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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言)을 하는 세가지 기준

  • 작성자

    황경규

  • 작성일

    2024.07.10 AM 10:36

  • 조회수

    457

이 글은 KBS진주방송국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방송된 내용입니다.

말을 하는 3가지 기준

 

○ 오늘 고전의 향기는어떤 내용입니까?

 

▶ 세상을 살다보면, 말로 인해 낭패를 보는 일이 많습니다. 말이 많다 보면 그 속에 반드시 잘못 내뱉는 말이 있고 그로 인해 인간관계가 손상되거나 때로는 큰 화를 입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전속에는 말을 경계하는 구절이 적지 않습니다. 

오늘 고전고전의 향기에서는 

‘말(言)을 하는 세 가지 기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누구나 한 번쯤은 말 실수를 해서 곤란을 겪은 경험이 있을 텐데요, 말을 하는 세가지 기준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 볼까요?

 

▶ 중국의 철학자인 묵자(墨子)는 ‘말을 하는데 세가지 기준이 있으니, 말의 내용이 근본이 있을 것, 내용이 보편타당성이 있을 것, 하는 말이 상황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말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정보를 남에게 전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보에는 객관적인 사실도 있고 때로는 자기의 주관적인 견해도 있으며 남에게서 주워들은 이야기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정보를 남에게 전달할때는 반드시 먼저 그 내용이 실질적인 사례로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그냥 자기 생각대로 말을 내뱉다 보면 반드시 거기서 후환이 따르게 됩니다. 

특히 남의 허물을 말하는 것은 극히 경계해야 합니다.

맹자는 <이루장구 하>에서 남의 허물을 말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경계했습니다. 

“남의 잘못을 말하다가 후환이 닥치면 어찌할 것인가?”

 간단한 말이지만 가지고 있는 뜻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사람은 말의 진실 여부보다는 말로 인해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 입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말이 진실하다 하더라도 자신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진실된 말을 한다 하더라도 남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이런 말들은 자신에게 원망만 남길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는 말에는 진실이 담겨있어야만 유용한 말이 되는 것입니다.

대학(大學)이라는 책에서는 말의 상관관계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언패이출자 역패이입하고 화패이입자 역패이출이라

(言悖而出者 亦悖而入 貨悖而入者 亦悖而出) 

풀어보면 말이 거슬리게 나가면 또한 거슬리게 들어오고, 

재물이 이치에 맞지 않게 들어오면 

또한 이치에 맞지 않게 나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안씨가훈(顔氏家訓)에서는 말을 많이 하지 말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無多言(무다언)하라 多言多敗(다언다패)니라 

無多事(무다사)하라 多事多患(다무다환)이니라’ 

즉 말을 많이 하지 마라, 말이 많으면 실패도 많다. 

일을 많이 벌이지마라 일이 많으면 근심도 많아진다.

 

그리고 말을 함에 있어서는 내용의 보편타당성이 있어야 합니다. 입만 벌리면 허황된 말을 한다거나 근거없는 내용의 말을 마치 진실인 것처럼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럴 경우 말하는 사람은 진실성을 담보하지 못해 오히려 상대방으로부터 신뢰라는 큰 것을 잃게 됩니다. 한번 신뢰를 잃어버린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설혹 그 말에 진실이 담겨 있다 할지라도 결코 신임을 얻지 못합니다. 따라서 스스로 생각해서 보편타당성이 없는 경우의 말이라면 스스로 말을 아끼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말을 하는데 있어서 기준이 되는 것은 유용지자(有用之者) 즉 자신과 남에게 도움이 되는 말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마주 앉아 말을 하는데 있어 단순히 자신의 지식만 과시하려고 할 뿐 자신과 상대방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허황된 말만 내뱉는다면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단지 그 시간이 지루하고 귀찮기만 할 뿐입니다. 

 

○ 말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갖고 있는데, 고전속에서는 어떻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까?

 

▶ 맹자 역시 출호이자 반호이자(出乎爾者 反乎爾者)라고 해서 ‘자신에게서 나온 말은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의 행한 바에 말미암는다’라고 했습니다. 

