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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검절약·사회봉사 외길 추담楸潭 장충석張忠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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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평론

  • 작성일

    2024.03.05 PM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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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5

그의 삶의 원천이었던 세무사 생활에 한 치의 빈틈도 없었고, 어머니의 근검절약 정신을 이어받아 검소했으며, 자신을 위해 돈을 쓰기 보다는 사회를 위해 사랑의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자신은 한 평의 땅도 소유하지 않은 채 자연으로 돌아갔다. 진주사람 추담 장충석은 그렇게 살았다.

경상남도가 경남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선정한 ‘자랑스런 경남 100인’ 중의 한 사람인 진주사람 추담(楸潭) 장충석(張忠錫, 1922~2011).
그의 삶을 되돌아보면, 오로지 ‘근검절약’과 ‘사회봉사’의 외길을 걸어왔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그는 대한민국 제1호 세무사로서 한국세무사회의 창립멤버이자, 사회봉사단체인 진주라이온스클럽 창단멤버로 47년간 봉사했다.
만학도(晩學徒)의 삶 역시 그에게는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여는 신선한 시도였다.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의 눈에는 지역의 인재육성이라는 새로운 삶의 목표가 들어왔다. 고희를 맞은 1991년에 추담장학재단이 설립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추담장학재단은 지금도 그의 뜻을 이어 지역발전을 위한 연구와 인재육성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경남탄생 100주년을 맞아 경남도가 선정한 ‘자랑스런 경남인상’을 수상한 것은 자랑스런 진주사람이자 그의 삶이 타인의 모범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일이다. 추담의 행적은 캡슐에 보관돼 후세 사람들에게 길이길이 그 전범(典範)이 되고 있다.
사후에 경상대학교에 그의 시신과 장기 기증을 약속한 추담은 일일이 기록하기 힘들 정도의 봉사활동을 해왔고, 그 결과 2001년 ‘제1회 진주시민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게 된다. 그리고 10년 후인 2011년 추담 장충석은 영원히 진주를 떠났다.
추담은 2001년 제1회 진주시민상, 2002년 대통령상, 2006년 경남문화상을 수상했으며 2007년에는 제44회 저축의 날을 맞이하여 저축 유공자로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훈하기도 했다. 저서에는 『삶의 지평』 『旅窓에 비친 南美大陸』이 있다.

 

‘제가 어릴 때 어머니께서는 끼니 때가 되어 거지가 찾아오면, 당신의 밥을 거지에게 주고 굶을 때가 많았다.’ 2007년 저축의 날을 맞아 저축유공자로 선정돼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은 추담의 회고담이다.

 

자린고비 세무사

추담 장충석은 대한민국 제1호 세무사로서 한국세무사회의 창립 멤버이다. 1962년 2월 10일, 은행집회소에서 열린 한국세무사회 창립총회에서 133명의 회원 가운에 당당히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세무사로서의 그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세무사로서의 삶을 시작한 그의 미래가 탄탄대로가 될 것임은 누구도 의심치 않았다. 더군다나 1호 세무사라는 자부심과 그의 앞에 열린 탄탄대로는 무작정 걷기만 해도 부와 영예는 예약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진주에서 유명한 ‘자린고비 세무사’로 불렸다. 자신의 집에서 회계사무소까지 왕복 8km에 이르는 거리를 하루도 빠짐없이 도보로 출퇴근을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 흔한 자동차 한 대도 사지 않고 평생을 걸어 다녔으니 더 할 말이 없다.
하지만 그의 그러한 근검절약 정신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추담의 어머니가 몸소 실천한 봉사하는 삶을 보고 배우며 자랐기 때문이다. 추담의 어린 시절 어머니의 삶은 다음과 같았다.
‘제가 어릴 때 어머니께서는 끼니 때가 되어 거지가 찾아오면, 당신의 밥을 거지에게 주고 굶을 때가 많았다.’
2007년 저축의 날을 맞아 저축유공자로 선정돼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은 추담의 회고담이다.
어머니의 근검절약과 봉사하는 삶을 배우고 자란 추담에게 ‘절약과 봉사’는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흔한 자동차 한 대도 없이 도보로 출퇴근했던 그의 삶이 결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남을 위해 살자’는 생활 신조는 그렇게 자신의 인생 대부분을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한 삶을 살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생활신조는 일상생활에서 철저히 실천되었다.
근검절약하는 삶을 산 추담은 무려 400여 개가 넘는 통장을 가질 만큼 넉넉했지만, 3천 원짜리 점심을 사먹을 만큼 그의 검소한 생활은 그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절약하는 습관에 이어 그만의 재테크 비법을 소개하기도 했다. 세무사라는 직업을 갖게 된 이후, 그는 진주의 한 금융기관과 거래를 했다. “한 금융기관과 거래를 하면 신용도도 쌓이고 VIP 대접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만의 노하우다.
 

“일생을 두고 나 자신의 힘으로 남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길 늘 기대해 왔다. 비록 만학도의 몸이긴 하지만 69세 되던 해에 경상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사과정을 거치면서 낙후된 지방대학의 육성 발전을 위해 견실한 장학재단의 설립이 시급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추담장학재단을 설립하게 된 것이다.”

 

추담장학재단 설립

추담이 오로지 돈을 버는 데만 매달린 것은 아니다. 평소의 경제관념을 알게 해주는 그만의 신념이 있었다. ‘돈 버는 자랑을 하지 말고, 돈 쓰는 자랑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린고비 세무사로 이름났던 추담은 이렇게 아껴 모은 돈으로 1991년 ‘추담장학재단’을 설립하게 된다. 1991년 10월 고희연을 맞은 추담은 추담연구장학재단 발기인 총회를 열고, 12월 18일에는 1억 원을 출자해 재단설립 신청을 하면서, ‘추담장학재단’이 결실을 맺게 된다.
추담장학재단은 현재 5억 원의 출자금을 기반으로 지역의 어려운 학생들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을 전하는 소중한 재단으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1992년에 등록허가를 마친 추담장학재단은 이듬해인 1993년 제1회 연구비 및 장학금 수여식을 갖고 교수(2명)와 학생(12명)에게 총 1천만 원을 지급하게 된다. 이어 1994년에는 1,550만 원, 1994년에는 5,000만 원을 출자한데 이어 1995년에는 1,980만 원, 1997년에는 2,480만 원 등 지난 2001년까지 수혜금액은 2억 1,590만 원에 이르렀다.
추담이 별세한 2011년부터는 장학재단이 경상대학교로 이관되면서 ‘추담연구재단’으로 명칭은 변경됐지만, 추담의 설립 취지에 맞게 교수와 학생에게 연구 지원금과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추담은 추담장학재단 설립과 관련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생을 두고 나 자신의 힘으로 남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길 늘 기대해 왔다. 비록 만학도의 몸이긴 하지만 69세 되던 해에 경상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사과정을 거치면서 낙후된 지방대학의 육성 발전을 위해 견실한 장학재단의 설립이 시급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추담장학재단을 설립하게 된 것이다.”
당시 추담이 가졌던 지방대학의 발전과 인재육성의 중요성. 그것은 만학도로서의 삶을 산 추담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만학도(晩學徒)의 삶

69세의 만학도 추담 장충석이 석사모를 쓰던 날, 그의 지나온 삶에 대한 언론의 관심이 집중됐다. 자린고비 세무사에 저축왕으로 이름났던 추담이 만학도(晩學徒)로서의 새로운 삶을 걷게 된 이유는 여러모로 언론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배움에 있어서는 청춘’이라는 이야기를 자신 있게 할 수 있었던 건, 추담이 비교적 넉넉한 세무사 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학문에의 끊임없는 욕구 때문이었다.
‘어떤 형태로든 기회만 닿으면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고 말해왔던 추담은 끊임없는 업무와 노령으로 인한 건강 쇠약으로 소망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지난 1988년 경상대학교에서 1년 과정의 경영자반 학생을 모집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1년 정도면 늙은이도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는 추담은 선뜻 마음을 내어서 원서를 제출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원서마감과 동시에 경영자 과정이 없어지게 되었다. 결국, 추담은 ‘큰 맘 먹고’ 석사과정에 등록을 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만학도로서의 삶은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경상대학교 경영행정대학원에 진학하긴 했지만, 칠순을 눈앞에 둔 노령의 몸으로 경영전공 서적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난생처음 대하는 영어는 큰 고민거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담은 1학년 1학기를 우수한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기도 했다.
추담은 끊임없는 노력으로 계속 장학생에 선발됐다. 그런 그가 떠올린 생각 하나. ‘나는 장학금을 받지 않아도 공부를 할 수 있는 형편이지만 젊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결국 추담은 자신이 받은 장학금을 가난한 학생에게 주기를 권하며 자신은 사양했다.
그의 만학도로서의 삶은 계속 이어졌다. 2학년 때는 그 어렵다는 종합시험도 거뜬히 통과한 추담은 논문심사도 무사히 통과했다. 그의 석사학위 논문은 「기업합병에 따른 세무회계처리에 관한 연구」이다.
1989학년도 학위수여식에 참석한 추담은, 69세의 최고령 학위수여자로 주위의 부러움과 찬사를 한몸에 받았다. 만학도로서의 첫 꿈이 비로소 이루어지던 순간이었다.
추담의 학력을 보면 1946년 9월 30일 진주사범 교원양성학과 졸업, 1957년 경남대학교 졸업, 1990년 8월 25일 경상대학교 경영대학원(경영학석사) 졸업에 이어, 5년 뒤인 1995년에는 경남대학교 대학원 경영학 박사과정을 밟았다. 그의 나이 74세였다.
세무사로서의 그의 삶이 그랬듯이 만학도로서의 삶 역시, 그에게는 하나의 끊임없는 도전이었고 결국에는 화려한 꽃을 피워냈다.

