 삶을 숙명으로 여기고 순응하며 사는 한 인간 남자와 저주를 풀기 위해 미지의 세상 밖으로 뛰어든 여신이 잔혹한 운명을 뛰어넘으며 펼치는 판타지 로맨스 드라마이다. 서현, 나인우, 전광렬, 윤지혜, 기도훈 등이 출연했다.진주 올로케이션이었던 「징크스의 연인」은 진주 논개시장을 주 무대로 남가람공원, 국립진주박물관 등의 관광명소와 진주시 곳곳을 카메라에 담았다. 더불어 진주 출신 배우와 아역 보조 출연자의 출연으로 연기지망생들에게 기회의 장이 되기도 했다. 진주 논개시장은 중앙시장 중앙길의 커다란 시계를 기준으로 왼쪽에 형성된 시장이다.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올뺨 야시장은 매주 2천명의 관광객이 방문할 만큼 문전성시를 이룬다. 진주논개제와 진주문화유산 야행 등의 행사와 연계해 진주의 새로운 명소가 되고 있다.남가람공원은 남강 바로 옆 대나무 숲길에 조성되어 있다. 울창한 대나무 숲이 장관이며, 조명의 안내를 따라 남가람 별빛 길을 걸으면 대나무 숲의 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도심속 휴식공간으로 최적의 공간이다.드라마 「징크스의 연인」은 16부작으로 2022년 6월 15일~8월 4일까지 방영되었다. TVN 드라마 「위대한 쇼」와 비단길 청년몰·목공예전수관·진주냉면 「위대한 쇼」는 전 국회의원 위대한이 국회 재입성을 위해 문제투성이 사남매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이다. 위대한 역에 송승헌, 이선빈, 임주환 등이 출연했다. 「위대한 쇼」의 진주 촬영지는 진주중앙시장 비단길 청년몰에서 시작된다. 비단길 청년몰은 열정과 도전정신을 가진 청년 상인들과 전통시장 활성화를 위해 2018년 12월 개장했다. 다음 촬영지는 진주목공예전수관이다. 진주 목공예의 우수성을 널리 알림과 동시에 일상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제품을 직접 만들고 체험하는 공간이자, 진주 목공예를 계승·발전시켜 나가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진주는 예로부터 소목장 등 전통 목공예가 다양한 형태로 전승되고 있는 곳이다. 상, 장, 농 등의 가구와 궁궐에서 사용하는 함과 같은 가구류를 궁궐에 진상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3대 냉면의 하나인 진주냉면(晋州冷麪)도 소개되었다. 「위대한 쇼」는 16부작으로 2019년 8월 26일~10월 15일까지 방영되었다. MBC드라마 「연인」과 진주역차량정비고 드라마 「연인」은 병자호란을 겪으며 엇갈리는 연인들의 사랑과 백성들의 생명력을 다룬 휴먼역사 멜로 드라마이다. 주인공인 이장현 역의 남궁민과 유길채 역의 안은진이 출연했다.백상예술대상 드라마 작품상을 수상한 「연인」은 극중에서 한복전이 열린다. 이 한복전이 개최된 공간이 바로 진주의 ‘진주역 차량정비고’이다. 진주역차량정비고는 일제강점기인 1925년 진주역과 함께 건립되었다. 원래 명칭은 ‘진주역 기관구’로 2005년 국가등록문화재 제202호로 지정되었다. 진주역차량정비고에는 한국전쟁 당시 총탄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산 역사의 현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현재는 진주철도문화공원의 핵심 공간으로 많은 행사가 개최되고 있다.드라마 「연인」은 21부작으로 2023년 8월 4일~11월 18일까지 방영되었다. 진주는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 이외에도 각종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전국으로 소개되었다. 대표적인 프로그램으로 「김영철의 동네 한바퀴」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 「박종인의 땅의 역사」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 등이 있다. KBS1 교양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 한바퀴」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는 속도의 시대에 잃어버리고 살았던 동네의 숨은 매력을 재발견하면서 팍팍한 삶에 따뜻한 위안을 전하는 도시 기행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다. 김영철의 동네 한바퀴에 진주가 소개된 것은 2020년. ‘보배롭다, 그 이름 –경남 진주’라는 프로그램명으로 방송되었다.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는 진주의 여러 곳을 소개했다. 진주상공회의소의 전신인 ‘상무사(商務社)’와 진주를 대표하는 음식인 ‘진주육회비빔밥’, 진주 중앙시장의 한복공방, ‘촉석루와 의기논개’, 은장도 공방 ‘쇠모루’와 사라지지 않아 아름다운 진양호와 수몰마을의 마지막 주민과의 만남도 가졌다.상무사는 1895년(고종 3) 보부상 등 과거의 상업조직을 정비해 새로 설치한 상업기관으로 진주상공회의소의 전신이다. 상무사 건물은 건축물로는 충청남도 예덕상무사와 더불어 조선시대 관아 건축의 전형적인 평면구성을 볼 수 있는 드문 사례이다. 현판을 통해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를 전후한 보부상의 활동상황과 진주지역의 경제활동상황을 볼 수 있어 경제사적인 의미가 크다. 현재 진주시 옥봉길15번길 5에 있다. 