물론 이 말은 정치를 함에 있어서 경계하는 말로 사용되었지만 일상생활에서도 전혀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해 설원(說苑)이라는 책에서도 ‘입은 관문과 같고, 혀는 병사와 같으니 말이 잘못 나가면 거꾸로 자신이 상하게 된다’라고 해서 말의 중요성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사기(史記)에서도 ‘君子交節이라도 不出惡聲’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의 뜻은 군자는 관계를 끊은 후에도 그 사람에 대해서 나쁜 말을 하지 않는다라는 뜻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말 역시 일상생활에서 지키기란 쉽지 않습니다.

공자는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質直而好義 하고 察言而觀色하며 慮而下人하라’라고 했습니다. 

이 글을 풀어보면 ‘곧게 말하면서도 의를 좋아하고 

말을 살피면서 얼굴색을 관찰하고 생각해 

다른 사람에게 겸손하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말을 할때는 항상 정직하고 더불어 의로움을 좋아하고, 상대방의 말뜻을 살피며 마음을 읽어내고 다른 사람에게 겸손할 것을 생각한다면 말이 초래하는 재앙에서 조금이나마 벗어 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최근 모 도지사가 한 말들을 보면 말이 왜 중요한지를 더욱 실감할 수 있습니다.

최근 이 지사는 지난 10년간의 정권을 좌파정권이라고 말한데 이어서 지난 현충일 추념사중에 ‘친북은 진보고, 나라 수호는 보수 꼴통인가? 기가 찬다’라고 말한데 이어 한 통계를 인용해 20대 10명중 6명이 한국전쟁이 언제 일어났는지 모르고 있고 국민의 40%가 모르고 있다면서 

젊은 세대중 일부는 심지어 북침으로 알고 있고, 여기에는 육군사관 생도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지사의 이 말을 듣고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말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개인적인 판단기준에 따라 지난 10년간의 정권이 좌파정권이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350만 도민을 대표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그토록 개인적인 의견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다면 과연 도민들의 대표가 될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져봐야 할 문제입니다. 

결론적으로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기 위해 도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말살한 전형적인 정치꾼에 불과하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사의 이러한 발언들을 묵자가 말한 말의 세가지 기준에 대입해 보면 단 한가지도 부합되는 것이 없습니다. 하는 말의 내용이 실질적인 사례로 뒷받침되지도 못했고, 말한 내용도 보편타당성을 얻지 못했으며, 그가 내뱉은 말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는 도움이 되었을지언정 다른 사람에게는 도움이 되지 못한 경우입니다.

아마 김지사의 이러한 발언들은 사실여부를 떠나서 맹자가 말했듯이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고, 대학에서도 말했듯이 거슬리게 나간 말은 거슬리게 들어오게 된다는 사실을 나중에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변치 않는 말의 본질이 있다면, 자신에 대한 진실성과 타인에 대한 예의일 것입니다. 

말이 많고 말재주 있는 것이 더 이상 폄하되거나 부정되지 않는 요즘 사람들에게 말을 가급적 하지 말도록 강요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범법행위겠지만, 적어도 거짓 생각으로 자신과 남을 속이거나, 거칠고 야비한 말투로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은 절실한 시대적 요청일 것입니다. 

공자는 눌언(訥言) 즉 말을 많이 하지 않아야 군자가 될 수 있다고 했지만 지금은 말을 적게 하기 보다는 많이 하더라도 말을 가려서 하는 것이 생활화되어야 할 그런 시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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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10
  • 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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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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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서치(feat. 책 빌리는 예의)