 

진주발전을 위한 그의 헌신도 적지 않았다. 이남두 진주시장 재임시절에는 ‘민간인 토지감정평가 위원’에 위촉돼 남강교~새벼리 도로 2차선 확장 공사 당시 강남동과 칠암동쪽 토지를 감정가로 매입하여 현재와 같은 4차선 보도를 설치하는데 공헌을 했다.

 

자랑스런 경남인

추담은 경상남도가 경남도 탄생 100주년을 맞아 선정한 ‘자랑스런 경남인 100인’에 선정됐다. 경남의 명예를 드높인 경남인 100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된 영예를 얻은 것이다. 그의 삶 곳곳에 깃들어 있는 교훈은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자린고비 세무사, 저축왕, 장학재단, 만학도로 대표되는 추담의 삶에 있어 또 하나의 흔적을 찾는다면 단연 ‘지역에 대한 봉사’이다.
1964년 국제라이온스클럽 진주라이온스클럽 창립 멤버로 새로운 지역봉사의 지평을 열었다. 진주라이온스클럽 창단 이후 47년간 계속된 그의 사회봉사활동 경력은 아직도 모범사례로 남아 있다.
시내에 거주하고 있는 동거인 합동결혼식을 개최한 것은 물론 1991년 고희연 때에는 2명의 소년 소녀 가장에게 각 200만 원의 성금으로 국민주택에 입주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민주화 시민정신운동과 관련해 김동길 교수 초청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지역의 정신문화 개선에도 그 흔적을 남겼다.
1992년 4월에는 180만 원의 봉사금을 쾌척해 국제재단 Melvin Jones Fellow 회원이 되었으며, 1996년에는 경남탄생 100주년에 즈음하여 ‘자랑스런 경남 100인’에 선정되어 캡슐에 그의 공적이 보관되어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진주발전을 위한 그의 헌신도 적지 않았다. 이남두 진주시장 재임시절에는 ‘민간인 토지감정평가 위원’에 위촉돼 남강교~새벼리 도로 2차선 확장 공사 당시 강남동과 칠암동쪽 토지를 감정가로 매입하여 현재와 같은 4차선 보도를 설치하는데 공헌을 했다.
또한, 진주시 지방세 심의위원으로 활동한 것은 물론 한국산업경제학회 고문으로 경제부분에서 활약을 하기도 했다.

 

삶의 지평

추담은 지난 1997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마지막 삶의 목표에 대해 밝힌 적이 있다. 평생을 근검절약과 봉사로 살아온 그의 마지막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만년에 배움에 대한 열의로 가득찼던 그가 가진 마지막 소망은 진주의 인재를 키우는 장학사업이었다.
추담장학재단은 그가 작고한 뒤에도 여전히 지역의 인재들에게 꿈과 희망이 되고 있지만, 그의 속내는 진주발전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많이 연구자들과 학생들에게 혜택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사람이 밥을 하루에 한 그릇을 먹든, 두 그릇을 먹든, 죽을 때는 돈 한 푼 가져갈 수 없어. 쓸데없는 물욕이 사람을 망치는 길이야.”
추담의 말 속에는 욕심 없이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삶에 제법 어울리는 삶을 사는 것도 중요하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내가 진주에서 살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았는데, 이제는 사회에 환원하고 싶어.”
그는 생전에 한 푼이라도 더 아껴 장학금을 만들고 싶어 했고, 그 장학금으로 지역발전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어 우수한 인재가 육성되어 장래 진주의 발전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고자 했다.
추담은 생을 마감하기 전에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은 학구파였으며, 여전히 집에서 그의 직장까지 왕복 8km의 거리를 걸어 다녔으며, 3천 원짜리 소박한 밥으로 점심을 해결하는 자린고비 세무사였다.
담배를 피우지도 않았고, 매일 아침 세숫물을 변기에 부어 물을 아꼈던 추담. 평생을 세무사로 살았지만, 자신의 명의로 된 재산이라고는 땅 한 평도 없다.
그리고 추담은 자신의 시신과 장기를 경상대학교 의과대에 기증하기로 약속했고 실천했던 ‘아낌없는 삶’을 살았다.

 

추담은 생을 마감하기 전에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은 학구파였으며, 여전히 집에서 그의 직장까지 왕복 8km의 거리를 걸어 다녔으며, 3천 원짜리 소박한 밥으로 점심을 해결하는 자린고비 세무사였다.

 

진주시민상 수상

진주시의 명예를 빛내거나 지역발전에 공이 있는 시민을 대상으로 수여하고 있는 ‘제1회 진주시민상’에 추담이 선정됐다.
진주시민상은 체육 및 지역발전에 공헌해온 사람에 대해 부문별로 시상을 해왔던 진주시문화상이 대상자가 줄고 권위가 없다는 지적에 따라 2001년부터 진주의 명예를 빛냈거나 지역사회 발전에 공헌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을 선정해 시상하는 상이다.
추담이 처음으로 제정된 진주시민상에 선정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적어도 그가 걸어왔던 89년 삶 가운데 거의 대부분이 진주에 있었고, 그의 다양한 활동 역시 진주발전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저축유공자로 선정돼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은 뒤 그의 인터뷰는 너무나 평범하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요즘 대학까지 애들 교육하려면 돈도 많이 든다는데 국민 저축률이 떨어져서 걱정입니다. 적게 벌더라도 아껴 쓰고 장래를 위해 반드시 저축해야 합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그 일은 추담은 평생을 실천했다.
오늘날 자신만의 삶의 방향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럴 때 추담 장충석이 걸어온 길을 한 번 되돌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는 그의 삶의 원천이었던 세무사 생활에 한 치의 빈틈도 없었고, 어머니의 근검절약 정신을 이어받아 검소했으며, 자신을 위해 돈을 쓰기 보다는 사회를 위해 사랑의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자신은 한 평의 땅도 소유하지 않은 채 자연으로 돌아갔다.
진주사람 추담 장충석은 그렇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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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사람) 1. 아인 박종한 썸네일 이미지