진주 실크의 명성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바로 진주 중앙시장의 한복 공방들이다. 진주 비단으로 한복을 지어 입는 사람들은 모두 중앙시장 한복 공방을 찾았다. 지금도 한복 공방은 진주 비단의 역사를 이어가려 애쓰는 공간으로 남아 있다. TV조선 교양프로그램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은 식객 허영만이 소박한 동네 밥상에서 진정한 맛의 의미와 가치를 찾는 교양 프로그램이다.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에 소개된 진주음식은 진주비빔밥의 대명사인 ‘제일식당’, 못생겼지만 별미인 아귀 수육과 복국 맛집인 ‘하동집’, 흑돼지 갈비 수육으로 유명한 ‘산청흑돼지’, 별미 거지탕 ‘평양빈대떡’, 국밥의 일인자 ‘송가네 국밥’ 등이다. TV조선 교양프로그램 「박종인의 땅의 역사」 「박종인의 땅의 역사」는 날 것 그대로의 역사를 기반으로 땅에 남아 있는 역사 흔적을 파헤쳐 보고 의심과 뒤집어보기를 통해 우리가 몰랐던 우리의 역사를 앞뒤 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알아보는 프로그램이다.박종인의 땅의 역사에서는 ‘진주, 그 사람들이 사는 법(64회)’ ‘지워진 이름, 잊힌 기억 민초들의 땅, 진주(12회)’이 방송되었다. ‘진주, 그 사람들이 사는 법(64회)’에서는 남강과 의기 논개를 비롯한 진주역사를 써 내려간 진주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지워진 이름, 잊힌 기억 민초들의 땅, 진주’에서는 ‘남강이 피로 물들던 날, 선조는 도주 중이었다, 태평회맹도의 비밀과 진주성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KBS 교양프로그램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는 인생 후반전을 준비하는 싱글 여배우와 여가수들이 같이 모여 살면서 인생의 새로운 맛을 찾아가는 교양 프로그램이다.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 15화에 ‘가수 혜은이의 61년 전 추억의 장소’편이 방송되었다. 혜은이는 61년 전 추억이 담긴 진주의 ‘진주성 촉석루’와 ‘의암’을 찾아서 자신의 사연을 소개했다. 영화나 드라마가 화제가 되면 ‘촬영지’는 SNS의 핫 게시물로 떠오른다. 저마다 촬영지를 방문하고 인증 샷을 올리면 이른바 명소로서의 인지도 역시 증가한다. 진주는 영화와 드라마,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진주의 가치’를 알리고 있다. 영화나 드라마, 방송프로그램 속에 소개된 진주의 명소를 알리기 위한 노력도 필요해 보인다.
- 2025-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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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황경규/진주향당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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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193

피플&스토리 (진주사람) 5. 기업가(企業家) 박종실(朴鍾實) - 무소유의 나눔과 실천
기업가(企業家) 박종실(朴鍾實) 무소유의 나눔과 실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기업가(企業家) 박종실(朴鍾實, 1920~2002). 부와 권력,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해야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는 도덕성과 실천력을 두루 겸비한 진주사람이다. 기업의 사회환원이 실종됐다는 사회 일각의 비판이 비등하는 오늘날,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그의 고향 진주에 내어주고 떠났다.회고해 보면, 그는 분명 성공한 기업가이다. 일면을 보면 지역경제활성화에도 큰 기여를 했고, 지역사회발전이라는 측면에서도 그의 공적은 어느 누구와 견주어도 결코 녹록치 않다. 기업가로서 어쩌면 당연한 행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업가 박종실의 삶이 환히 빛날 수 있었던 건, 지역사회의 공공이익을 위한 헌신적인 삶이 있었기 때문이다. 재단법인 진주산업대학교 종실연구장학재단 설립에 이어 진주사람들에게 ‘병상(病床)의 나눔, 아름다운 팔순(八旬)’으로 기억되는 재산의 사회환원. 그는 떠나면서 그의 재산 모두를 진주의 인재육성에 기부했다. ‘평생 모은 재산을 의미있게 쓰겠다’는 평소 그의 신념은 바로 실천으로 이어졌다.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실천되는 순간이었다.기업가 박종실이 걸어 온 길은 곧 지역 운송업의 역사이기도 하다. 1920년 진주에서 태어나 진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1942년)한 박종실은, 삼가금융조합의 서기로 근무하다가 1946년 조선화폐자동차에 근무하게 된다. 