‘간서치(看書癡)’○ 오늘 고전산책은 어떤 내용입니까? ▶ 조선시대 선비인 이덕무(李德懋)를 가리켜 ‘간서치(看書癡)’라고 불렀습니다. 간서치란 ‘책 읽는 바보’ 쯤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오늘 고전산책에서는 조선시대 선비 이덕무의 책읽기에 대한 그의 생각과 사상을 알아보겠습니다. ○ 조선시대에 서파(庶派)로 분류되면 벼슬길에 나가기 어려운 신분인 것으로 아는데요? ▶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시대에 서파(庶派)로 분류된 사람은 벼슬길에 나갈 수 없었습니다. 서파라는 것은 즉 직계를 거슬러 올라가 한 명이라도 서자가 있으면 자동적으로 그 후손이 서파로 분류되는 것을 말합니다.그리고 조선시대에 서파라는 것은 관료로서의 출세 길이 막힌다는 것과 사회적 차별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덕무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내하고 단정한 길을 걷게 됩니다. 이덕무 역시 과거공부를 하고 증광초시(增廣初試)에 합격하지만, 이것은 그의 생애에 어떤 의미를 갖는 사건은 되지 못합니다. 서파로서 사회적 차별을 견뎌야 하는 그의 심정은 ‘관독일기(觀讀日記)’라는 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밤에 희미한 달빛이 은은히 비치고, 풀 벌레의 울음소리가 시끄럽더니 이내 또록또록 들린다. 등불은 가물가물하는데 말없이 홀로 오똑 앉아 있노라니 강개한 감정이 겹겹이 생겨나고 까닭없는 슬픔이 밀려온다. 아마도 가을의 기운이 장부의 뻣뻣한 창자를 단련시키려고 하여 이런 것인가 보다’ 이덕무는 정식으로 직업이 없었습니다. 정식직업이라 부를만한 건 39세 되던 해 얻은 규장각 검서관 자리였습니다. 그런 이덕무가 평생 할 수 있었던 일은 책을 읽는 것 뿐이었습니다. ○ 반쪽짜리 양반에게 있어 독서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 사실 반쪽짜리 양반인 이덕무에게 있어서 책 읽기란 모순이었습니다. ‘책을 읽으면 선비이고, 벼슬을 하면 대부’라는 말이 있듯이 조선이란 사회의 맥락에서 독서란 곧 관료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입니다.하지만 이덕무의 독서는 그것이 아예 불가능했습니다. 여기에서 오로지 지적행위로서의 독서가 생겨납니다. 다른 목적을 갖지 않는 순수한 책읽기 자체에만 몰두했던 것입니다.이덕무는 소위 책을 읽지 않는 양반들의 행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늘 예나 지금이나 인가의 자제들이 밀랍을 먹인 종이로 바른 창문에 화려하고 높은 책상을 두고, 그 옆에 비단으로 장정한 서책들을 빽빽하게 진열해 놓고서, 자신은 머리에 복건을 쓰고 흰 담요위에 비스듬히 누운 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야기를 지껄이고 기침이나 캉캉 뱉다가 한 해가 다 가도록 한 글자도 읽지 않는 것이 가장 유감스럽다’ 그러면서 이덕무는 맹자와 양웅의 이야기를 인용합니다.‘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고 지낼 뿐 만약 가르침이 없으면 금수에 가깝다’는 맹자와 말과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비록 걱정거리가 없다 한들, 금수가 될 것이다’는 양웅의 말을 인용하면서 맹자의 가르침과 양웅의 배움이 바로 독서라고 말합니다.