(진주사람) 1. 아인 박종한

아인(亞人) 박종한(朴鐘漢) 시대의 참스승으로 살다 경남사학(慶南私學)의 염원을 남명정신에 두고, 평생을 교육에 헌신한 진주교육계의 거목 아인(亞人) 박종한(朴鐘漢, 1925~2012). 아인은 반진단(般震團)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전개한 애국지사이며, 반진구국(般震救國) 정신을 건학 이념으로 대아중·고등학교를 설립해 오민교육을 실시한 교육자이자, 이 시대의 참스승이다.반진구국과 오민사회건설을 바탕에 둔 그의 교육이념은 오민교육과 오민박물관 개관, 경의정(敬義情) 학생다도교육, 창렬사 참배, 화랑숙(花郞塾)교육, 충무공백의종군 등으로 이어져 경남사학 교육의 표준이 되었다. 특히 학교교육에 다도를 접목한 아인은 문교부에서 전국의 장학사를 대상으로 ‘다도교육지도안’을 발표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아인은 민족문화재가 가진 정신을 올바로 계승하는 민학회(民學會) 발족과 ‘민학지’ 발간에 이어, 전국 최초로 서울에 ‘진주향토문화사전(晋州鄕土文化史展)’을 개최해 천년 진주의 역사와 전통을 전국에 알리기도 했다.진주정신의 바탕이 되는 남명정신을 계승하고자 ‘남명제(南冥祭)’를 창설했고, 한민족현창회를 창설해 민족제단을 건립하는 등 민족정신 현창에 노력했다. 남명제는 ‘남명정신을 사학에 보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시됐다. ‘학교교육은 학자를 배출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할 수 있는 생활인을 기르는데 목적을 둔다’는 아인의 교육이념을 엿볼 수 있다.한국차문화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초의선사가 기거했던 ‘일지암’을 찾아 복원한 아인은 진주다도회 창립은 물론 최범술, 김미희, 박동선 등과 (사)한국차인회를 창립했으며, ‘차의 날 선언문’을 직접 작성해 진주 촉석루에서 ‘차의 날’을 선포하는 등 한국 차문화에 기여한 공로로 ‘한국의 차(茶) 스승’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아인은 하버드대학과 MIT, 예일대학 등의초청강연에서 한국 차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기도 했다.아인의 생애 전반은 오민교육이 바탕이 된 경남사학의 발전을 염원한 교육자의 삶과 평생을 차(茶)와 함께 한 한국 다도(茶道)의 선구자로 기억되고 있다. 아인 박종한 선생 탄신 100주년 기념식(2025. 5. 17) 반진구국의 정신 대아고등학교의 창설정신은 항일투쟁단체인 반진단(般震團)의 반진정신(般震精神)에서 비롯됐다. 아인은 육당 최남선의「조선역사(朝鮮歷史)」라는 책을 읽다가, 옛날 우리 민족이 고조선을 세우기 전에 ‘진(震)(東夷族의 故國名)’이라는 나라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대아고등학교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던 ‘반진문(般震門)’이 나오게 되었고, 대아고등학교의 창설정신으로 자리잡게 된다.아인은 최소해(崔小海), 김대성(金大成), 서병도(徐炳道) 등 8명과 뜻을 모아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을 예측하고 민족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반진단(般震團)’이라는 항일투쟁단체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1943년 8월의 일이다.반진단 결성 이듬해인 1944년 7월 하순경, 단원들은 부산의 부두폭파를 목표로 삼고 차근차근 실천해 나갔다. 독립군이 은닉해 놓은 군자금과 무기매설 장소를 표시한 지도 한 장을 확보한 단원들은 군자금과 무기찾기에 나섰다. 당시 진주 요시노국민학교(현 중안초등학교)에서 촉탁으로 교편을 잡고 있던 아인은 자신의 한 달치 월급 40원을 여비로 제공했다. 하지만 일경의 불심검문에 걸려 단원들이 체포되고 만다. 당시 반진단의 아지트였던 부산 대신동 최소해의 하숙집에는 벌써 일본경찰이 들이닥쳐 반진단의 혈서연판장과 독립선언문, 사제폭탄을 모조리 압수해 간 뒤였다. 아인도 무사할 수가 없었다. 수업도중 경남도경 조선인 형사 2명에 의해 연행되어 진주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그때가 1944년 11월 24일의 일이었다.이후 6개월동안 각 경찰서를 전전하며 고문을 당했고, 예심에 회부되어 부산형무소에 수감된 것은 이듬해 6월이었다. 혹독한 고문으로 영어의 몸이 된 반진단원들은 그로부터 두 달 후 광복으로 풀려나게 되었다.비록 반진단은 가시적인 항일투쟁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대동아공영의 기치아래 역사를 거스르는 일제의 단발마적 발악과 조선인들의 체념어린 ‘황민화 정책’에의 동화의식이 풍미하던 태평양전쟁 말기에 순수하고 뜨거운 민족의식을 보여 주기에 충분했다.아인은 광복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자유아시아학생연맹’을 결성했다. 세계의 각축장이 된 아시아의 발전을 위해서는 아시아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그의 신념 때문이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아인은 ‘아시아의 안목을 가진 지도자’ 육성이 시급하다는 판단 아래, 선친인 만암의 전 유산을 기본 재산으로 대아중·고등학교를 설립해 교육자의 길을 걷게 된다.대아고등학교의 ‘대아(大亞)’라는 교명은 ‘아시아의 안목을 가진 큰 지도자를 길러 내겠다’는 아인의 희망이 담겨 있다. 대아학당과 오민교육 1946년 4월 8일. 반진단원들이 아인의 자택에 모였다. 당시 나라는 좌우익으로 갈라져 사회는 극도의 혼란 상태를 맞고 있었고, 반진단원들은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했다. 아인은 각계 분야에 필요한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현실을 인식하고 육영사업에 뜻을 두게 된다. 그후 아인은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들어가 경제학을 전공, 학업에 전념했다. 그러나 일찍이 그의 가슴속에 불붙었던 조국애는, 조국의 운명을 바꾸는 일로 바뀌었다. 조국의 운명이 바로 아시아의 운명이며, 조국의 현실이 바로 아시아의 현실이라는 냉엄한 현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아인은 기성 정치인을 배출하는 것 보다는 앞으로 조국의 지도자가 될 학생들의 결속과 유대 필요성을 자각하게 된다. 철기 이범석 장군의 지지와 후원을 얻어 그 조직과 결성을 위하여 일본으로 건너갈 준비를 하고 있던 중 민족상잔의 비극 6․25전쟁과 맞닥뜨리게 된다. 결국 아인은 학업은 물론 ‘자유아시아학생연맹’의 꿈도 모두 중단한 채, 노부모를 모시고 선영이 있는 남해의 재실로 피난길을 떠났다.휴전이 성립되던 해, 아인은 선친의 유산을 기본재산으로 반진단의 구국정신을 계승하는 재단법인 하천학원 대아중․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이사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그때가 1953년 12월 23일의 일이다. 당시 아인의 마음속에는 ‘조국의 통일과 자유가 아시아의 독립과 자유에 있음을 자각하여 밖으로는 아시아 학생연맹을 조직하고, 안으로는 신생 조국의 지도자를 양성한다’는데 있었다. 1973년 12월 29일에는 대아고등학교가 매 학년 10학급으로 증설 인가를 받았고, 이후 학교는 급속한 발전을 이루게 된다.그러나 학교가 커가면서 아인의 고민도 덩달아 많아지기 시작했다. 당시 대부분의 학교들은 진학위주의 시험교육을 우선했다. 교사가 학생에게 지식을 팔고, 교직은 돈을 벌기 위한 가장 손쉬운 직업을 전락되어 가고 있었다. 이와같은 풍조는 전국적으로 확산됐고, 아인은 학교교육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그리하여 참된 교육은 학교교육보다 가족적인 사제동행(師弟同行)의 사숙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실시한 교육이 화랑숙(花郞塾)교육이다. 그러나 60여명의 학생을 선발해 24시간 교육을 실시했지만 이 역시 채 2년이 못돼 좌절되고 말았다.아인의 오민교육(五民敎育)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1970년 4월 8일, 아인은 손문의 삼민주의(三民主義) 구국이념을 참고해「오민교육(五民敎育)」이라는 책을 저술하고, 대아학원에 오민교육(五民敎育)을 실시하게 된다.아인의 오민교육은 손문의 ‘삼민주의(三民主義, 民族 民生 民權)’에 민성(民性)과 민복(民福)을 추가해 감응과 체험을 위주로 하는 전인교육(全人敎育)이었다.아인은 즉시, 오민에 기초한 교육을 실시했다. 민성교육(民性敎育)으로는 모현단에 봉안된 민족선사 추모교육(智)과 세계선사추모교육(情), 오성다도를 통한 정서안정교육(意)이 실시되었다. 그리고 민생교육(民生敎育)으로는 민족후생생활사교육과 세계후생생활사교육, 능률적 자습교육이 실시되었다.민족교육(民族敎育)으로는 민족제단 교육과 세계 호국사교육, 충무공 추모행군, 민권교육(民權敎育)으로는 민중운동사교육, 세계인권운동사교육, 국민주체의식교육이 행해졌고, 민복교육(民福敎育)으로는 민족문화사교육, 세계문화사교육, 예능창작교육등이 실시되었다. 