경전여객자동차(주) 전무이사를 역임한 그는 대한통운(주) 진주지점장에 이어 1969년 경전여객자동차(주) 대표이사와 뉴종로관광호텔 대표에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기업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지역사회에 대한 공헌에도 기여한 그는 모교의 축구부 후원회장을 맡으면서 전국대회 우승을 이끌었고, 중안초등학교 악대부 창설에 이은 전국대회 우승, 그리고 춘추회 회장을 맡으며 동문화합을 이끌어내는 산파역을 해냈다. 기업가로서 성공한 그는 70세 되던 해인 1990년 재단법인 진주산업대학교 종실연구장학재단을 설립하면서 지역인재 육성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11년이 지난 2001년 병상에서 투병중이던 그는 공시지가 26억 5,000만원에 이르는 그의 재산을 재단에 기부했다. 그가 바란 것은 오로지 모교의 발전과 지역발전, 그리고 인재육성이었다.그의 모교인 경남과학기술대학교는 그의 뜻을 기리는 의미에서 학생회관의 이름을 ‘종실회관(鍾實會館)’으로 정했다. 벽지와 도시를 연결하다 기업가 박종실은 1920년 1월, 진주에서 태어났다. 향년 82세를 일기로 타계하기 까지 그의 삶은 오로지 진주의 경제발전과 인재육성에 집중됐다. 그는 1941년 2월 진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한 뒤, 우수한 학업성적으로 이듬해 삼가금융조합 서기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디게 된다. 당시만 해도 진주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산촌지역으로 변변한 사회기반시설이라고 할만한 것도 없는 깡촌에 불과했다.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한 그는 지역경제를 살리는 일이 급무(急務)임을 깨닫고 가슴속 깊이 담아 두었다.1946년 조선화폐자동자(주) 경리주임을 역임하면서 마침내 낙후된 지역경제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실천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당시 운송업에 종사했던 그의 주 관심사는 효율적인 진주시의 운송체계를 확립하는 일이었다. 1951년 버스업체인 경전여객자동차(주) 전무이사를 맡으면서 그의 꿈은 점점 현실화되기 시작했고, 1958년 대한통운(주) 진주지점장을 역임하면서 진주시의 물류체계와 운송의 효율성을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에 자신감을 갖게 된다.그의 이러한 신념은 1969년 경전여객 대표이사를 맡은 뒤 본격적인 기업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현실화되었다. 그는 우선 벽지와 도시를 연결하는 대중교통 노선을 개발에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도농(都農)간의 격차 해소가 곧 지역발전과 연계된다는 그의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경영진들은 이러한 벽지노선 개발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벽지노선을 개발하고 운행을 하게 되면 ‘남는게 적다’는 이유로 격렬하게 반대했다. 이익을 우선하는 기업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운수업은 이익보다 승객들의 불편을 덜어 주는게 가장 중요하다’며 경영진의 반대를 일축했다.이러한 그의 기업이념은 진주시의 교통사(交通史)에 있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고, 그것은 곧바로 기업가로서의 성공을 담보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기업가 박종실은 진주에서 성장해 나갔다.그가 1976년부터 운영했던 뉴종로호텔은 지역에 대한 그의 애정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진주를 찾는 사람들에게 편리한 숙식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자했던 많은 외국인들에게 아늑한 쉼터가 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눈에 띄는 서비스와 애향심의 발로는 곧바로 기업의 성공의 바로미터가 되었다.그에게 기업은 곧 지역경제발전이라는 등식으로 연결됐다. 그러기에 그는 진주에서 가업(家業)을 이룬 기업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종실연구장학재단 설립 기업가 박종실의 꿈은 기업가답게 지역의 경제를 발전시키는 일이었다. 그의 꿈은 일흔 살이던 1990년까지 현재진행형이었다. 그는 삶의 거의 모두를 기업을 일으키는 일과 가업을 지켜나가는 일, 그리고 ‘먹고 살기 힘든 시대의 탈출’에 쏟아 부었다. 그런 그의 꿈과 희망은 결실을 보고 있었다.고희(古稀)의 기업가 박종실은 새로운 삶의 도전을 시작했다. 그것은 지역의 인재육성이라는 새로운 꿈이었다. 그는 남다른 모교사랑을 바탕으로 후배사랑과 지역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1990년 1억원을 출연하여 진주산업대학교에 ‘종실연구장학재단’을 설립했다.재단에서는 가정형편이 어렵지만 타의 모범이 되는 후배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그들이 묵묵히 걷고 있는 면학(勉學)의 길에 힘을 보태주었다. 그리고 교육연구발전을 위해 교수들에게 연구비를 지급했다.기업가 박종실은 ‘좋은 교육을 받고 열심히 공부하는 인재가 국가발전의 초석’이라는 명제를 몸소 실천한 것이었다.