즉 독서를 하지 않으면 아무리 부귀할지라도 그는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덕무에게 있어서 독서는 곧 인간이 되는 길이었던 것입니다. ○ 이덕무를 책 읽는 바보, 즉 간서치라고 부르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 이덕무는 독서에 골몰하는 자신을 가리켜 간서치, 곧 책읽는 바보라고 불렀습니다.그가 초년에 쓴 간서치전(看書癡傳)을 보면 이덕무를 왜 간서치라고 부르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남산 아래 바보가 살았다. 눌변이라 말을 잘하지 못했고, 성격이 졸렬하여 세상을 알지 못했고, 바둑이나 장기 따위는 더더욱 몰랐다. 오직 책 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아 추위도 더위도 주림도 아픈 줄도 몰랐다. 글을 막 배웠을때부터 스물 한 살이 될 때까지 하루도 손에서 옛글을 놓은 적이 없었다. 예전에 보지 못한 책을 보게 되면 기뻐 웃으니 집안사람들은 그가 웃는 것을 보고는 곧 그가 기이한 책을 구한 것을 알곤 하였다. 사람들이 그를 간서치라 해도 그냥 기쁘게 받아들일 뿐이었다’ 읽을 책이 없을 때는 장부나 달력 보기를 마다하지 않았다는 이덕무는 가난했기 때문에 책을 살 돈이 없었고 책을 빌리고 베끼는 것이 책탐을 푸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덕무에게 가장 비판을 많이 받았던 사람은 책을 빌려주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세정석담(歲精惜談)이라는 글에서 이덕무는 스스로 책을 읽지 않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짓이고 자신이 읽지 않으면서도 남에게 빌려 주지 않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이라고 규정짓고 있습니다. ○ 이덕무만의 책 빌리는 예의가 있다구요? ▶ 이덕무는 그의 책 사소절에서 책을 빌리는 예의에 대해 한바탕 설교를 늘어놓습니다. 먼저 그는 ‘남에게 책을 빌려주어서 그 사람의 뜻과 사업을 키워주는 것은, 남에게 돈과 재물을 주어서 그 곤궁과 굶주림을 구제해 주는 것과 같다’라고 했습니다.그리고 주인이 허락하지 않을 경우, 억지로 빼앗아 소매속에 넣고 일어나서는 안되며 남의 책을 빌리면 기한내에 돌려 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 빌린 책을 돌려주지 않고 다시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어서는 안되며 빌려준 사람에게는 반드시 보답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덕무는 그의 나이 서른 아홉살에 규장각 검서관이 되었습니다. 검서관은 규장각에서 출판하는 모든 책을 교정하는 직을 말합니다. 이렇게 책벌레 이덕무는 자신의 소원대로 책을 읽는 직업을 갖게 되었고, 1793년 그가 사망하는 해까지 규장각을 벗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이덕무가 살던 때와 달리 지금은 책이 범람하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독서하는 교양층은 점점 얇아지고 인문서는 팔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고 지낼 뿐 만약 가르침이 없으면 금수에 가깝다’는 맹자의 말씀을 다시 한 번 기억할 필요가 있는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 2024-07-10
  • 작성자