다도교육과 차문화운동 아인은 대아고등학교에서 현대 한국 차문화운동의 시초가 된 다도교육을 실시했다. 대아고등학교는 한국 차문화의 발원지가 되었고, 우리나라 차문화사(茶文化史)에서 아주 중요한 일로 기록되었다.한국 차문화의 발원지이자 한국차인회 발족의 계기가 된 대아고등학교의 다도교육은 1969년에 시작되었다. 학생들의 정서안정을 위한 다도교육은 비록 정규시간은 아니지만 교장실에서 교장이 직접 지도했다. 당시 다도교육에 사용한 찻 잔을 ‘경의잔(敬義盞)’이라 불렀는데, 이는 당시 진주지방에 종사로 계셨던 남명(南冥)선생의 경의정신을 흠모했던 아인의 아이디어였다.이러한 대아고등학교의 다도교육은 신문지상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알려지면서 ‘대아고등학교=차(茶)’라는 등식이 성립되었다. 그후 대아고등학교의 다도교육은 사단법인 한국차인회 발족의 계기가 되었고, 현 한국차문화의 요람이 되었다. 아인은 진주다도회를 결성했다. 대아고등학교 교장실에 삼현여고의 최재호, 선명의 강명찬, 미도양화점 김창문, 제일극장 최규진, 경상대학교 김재생 등이 참여했다. 첫사업으로 일본의 차인들을 초청해 문화교류를 시작했고, 효당 최범술을 고문으로 추대해 ‘대아다법(大亞茶法)’ 등 한국 고유의 다도를 정립해 나가기 시작했다. 진주에서 출발한 다도(茶道)는 최범술, 김미희, 박동선 등 몇몇 차인들이 참여한 가운데 ‘사단법인 한국차인회’ 창립으로 이어졌다. 서울 오류동 박동선의 자택에서 한국차인회 발기회가 열리고 1980년 서울 무역회관에서 한국차인회 설립총회가 개최되었다. 당시 아인은 ‘아인 차문화 운동 30주년’을 맞는 뜻 깊은 해였다.아인은 1970년대 말, 차문화 운동을 추진하던 중 한국 차문화의 정체성을 찾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 차(茶)의 성지인 초의선사의 ‘일지암’을 재건하는데 전력을 기울이게 된다. 일지암은 초의선사가 1824년(순조24)에 건립했다. 초의선사는 1866년 입적할 때까지 40여년간 이곳에서 다인들의 교과서인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을 펴냈고,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과 교류하며 차문화의 중흥을 도모한 한국차의 성지이다.아인은 1979년 몇차례의 답사 끝에 대둔산에 있었던 일지암을 찾아냈고, 조자용, 김봉호, 김두만 등과 거동이 불편했던 해남 박응송 스님과 함께 초의선사의 일지암지를 표시한 표시목을 박은 뒤, 1979년 4월에 일지암을 재건했다.일지암을 재건한 아인은 1981년 5월 25일, 진주정신의 상징인 촉석루에 전국의 100여명의 차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차의 날’을 제정하고 선포했다. 아인이 차의 날을 제정한 것은 전국에 우리고유의 ‘차문화’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우리 차를 마시는 운동을 추진하면서 부터이다. 차의 날은 입춘에서부터 100일이 되는 날인 5월 25일로 정했다. 아인은 직접 ‘차의 날 제정선언문’을 작성하고 낭독했다.아인은 선언문에 이렇게 적고 있다.‘차의 날을 기하여 많은 국민들이 차(茶)와 인연을 맺어 찬란하였던 민족의 차문화(茶文化)가 이 땅에 다시 꽃 피워질 것을 확신하면서 5월 25일을 차의 날로 선언하는 바이다’아인은 1981년, ‘경의정(敬義情) 학생다도’를 정립하는 것은 물론 전교생에게 다도교육을 실시했다. 당시 아인의 다도교육은 전국의 언론으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애다흥국(愛茶興國)’에 평생을 헌신한 아인은 학생들에게 3가지 행다법(行茶法)을 가르쳤다. ‘조신(調身)’ ‘조식(調息)’ ‘조심(調心)’이 그것이다. 조신은 ‘몸을 바로 세우는 것’이고, 조식은 ‘1분 18식의 단전호흡방법’이며, 조심은 ‘차의 오감(五感)에 의식을 집중시키는 것’이었다.아인은 차(茶)가 정서안정에 도움이 된다는 확신을 가졌다. 1981년 학교가 이현동으로 이사할 당시 다실(茶室)을 지을 정도로 학생들에 대한 다도교육은 그에게 중요한 교육이었다.이러한 아인의 다법은 학교일선에서 물러난 1985년 이후 오성다도(五性茶道)로 완성돼 차인들에게 전수되고 있다.아인의 차정신은 남명정신과 맞닿아 있다. 아인이 남명제를 창설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이다. 아인은 당시 각 사립학교의 설립정신을 조사했지만, 대부분의 사학들은 설립이념이 없었다. 그래서 아인은 당시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위대한 실천 철학자 남명이 세운 사학정신을 경남사학의 정신으로 삼기로 결심했다. 1977년 남명의 475회 생신을 맞아 경남체육관에서 ‘제1회 남명제(南冥祭)’를 개최했다. 남명제에는 술 대신 맑은 차를 올렸다. 아인은 남명제 창설을 통해 ‘학교교육은 학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배운 것을 실천하는 생활인을 기르는 곳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나라에 남명보다 더 훌륭한 교육자는 없다는 그의 신념이 반영된 것이다.이렇게 아인은 민족정신을 실천하는 교육자이자, 한국 차의 스승으로 자리잡았다. 진주차례회의 4인방(아인 박종한, 의재 허백련, 효당 최범술, 차농 김재생) 차(茶) 그리고 하천다숙아인은 다도강연을 비롯해 다기(茶器) 제작에 관심을 쏟았다. 당시 아인이 제작한 다기는 무애사발(이도다완), 오행다완, 경의잔 등이었다. ‘경의잔(敬義盞)’은 아인 스스로 ‘경이직내 의이방외(敬以直內 義以方外)’ 즉, ‘경(敬)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義)로써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반듯하게 한다’는 남명의 정신을 다도에 접목하고 스스로 실천한 것이다.국내외적으로 다도강의를 통한 ‘차문화 활성화’를 위한 활동도 쉬지 않았다. 1991년 이후 차 교육에 매진한 아인은 300여개 단체에 1만여명이 넘는 다인들에게 차교육을 실시했으며, 미국 하버드대학과 MIT, 예일대학 등의 초청강연에서 한국 차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개최된 ‘제1회 한국차인회 다도연구발표회’에서 아인은 ‘한국다도의 정신’에 대해 강연해 일본의 다도와 확연히 구분되는 한국의 전통 다도를 알려 나갔다.아인은 ‘다산의 차 사랑’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한 공로를 인정받아 제2회 다산 대상에서 문화예술부문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사단법인 다산연구소로부터 다산 정약용선생의 삶에 밴 차 정신을 널리 알리고, 한국 차 산업을 일으켜 차 문화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공로상’을 수상했다. 1998년에는 초의문화재단으로부터 ‘초의상’을 수상했으며, 한국차인연합회의 ‘명원차문화공로상’을 수상했다.(사)국제차문화교류협력재단은 2012년 11월 13일, 평생을 후학양성과 차문화발전을 위해 헌신한 아인을 ‘한국의 차 스승’으로 추존했다. ‘한국 다도의 실천자이며, 우리 다문화 정착화의 주춧돌이셨던 고 아인 박종한 선생님을 한국 다문화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한민국 차인들의 마음을 담아 한국의 차 스승(師表)로 추존한다’ 고 이유를 밝혔다. 남해군 설천면 덕산리에 위치한 하천다숙(荷泉茶塾)은 현대 차문화운동의 선구적 산실이다. 아인이 차문화운동의 계몽적 차원에서 이름 붙인 하천다숙은 최근 한국전통건축으로 선정돼 국가문화재로 등록되었다.‘하천재의 물리적인 공간과 정신적인 공간이 그대로 후손에게 연계되면서 이 지역은 물론 국제적으로 공개된 건축물로 생활을 예술화하고 예술을 철학화하는 계몽적 차생활 문화공간’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아인은 만년에 하천다숙에 기거하면서 오성다도의 사상과 철학을 집대성한 ‘오성다도’ 등의 차 관련 서적을 집필했다. 오성다도는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근대 차문화사는 물론 한국 차 철학을 정립한 저서로 평가받고 있다. 이외에도 아인은「오민교육」「한국인의 차 생활사」등을 집필했다.2012년 5월 7일, 진주교육계의 거목인 아인 박종한은 세상을 떠났다.항일 애국지사, 교육자, 차인들의 사표(師表)였던 아인의 뜻을 기려 진주시민들은 진주시민상을 수여했다. 진주차례회와 일본 나고야 차도회의 한일차문화교류(1970년) ▲학·경력1943 진주공립중학교, 진주고등학교 졸업1950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재학중 한국전쟁으로 학업 중단1953 대아중·고등학교 설립1969대아고등학교 다도교육 실시1976 진주향토문화사전 개최1977 남명제 창설, 헌다례 복원1978 아인요 설립1979 (사)한국차인회 설립1979 일지암 재건1981 차의 날 창설1982 무애사발, 오행다완, 경의잔 창작1993 한민족현창회 창설1994 오성다도 정립2007 하천다숙에 차의 날 선언기념비 제막 ▲포상1989 (사)한국차인회 창설 공로패1998 차문화공로상(한국다도협회)1998 초의상(초의문화재단)2000 명원차문화공로상(한국차인연합회)2008 한국차인대상 교육공로상2012 한국의 차 스승( 사 국제차문화교류협력재단)