후배들 역시 모교발전과 후배들의 학업증진을 위해 사재를 출연해 만든 박종실 동문을 추모하는 모임인 ‘혜봉회’를 만들어 선․후배간의 나눔의 전통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당시 종실장학금의 수혜를 받은 많은 학생들이 현재 사회 각계에서 국가발전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신념과 선택은 분명 옳았음이 증명되고 있는 셈이다.동문화합을 위한 그의 공헌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진농․진산대의 원로 모임인 춘추회 회장을 10여년간 역임했다. 춘추회는 모교에 대한 헌신적 봉사로 동문화합은 물론 대학의 발전을 위한 다양한 일들을 추진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종실연구장학재단의 설립은 기업가 박종실이 기업의 사회환원이라는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는 첫걸음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결정한다. 병상(病床)의 나눔, 아름다운 팔순(八旬) 팔순의 박종실은 병마와 싸우고 있었다. 병상(病床)에 누운 그는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평생 모은 재산을 의미있게 쓰고 싶다”외아들인 영환을 비롯한 자녀들은 아버지의 뜻에 따른다. 단 한마디의 이의제기도 없었다. 기업가 박종실은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진주시 장대동 소재 토지 464평을 재단에 기부했다. 시가(時價)가 무려 26억 5,000만원에 이르는 알짜배기 땅이었다.이 땅은 진주시내의 단독주택 한 채를 제외하고 그가 소유했던 유일한 재산이었다.‘재학생중에 부모님이 땔감을 팔아서 학비를 마련하는 것을 보고는 가슴이 아팠다’는 그는 이번 기부가 ‘모교와 사회에 대한 마지막 봉사라고 생각하고 기증을 결심했다’고 담담히 말했다. 2001년 11월 당시 정해주 총장에게 기증의사를 밝힌 뒤 그는 다음달 바로 병원에 입원을 했다. 기업가 박종실의 아름다운 기부가 알려지자 곧바로 언론에서는 지방과 중앙을 가리지 않고 대서특필을 했다. 그리고 그의 기부를 이렇게 평가했다.‘병상(病床)의 나눔, 아름다운 팔순(八旬)’평생을 운수업과 호텔업에 종사했고, 모교를 졸업한지 50년 되던 해에 종실연구장학재단을 설립한 그는, 자신이 몸을 누일 집 한 채를 제외하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사회에 기부한 것이다.‘모교와 후배사랑의 평소 소신을 실천으로 옮겼을 뿐’이라는 겸손한 인터뷰는 곧장 기업의 사회환원이라는 의제로 옮겨져 지역사회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점검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경남과학기술대학교는 그의 뜻을 받들어 장학사업과 교직원 연구지원에 활용하겠다고 약속한데 이어 학생회관의 명칭을 ‘종실회관’으로 명명(命名)해 선후배간의 새로운 나눔의 전통을 만들기도 했다.기업가 박종실의 아름다운 기부는 지역대학발전과 지역주민의 교육열 향상이라는 원동력이 될 뿐만 아니라, 크게는 국가의 교육발전과 인재양성을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교훈적인 일이다.지역의 관점에서 보면, 한 개인이 자신이 가진 전 재산을 지역을 위해 쾌척한다는 일은 분명 쉽지 않고 전례가 드문 일이었다. 그의 이러한 아름다운 뜻은 전국의 신문과 방송으로 전파되어 국민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었고, 기업의 사회환원 붐을 조성하는 계기로 자리잡기도 했다.이렇게 기업가 박종실의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기부는 진주의 명예를 전국에 드높이는 소중한 진주의 한 역사가 되었다. 지역사회에 남긴 흔적 기업가 박종실은 지역사회의 다양한 분야에도 그 흔적을 남겨 두었다. 생전에 1남5녀를 둔 그는 평소 검소하고 절제된 생활로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그리고 운송업과 호텔업에 종사하면서 지역경제발전과 교육에 헌신적인 열정을 쏟았다.그런 그의 가슴 한 켠에 머물고 있던 또 하나의 관심은 학교발전을 위한 작은 밑거름을 뿌리는 일이었다.1960년대 모교인 진주농림고등학교의 축구발전을 위해 후원회 회장을 흔쾌히 맡으면서 후원자로서의 그의 활동은 시작됐다. 당시 축구부는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모교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대회를 치르고 있었다. 그는 축구부의 이러한 헌신에 주목했다.그가 축구부 후원회장을 맡으면서 축구부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곧바로 좋은 성적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적극적인 후원의 결과는 1965년 전국 고등학교축구선수권대회 우승이라는 보답으로 돌아왔다.당시의 우승은 축구의 도시인 진주의 명성을 잇는 쾌거이자, 향후 진주가 전국의 축구대회 최강자로 등장하게 되는 물꼬를 여는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이다.