    황경규/진주향당 상임고문

  •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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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난 척 하는 사람을 대처하는 좋은 방법

○ 오늘 고전의 향기는 어떤 내용입니까? ▶ 사람의 크기를 무엇으로 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자본주의 시대에 걸맞게 오직 돈와 명예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혹은 공부를 많이 해서 박학다식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오늘 고전산책에서는 고전이 말하는 ‘사람의 크기’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 현대사회에서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을 가진 사람을 동경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고전에서는 좀 다르겠죠? ▶ 고전을 보면 이 세가지를 경계하는 글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먼저 춘추좌씨전을 보면 부를 거머쥔 사람들을 경계하는 글이 있습니다. ‘부이불교자 선(富而不驕者 鮮)이요 교이불망자(驕而不亡者) 미지유야(未之有也) 니라’ 즉 ‘부자이면서 교만하지 않는 자가 드물고, 교만하면서 망하지 않는 자가 있지 아니하다’라는 뜻입니다.따라서 일반적으로 부를 가진 사람은 교만하기가 쉬운데 증자(曾子)라는 사람은 부유하다고 해서 잘난체 하는 사람을 대처하는 좋은 방법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피이기부(彼以其富) 아이오인(我以吾仁)’이라 해서 부(富)를 가지고 잘난체 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어질게 행동한다면 전혀 문제될게 없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그리고 명예와 관련해서는 맹자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성문과정(聲聞過情)을 군자(君子) 치지(恥之)니라’ 즉, ‘명성이 실제보다 지나친 것을 군자는 부끄러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이 세상에는 자신보다 잘난 사람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너무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지식인층을 살펴보면 이런 현상은 더욱 두드러집니다.권력 또한 국민의 신의를 바탕으로 생기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소위 권력자들은 권력을 가지는 순간 곧바로 국민위에 군림하려고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그래서 고전에서 사람의 크기를 구분할 때는 반드시 그 사람이 가진 사랑이 얼마나 크고 넓은 지로 경계로 삼고 있습니다. ○ 사랑의 크기로 사람의 크기를 재단하기에는 객관적으로 조금 어렵지 않을까요? ▶ 그래서 고전을 읽다보면 군자(君子)와 소인(小人), 대인(大人)과 소인(小人)이니 하는 단어를 자주 접하게 됩니다. 이것 역시 사람을 구분하는 잣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인사(人事)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너무 잘 알고 있는 단어이고 일상생활에서 늘 하는 행동이지만 사실 정확히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알고 계신 분들은 드문 것 같습니다. 인사라는 것은 사람 인(人)에 일 사(事), 즉 사람이 해야 할 일, 사람의 도리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사람으로써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하면 군자가 되는 것이고, 그 도리를 알고도 행하지 않는다면 소인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크기는 그 사람이 가진 사랑의 크기가 얼마만큼 큰가에 따라 구분을 지을 수 있습니다. 만약 그 사랑이 천하를 덮을 정도라면 그 사람은 천하만큼 큰 사람입니다. 제 한몸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의 독립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알았던 백범 김구 같은 분들을 우리가 위대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설원(說苑)이라는 책에 ‘대인자 은급사해(大人者 恩及四海)요 소인자 지어처자(小人者 止於妻子)’라고 했습니다. 즉, ‘대인은 그 은혜가 천하에 미치고, 소인은 처자에게 그친다’는 뜻입니다.보통 사람들의 사랑은 자기 가족을 살피는데 그치는게 일반적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자기 가족만큼의 크기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 보다 못한 사람은 자기자신만을 사랑하는데 그치게 되는데 그 사람은 자신만큼의 크기를 갖게 됩니다. ○ 말을 뒤집어 본다면 자신의 크기만큼 남을 사랑할 수 있다는 뜻도 되지 않겠습니까?▶ 고전에서 사람의 크기를 말할 때 늘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 대장부의 정의입니다. 맹자는 사내가 세상에 태어나면 무릇 대장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대장부에 대한 정의를 내림과 동시에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맹자가 말하는 대장부는 ‘인(隣)이라는 천하(天下)의 넓은 집에 살고, 예(禮) 라는 천하(天下)의 바른 위치에 서서, 의리(義理)라는 천하(天下)의 큰 도(道)를 행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곧, 천하를 사랑할 수 있는 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입니다.그리고 많은 성현들이 대장부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도 했습니다.맹교(孟郊)라는 사람은 ‘군유장부루(君有丈夫淚) 읍인불읍인(泣人不泣人)’이라고 해서 ‘그대에게 대장부의 눈물이 있다면, 남을 위하여 흘리고 자신을 위해 흘리지 말라’고 했습니다.그리고 원매라는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 영웅이 되고 미인을 얻는 것은 ‘일신의 사랑’이지 ‘천하의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모름지기 세상에 태어나면 일신의 영달이나 추구하는 작은 사람이 아니라 천하의 영달을 추구하는 큰사람이 되기를 희망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백거이라는 사람은 신제능오성감이유영(新制綾襖成感而有詠)이라는 시를 통해 대장부의 포부를 이야기 하기도 했습니다. 헐벗어서 구제할 수 없는 백성들이 많은데혼자만 따뜻하면 어떤 마음일까어찌하면 만 장 길이의 큰 가죽 옷을 구해서온 낙양성 사람을 덮어 줄 수 있겠는가 천하의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을 가진 사람만이 마치 큰 사람처럼 보이는 거짓된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수긍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 되돌아보게 됩니다.거대한 기업들은 국민을 먹여 살린다고 강변하면서 때로는 협박까지 일삼고 있고, 알량한 명예를 지닌 사람들은 마치 세상을 다 거머쥔 것처럼 오만을 떨고 있으며, 권력을 쥔 사람들은 마치 자신의 행동이 법이라도 되는 것처럼 막무가내식 정치를 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런 사람들의 사람의 크기는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여기서 과연 나의 사랑은 어디까지를 덮고 있는가를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사랑이 미치는 곳이 국가인지? 가족인지? 아니면 자신인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한번 던져 보시고 만약 그 어딘가에 자신의 마음이 머문다면 그곳이 나의 사람됨의 크기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고전은 말하고 있습니다.

  • 2024-07-10
  • 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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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를 등치는 사람들