  • 2024-03-05
  • 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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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규 / 진주향당 상임대표

이선규 진주향당 상임대표 진주가 가진 문화의 힘을 믿는다 경남역사문화연구소 진주향당을 새롭게 이끌 신임 상임대표에 이선규 이사가 선임되었다. 이선규 상임대표는 ‘문화의 힘’을 믿고 진주향당의 새로운 미래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 신임 상임대표로서의 포부가 있다면. 진주향당이 지난 20년 동안 추진해 온 일들을 감안하면 상임대표라는 자리가 너무 무겁게 생각됩니다. 고전에 ‘조정에서는 관직이요, 향당에서는 연치이다’라는 말이 기억납니다. 진주향당에서 제가 가장 나이가 많아서 이 자리를 맡은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비록 역사와 문화에 대한 경험이 일천하지만 진주가 가진 문화의 힘을 믿고 수락했습니다. 진주지역에서 활동해온 진주향당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직을 수행하겠습니다. ▲ 취임사에서 문화의 힘을 강조하셨는데. 평소에 저는 늘 문화의 힘을 믿어 왔습니다. 인류사를 되돌아 보면 로마와 당나라 등 숱한 제국들이 역사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문화는 천년 이상 이어져 지금의 동서양 문명의 뿌리가 되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한 백범 김구 선생도 삼시세끼 챙기기도 어려운 궁핍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독립된 조국의 가장 바람직한 미래에 대한 생각을 밝힌 적 있습니다. 그것은 경제적 부국이나 군사대국이 아니었습니다. 백범 선생이 꿈꾸었던 조국의 미래는 문화가 강한 나라, 즉 문화강국 대한민국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백범일기를 읽던 저에게 가장 큰 울림을 준 말이었습니다. ▲ 진주향당 상임대표로서 하시고 싶은 일이 있으시다면. 진주향당 지난 20년 동안 진주라는 지역사회에서 필요한 일들을 찾아서 해내고자 고민하고 노력해왔던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그간의 노력과 열정을 바탕으로 열매를 수확하는 시기를 앞당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진주향당이 역점을 두고 있는 사업이 있습니다. 바로 진주성 외성 찾기입니다. 이 사업은 진주의 미래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진주시로부터 용역을 끝낸 상태이고 앞으로 본격적으로 추진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진주향당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예전과 다름없이 열심히 해나가면 되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선규 상임대표가 동산서당 동학들과 함께 찍은 사진▲ 교방문화 활성화도 진주의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가치가 높다고 보십니까? -문화가 힘을 가질 수 있는 조건은 정체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주교방문화는 진주의 미래자원으로서의 잠재적 가치를 충분히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교방문화에 대한 인식도 좋아지고 관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유인촌 문체부 장관이 진주를 방문했을 당시 교방문화 특화를 지시했을 정도입니다. 현재 진주시와 진주시의회로부터 용역을 받아 교방문화활성화 기본계획과 실행계획 용역을 끝낸 상태입니다. 이제는 진주시와 의회가 얼만큼 의지를 가지고 추진하느냐에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 진주성 외성 찾기 사업의 중요성은. 진주성 외성 찾기는 현재 지역사회에서 가장 큰 호응을 얻고 있는 사업입니다. 필요성은 물론이고 진주의 미래 100년을 준비하는데 있어 가장 필요한 사업이기도 합니다. 최근 진주성 외성 츶기 프로젝트 용역 최종보고를 마쳤습니다. 진주시에서도 사업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관련 조례 제정과 남문 재현 등 추진 가능한 사업들의 실행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진주성 외성 찾기는 서울의 한양도성에 못지 않은 진주의 미래를 위한 사업입니다. 한양도성 관계자도 진주성을 부러워 하고 있습니다. 진주성 외성 찾기는 한낱 진주향당의 사업이 아니라 이제 진주시의 사업으로 추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진주교방문화 활성화도 중요하다고 보는데. -진주 교방문화는 교방악가무, 교방음식, 교방복식 등의 활성화를 통해 대한민국 유일의 문화컨텐츠로 자리잡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진주에서 교방음식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컨텐츠에 대한 호기심과 진주라는 지역성과 정체성을 가진 문화라는 점에서 K-컬쳐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교방문화를 주제로 하는 진주논개제와 교방문화의 융합 등을 통해 지역축제 활성화에도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올해 진주 논개제에는 전국에서 연행되고 있는 교방의 악가무를 초청하는 ‘전국 교방문화 페스타’ 등의 사업도 추진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진주향당은 앞으로도 교방문화의 확산을 통한 지역경제활성화에 최선의 노력을 다할 생각입니다. ▲ 향후 포부가 있다면. 창립 20주년을 맞은 진주향당의 역사에 걸맞는 역할을 해나가겠습니다. 진주향당이 앞으로도 지역의 문화역량과 지혜를 모으는 단체로 제자리를 잡아나가는 것은 물론 지역문화 아젠다 발굴과 제시, 청년문화일꾼 육성, 지역 문화산업 아이디어 발굴 등을 통해 진주의 역사와 문화발전에 작은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문화의 힘만 믿고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많은 질책과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 2024-03-05
  • 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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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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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호 회장 / 진주문화유산 해설사회