지역사회에 대한 그의 헌신적인 봉사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진농․진산대 원로 동문 모임인 ‘춘추회’ 회장직을 맡게 된다. 춘추회는 모교의 발전을 위한 다양한 기획을 생산해 내고 실천하는 모임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남다른 열정과 물심양면의 지원아래 춘추회는 학교라는 작은 사회의 화합과 발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역주민의 화합과 다양한 분야의 발전이라는 시너지 효과를 거두게 된다.지역사회에 대한 그의 헌신적 봉사와 지원은 다양한 결과로 나타났다. 그는 진주중안초등학교 악대부 창설에 기여를 했다. 당시 불모지였던 초등학교 악대부의 창설은 단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중안초등학교 악대부는 그의 지원 아래 1995년 전국 아동음악경연대회 우승을 거머쥐게 된다.그리고 이듬해인 1996년에는 조계종 전 종정인 청담스님 선시시비건립추진 운동이 시작되자, 곧바로 추진위원장을 자임했고 경남과학기술대학교 관내에 청담대선사 선시비를 건립하기에 이른다.‘지역을 자산으로 성장한 기업은 반드시 지역을 위해 기여해야 한다’는 명제에 한 치 어긋남이 없었던 그의 행적은 분명 기업인들의 모범이 될 만하다. 그래서 그의 지역사회에 대한 헌신적인 봉사는 더욱 값지게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경제계의 큰 별이 지다 기업가 박종실은 8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는 1960년대 대륙공업사, 경전여객 등을 창업해 진주의 운수업을 이끌었고, 1970년대에는 호텔 경영 등을 적지 않은 재산을 모았다. 하지만 그는 그가 평생 모은 재산을 종실연구장학재단에 기부했다. 세상을 떠날 때 그의 곁에는 다 헤어진 점퍼와 구두 그리고 자전거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모교인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학생들은 모교 소식지에 그를 추모하는 글을 실었다. 그의 후배들은 그의 삶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숭고(崇高)한 삶을 사셨습니다.’ 무소유의 삶을 실천한 기업가 박종실에게는 최고의 찬사였다. 검소한 삶을 실천한 기업가 박종실. 그는 주로 점퍼와 운동화 차림으로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업무처리를 위해 타지(他地)에 갈 일이 아니면, 자동차를 일체 이용하지도 않았다. 그가 타계한 뒤 그의 가족들은 낡은 구두를 그의 곁에 두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어렵게 공부했던 한(恨)을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는 그는 종실연구장학재단을 만들어 후배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그리고 건강이 나빠지면서 마지막 재산을 뜻깊게 쓰고 싶다’던 그는 가족들의 동의하에 자신의 전 재산을 모교 후배들에게 쾌척을 했다.그런 그가 평생을 살면서 가장 즐거웠던 일은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이 보낸 편지를 읽을 때였다고 한다. 그리고 시간을 내어서 매년 한 두차례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과 식사를 하면서 격려하는 시간이 행복했다고 한다.기업가 박종실은 임종을 앞두고 유언을 남겼다.‘조의금을 일체 받지 말고 가족장으로 조용히 장례를 치러달라.’당시 정해주 총장이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학교장으로 치러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그는 간절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고 2002년 1월 25일 기업가 박종실의 장례는 학교장으로 치러졌다.평생동안 그의 마음속의 고향이었던 모교에서 치러진 장례식은 개교 92주년을 맞은 경남과학기술대학교 최초의 학교장이었다. 당시 정해주 총장은 “당신은 돌아가시면서도 지방대학의 열악한 재정을 염려하셨다”고 회고했다.무소유의 삶을 실천한 기업가 박종실. 그는 성공한 기업가이자,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몸소 보여준 실천적 기업가이다. 진주시는 지역사회와와 지역인재 육성, 지역경제분야, 공익사업분야, 사회위생분야 등에 그의 공적을 높이 기려 2002년 제2회 진주시민상 수상자로 선정했다.기업의 사회환원과 지역사회에 대한 기여가 어떤 것인지를 몸소 보여주고 실천한 기업가 박종실이 진주시민상을 받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학․경력1941. 2 진주공립농업학교 졸업(5년제)1942. 4 삼가금융조합 서기1946. 9 조선화폐자동차(주) 경리주임1951. 10 경전여객자동차(주)전무이사1958. 11 대한통운(주) 진주지점장1969. 8 경전여객자동차(주)대표이사1976. 3 뉴종로관광호텔 대표1990 4 재단법인 진주산업대학교 종실연구장학재단 설립1990. 5 진농춘추회 회장2001. 12 대지증여(3필지 464평 공시지가 26억5,000만원)2002. 1 별세