정치를 등치는 사람들▶ ‘정치를 등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권력을 앞세워 법을 악용하는 무리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은 사람이 만든 법을 가지고 언제나 사람에게 군림하고, 법을 인간의 족쇄로 만들고 있습니다.‘정치와 권력의 함수’라고 부릅니다. ○ 오늘날처럼 권력의 장치가 공고히 다져져서 무서운 힘을 발휘하는 시대는 없는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 사실 정치를 하는 힘은 권력에 있습니다. 따라서 권력을 쥔 사람은 항상 자신이 칼자루를 잡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법과 힘으로 밀어 붙이거나 아니면 갖은 술수를 부리고 엄포를 놓아서 주눅이 들게 해 세상을 억지로 꿰맞추려고 합니다.역사적으로 보면 이런 이유 때문에 변란이 일어나 때로는 밀려나고 물러나고 빼앗고 빼앗기면서 정권의 다툼이 요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이른바 다스리는 사람, 즉 치자들이 정권욕에 사로잡히면 잿밥에 눈이 팔려 염불을 못하는 중과 다를바가 없게 됩니다. 왜 백성들이 정치를 불신하겠습니까? 정권을 잡으면 특권층이 신흥세력으로 부상하고, 정권을 빼앗기면 다음날로 신흥세력에 의해 구세력이 축출되는 그런 구태를 일삼아왔기 때문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인의 장막에서 부정부패가 기승을 부려 한평생 독립운동을 했던 보람도 없이 망명을 해야 했고, 박정희대통령은 독재의 엄호를 받은 측근세력들의 세도에 희생당했고, 전두환대통령은 척족들이 이권의 사냥꾼들이 되는 바람에 권좌에서 물러난 뒤 절간에서 유배생활을 했습니다. 이처럼 대권을 쥔 이른바 치자들의 말로가 비참하거나 부끄러운 결말에 이른 까닭은 올바른 다스림의 정치를 하지 못하고 힘으로 다스리는 정치, 즉 사람위에 군림하는 정치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2,500년전부터 위정이덕(爲政以德) 즉, ‘정치는 덕으로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 사람을 잘 쓰는 것도 나라를 잘 다스리는 중요한 일이 되지 않을까요? ▶ 순자(荀子)의 군도(君道)라는 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현명한 임금은 금이나 보석 등은 사사로이 사람들에게 주지만, 관직이나 직책은 사사로이 사람들에게 주는 법이 없다’라고 했고, 한시외전(韓詩外傳)에는 ‘인사가 도리에 합당하면 귀신의 일에도 순응할 수 있고 귀신의 일에 순응하면, 내리는 복이 크고 넓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지도자가 인지상정에 얽매여서 인사의 공정을 잃으면 조직의 근본이 흔들리게 됨을 경고한 말입니다.춘추시대의 일입니다. 진나라의 문공이 구범(咎犯)이라는 사람에게 서하라는 곳의 태수로 누구를 삼으면 좋을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구범은 우자고(虞子羔)라는 사람을 추천합니다. 그러자 문공이 우자고와는 서로 원수지간인데 어떻게 추천할 수 있느냐고 묻자, 우자고는 이렇게 대답합니다.‘임금께서는 누가 태수로 적당한지를 물었지, 누가 원수인가를 물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인간이면서 감정의 애증을 초월할수 없지만 공적으로는 객관적인 시각에서 대상을 판단할 수 있어야 리더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면서도 그 잘못을 알고 미워하면서도 그 장점을 아는 것, 이것이 바로 리더의 엄정함입니다. 구범이라는 사람은 이러한 엄정함을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 임금이 잘못하던 신하가 잘못하던간에 정치를 등치는 사람들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자는 국민들 아니겠습니까? ▶ 이른바 힘으로 하는 정치는 정치를 보기 좋게 화장을 해주는 경우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이렇게 되면 법이라는 것이 거미줄과 같아서 새는 그 거미줄을 뚫고 날아가 버리지만 벌레 따위는 걸리고 만다는 탄식이 국민들의 입에서 떠나 본적이 없습니다.그렇다면 법망을 비웃고 날아가는 새는 무엇일까요? 바로 권력을 가진 이른바 힘있는 무리이고, 법망에 걸려드는 벌레는 힘없는 국민들을 말합니다. 따라서 법을 어기지 않으면 아무런 일이 없는 세상을 살수 있지만, 법대로만 하다가는 살아갈 수가 없다는 국민들의 말을 흘려 버릴 수 없습니다.아무리 법치의 세상이라 하더라도 정치를 하는 사람의 됨됨이가 인의(仁義)에 바탕을 두지 않는다면 세상은 항상 무섭게 돌아가고 맙니다. 사람보다는 컴퓨터를 더 믿으려는 세상이 되면 될수록 세상을 다스리는 일에 비인간화 현상이 두드러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그래서 공자는 권력을 치부의 수단이나 특권으로 여기는 사람을 사이비 정치꾼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 최근 검찰총장 후보자가 논란 끝에 사퇴를 하기도 했지 않습니까? ▶ 아마 이번 사건을 두고 많은 국민들은 소위 이 땅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한번쯤은 생각을 해보셨을 것 같습니다. 사실 검찰총장은 대검찰청의 최상급자이면서 권력의 핵심이나 다름없습니다.그런데 인사청문회를 한 결과는 어땠습니까? 위장전입에 주택 구입자금 의혹, 의심스러운 부인의 명품 쇼핑, 스폰스와 해외골프 여행, 그리고 자녀 결혼식을 국내 최고가의 6성급 호텔에서 하고서도 그곳을 소박하게 ‘조그만 교외’라고 표현하는 후보자의 모습에서 아마 많은 국민들은 우리나라의 이른바 상류층의 도덕불감증과 거짓말 투성이의 위선에 허탈감을 느끼셨을 겁니다.물론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현재 이 땅에서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그와 비슷한 수준에 있다면 우리나라의 미래는 내다보지 않아도 뻔하다는 생각 역시 한번 해보셨을 겁니다. 지금 난장판을 벌이고 있는 여야 정치권이 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과연 그들이 그토록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 과연 국민을 위한 일일까요? 지금 여야 정치권은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는게 아니라 자신들을 위한 정치를 하고 있다는 국민들의 따끔한 지적을 과연 눈치나 채고 있을까요?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는 소위 대한민국 권력의 핵심을 들여다보면서 과연 국민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합니다.공자는 ‘덕으로 정치를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마도 또 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겁니다. ‘제발 정치를 등치지 마라, 이것은 백성의 소원이다’라고 말입니다.