진주문화유산의 배움과 나눔 공간 진주문화재야행 해설 봉사 나서‘진주 문화와 역사’ 지킴이 자임 진주문화유산원(원장 강주기)의 중점사업 중의 하나인 ‘진주문화유산대학’ 수료생들이 진주문화 유산의 배움과 나눔 공간을 확장하기 위해 모임을 결성했다. 진주문화유산해설사회, 일명 ‘문사회’이다. 진주지역 문화유산의 보호와 관리 및 학술연구와 해설사 활동을 목적으로 결성된 문사회 이춘호 회장을 만났다. ▲ 문사회를 소개해 주신다면. 정식 명칭은 ‘진주문화유산 해설사회’입니다. 줄여서 ‘문사회’라고 합니다. 저희들은 진주문화유산원이 진행한 진주문화유산대학의 수강생들로 이루어진 모임입니다. 진주문화유산대학은 진주문화유산의 소중함을 체득하는 소중한 시간들이었습니다. 평소에 그냥 지나쳤던 진주의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천년 진주의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모임을 통해서 진주문화유산에 대해 더 공부하고 싶은 마음에 작은 단체를 결성했습니다. ▲ ‘문사회’라는 단체를 결성하게 된 동기가 있다면. 진주문화유산대학 과정을 통해 진주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지속적인 공부의 필요성이 있다는 점에 다들 공감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2022년 진주문화유산대학 졸업생을 중심으로 공부를 조금 더 전문적으로 해보고 싶다는 의견이 제시되면서 모임이 결성되었습니다.단체명을 진주문화유산 해설사회라고 한 것도 이유가 있습니다. 진주문화유산대학을 수료한 뒤 진주문화관광재단이 주최하는 진주문화재야행에서 무료로 문화유산 해설봉사를 했습니다. 비록 배움의 시간은 짧았지만, 진주를 찾아온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문화유산을 알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진주문화유산에 대해 더 큰 관심을 갖게 되었고, 진주의 문화유산을 해설하는 자원봉사를 해보자는 뜻에서 문사회를 결성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15명의 회원들이 동참하고 있습니다. ▲ 진주에는 유사한 단체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문사회의 향후 계획이 있다면. 경남도가 운영하는 문화관광해설사들도 계시고 진주문화원이나 여타 다른 민간단체에서 운영하는 해설사님도 많이 계신 것으로 압니다. 다들 지역의 문화유산에 대한 애정을 갖고 활동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희들도 많이 배우고 공부해서 실력있는 해설사가 되자는게 회원들의 뜻입니다. 일단 문사회 회원들은 진주문화유산에 대한 애정이 깊습니다. 관심도 매우 높구요. 저는 이것이 문사회의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주문화유산대학을 통해 지속적인 배움의 과정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조금 더 전문적인 식견을 갖춘 해설사가 될 수 있으리라 믿고 있습니다. 지금도 진주문화유산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진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 해설사로 거듭날 수 있을 거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춘호 회장은 회원들과 함께 지난 2023년 진주문화재야행 무료해설봉사를 비롯해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진주문화유산대학에서 배운 점이 있다면? 사실 진주문화유산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저희들로서는 지난해(2022년) 진주문화유산대학에서의 강의는 일종의 충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진주문화유산으로 보는 진주의 역사와 문화의 깊이는 생각 이상이었습니다. 아마도 수강생 거의 모두가 저와 같은 생각이었다고 봅니다. 12번의 강의를 통해서 진주에 대해 잘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올해에도 모두 10번의 강의를 수료했습니다. 다양한 강사님들의 강의를 통해서 진주문화유산의 이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존과 계승의 필요성까지 알게 된 소중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사실 요즘같은 시대에 진주문화유산대학 같은 강의 중심의 강좌는 인기가 없습니다. 시각적이고 체험적인 강의가 주를 이루는 시대를 살면서 지역의 역사와 문화는 그리 와닿지 않는 부분이 있는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진주문화유산대학을 듣는 수강생 모두가 강의 기간 내내 높은 참석율을 보였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매우 소중한 시간들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수강생들의 호응이 좋았던 것도 물론입니다. 개인적으로 진주문화유산대학이 지속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문화유산 해설사를 만드는 과정으로 이해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진주문화유산대학 과정에는 진주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문화유산에 대한 이론강의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강의 중간중간에 문화유산 해설기법 등에 강의와 현장 해설도 포함되어 있어 해설사로서의 자격을 갖추기 위한 다양한 강의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올해(2023년) 진주문화재야행 행사에 해설사로서 첫 발걸음을 했습니다. 여러모로 부족했지만 최선을 다해 맡은 문화유산에 대해 공부하고 해설연습을 하면서 무난하게 행사를 치렀다고 생각합니다. 촉석루, 북장대를 비롯해 5개 문화유산에 2명의 해설사들이 3일 동안 무료로 해설봉사를 했습니다. 사실상 해설사 데뷔를 한 셈이었습니다. 해설봉사를 통해 개인적으로 부족한 점을 스스로 인식하고 조금 더 전문적인 식견을 갖추어야 겠다는 결론에 이른 점이 성과라면 큰 성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문사회는 앞으로 어떤 일을 할 계획인가요? 지금은 진주의 문화유산에 대한 공부가 우선입니다. 진주문화유산대학이 마련한 강의를 충실하게 듣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해설사로서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공부를 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진주향당에 주최하는 진주역사골든벨 행사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대회 준비를 하면서 진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다양한 공부를 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대회 준비 기간 내내 시간만 나면 메모를 하면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까지는 좋은 성적을 내지는 못했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진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신감이 붙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축적이 진주문화유산 해설사로서 빨리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 향후 문사회의 활동계획이 있다면. 우선은 진주문화유산대학 강의를 통해 전문적인 지식을 계속 쌓아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진주역사골든벨과 같은 행사의 적극 참여로 개개인의 역량을 점검하는 시간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회가 된다면 진주문화재야행의 문화재 해설봉사에도 참여할 생각입니다. 문사회가 문화유산해설사를 꿈꾸는 분들이 모인 공간이기 때문에 본래 목적에 맞는 활동을 꾸준히 해나갈 계획입니다. 그리고 진주문화유산에 대한 학술연구도 계획하고 있습니다.현재 회원들과 진주에 소재하고 있는 문화유산을 찾는 현장 학습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예를들면 창렬사를 방문해서 청소도 하고 해설을 들으면서 해설사로서의 경험을 축적하고자 합니다. 회원 모두가 바쁘지만 기쁜 마음으로 동참하기로 했습니다. ▲ 회원님들께 한 말씀. 개인적으로 진주문화유산해설사회의 결성에 힘을 주신 회원 모두에게 먼저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더불어 부족한 저를 회장에 선임해 주심에 보답하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역량을 쏟아서 문사회의 발전을 도모하겠습니다. 회원님들의 적극적인 동참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문사회라는 모임 결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 주신 진주문화유산원 강주기 원장님과 문사회를 위해 갖은 잡무를 마다하지 않고 계신 전종실 사무국장님께도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 회원 모두가 진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해설사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겠습니다. 지켜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더불어 늘 적극적인 동참으로 힘을 주시는 회원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 2024-03-05
  • 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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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궁사 향촌할매 / 활과 함께 한 54년 여무사(女武士)의 삶 썸네일 이미지