- 2025-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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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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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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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향기 간서치(feat. 책 빌리는 예의)
‘간서치(看書癡)’○ 오늘 고전산책은 어떤 내용입니까? ▶ 조선시대 선비인 이덕무(李德懋)를 가리켜 ‘간서치(看書癡)’라고 불렀습니다. 간서치란 ‘책 읽는 바보’ 쯤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오늘 고전산책에서는 조선시대 선비 이덕무의 책읽기에 대한 그의 생각과 사상을 알아보겠습니다. ○ 조선시대에 서파(庶派)로 분류되면 벼슬길에 나가기 어려운 신분인 것으로 아는데요? ▶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시대에 서파(庶派)로 분류된 사람은 벼슬길에 나갈 수 없었습니다. 서파라는 것은 즉 직계를 거슬러 올라가 한 명이라도 서자가 있으면 자동적으로 그 후손이 서파로 분류되는 것을 말합니다.그리고 조선시대에 서파라는 것은 관료로서의 출세 길이 막힌다는 것과 사회적 차별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덕무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내하고 단정한 길을 걷게 됩니다. 이덕무 역시 과거공부를 하고 증광초시(增廣初試)에 합격하지만, 이것은 그의 생애에 어떤 의미를 갖는 사건은 되지 못합니다. 서파로서 사회적 차별을 견뎌야 하는 그의 심정은 ‘관독일기(觀讀日記)’라는 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밤에 희미한 달빛이 은은히 비치고, 풀 벌레의 울음소리가 시끄럽더니 이내 또록또록 들린다. 등불은 가물가물하는데 말없이 홀로 오똑 앉아 있노라니 강개한 감정이 겹겹이 생겨나고 까닭없는 슬픔이 밀려온다. 아마도 가을의 기운이 장부의 뻣뻣한 창자를 단련시키려고 하여 이런 것인가 보다’ 이덕무는 정식으로 직업이 없었습니다. 정식직업이라 부를만한 건 39세 되던 해 얻은 규장각 검서관 자리였습니다. 그런 이덕무가 평생 할 수 있었던 일은 책을 읽는 것 뿐이었습니다. ○ 반쪽짜리 양반에게 있어 독서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 사실 반쪽짜리 양반인 이덕무에게 있어서 책 읽기란 모순이었습니다. ‘책을 읽으면 선비이고, 벼슬을 하면 대부’라는 말이 있듯이 조선이란 사회의 맥락에서 독서란 곧 관료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입니다.하지만 이덕무의 독서는 그것이 아예 불가능했습니다. 여기에서 오로지 지적행위로서의 독서가 생겨납니다. 다른 목적을 갖지 않는 순수한 책읽기 자체에만 몰두했던 것입니다.이덕무는 소위 책을 읽지 않는 양반들의 행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늘 예나 지금이나 인가의 자제들이 밀랍을 먹인 종이로 바른 창문에 화려하고 높은 책상을 두고, 그 옆에 비단으로 장정한 서책들을 빽빽하게 진열해 놓고서, 자신은 머리에 복건을 쓰고 흰 담요위에 비스듬히 누운 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야기를 지껄이고 기침이나 캉캉 뱉다가 한 해가 다 가도록 한 글자도 읽지 않는 것이 가장 유감스럽다’ 그러면서 이덕무는 맹자와 양웅의 이야기를 인용합니다.‘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고 지낼 뿐 만약 가르침이 없으면 금수에 가깝다’는 맹자와 말과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비록 걱정거리가 없다 한들, 금수가 될 것이다’는 양웅의 말을 인용하면서 맹자의 가르침과 양웅의 배움이 바로 독서라고 말합니다.즉 독서를 하지 않으면 아무리 부귀할지라도 그는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덕무에게 있어서 독서는 곧 인간이 되는 길이었던 것입니다. ○ 이덕무를 책 읽는 바보, 즉 간서치라고 부르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 이덕무는 독서에 골몰하는 자신을 가리켜 간서치, 곧 책읽는 바보라고 불렀습니다.그가 초년에 쓴 간서치전(看書癡傳)을 보면 이덕무를 왜 간서치라고 부르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남산 아래 바보가 살았다. 눌변이라 말을 잘하지 못했고, 성격이 졸렬하여 세상을 알지 못했고, 바둑이나 장기 따위는 더더욱 몰랐다. 오직 책 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아 추위도 더위도 주림도 아픈 줄도 몰랐다. 글을 막 배웠을때부터 스물 한 살이 될 때까지 하루도 손에서 옛글을 놓은 적이 없었다. 예전에 보지 못한 책을 보게 되면 기뻐 웃으니 집안사람들은 그가 웃는 것을 보고는 곧 그가 기이한 책을 구한 것을 알곤 하였다. 