  • 2024-07-10
  • 작성자

    황경규/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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끓는 물 식히려면 장작불 부터 꺼라

끓는 물을 식히려면 장작불 부터 꺼라 ‘끓는 물을 식히려면 장작불을 끄는 것이 가장 좋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결과란 원인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좋은 원인을 만들면 당연히 좋은 결과가 뒤따른다는 말입니다. 예로부터 현명한 사람들은 이러한 이치를 잘알기 때문에 좋은 원인을 먼저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원인이 결과를 만든다’는 고전의 가르침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 사실 보통 사람들은 좋은 원인을 만드는 것은 등한시하면서도 좋은 결과만 기대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 사실 좀 어려운 것 같은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조금 쉽게 설명드리면 ‘평소에 공부는 열심히 하지 않고 시험성적이 좋기만을 바라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회남자(淮南子) 범론훈(氾論訓)편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송나라 사람이 딸을 시집보내면서 “혹시 나중에 이혼을 당할 수 도 있으니 돈을 은밀히 좀 모아두어라. 너에게 돈이 많이 있으면 다시 시집 가기가 쉬울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시집을 간 딸은 아버지가 일러준 계책대로 돈을 은밀히 모아두었지만 나중에 이 사실이 발각되어서 결국 시집에서 쫓겨나게 됩니다.딸의 아버지는 이혼에 대비해서 돈을 훔쳐 모아둘 필요성은 알았지만, 그것이 이혼의 사유가 될줄은 몰랐고, 어려움에 대비할 줄만 알았지 어려움이 생기지 않도록 할 줄은 몰랐던 것입니다. 결국 좋은 결과를 만들지 못할 것에 대해서는 두려워했지만 좋은 원인을 만드는 것에는 등한시 했던 것입니다.그래서 문자(文子)는 미명(微明)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사람들은 모두 생겨난 환난에서 빠져 나올줄은 알지만 환난이 생겨나지 않게 할 줄은 모른다’이 글은 매사에 그 원인이 있는데 결과에만 매달리고, 그 원인에 천착하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지적한 글입니다. ○ 사실 요즘 세상을 살다보면 원인과 결과에 상관없이 진짜로 불합리하다 싶은 일들을 많이 경험하게 되지 않습니까? ▶ 수많은 인간군상들을 불후의 저서인 사기(史記)에 기록했던 사마천(司馬遷) 역시 원인과 결과에 부응하지 않는 인간세상의 불합리함을 두고 이렇게 통탄했습니다.‘하는 일이 올바르지 않고 법이 금지하는 일만 범하면서도 일평생을 호강하고 즐겁게 살며 대대로 부귀가 이어지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하면 걸음 한번 내 딛는데도 땅을 가려서 딛고, 공평하고 바른 길이 아니면 가지 않는데도 재앙을 만나는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런 사실은 나를 당혹스럽게 한다. 만약에 이러한 것이 하늘의 도리라고 한다면 이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아니면 그른 것인가’사실 이러한 일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소위 팔자타령을 하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은 뼈빠지게 일해도 겨우 목에 풀칠할 정도로 늘 어렵게 살뿐이고, 뒤에 숨어서 온갖 못된 짓을 다하는 사람은 죽자살자 일을 하지 않아도 보란 듯이 떵떵거리고 사는 모습을 우리는 현실속에서 수없이 목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떨때는 정직하게 살던 사람이라도 이런 부조리한 현실과 부딪히게 되면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것인지 헷갈리게 됩니다. 법을 지키고 바른길을 가기보다는, 차라리 그들처럼 잘살기 위해서 불법이라도 자행하는 것이 오히려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세상이 점점 어지러워지면서 불법이 판을 치고, 불법을 하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세상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는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원인보다는 결과에만 집착하게 되는 세상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 하지만 고전에는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일깨우는 좋은 글들이 많이 있을 것 같은데요? ▶ 고칙성(高則誠)의 비파기(琵琶記)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선행과 악행은 결국 응보가 뒤따른다. 