여궁사 향촌할매 / 활과 함께 한 54년 여무사(女武士)의 삶

여궁사 향촌할매활과 함께 한 54년 여무사(女武士)의 삶 싱그런 봄바람에 몸을 실은 나비가 날개짓 하듯, 그의 궁체(弓體)는 화려함의 극치다. 과녘에 고정된 눈초리는 매섭고 날카롭지만, 시(矢)를 날린 후의 그의 모습은 비상(飛翔)을 앞 둔 나비의 몸짓이다. 그의 사법(射法)이 좌궁(左弓)인 탓도 있지만, 깍지손을 가볍게 떼며 뒤로 시원스럽게 내 뻗는 동작은 ‘아름다운 여궁사(女弓射) 궁체의 모범’이 되었다.여궁사(女弓射) 김미이(金米伊 73). 그의 호(號)는 향촌(香村)이고, 아명(兒名)은 향자(香子)이다. 사정(射亭)에서는 향촌할매로 통하며, 특히 궁체가 아름다워서 ‘나비 할머니’로도 불렸다. 그런 그가 2001년 8월26일, 납궁례(納弓禮)를 갖고 ‘활과 함께 한 54년 여무사(女武士)의 삶’을 마감했다. 병약한 소녀시절, 병마(病魔)를 이기기 위해 활을 잡은 그가 반세기가 넘도록 활약하던 무림(武林)을 떠나 자연인(自然人)으로 돌아간 것이다. 납궁례(納弓禮)란, 자신이 쓰던 궁시(弓矢)를 활터에 반납하고 ‘활 인생을 정리한다’는 뜻을 강호의 무사(武士)들에게 알리는 일이다. 흔히 납궁례를 금분세수(金盆洗手)라고도 하는데, 이는 말 그대로 ‘황금대야 손을 씻는 의식’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무림의 모든 문파를 대표하는 무사들을 초청해 놓고 황금으로 된 대야에 손을 씻고 무림을 떠나는 것이다. 그러면 그 날로 그는 무림에서는 신화나 전설 속의 인물로 격상되며, 이후 무림에서 맺은 모든 원한과 관계는 깨끗이 청산된다. 무릇 무협지에서나 나올법한 이러한 예절은 1939년 전주 천양정에서 행해진 이우봉의 납궁례와 해방이후 서울 백운정에서 납궁례(納弓禮)가 행해진 이후 반세기만의 일이다.김향촌 여무사는 ‘시작은 있으되, 끝은 없기 쉬운 강호’에 사습(射習)의 시작과 끝을 분명하게 보여줌으로써 후배 무사들에게 궁도인(弓道人)의 참모습을 보여주었다.화려한 궁체(弓體)와 무수한 입상기록으로 찬사(讚辭)를 받았던 그가 54년간의 활과 함께 한 삶을 정리하고, 이제 국궁사(國弓史)의 새로운 한 획을 그은 것이다.향촌할매는 3년전만해도 스스로 각궁(角弓)을 얹어서 활을 쏘곤 했다. 그러다가 몇 년전에 집안에 골치아픈 일이 생겼다. 게다가 건강까지 악화돼 병원을 찾는 횟수도 많아졌다. 한 일 년여를 끌다가 집안 문제도 해결되고, 병도 차츰 나아졌다. 그러나 칠순 노인이 그 사이에 겪은 풍파는 대단한 것이었다. 향촌할매는 마침내 납궁례(納弓禮)를 하기로 결심했다. 납궁례(納弓禮)가 행해졌던 2001년 8월26일, 사천(泗川) 관덕정(觀德亭). 분홍 한복에 단정히 빗어 넘긴 짧은 머리의 향촌할매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평생을 자신과 함께 한 소중한 활과 전통을 관덕정 사두(射頭)에게 전했다. 19세 어린나이에 집궁한 뒤, 지금은 칠순 노인이 된 향촌할매의 54년의 기나 긴 활 인생이 마감되는 순간이었다. 활과의 운명적인 만남김미이(金米伊) 여궁사는 1929년 경남 사천시에서 경주 김씨 경팔(慶八)의 둘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한 그는 열 아홉살 되던 해인 1947년에 활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게 된다. 사천산성(泗川山城)에 위치한 관덕정(觀德亭)에서의 일이다.작은 체구에 병약한 체질이었던 그가 우연히 관덕정에 올라갔다가 활쏘기 하는 것을 구경하게 되었다. 당시 병명은 폐결핵. 병원에 다녀도 병이 쉬이 낫지 않았던 터라 부모님들의 염려도 적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동네사람들은 ‘곡소리’만을 기다렸을 정도로 불치의 병으로 여겨졌다.그런던 차에 당시 사범으로 활약하던 조삼동과 고종 오빠이자 총무였던 목영주의 권유를 받게 된다. 활쏘기가 건강을 유지하는데 최고의 운동이며, 특히 위장병에 아주 좋다는 얘기에 부모님들도 흔쾌히 승낙을 하셨다. 여자의 몸으로 활을 쏜다는 것이 다소 마음에 걸렸으나 ‘병을 고친다’는데 반대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당시 궁도는 대부분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시대였고, 권번기적(券番妓籍)을 가진 여성들이 활을 쏘긴 했지만 여성궁도 인구는 그리 많지 않았다. 우연한 기회에 집궁(執弓)을 하게된 그는 처음에는 사천산성에 위치한 관덕정에 오르 내리는 일조차 힘겨운 날들이었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올라 정(亭)에 가는 것만으로도 그에게는 큰 일과였다. 그래선지 활 시위를 당기는 것조차 그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른 사우(射友)들은 1개월이면 충분한 활당기는 연습을 무려 일 년동안 계속했다. 더구나 남이 쓰다 버린 활을 대나무로 재활용해서 만든 활이기에 자신의 체력에 맞는 활을 가질 수도 없었다. 끝없이 계속되는 연습은 지겨움의 연속이었지만, 그의 ‘주살질(줄살)’은 쉼없이 계속됐다.나중에 그가 ‘아름다운 여궁사 궁체의 모범’이 돼 체법상을 수상하게 된 것도, 입사 이후의 이같은 노력 덕분이다, 사법(射法)이 보기드문 좌궁(左弓)이었던 이유도 따로 있다. 병약하다 보니 자연 힘이 좋은 오른 손을 주로 사용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좌궁(左弓)이 된 것이다.일 년여의 주살질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대(射臺)에 서서 활을 쏘지 못했다. 무려 145m 전방에 있는 과녘까지 화살을 날릴 만한 힘이 그에겐 부족했던 것이다. 그래서 과녘 40~50m 전방에서 활을 당기곤 했다. 그러기를 다시 일년 여. 드디어 그는 정식 사대(射臺)에 섰다. 그가 활을 잡은 지 2년만이고, 그의 나이 21살때였다.집궁 후 열심히 습사(習射)를 한 그는 90일만에 몰기(沒技), 즉 ‘5矢5中’을 했다. 몰기(沒技)란 5개의 화살(矢)이 모두 과녘에 명중하는 것을 말한다. 궁도인에게 있어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건강이 남다르게 좋아졌다. 아니, 자신도 모르게 병이 나았다는 말이 맞았다. 병약했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는 정식 사대에서 힘차게 시위를 당기는 진정한 여무사(女武士)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향촌할매의 납궁례(다음카페) 최고의 여무사 향촌할매‘궁도(弓道)란 낚시처럼 좀체 그 손 맛을 잊기 어렵다’는 말처럼 ‘활’은 그에게 있어 전부가 되었다. 처음 병을 이기기 위해 시작한 궁도였지만, 지금은 활만이 그에게는 전부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10년여의 공백기간이 생겼다. “활은 낚시처럼 손 놓기가 어려웠다”는 고백처럼 한동안 활은 그에게 있어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당대의 가정이면 누구나 겪었던 생활고와 여러 가지 이유는 여무사(女武士)로서의 순탄한 길을 보장하지 않았다.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그가 활만 쏘며 편안한 생활을 하기에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던 것이다.무려 10여년의 세월을 기다린 끝에 40대를 훌쩍 넘긴 불혹의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활을 다시 잡았다. 다소나마 안정된 생활과 비교적 넉넉한 사람살이가 다시 활을 붙잡게 하는 여유를 가져다 준 것이다. 그 때부터 본격적인 활쏘기가 시작되었다. 최고의 여무사가 되기 위한 그 만의 노력이 시작된 것이다.그가 처음으로 시지(矢誌)를 받은 것은 25살이었던 1954년의 일이다. 마산의 추산정에서 실시한 궁술대회에서 여무사 부문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이후 그의 입상 기록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며 개인 우승만도 20여차례나 기록했다. 시지(矢誌)란 궁도대회에 나가 우승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장을 말한다. 평범한 사람이면 시지 1개를 받기도 힘든데, 그는 54년의 활 인생에 있어 무려 23개가 넘는 시지(矢誌)를 받았다.그의 주요 입상기록을 보면, 경무대경찰서가 주최하고 내무부치안국이 후원한 제4회 대통령친람전국무술선수권대회 우승을 비롯해 전주 천양정에서 주최한 제27회 전국남녀궁술대회 우승 등 무수한 입상기록을 갖고있다.사천에 적(籍)을 두었던 그가 진주(晋州) 창림정(倉林亭)으로 옮긴 것은 그가 44세되던 해이다. 대회마다 입상은 따 놓은 당상이었고, 그의 명성도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 갔다.그가 이처럼 각종 궁도대회에서 입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연습과 노력도 있지만, 명궁을 찾아가 그 기술을 전수 받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던 데 있다. 전국적인 명궁으로 이름 난 임종남 명궁 밑에서 2년여동안 받은 강습은 그에게 큰 힘이 되었다.1954년 전주대회에서의 일이다. 50여명의 여궁사가 출전을 했지만 관중(貫中)을 하는 궁사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당연히 우승은 그의 몫이었다. 이같이 각종 대회를 휩쓰는 성적을 내자 궁술대회장의 분위기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향촌할매’가 대회장에 들어서면, ‘그만 쏴라’는 치기어린 말과 ‘정말 잘 쏜다’는 찬사가 엇갈리기 시작한 것이다. 자그마한 체구의 향촌할매가 활을 잡고 사대에 서면 관중들은 조용히 숨을 죽이고 그를 집중했다. 그리고는 찬사를 터뜨린다. “정말 멋진 궁체구나”그는 1998년에 전국대회 10회 우승을 축하하는 기념비를 창림정(倉林亭)에 세웠다. 1954년 서울 황학정과 1955년 전주 천양정 우승 등 10차례의 우승을 기념한 것이다. 그리고 그 기념비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궁도는 정신세계의 사람됨을 중시하는 전래의 수신덕목이다’ 아름다운 여궁사 궁체(弓體)의 모범향촌(香村)은 궁체가 특히 아름다워서 대회장에 나가면 사람들로부터 ‘나비 할머니’왔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 이는 발시(發矢)할 때 줌손을 과녘쪽으로 밀고 동시에 깍지손을 아주 가볍게 떼면서 뒤로 시원스럽게 내 뻗는 동작이 마치 봄바람에 나비가 날개짓을 하는 모양과 같아 붙여진 이름이다.그래선지 그의 수상기록에는 항상 궁체상(弓體賞)이 뒤따른다. 누구나 받을 수 있지만 쉽게 받을 수 없는 상(賞)이 바로 궁체상이다. 향촌할매는 전주 천양정에서 개최된 제26회 전국남녀궁도대회에서 체법상(體法賞)을 수상한 것을 비롯해 각종 대회에서 많은 상을 수상했다. 아름다운 여궁사 궁체의 모범이 되었던 것이다.광주 관덕정에서 2년동안 강습을 받을때의 일이었다. 향촌할매의 집궁하는 모습에 반한 여궁사가 사천까지 내려와 사범을 청했던 일도 있었다. 향촌할매가 54년의 활 인생을 정리하는 납궁례(納弓禮)를 행한 뒤 얼마지나지 않아 그는 궁도에 입문하는 이에게 몇가지 당부를 했다. “처음 활을 쏠때는 말할 수 없이 좋았다. 낚시보다 더한 것이 바로 이 뿔병인데, 활이 나가는 순간의 그 느낌은 경험해 보지 못한 이라면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요즘에는 사업하는 젊은이들에게는 자중할 것을 권하고 싶다.”광주에서 강습을 받고 있을 때 천석꾼이었던 궁도인이 있었는데, 체법도 좋고 활도 잘 쏘았는데 결국은 재산을 다 탕진하고 말았단다. 자신의 사업은 돌보지 않고 무턱대고 활에만 매달린 탓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활에 대한 애정은 납궁례를 한 지금도 달라지지 않고 있다. “이보게! 활을 선택할 때는 센 궁을 선택하면 안된다네. 자신의 힘에 맞는 궁을 선택해야 자신을 다스릴 수 있어.”활의 역사상 보기 드문 풍속인 납궁례(納弓禮)를 행하고, 무림을 떠나 평범한 자연인으로 돌아간 향촌할매의 궁도에 대한 사랑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 2024-03-05
  • 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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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시의회 '진주교방문화연구회' 박미경 회장