사람들이 그를 간서치라 해도 그냥 기쁘게 받아들일 뿐이었다’ 읽을 책이 없을 때는 장부나 달력 보기를 마다하지 않았다는 이덕무는 가난했기 때문에 책을 살 돈이 없었고 책을 빌리고 베끼는 것이 책탐을 푸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덕무에게 가장 비판을 많이 받았던 사람은 책을 빌려주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세정석담(歲精惜談)이라는 글에서 이덕무는 스스로 책을 읽지 않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짓이고 자신이 읽지 않으면서도 남에게 빌려 주지 않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이라고 규정짓고 있습니다. ○ 이덕무만의 책 빌리는 예의가 있다구요? ▶ 이덕무는 그의 책 사소절에서 책을 빌리는 예의에 대해 한바탕 설교를 늘어놓습니다. 먼저 그는 ‘남에게 책을 빌려주어서 그 사람의 뜻과 사업을 키워주는 것은, 남에게 돈과 재물을 주어서 그 곤궁과 굶주림을 구제해 주는 것과 같다’라고 했습니다.그리고 주인이 허락하지 않을 경우, 억지로 빼앗아 소매속에 넣고 일어나서는 안되며 남의 책을 빌리면 기한내에 돌려 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 빌린 책을 돌려주지 않고 다시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어서는 안되며 빌려준 사람에게는 반드시 보답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덕무는 그의 나이 서른 아홉살에 규장각 검서관이 되었습니다. 검서관은 규장각에서 출판하는 모든 책을 교정하는 직을 말합니다. 이렇게 책벌레 이덕무는 자신의 소원대로 책을 읽는 직업을 갖게 되었고, 1793년 그가 사망하는 해까지 규장각을 벗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이덕무가 살던 때와 달리 지금은 책이 범람하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독서하는 교양층은 점점 얇아지고 인문서는 팔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고 지낼 뿐 만약 가르침이 없으면 금수에 가깝다’는 맹자의 말씀을 다시 한 번 기억할 필요가 있는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 2025-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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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황경규/진주향당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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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165

주간 브리핑 (주간브리핑) 2. 진주에서 안 만드는 진주 진맥(feat.진주시상권활성화재단)
진주에서 안 만드는 '진주 진맥'(feat. 진주시상권활성화재단) ‘진주(晋州)에서 안 만드는 진주 진맥’진주시상권활성화재단이 추진하는 ‘진주 진맥 지역특화상품 개발 및 브루어리 조성사업’ 이야기이다. 목표는 거창하다. ‘앉은뱅이밀을 활용한 지역 특화 수제 맥주를 개발해 팝업스토어 개최, 올뺨야시장 판매와 더불어 중앙상권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브루어리를 조성한다.’ 참으로 바람직한 목표이기는 하다. 근데 실상은 전혀 딴 판이다. ‘껍데기만 진주 맥주’라는 말이다. 일단 진주에서 진주 맥주를 거의 만들지 않는다. 일설에 의하면 대부분 부산에서 만든 맥주를 가져다 팔고 있다. 진맥은 캔맥주로 판매되고 있다. 맥주 캔 역시 타 지역 공장에서 만든 캔에 라벨만 붙인다고 한다. 진주 맥주의 핵심인 진주 특산물 앉은뱅이밀의 함량도 1% 미만이다. 사실상 진주에서 만드는 것이 거의 없다. 시민들의 돈으로 타 지역 업체의 배만 불려 주면서도 이름은 거창하게도 ‘진주진맥’이다. 섭천 소가 웃을 일이고, 진주시민을 기만하는 행위이다. 진주중앙시장 청년몰이 시민과 관광객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이색 축제인 ‘호프 1884’ 생맥주 축제를 개최했다. 과연 이 축제에 진주 맥주는 판매되었을까? 정답은 ‘아니오’이다. 진주에서 개최되는 맥주 축제에 진주 진맥이 판매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또 다른 궁금증을 낳는다. 그렇다면 진맥은 생맥주를 생산하지 않는 것인가? 근데 타 지역 맥주 축제에는 기를 쓰고 다니며 시음 행사를 한다.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인지 싶다. 진주맥주를 판매하는 ‘진맥 브루어리’라는 공간을 만들었다. 2024년 혈세 15억 원의 예산을 투입했다. 근데 위치가 문제다. 중앙시장에서도 상당히 외진 곳이다. 당초 젊은 층의 접근성이 좋은 차없는 거리였지만 변경됐다,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진주시의 적극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매출은 저조했다. 연간 수익이 6,500만원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러면 운영비는 얼마일까? 연간 1억7,900만원이 투입되고 있다. 