다만 빠른가 느린가의 문제일 뿐이다.’사실 사람이 겪는 화(禍)와 복(福)은 짧은 시간에 판가름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복으로 알았지만 나중에 화가 되고, 화로 알았던 것이 후일에 복이 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떵떵거리고 살지만 그 재물을 정당치 못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라면 언젠가는 반드시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것도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노자(老子) 임위편(任爲篇)에도 天網恢恢(천망회회) 疎而不失(소이불실)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이 글은 ‘하늘의 그물은 넓고 넓으며, 성기지만 새는 곳이 없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다 자세하게 설명 드리면 하늘의 그물은 넓고 광대해 비록 그 그물의 눈이 성글게 보이지만 선악의 응보를 반드시 내리고 절대로 실패하는 일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그리고 회남자는 ‘뚜렷한 공이 없이 얻은 큰 이득은 뒤에 가면 장차 손실로 변한다’고 했고, 전국책에서는 ‘공이 없는 상과 힘쓰지 않고 받은 예우는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그리고 명심보감에서는 ‘까닭없이 큰 돈을 얻게 되면 큰 복이 아니라 반드시 큰 재앙이 있게 된다’라고 했고 구양수(歐陽修)도 ‘소인이 뜻을 이루면 한때 통쾌해 하지만, 진정 그 득실을 알려면 시간이 흐른뒤에야 비로소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 최근 비정규직법 문제가 적지 않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고전의 가르침은 어떻습니까? ▶ 이 문제야 말로 원인보다는 결과에만 천착하고 있는 어리석음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여야 모두가 비정규직법안에 대해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서로 자기가 옳다는 주장만 하고 있습니다. 여당은, 야당이 비정규직법 시행유예를 거부해 실업대란이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고, 야당은 노동의 유연성만 강조하는 바람에 해고사태를 방조하고 있다고 서로 비난에만 열을 올리면서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논란의 중심에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라는 법의 당초 취지가 아예 실종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위한 법이 오히려 비정규직의 대량 해고사태를 불러온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다면 그 근본원인에 대한 해법만 제시하면 될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논란을 보면 여야 모두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비정규직법안이 가져올 그 결과에만 서로 천착을 하면서 난장판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어 가고 있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는 것 같이 보입니다.앞서 말씀드렸듯이 끓는 물을 식히려면 장작불을 끄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지금 비정규직 법안을 놓고 벌어지고 있는 논란에 있어 어떤 것이 끓는 물이고, 어떤 것이 장작불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정치권을 보면 장작불을 끄기는커녕 끓는 물에 서로 손을 데여가면서 물을 식히는데만 골몰하고 있습니다.지금 이 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사마천이 당시 세상의 불합리함을 통탄했던 것과 같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비정규직법안을 놓고 다투는 정치권을 보면서 매사에 그 원인을 외면한채 결과에만 매달리고, 그 원인에 천착하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 2024-07-10
  • 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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