진주시의회 연구단체인 진주교방문화연구회를 결성한 계기가 있다면. 진주의 교방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유인촌 문체부 장관이 진주를 방문했을 당시, 진주검무를 비롯한 교방악가무의 상시공연 등을 통한 ‘교방문화 특화 지시’도 있었다. 진주만이 가진 진주교방문화를 활용한 특화관광도시 조성에 희망이 보였다.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늦다는 생각에서 연구단체인 진주교방문화연구회를 결성해 활동했다. 교방의 악가무 뿐만 아니라 교방음식과 교방복식, 교방기념품 등 교방문화를 활용한 관광콘텐츠 개발로 지역경제활성화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저와 같은 생각을 해주신 의원님들의 참여로 진주교방문화연구회를 결성했다. 진주교방문화연구회의 주요 활동을 소개해 주신다면. 진주교방문화연구회의 전문성 확보를 위한 사업부터 시작했다. 우선 교방문화 전문가 초청 을 시작으로 교방문화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정립하는데 주력했다. 교방문화에 대한 정확한 이해없이 연구단체로 제자리를 잡을 수 없다는 의견에 따랐다. 전문가 초청 강연을 통해 교방문화 전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타 지역의 사례를 살피기 위해 선진지 견학을 실시했다. 그 결과 진주만큼 교방문화의 역사와 흔적이 남아있는 곳을 찾기 어려웠다. 이는 진주의 교방문화가 대한민국 교방문화의 본산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진주시의회의 연구단체로는 사상 처음으로 용역을 실시했다. ‘교방문화 특화관광도시 진주’를 만들고자 했다. 교방문화 관광특화도시의 개념이 대해 말해주신다면. 교방문화 특화관광도시는 진주교방문화라는 진주 고유의 문화콘텐츠 개발을 통해 기존 지역의 산업과 연계하는 관광활성화는 물론 먹거리산업 등 지역경제활성화에 기여하는 도시를 의미한다. 진주교방문화는 교방악가무, 교방음식, 교방복식, 교방 문화상품 등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를 내재하고 있다. 교방의 악가무는 진주검무를 비롯해 대한민국 최고의 자리에 올라있고, 교방음식 또한 진주 이외의 지역에서는 거론조차 되지 않는 진주만의 먹거리산업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높다. 교방복식은 진주실크산업과의 연계를 통해 새로운 콘텐츠 개발과 미래산업으로의 활용가능성이 크다. 교방 문화상품 역시 교방문화 관광특화도시 조성을 위해 반드시 추진하고 키워내야 할 관련 산업으로의 성장 가능성이 높다. 진주가 교방문화 특화관광도시로 조성이 된다면 전국의 관광객들이 진주를 찾을 것이다. 진주의 교방문화는 희소성을 가진 문화자원이다. 오늘날 관광트랜드 역시 희소성을 가진 지역의 관광콘텐츠를 선호하고 있다. 진주교방문화의 역사성과 전통성을 기반으로 블루오션 문화관광도시 진주를 만들고 싶다. 어쩌면 진주 관광 미래 100년을 준비하는 중요한 일이다. 타 지역의 교방문화 관광 자원화 사례가 있는가. 전국적으로 교방문화의 관광자원화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부안군은 명기 매창을 소재로 테마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정읍시는 기생 소란을 주제로 고택문화체험, 밀양시는 기생 운심을 활용해 신안운심문화마을 조성과 운심검무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국외 관광 자원화 사례로는 일본의 게이샤문화를 들 수 있다. 지금 일본의 게이샤 문화는 일본을 대표하는 문화콘텐츠로 자리잡고 있다. 종합적으로 볼때 이미 타지역에서는 교방문화를 활용한 관광콘텐츠 개발에 역량을 쏟고 있다. 하지만 진주교방문화가 가진 관광적 가치와 비교해 본다면 엄청난 차이가 있다. 진주는 이들 지역에 비해 교방악가무, 교방음식, 교방복식 등 종합선물세트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진주교방문화를 특화해 전국에서 으뜸가는 교방문화 특화관광도시로 만들어가야할 당위성을 여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진주교방문화는 충분히 ‘K-브랜드’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도 있다. 교방문화 특화관광도시 진주 조성 용역을 통해 얻은 성과가 있다면.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말씀드린다면 진주교방문화의 진수를 담아내는 특화관광도시 진주 조성 필요성에 대해 크게 공감하고 있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현재 진주의 관광콘텐츠가 진주남강유등축제 등 축제분야에 집중되면서 관광도시가 갖추어야할 필요충분조건인 다양성을 잃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진주시민과 관광객 모두에게 가장 관심이 높은 분야는 바로 교방음식이었다. 설문조사 참여자의 90%가 교방음식의 개발 필요성에 공감했으며, 교방음식을 활용한 밀키트개발 등 음식콘텐츠 개발도 필요한 것으로 응답했다. 이를 반영하듯이 현재 지역내에서도 교방음식에 대한 관심도 높다. 교방음식의 개발을 통한 지역 먹거리산업의 활성화 방안에 대해서도 고민해 봐야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교방문화를 활용한 특화도시 진주 조성을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이 있다면. 진주교방문화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진주시교방문화지원조례를 제정하는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조례제정의 필요성을 묻는 설문조사에서도 진주시민은 70%, 관광객은 65%가 찬성의사를 밝혔다. 교방악가무의 상시공연과 교방음식 개발, 교방 문화상품 개발 등을 통한 교방문화활성화를 위해서는 관련 조례의 제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진주시의회 차원에서 조례제정을 비롯해 교방문화활성화를 위한 제반 지원을 심사숙고할 생각이다. 물론 집행부에도 교방문화 특화관광도시 조성을 위한 노력을 주문할 생각이다. 진주는 교방문화의 본산이다. 그리고 진주에 와야만 교방문화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다. 이것만으로도 교방문화 활성화를 위한 명분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진주교방문화가 K-BRAND를 선도하기 위한 조건이 있다면. 진주교방문화활성화를 위한 진주향당과 진주문화유산원 등 민간단체의 노력에 이어 진주시가 교방문화 활성화 기본 용역을 수립했고 이어서 진주시가 교방문화 특화관광도시 진주 조성이라는 실행계획을 수립했다.진주시의회 연구단체인 진주교방문화연구회는 용역 결과를 바탕으로 진주 교방문화 특화관광도시 조성을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일 예정이다. 용역 결과를 보면 교방문화활성화를 위한 4개의 목표와 전략이 세워졌다. 산업화(교방문화 창업), 관광화(관광자원화), 대중화(생활문화확장사업)가 바로 그것이다. 산업화로는 교방음식 경진대회, 교방음식 밀키트사업, 교방음식한마당 등이 제시되었다. 관광화는 진주논개제 등 지역축제연계사업으로 대한민국 검무 대전, 대중화는 교방문화 아카데미, 교방문화거리조성, 교방문화의 역사 정립, 글로벌화는 세계교방문화투어 등이다. 지금부터 진주교방문화가 K-BRAND를 선도하는 진주만의 관광자원으로 키워나가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진주교방문화 활성화를 위한 향후 계획은. -일단 교방문화 특화관광도시 조성을 위한 첫걸음은 관련 조례를 제정하는 일이다. 그 다음에는 진주 논개제 등 지역축제와 연계해 진주만이 가진 교방문화의 전통성을 대내외에 홍보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교방음식을 개발함과 동시에 교방문화상품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할 일은 많지만, 차근차근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주시와 진주시의회가 교방문화 활성화를 위한 첫 걸음을 내디뎠다. 진주는 교방문화로 다시 한 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관광도시로 거듭날 것으로 믿는다. 진주시의회 차원의 노력도 약속드린다.

  • 2024-03-05
  • 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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