이런 지적이 이어진다. ‘자기 돈을 가지고 이렇게 사업을 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세금을 마구 땅바닥에 버리는 꼴이다. 진주시활성화재단에 그 책임을 물을 수 밖에 없는 건 당연하다. 진주시의회 오경훈 경제복지위원장이 진주시상권활성화재단의 문제을 지적했다. ‘진주시상권활성화재단이 이 상태라면 유지해서는 안된다.’ ‘내년 본예산 심의를 할 때 심각하게 고민해 보겠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진주시상권활성화재단의 존재 자체는 삭제되어야 마땅하다. 청년 상인에게 깊은 생채기만 남긴 논개시장 ‘누들로드’와 로데오거리 부흥에 실패한 사업으로 낙인된 ‘마이무 푸드존’, 초·중·고등학생과 대학생, 가족들이 와서 즐길 수 있도록 했지만 그들의 그림자 조차 찾을 수 없는 ‘e-스포츠 커뮤니티센터’ 조성사업은 진주시상권활성화재단의 ‘존재 이유 없음’을 확인할 수 있는 사업들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재단 운영비를 포함한 연간 12억원에 가까운 예산을 이 재단에 투입해야 하는 이유를 찾기 어렵다. 재단의 활동이 예산의 가치를 담보하지 못한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예산집행 중지와 재단의 활동을 스톱시켜야 한다. 하물며 시민의 혈세로 시민을 속이고 외지 업체의 배만 불리는 상황에서 ‘잘하라’고 격려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진주시상권활성화재단이 추진하는 몇 개의 사업만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이 아니다. 원도심 공동화와 소상공인이 극한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는 이 엄중한 시기에 재단의 역할에 대한 고민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진주의 재래시장과 공동화되고 있는 원도심의 활성화를 위한 근본대책을 수립하는 한편 지역 상권의 특성에 부합하는 사업들이 제안되고 추진되지 않는다면 진주시상권활성화재단의 존재 필요성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가. 지금 진주의 상권은 허물어지기 일보직전이다. 원도심에는 빈 점포가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 근근히 버티고 있는 상인들의 인내도 한계에 직면하고 있다. 기회만 있으면 다른 지역으로 떠나고 싶어한다. 해수부의 부산 이전 소식에 지역의 상권이 벌써 부터 술렁이고 있다. 일부 상공인들은 진주의 사업을 접고 일찌감치 부산으로 이전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진주의 상권이 직면한 현실이다. 근데 진주시가 주는 예산을 쌈짓돈 정도로 생각하는 이 태도에 대해 어찌 극렬한 비난을 하지 않겠는가. 진주시가 설립한 각종 재단에 대한 엄격한 검증이 필요하다. 진주시에서 막대한 예산을 지원받고 있는 진주시상권활성화재단, 진주문화관광재단, 진주공예창작지원센터, 진주시시설관리공단 등의 성과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재단 존속의 필요성 여부를 엄격하게 판단해야 한다. 시민이 내는 세금으로 운영되는 만큼 재단의 가치가 명확하게 증명되지 않는다면 굳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다.진주시의 출자·출연 재단이 가지는 공통의 문제가 있다. 일단 사명감이 없다. 재단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피고 견제하고 감시하는 체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가 주는 예산 가지고 일잘하는 업체를 뽑아서 사업을 넘기는 일만 열심히 하고 있다. 전문가 집단으로서의 재단이 아닌 진주시의 하청업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재단은 특수성에 전문성이 더해진 집단이다. 근데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이 직접 나서지 않고 사업을 쪼개 용역을 내보내고 정산 등 관리 감독만 하고 있다. 이른바 ‘놀고 먹는 어공(어쩌다 공무원)’의 특징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정산과 관리감독 전문가인 공무원에게 맡기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예산 절감 효과는 덤이지 않은가. 굳이 엄청난 예산을 들여서 어공을 등판시킬 이유가 있겠는가. 진주시의회는 진주시상권활성화 재단을 비롯한 각종 재단에 투입되고 있는 예산 대비 성과 여부를 면밀히 검토한 뒤, 재단의 존속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시민의 예산이 낭비되고 재단의 역할이 미비한데도 계속 예산지원을 해 준다면 진주시의회 역시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원고 일부 수정 2025. 07. 28)
- 2025-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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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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